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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문, 좁은 길 마7:13-14

gkffpffndi 2020. 9. 5. 22:33

좁은 문, 좁은 길 마7:13-14

 

19세기의 실존주의 철학자인 케에르케고르는 그의 책 <이것이냐,저것이냐>에서 인간은 매순간 마다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자신이 선택한 삶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개인이 져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매순간 선택해야 한다. 아침에 출근할 때 버스를 타고 가야 할지 승용차를 타야 할지, 친구를 만나야 할지 아니면 만나지 말아야 할지, 내가 현재 다니는 직장을 그만 두야 할지 아니면 계속 다녀야 할지 결혼을 해야 할지 하지 말아야 할지 말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좁은문, 좁은 길로 갈 건지 아니면 넓은 문, 넓은 길로 가야 할지를 선택 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이 나오기 전데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산상수훈의 8복에 대하여 말씀하시고 기도와 구제, 금식에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하나님나라의 백성의 삶에 대하여 말씀하고 계십니다.

 

, 하나님 나라는 이런 것이다. 내 나라는 이런 것이다. 내 나라에 들어오고자 하는 사람은 이런 선택과 결단이 필요하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하는 사람은 좁은 문, 좁은 길로 들어와야 내 나라에 갈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좁은 문과 좁은 길은 넓은 길과 넓은 문에 대조되는 말씀입니다. 좁은 문이나 좁은 길은 어떻습니까? 일단 협소한 길이기 때문에 편한 길은 아닙니다. 넓은 길이 아니기 때문에 다니기가 불편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큰 것을 좋아합니다. 아파트도 큰 평수를 선호합니다. 자동차도 일단 능력 있으면 큰 차, 고급승용차를 선호합니다. 왜 그럴까요. 공간이 일단 넓으니 편안히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좁은 길로 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왜요? 불편하니까요. 그래서 좁은 문보다는 넓은 문, 좁은 길보다는 넓은 길을 선호하는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작은 교회보다는 큰 교회에 사람들이 많이 모여 듭니다. 왜요?부담 없이 편하게 다닐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잘 빠져도 교회활동을 잘 하지 않아도 누가 뭐라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대중속에 묻어서 익명성을 가지고 다닐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편한 길을 좋아해서 많은 사람들이 찾고 많은 사람들이 들락거립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이 뭐 굉장한 것이 있는 것 같아서 사람들은 큰 교회를 선호합니다. 큰 교회에서는 많은 사람들과 교제할 수 있고 큰 교회 다니면 큰 복을 받을 수 있을 것 같고 그냥 천국에 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인간의 생각과는 역설적으로 천국으로 가는 길은 넓은 문. 넓은 길이 아니라 좁은 문, 좁은 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좁은 문과 좁은 길을 가는 것이야 말고 천국으로 가는 것이고 그 길이 생명의 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좁은 문과 좁은 길은 일단 사람들이 선호하지 않습니다. 왜냐 하면 길이 험하고 협소하기 때문에 불편합니다. 그래서 그 길을 가는 것을 꺼려합니다. 좁은 문과 좁은 길로 가는 것이 세상 사람들에게 미련하게 보이는 것이고 어리석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 길은 물질적으로도 손해를 보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좁은 길은 고난의 길이요 많은 사람들이 가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는 반면에 하나님은 그 길을 좋아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좁은 길이어서 처음에는 불편한 것 같지만 결과적으로 그 길은 영광과 축복의 길이요, 생명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자 우리가 성경의 인물 아브라함을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브라함의 고향은 갈대아 우르였습니다. ‘갈대아 우르라는 지역은 인류 최초의 문명이 발생한 수메르 지역으로 최초 도시였습니다. 이 지역은 상수도와 하수도가 설치되어 있었고 2층 구조로 집들이 잘 지어져 있었던 도시가 잘 발달된 곳이었습니다. 농업과 어업과 공업의 중심지로서 부유한 도시로 달의 신 난나를 섬기는 곳으로서 육체적 사랑을 즐기는 여신으로 아브라함의 가정도 이 여신을 믿었으며 여신의 장신구와 상을 파는 장사를 하여 생활하였다. 그 당시 가장 풍요롭고 번성한 갈대아 우르를 떠나서 하나님이 지시하신 땅으로 가라고 명령하자 아브라함의 가족은 지체 없이 아버지 데라와 그리고 조카 롯과 함께 정처 없이 떠나게 되었습니다. 갈대야 우르를 떠나온 아브라함의 가족은 가나안 땅에 도착하기 전에 오늘 날 터키지역에 속한 하란에 머물러 살게 되었다. 하란도 고대 도시로 상업이 발달하고 달의 신을 섬기던 지역이었는데 이곳에서 아브라함은 자신의 아버지 데라가 죽자 가나안 땅으로 출발하게 됩니다. 가나안 에 도착한 아브라함과 조카 롯은 열심히 일해서 양이 많아지게 되었는데 어느 날 아브라함의 목자와 조카 롯의 목자가 양을 먹이는 초지로 심하게 다투는 것을 보고 아브라함이 조카 롯을 불러 이렇게 말합니다. 자 이제 너와 나는 삼촌과 조카 사이인데 서로 다투지 말자. 너가 먼저 선택하라. 너가 좌하면 나는 우하겠고, 너가 우하면 나는 좌하겠다고 하자. 조카 롯은 소돔과 고모라 지역이 가까운 물과 초지가 많은 요단을 선택하여 소돔지경에 이르러 살았고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 거주하였습니다. 그 당시 소돔과 고모라 지역은 아주 화려하고 큰 도시였습니다. 물질이 풍성하고 도시문화가 발달한 그런 지역이었습니다. 그러니 그 지역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 지역은 죄악이 관영한 곳이었습니다. 소돔은 우리가 아는 대로 동성애가 가득하고 사람들이 아주 악했습니다. 롯이 그 지역을 선택한 것은 눈에 보이는 대로 판단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롯은 당시에 시날 왕 아므라벨과 엘라살 왕 아리옥 등에게 포로로 끌려가서 곤욕을 치르고 아브라함의 자신의 자객318명을 데리고 가서 포로 잡힌 롯을 구하여 옵니다. 그 이후에 롯의 가정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가정이 무너졌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인간의 화려함과 물질적 풍요를 쫒아가지 않고 창12:4절에 보면 아브라함은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 갔고아브라함은 세상의 화려함을 따라가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갔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간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되어 오늘날 수 천 년이 지났지만 그 이름이 우리에게 알려지고 그 당시 최고의 화려하고 풍요로운 도시였지만 우상의 도시를 떠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가나안 땅에 정착한 아브라함은 그 후손들이 전 세계를 다스리고 있으며 성경을 통해서 엄청난 영향력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좁은 문, 좁은 길로 가는 길은 여러 가지로 생각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야 사는 길입니다.

 

두 번 째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바울입니다. 바울은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 중의 한 사람입니다. 오늘날 기독교가 유대교에서 벗어나 세계적인 종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바울의 공로입니다. 바울은 가만히 있었으면 크게 출세할 수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가 자신에 대하여 말할 때 자신은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가말리엘 문하생이요 로마의 시민권을 가진 자라고 말하였습니다. 이 말은 그 당시 바울은 최고의 학문을 소유한 엘리트요. 그 당시 부자들이 가지고 싶었던 로마의 시민권을 날 때부터 가진 자였습니다. 그는 유대인으로서 율법에 능통한 자였습니다. 그런 그가 다메섹에 예수 믿는 기독교인들이 숨어 있다고 하여 대제사장의 공문을 가지고 잡아들이려고 가는 도중에 다메섹에서 환상 중에 주의 음성을 듣고 주님을 만나는 결정적인 사건이 그를 변화 시켰습니다. 바울은 그 때 이후로 그리스도를 위해서 고난 받는 종이 되었습니다. 예수 믿어서 축복이 아니라 오히려 고난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를 통해서 자신이 얼마나 고난을 받았는지를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복음을 전하다가 아시아 받은 환난에 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자신은 심한 고난으로 인하여 살 소망 까지 끊어졌다고 말합니다. 사형선고를 받은 거와 같다고 말하면서 이런 환난과 고난 속에서 자신은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 성도에게 이 편지를 쓴 것은 자신의 사도권을 부정하는 교인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자신이야 말로 참 사도라고 말하는데 참 사도의 표지가 무엇인지 바울은 1123절 이하에서 그리스도를 위한 수고와 고난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참사도의 표지는 말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해서 수고하고 고난을 받은 표지가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갈라디아서6:17절에서 예수의 흔적이라고 말합니다. 흔적이라 말의 희랍어는 스티그마인데 이 말의 뜻은 낙인, 화인이라는 말인데 이 뜻은 소나 말에게 주인의 이름을 불로 지져서 새겨 넣은 것을 말합니다. 즉 예수님을 인하여 받은 박해의 상처를 말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참 사도라고 하는 것에 대하여 이 고난의 흔적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11장에서 자신은 예수를 위해서 수고를 넘치도록 하였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며 유대인에게 사십에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다고 하였습니다.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했으며 수고하고 애쓰며 여러번 자지 못하고 주리고 굶고 목마르고 춥고 헐벗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것보다 더욱 마음 한 구석에 더욱 염려 하는 것이 있으니 교회를 위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 가운데 누가 약하면 자신도 약하고 누가 실족하면 자신도 그러하고 교인들 가운데 애타면 자신도 애탄다고 말하면서 바울은 자신의 안위나 편안함보다고 오히려 교인들의 안전과 평안과 행복을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말을 합니다. 나로 인해서 교인들이 실족하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자신을 약한 인간에 불과 하다고 말합니다. 다메섹에서 아레오 왕의고관이 자신을 잡으려고 왔을 때 광주리를 타고 들창문으로 도망가는 나약한 인간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최근에 광화문집회와 사랑 교회발 확진자로 인해 교회가 세상 사람들에 의해서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고 마치 교회가 감염원인 것처럼 잘못 보도되고 있습니다. 교회는 다른 어떤 집단이나 단체보다도 방역과 사회적 거리두기를 잘 지켜 왔습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결과는 교회가 방역을 방해하고 코로나를 퍼뜨리는 주범처럼 되어 교인들이 직장에서 압박을 당하고 교회를 나가지 못하도록 분위기를 만들고 있습니다. 심지어 경상도 어느 교회에서는 주일날 면직원이 교회에 들어와서 목사님에게 강단에서 내려오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교회가 짓밟히고 있는 일이 이 땅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세계적인 인권운동가인 수잔 솔티 여사를 중심으로 해서 57개국 266단체가 청와대에 코로나 19 대응과정에서 종교의 자유를 억압하고 교회를 희생양 삼고 있다고 탄압을 중지하라는 서한을 전달하였습니다.

 

지금은 고난의 시대입니다. 참 목자, 거짓목자, 양과 염소, 알곡과 쭉정이가 걸러지는 시대입니다. 마지막 환난에서 구원 받는 성도는 계시록14:4-5절에서 이 사람들은 여자와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순결한 자라.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가운데서 속량함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속한 자이니 그 입에는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 들이더라

 

세 번 째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낮고 천한 말구유에 오셨습니다. 그분은 이 땅에 우리와 똑 같은 인간의 육신을 가지고 오셨지만 죄는 없으십니다. 그 분은 33년 동안 이 땅에 사셨고 3년 공생애 하는 동안에 하나님 나라에 대해 선포하셨고 수많은 일들을 행하셨습니다. 물을 포도주로 만드는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기적을 행하셨고 소경의 눈을 뜨게 하셨으며 열 두해 동안 혈루 병으로 고생하던 여인을 치료하셨으며,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을 치료해 주셨고 물위를 걸어 다니는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물고기2마리와 떡5개로 5천명을 먹이고도 12광주리가 남는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문둥병자를 치료하셨고 귀신을 쫒아냈습니다. 그래서 그분 주변에는 언제나 가난하고 소외된 자 병자들이 예수님 주변에 몰려들어 하나님 나라에 대한 메시지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부자청년은 내가 어떻게 해야 천국에 갈 수 있느냐고, 어떻게 해야 구원받을 수 있냐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하나님의 계명을 다 지키라고 말했습니다. 살인하지마라, 간음하지 마라, 도적질하지 마라, 네 이웃을 해하려고 거짓증거하지 마라. 그랬더니 자신은 다 지켰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결정적인 것이 하나 부족하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네가 보니 너는 통장에 재물이 많이 있는데 그것을 풀어서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 사용하고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였더니 그 부자 청년은 근심하고 예수님을 떠났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따른다고 하는 것은 언제나 선택의 결단이 필요한 것 입니다.천국,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세상과 예수님을 동시에 가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소유하기 위해서,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하나를 포기해야 합니다. 무엇이 더 소중한 것인지를 아는 자만이 현명한 선택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영원한 것을 위해서 일시적인 것을 포기 할 수 있어야 영원한 삶을 누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땅의 복과 하늘의 복을 다 받으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를 포기해야 하는 것입니다. 양 손에 떡을 다 가질 수 없습니다. 예수를 선택하든지 아니면 세상을 선택하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좁은 문, 좁은 길로 갈 건지 아니면 넓은 문, 넓은 길로 갈 건지 말입니다

 

예수님도 지상에서의 마지막 순간이 다가 왔을 때 어떻게 하셨습니까? 주님은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 그 날 밤 밤이 맞도록 기도하셨습니다. 할 수 있거든 이 잔을 내게서 물리쳐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하지만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한다고 하시면서 하나님아버지의 뜻이 십자가를 지는 것임을 깨닫고 고통의 잔을 마심으로 모든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시고 하나님 나라의 영광의 자리에 오르셨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육체를 찢는 십자가의 고통을 지시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심으로써 모든 사람들이 예수의 이름에 무릎 꿇게 하셨고 우리에게 새롭고 산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바울은 빌립보서2:6-8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든지 아니면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았든지, 버림을 받았든지, 우리가 살든지, 멸망 받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든지 아니면 마귀의 자녀, 진노의 자녀이든지 둘 중 하나라고 말합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의 운명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어느 길을 선택하시겠습니까?

 

그러므로 히브리서 기자는 말합니다. 4:14에서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 지어다.” 예수님이 가신 길을 따라가야 합니다. 믿음의 선진들이 가신 길을 가야 합니다. 좁은 문, 좁은 길을 선택하셔서 영원한 천국과 영생을 누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202094일 새 믿음교회 정영진목사 주일설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