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마5:8
예수님의 산상수훈의 팔복 가운데 여섯 번 째 복으로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이요”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먼저 본문의 ‘마음(카르디아)’는 ‘심령’이라는 말과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마음(카르디아)은 인간의 지정의를 가진 것으로 인간의 내면의 모습을 말한다고 할 수 있으며 이것은 전인격의 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말씀하시기를 마태복음23:25-28에서 “화 있을 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 도다. 눈 먼 바리새인이여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화 있을 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
이상의 말씀에서 보면 예수님은 안을 깨끗이 하라 하십니다. 외모를 깨끗하고 화려하게 꾸미고 그것을 아름답게 하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마음을 중요시 하라는 것입니다.
사무엘상 16장에 보면 사울 왕이 하나님 앞에 버림을 받고 난 이후에 하나님께서 낙심 중에 있는 사무엘을 불러 이르되, 네가 언제까지 슬퍼하고 있느냐. 너는 뿔에 기름을 채워 가지고 베들레헴 사람 이새에게로 가서 그의 아들 가운데서 한 왕을 세우라.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사무엘은 베들레헴에 이르러 성읍의 장로들을 모았습니다. 사무엘 선지자가 온 다는 소식에 이들은 불안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평강을 위하여 오시나이까. 라고 물었습니다. 사무엘이 평강을 위하여 왔다고 말합니다. 사무엘은 내가 여호와께 제사하러 왔으니 스스로 ‘성결’하게 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자신과 함께 제사지내자 하고 이새의 아들들을 성결하게 하고 제사에 참여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한 사람씩 사무엘의 앞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먼저 엘리 압이 지나가게 되자, 사무엘이 맘이 들었습니다. 과연 하나님이 기름 부을 자가 여기 있었도다. 하면서 기름을 부으려고 하자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삼상16:7절에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이새의 장남 엘리 압은 다윗에 비하면 키도 크고 용모가 뛰어났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요즈음 말로 말하면 꽃 미남입니다. 작년인가 왜 “별에서 온 그대”의 주인공인 김수현 쯤 비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시대가 많이 변해서 인지 요즈음 젊은 청년들도 외모를 상당히 중요시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남자들도 화장을 하기도 하고 맛사지샾에 가서 피부도 관리한다는 말도 있습니다, 심지어 쌍꺼풀 수술은 보통이고 코나 다른 부분도 성형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입시생들이 면접을 본다거나 입사시험을 보기 전에 자신의 외모를 꾸미는 것은 이 시대의 퐁조 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또한 이 시대는 외모도 스펙이라고 말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은 외모를 중요시 합니다. 그 사람의 가문이나 학벌이나 학위, 토익점수나 소위 스펙을 중요시 합니다만 우리 하나님은 중심을 보십니다. 여기서 중심이란 ‘마음’을 가리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람의 생각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사야55:8-9절에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은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이렇게 하나님께서 사람의 외모보다 마음을 중요시 하는 것은 그 사람의 마음이 그 사람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그 사람의 말하는 것은 그 사람의 마음을 가리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15장에 보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음식을 먹을 때 장로의 유전을 따라서 손을 씻지 않으십니까? 여기서 ‘장로들의 유전’은 곧 미쉬나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유대교는 토라(율법)를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토라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모세 오경에 ‘기록된 토라’이고 다른 하나는 기록된 토라에 대한 실천적 내용을 다룬 ‘구전적 토라’인데 이것을 ‘미쉬나’라고 부릅니다. 그 당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율법과 동등한 권한을 가진 장로들의 유전인 ‘미쉬나’를 들어서 음식을 먹을 때 손을 씻지 않고 먹는 예수님의 제자들에 대하여 시비를 걸었습니다. 이런 유대인들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11절에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 이니라” 17-18 “입으로 들어가는 모든 것은 배로 들어가서 뒤로 내 버려지는 줄 알지 못하느냐, 입에서 나오는 것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 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리라.”
이것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손 안 씻고 먹는다고 그 떡이 더러워서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먹는 것은 다 배로 들어갔다 뒤로 나온다는 것이지요. 정작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은 ‘정결의식’ 즉, 종교적 행위를 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더러운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즉 너희들처럼 겉으로 깨끗하게 씻는다고 깨끗한 사람이 되는 게 아니라 마음속이 깨끗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아무리 정결하게 하고 깨끗이 하여도 정작 마음속이 더러운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면 무슨 의미가 있느냐 이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바리새인과 서기관을 향해 예수님이 ‘회칠한 무덤’이라고 비난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사람의 외모보다 ‘마음’을 중요시하는 것은 이 ‘마음(카르디아)’은 하나님과 영적으로 교통하는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교제하는 이 ‘마음’이 깨끗해야 합니다. ‘마음’이 깨끗하지 않으면 하나님과 교통할 수 없습니다.
다윗의 시로 알려진 시편24:3-6절에도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데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로다. 그는 여호와께 복을 받고 구원의 하나님께 의를 얻으리리 이는 여호와를 찾는 족속이요.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로다.”
하나님의 산에 오른 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계신 곳, 천국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적어도 천국 백성이 되려면 우리 마음이 깨끗해야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고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마음이 청결해야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청결(카다로스)’이라고 하는 말의 뜻은 두 가지를 담고 있습니다. 한 가지는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마음이 더러운 것이 없는 깨끗한 상태를 가리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은 정한 것이어야 하고 부정함이 없는 자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구약성경에서 말하는 청결은 또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레위기19:1-2절에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말하기를 너희는 거룩 하라 이는 나 여호와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19절에서는 “너희는 내 규례를 지킬지어다. 네 가축을 다른 종류와 교미시키지 말며 네 밭에 두 종자를 섞어 뿌리지 말며 두 재료로 직조한 옷을 입지 말지며”
이와 같이 마음의 청결이란 이중적인 마음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을 향하는 순수함(purity) 을 뜻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세상의 그 무엇이 섞이지 않는 순도 99.9프로의 순금과 같은 마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치 아내가 한 남편을 평생 지아비로 섬기는 것과 같은 마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 남편과 살면서 다른 남자를 생각한다면 그것은 순수함이 아닙니다. 한 여자와 살면서 다른 여자를 생각한다면 그것 역시 순수함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남편이나 아내가 둘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마6에 보면 유대인들을 향하여 여러 가지 교훈을 하시는 말씀이 나오는데 그 중에 물질에 관한 교훈이 나옵니다. 주님께서는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관심사인 물질에 대하여 이 땅에 창고에 쌓아두지 말고 하늘나라에 쌓아두라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지 못하고 도둑이 도둑질하지 못하다고 말씀하시면서 네 보물이 있는 곳에 네 마음도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24에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거나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리라.”말씀하셨습니다.
청결한 마음이란 하나님을 향한 충성스런 마음, 마음이 나누이지 않는 마음, 오직 주인 되신 하나님께만 향하는 마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편119:2절에 “....전심으로 여호와께 구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는 말이 히브리어로 ‘콜레브’인데 이는 마음이 나누이지 않은 온전히 하나님만을 따르는 마음을 가리킵니다.
여호수아 24장에서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장로들과 그들의 수령들과 재판장들과 관리들을 모아놓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신앙의 결단을 촉구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15절에서 여호수아는 오늘 날 너희가 하나님을 섬길 것인지 아니면 아모리 족속의 신들을 섬길 것인지 선택하라. 오직 나와 내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고 말합니다. 이 때 백성들은 자신들은 결단코 하나님을 배반하지 않고 우상을 섬기지 않고 오직 우리 조상들을 홍해를 건너게 하고 광야를 지나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까지 인도한 하나님만을 섬기겠노라고 약속합니다. 이 때 여호수아가 말합니다. 그러냐, 만약에 너희들이 약속을 어기면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복은 고사하고 하나님의 저주를 받을 것이니라. 라고 말하자 백성들이 “우리가 여호와를 섬기겠나이다”라고 말하자 여호수아가 그러면 너희들 스스로가 증인이 되었느니라. 그러면 너희 중에 이방 신들을 치워 버리고 너희의 마음을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로 향하라 하였습니다.
백성들은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청종하고 잘 섬기겠습니다. 라고 약속하였습니다. 이 날 여호수아가 세겜에서 백성들과 함께 언약을 맺고 법도를 정하고 큰 돌을 가져다가 상수리나무 아래에다 세웠습니다. 그리고 백성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27절에 “이 돌이 우리에게 증거가 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하신 모든 말씀을 이 돌이 들었음이니라. 그런즉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을 부인하지 못하도록 이 돌이 증거가 되리라”
요한계시록14:1-5절에 144000명에 관한 말씀이 나옵니다. 144000은 구원받은 성도의 수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어느 이단 종교에서는 자신들만이 144000에 속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집단에 속해야 구원받는다고 하면서 기성교회는 구원이 없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성경을 왜곡하는 것입니다. 지금가지 지구상에 지나간 숫자가 얼마인데 겨우 144000명이 구원받는 다는 것입니까? 그러면 과거 로마 박해 시대에 복음을 위해서 순교한 수많은 주의 백성들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그리고 이 성경해석이 틀린 것은 그 이전에도 많은 이단들이 이런 성경해석을 해서 다 맞지 않았습니다. 이 144000은 구원받은 성도의 수를 가리키는데 문자적인 의미가 아니라 상징적인 수로 오직 구원받을 자는 하나님만이 아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144000명과 하나님의 보좌 앞과 네 생물과 장로들 들만이 새 노래를 부르게 되는데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에 대하여 요한 사도는 4-5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이 사람들은 여자와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순결한 자라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에서 속량함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
세상에서 유일하게 두 눈으로 각각 다른 것을 볼 수 있는 생물이 있는데 카멜레온 이라고 합니다. 카멜레온은 그 색만 다양한 것이 아니라 눈의 초점도 다양합니다. 그래서 한 눈으로는 높은 것의 먹이를 보기도 하고 한 눈으로 물에 뜬 곤충의 먹이를 보기도 합니다. 이처럼 세상 사람들은 다 초점적인 생활을 합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오늘 날 하나님을 믿는 다고 하는 신자들 가운데는 이런 다 초점적인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세상을 같이 섬기는 것입니다. 천국도 가고 있고 세상에서의 부와 명예, 그리고 쾌락도 같이 즐기고 싶은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그러했습니다. 가롯 유다도 마찬가지입니다.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녔지만 부활하신 주님을 보지 못했습니다. 오직 한 마음으로 주님을 따랐던 제자들만이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심을 똑똑히 보았습니다. 오직 주님만을 따라서 그의 삶의 길을 걸어가는 자에게 주님은 자신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의 마음이 세상에 있지 않고 오직 나를 위해서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에게 집중하고 그 분만을 위해서 살아가는 자입니다. 바로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을 볼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런 자가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본문이 미래형으로 되어 있다는 것은 지금 우리가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면 이 땅에서도 하나님을 알 수 있고 더 나아가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친히 볼 수 있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전13:12에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의 마음이 청결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잡것이 섞이지 않는 순수한 마음으로 오직 주님께 충성을 다하여 하나님 나라에서 거룩하신 하나님과 우리 주님을 뵈올 수 있기를 주의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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