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휼이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마5:7
예수님의 산상수훈 가운데 앞에서 4가지 복,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라는 네 가지 ‘복’은 ‘복’을 받을 사람의 마음의 상태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반면, 이 다섯 번째 ‘복’은 다른 사람들에 대한 행동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긍휼이 여기는 자는(호이 엘레에모네스)에서 ‘긍휼’이라고 하는 고대 유대교 문헌(솔로몬의 지혜서) 외경(클레멘트전서13:2)등에는 자주 나타나는 말로서 본절의 교훈역시 유대인들에게는 익숙한 내용이었다고 합니다.
성경에 ‘긍휼’이라고 번역한 헬라어 ‘엘레오스’의 구약 히브리어 대응어는 ‘라함’과 ‘헤세드’이다. ‘라함’이라고 하는 뜻은 ‘슬픔’ ‘애통’이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뜻은 상대방의 처지를 깊이 이해하고 그들의 입장에서 슬픔을 느낀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자비’란 뜻이 있는 ‘헤세드’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상대방의 감정에 공감할 뿐 아니라 상대방의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하여 실제적으로 행동하여 구체적인 도움을 주는 것 까지 포괄하는 개념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긍휼이 여기는 자’는 말은 타인의 처지와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고 타인을 자신처럼 생각하고 도와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마음의 자세는 사실 예수님의 마음이라고 할 수 있다. 성경에서 예수님은 세리나 창녀, 사마리아 사람, 간음한 여인 등 그 당시 소외당하고 따돌림 당하는 사람들에게 관심과 사람을 보여 주고 그들에게 관대하게 대하고 그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므로 바로 이러한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복음서를 통해서 예수님의 사역을 보면 그 당시 대제사장, 서기관, 바리새인들에 대하여 엄하게 책망하신 것은 그들이 율법의 노예가 되어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고 심판하는 데 이용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을 버렸도다’ 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신약성경에 ‘긍휼’이라고 하는 단어는 26회나 나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14:14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풀어 주시기 전에 군중들이 예수님을 따라와서 빈들에 있는 그들의 모습을 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여기서 ‘불쌍히 여기사’라고 하는 말씀이 바로 ‘긍휼’이라고 하는 말과 동의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요한복음11:28-37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마리아 마르다 가정에 그 오라버니 나사로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그 가정에 찾아 갑니다. 마르다는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이 좀 더 빨리 오셨더라면, 아니 예수님이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을 것입니다. 하면서 울고 있는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시며 이런 마음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33절에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라고 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타인의 아픔을 공감하고 함께하는 그런 ‘자비’와 ‘긍휼’의 마음을 가지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마음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마음은 그 당시 유대교 랍비, 종교지도자들과는 대비되는 모습입니다. 그들은 구약의 율법대로 ‘악은 악으로 눈은 눈으로 갚은 것’이 하나님의 뜻인 줄 알고 타인에 대해서 용서와 사랑, 그리고 관용하는 마음의 자세를 갖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조금도 긍휼을 베풀지 않았습니다. 죄를 지은 자는 율법대로 돌을 쳐 죽이려고 했습니다.
유대사회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애와 자비는 사라지고 무섭게 경색된 정죄와 심판, 비판, 배타주의에 갇혀 종교 본연의 자비와 긍휼을 잃어버렸기에 주님은 이러한 사회에 대하여 경고를 울리고 자비와 사랑, 그리고 긍휼의 삶을 강조하였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은 복음서의 여러 곳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8:1-11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감람산에 올라가셔서 밤새 기도하시다고 이른 아침에 성전에 올라오십니다. 성전에 올라오신다는 소식에 사람들이 예수님 주변에 몰려 왔습니다. 이 때 예수님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던 종교지도자인 서기관과 바리새인이 한 음행 한 여인을 현장에서 잡아 가지고 예수님께 세우고 이렇게 말합니다. 모세는 이런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는데 당신은 어떻게 할 것입니까? 이렇게 말하는 것은 예수를 시험하여 올무를 씌우려고 한 것입니다. 이 때 주님께서 허리를 굽혀 엎드려 땅에다 대고 손가락으로 무엇인가를 쓰셨습니다. 그리고 일어서면서 하시는 말씀이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면서 다시 허리를 굽혀 땅에서 손가락으로 다시 쓰자 거기에 있던 서기관과 바리새인을 비롯해서 정죄했던 사람들이 하나 둘 씩 사라지고 예수님과 여자만 남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무슨 내용으로 쓰셨는지 신학자들의 의견이 분분 합니다. 여러분들도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도대체 무슨 말씀을 땅에다 쓰셨기에 그렇게 분노하고 온 사람들이 아무소리 없이 그 자리를 떠난 것일까? 우리는 이런 예수님의 지혜를 배워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거기 선 사람들의 구체적인 ‘죄’를 하나씩 쓰셨기에 그들이 양심에 가책을 받아서 돌아섰다고 하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은밀한 ‘죄’를 지적하였기에 그들의 그 자리를 떠났다고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허리를 펴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 그랬더니 거기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씩 떠나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과 여자가 단 둘이 남게 되자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어디 있느냐, 주여, 없나 이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 하니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이상에서 예수님의 모습과 그 당시 종교지도자인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모습이 대비됩니다. 종교지도자들은 그저 율법의 노예가 되어서 율법의 칼로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심판하는 데 사용했지만 예수님은 율법보다 자비와 긍휼을 더 중요시 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율법만을 강조하는 사회는 험악하고 메마른 사회가 됩니다. 특히 이슬람 율법을 지키는 무슬림들을 봐 보세요. 가끔 식 신문에 나오는 사건을 보면 자신들의 율법을 지키지 않는 자식을 끔찍하게 가족에게서 따돌리고 심지어는 죽이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국가나 조직을 유지하기 위해서 법과 규율이 필요하고 이러한 규칙을 잘 지켜야 그 국가나 사회가 안정되는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법이라고 하는 것이 인간의 기본적인 생활을 제약하고 통제하기만 하고 인간의 자유를 구속한다면 그 사회나 국가는 분쟁과 갈등이 폭발하는 사회가 되어 불안하게 되는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사람이 사람다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법이 우선시 되는 사회이기도 해야 하지만, 그 이전에 사랑과 자비가 넘치는 사회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바울은 엡4:32에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최근에 황교안 국무총리 인준 안이 우여곡절 끝에 자유투표로 통과 되었습니다만, 여당과 야당의 표결이 극명하게 드러났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국가나 국민의 안녕이나 안보가 우선시 되는 국회의원의 표결에 있어서 개인의 양심에 따라서 표결이 되어야 국가가 바른 방향으로 갈 수 있고 국회가 정쟁을 하지 않을 것인데, 당론에 따라서 국회의원 개인의 생각은 온데 간데 없이 하다 보니 나라가 혼란에 빠지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요번에 말도 되지 않은 것으로 반대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종교편향’이라는 ‘딱지’를 붙여 가지고 낙마시키려고 하였습니다. 진실한 신자라는 이유만으로 자비를 말하는 불교계가 쌍수를 들어서 불교시민단체를 다 동원하여 법무부장관 인준 때와 똑같이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대한민국 청문회 장에 나타나셔서 국회의원 한 사람 한 사람의 비리나 부정을 땅에다 쓰시면 아마도 한 사람도 큰 소리 칠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요즈음 국회의원을 ‘國害의원’이라고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나랏일을 해야 하는 사람이 정쟁만을 일삼고 국가보다 자신들의 이익만을 일삼고 있으니 이런 말이 나오지 않습니까? 우리는 다른 사람을 정죄하기에 앞서 나 자신을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비에 대한 교훈을 하신 말씀을 또 있습니다. 누가복음10:25-37절에 보면 강도만난 한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말씀은 한 율법교사가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서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라고 물을 때 주님께서 그럼 율법에는 뭐라 하였느냐, 예,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라고 말하자 그러면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율법교사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면 네 이웃이 누구입니까? 이 때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한 강도를 만나 옷을 벗기고 때려서 거반 죽게 되어 길거리에 버려졌다. 그런데 그 때 제사장이 지나갔는데 그냥 보고 피하여 갔다. 또 레위 인이 지나갔는데 그 사람도 피하여 갔다. 그런데 사마리아 사람이 지나가다가 거반 죽은 그 사람을 포도주와 기름을 부어 상처를 싸매고 그를 자신의 짐승에 태워 주막에 이르러서 돈을 주면서 비용이 더 들면 자신이 돌아오는 길에 갚겠다고 했는데 누가 강도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이렇게 말하자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셨습니다.
이상에서 들은 바와 같이 제사장, 레위인은 종교인입니다. 가장 사랑과 자비, 긍휼을 실천해야 하는 종교인들이 더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 모습입니다. 오히려 유대인들이 멸시하고 혼혈족이라고 차별하는 사마리아 사람이 더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날 어떻게 보면 날마다 사랑하라, 용서하라, 선행하라, 이렇게 종교지도자나 종교가 말은 많이 하지만 일반 사람들보다도 더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삶을 살지 못하고 있는 지도 모릅니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 에서도 알 수 있듯이 누가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내 주변의 소외당하고 가난하고 고통당하는 이웃들에게 긍휼과 자비를 베푸는 사람이 천국에 갈 수 있고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비유를 말씀하신 것은 그 당시에도 종교적인 율법만을 강조하여 율법의 정신인 사랑과 자비, 긍휼을 잃어버린 사회였기 때문 일 것입니다.
최근에 미국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어느 작은 어린아이가 햄버거 가게 들렸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가 자신이 햄버거를 사먹으려고 갔는데 거기에서 허름한 옷차림의 할아버지가 굶주린 모습으로 앉아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 아이가 그 할아버지에게 다가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할아버지, 뭐 먹고 싶은 거 없으세요? 작은 꼬마아이가 그러니 어이없게 생각하고 쳐다보았습니다. 그러니 이 아이가 재차 물어 보았습니다. 이 할아버지 왈 드디어 햄버거가 먹고 싶다고 한 겁니다. 이 아이가 햄버거를 사가지고 와서 건너 주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할아버지 더 잡수시고 싶으면 더 사다 드릴게요. 어린 아이지만 이런 감동적인 모습을 지켜본 사람들이 이것을 기사화 한 것을 읽어 보았습니다. 세계 최고의 부자인 미국사회도 이렇게 가난하고 고통당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기사를 낸 기자는 자기 자신과 자신의 가족만을 생각하고 이기적으로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어린 아이의 선행을 통해서 각박한 세상에 이러한 아이의 태도를 통해서 고통 받는 이웃에 대한 관심과 긍휼을 베풀고 함께 사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하는 의도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갖게 합니다.
마18:24-35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천국은 그 종들과 결산하는 어떤 임금과 같다고 말씀하시면서 결산할 때에 일만 달란트 빚진 자 한 사람을 데리고 옵니다. 임금이 묻습니다. 일만 달란트를 갚으라고 요구하자 종은 갚을 것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면 네 아내와 자식과 소유를 다 팔아서 갚으라고 요구합니다. 이 때 종이 말합니다. 한번만 종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소서, 긍휼을 베풀어 주소서 참으면 다 갚겠습니다.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다 탕감하여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종이 나가다가 자신에게 일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만납니다. 그 사람을 보자마자 빚을 갚으라고 요구합니다. 이런 상황을 지켜본 왕의 종이 왕에게 알렸습니다. 왕이여. 당신에게 일만달란트 빚진 자를 다 탕감해 주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그 자가 자신에게 겨우 일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만나서 그 돈을 값지 않는 다 하여 그 사람을 옥에 가두었습니다. 이에 임금이 화가 치밀어 그 종을 불러다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가 사정하여 네 빚 일만 달란트를 탕감해 주었더니 어찌하여 너는 네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냐 하고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하고 그를 옥졸에 넘겼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35절에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니라”
여기에서 임금은 분명히 ‘긍휼이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데 종은 ‘긍휼이 여기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여기서 일만 달란트 빚진 자는 누구이겠습니까? 바로 우리 들 자신입니다. 여기서 일만 달란트는 현재 화폐가치로 환산해보니 수조원이라고 합니다. 어떻게 이 돈을 갚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긍휼의 은총의 클라이막스는 ‘갈보리십자가’에서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총과 희생이 없었다면 영원히 속죄 받을 수 없고 지옥에 떨어 질 수밖에 없는 죄인입니다. 우리는 세상 풍조를 따라가고 공중의 권세를 잡은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있었고 하나님보다 마귀를 따라갔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아래 있었습니다. 그런데 긍휼하신 주님이 우리 대신 갈보리 십자가 위에 죽으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입니다.
디도서3,5절에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우리의 구원은 의로운 행위에 있지 않습니다. 오직 주님의 긍휼하심에 의해 죄 용서받고 새로운 하나님의 자녀가 됐습니다. 하나님의 긍휼이 없었다면 우리는 불쌍한 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변의 사람들이 혹 나에제 잘못했거나 참으로 용서하지 못할 정도의 고통을 주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긍휼을 받은 저와 여러분은 서로 용서하고 사랑하고 긍휼을 베풀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시편기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시51,1절에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따라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 죄악을 지워주소서” 예수님은 눅6,36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과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 야고보서2,13절에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우리 안에 다른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긍휼’의 없으면 다른 사람의 단점만을 보게 되고 이해와 용서와 사랑보다 판단하고 정죄하고 심판하는 바리새인과 같은 우를 범하게 됩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처럼 약점이 있고 죄를 지은 이웃을 도저히 용납하지 못하고 이해하지도 않기 때문에 돕지도 않습니다. 긍휼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구체적 행위입니다. 천국은 하나님의 긍휼로 시작되고 하나님의 긍휼로 이루어집니다. 오늘 우리사회는 긍휼이 메말라 있습니다. 정치권은 정쟁으로 고성과 막말이 오가고 종교계는 고소와 고발사건이 하루가 멀다 하고 세상 법정에 쌓인다고 합니다. 다른 사람의 잘못이나 실수에 대해서 용서나 이해보다 분노로 폭발하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러한 시대에 일만 달란트 빚진 자임을 깨닫고 우리 모두 그리스도의 긍휼의 마음이 충만하여 이웃을 사랑하고 형제를 긍휼이 여기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2015년 6월21일 청주벧엘성결교회 정영진목사 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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