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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평하게 하는 자의 복 /마5:9

gkffpffndi 2015. 7. 15. 11:42

화평하게 하는 자의 복 /5:9

지난 인류의 수천 년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전쟁에 관한 책에 대하여 읽어 보다가 지구촌 전체가 전쟁이 일어나지 않은 곳은 거의 없을 정도로 색칠해 놓은 것을 보았다. 오늘날 지구촌은 이념과 자원부족과 급격한 인구팽창과 가뭄과 기근으로 인한 식량부족으로 언제든지 전쟁의 위험성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2001911테러 사건을 비롯하여 미국의 이라크 침공 등 크고 작은 국가 간의 테러와 분쟁, 그리고 전쟁 등이 쉬지 않고 일어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IS테러분자에 의해서 기독교인들이 공격을 받고 세계가 위협에 놓여 있습니다.

 

지금은 잠잠합니다만 중국과 일본, 중국과 베트남, 중국과 미국, 한국과 일본의 독도 분쟁은 여전히 전쟁의 불씨를 안고 있습니다. 또한 같은 민족이면서도 여전히 핵무기로 동족의 생존을 위협하는 북한의 김정은은 언제든지 전쟁을 일으킬 수 있는 호전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20세기에 들어와서 지구촌에 큰 전쟁이 있었습니다. 세계 1차 대전과 2차 대전, 그리고 한국전쟁, 10년에 걸쳐서 치러온 월남전쟁, 걸프전쟁과 아프칸 전쟁과 이라크 전쟁 최근에 이르기 까지 지구촌 곳곳에서 전쟁의 소식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현재까지 핵 보유 국가들이 가지고 있는 핵탄두만으로도 지구는 수십 번이고 잿더미가 될 수 있다고 합니다. 미국은 지난 1945년 처음으로 핵폭탄을 투하한 이래 대략 16,000개의 핵탄두를 보유하고 있다고 합니다. 러시아는 7천 여 개의 전략 핵탄두를, 프랑스는 350개의 핵탄두를, 영국은 대략 200여개, 중국은 400여개의 전략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에 더하여 북한까지 원자폭탄으로 무장하게 되었으니 오늘처럼 평화가 절실히 그리웠던 때가 또 있을까요? 핵 문제 외에도 수많은 분쟁과 전쟁이 한반도를 긴장시키고 있습니다. 독도와 야스쿠니신사 참배로 인한 한일간의 분쟁, 동북공정으로 인한 한중간의 분쟁, 한미간의 갈등, 정당, 진보 보수간의 이념갈등이 산적되어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평화를 위해 울며 기도해야 할 때 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누가복음19:41-42"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예루살렘에 평화가 깨질 것을 바라보고 말씀하셨습니다

 

유대나라는 그 어떤 나라보다도 전쟁의 참혹함과 아픔을 겪은 나라입니다. 유대나라도 계속해서 강대국에 의해서 국가가 유린당하고 국민들이 고통을 겪어 왔습니다. 강대국인 페르시아, 그리고 바벨론에 의해서 전쟁을 치루어 국토가 황폐화되고 국민들이 포로 로 끌려가는 참혹함을 격어 왔습니다. 또한 AD70년에 로마의 티토 장군에 의해서 평화의 도성인 예루살렘이 돌 하나 돌 위에 남겨지지 않고 무너지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겪어 왔습니다. 21C세기 지금도 아랍 국가들과 전쟁을 치루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더욱 유대민족은 평화를 사랑하는 나라이고 갈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만날 때 마다 샬롬이라고 하는 인사를 하고 있는 지도 모릅니다.

이런 상황에 놓인 유대인들을 향하여 예수님은 산상수훈의 팔복 가운데 7번 째 복인 화평케 하는 자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이 세상은 언제나 전쟁과 분쟁이 쉬지 않고 일어나는 세상이다. 이런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로 나타 날 수 있을 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화평 하는 자로 나타나야 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국가와 국가간의 다툼을 전쟁이라고 표현 한다면, 개인과 개인과의 불화를 우리는 다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개인과 개인과의 이해관계가 충돌하게 되면

폭력이 등장하게 되고 그리고 그것은 재판으로 이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본문에서 화평케 하는 자(에이레노포이오이)’란 적극적으로 평화를 만들어 가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신약성경에는 화평에이레네라고 하는데 약 88번 정도 나온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자녀들은 전쟁과 다툼과 불화가 가득한 세상에서 언제나 peace maker가 되어야 합니다. 싸움을 붙이는 사람이 아니라 싸움을 말리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수동적으로 화평을 기다리는 사람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화평을 만들어가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창세기13장에 보면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과 조카 롯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여기에서 보면 아브라함의 자신의 조카 롯과 함께 자신의 고향인 갈대아 우르에서 나와서 먼 낯선 땅까지 와서 초지를 확보하고 양떼가 많아 질 때 가지 평화롭고 화목하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소유가 많아지자 삼촌과 조카 사이에 갈등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급기야는 양의 초지 문제로 다툼이 일어난 것입니다. 재산이 없을 때에는 삼촌과 조카 사이에 아무런 분쟁과 다툼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소유가 많아져서 양을 먹일 물과 초지가 부족하게 되자 가족 간에 다툼이 일어 난 것입니다. 이것이 만약에 국가 간의 문제로 확대시킨다면 이것은 전쟁의 문제일 것입니다. 일 촉 즉발의 상황에서 이 문제를 아브라함은 어떻게 해결하였습니까? 8절에 보면 아브람에게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친족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

아브라함이라고 자신의 소유에 대하여 욕심이 없었겠습니까? 하지만 아브라함은 믿음의 사람입니다. 인간의 계산이나 실리보다 가족 간의 화목이 더 중요한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하여 너와 나는 한 골육이 아니냐? 그러니 이런 일로 인해 마음 상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실 그 당시에 넓은 땅은 소나 양을 먹이기에 충분한 것이어야 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소유가 적을 때는 문제가 되지 않았던 문제가 소유가 많아지자 문제가 생기게 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인간적인 혈연관계를 내세워 우리가 다투지 말자. 라고 말합니다. 그러고 자신이 조카 롯에게 제안을 합니다. 그것은 조카에게 먼저 땅과 물을 선택할 선택권을 주는 것입니다. 그렇치않아도 조카 롯은 삼촌이 먼저 자신이 좋은 땅을 선택하면 어쩌겠는가? 하는 마음이 있었는데 오히려 삼촌이 자신에게 배려해주고 선택권을 양보했으니 여간 기쁜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서 아브라함은 이렇게 말합니다. 9절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 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참으로 믿음의 사람다운 모습입니다. 아브라함의 관용의 사람이요, 성령의 사람이었기에 눈앞의 이익보다 형제간의 화목이 더 중요한 것임을 알았기에 자신의 손실을 감수하면서 까지 형제간의 화해를 적극적으로 만들어간 peace maker였습니다. ‘평화란 절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처럼 자신보다 남을 더 생각하고 배려하고 관용하는 마음에서 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인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을 실천한 것입니다. 오늘 날 현대인처럼 이웃을 생각하지 않고 내 것은 내 것’ ‘네 것도 내 것이런 욕심과 탐욕을 가지고 살아가는 한 이 땅에 평화는 요원 한 것입니다.

얼마 전에 우리나라 재벌 회사 회장들이 형제들 끼리 그렇게 돈이 많은 데도 불구하고 재산 때문에 법정에 까지 가는 것을 보고 국민들이 무슨 생각을 하였겠습니까? 우리나라에도 재산문제로 인해서 형제와 형제는 물론이고, 남편과 아내도 법정에 까지 가서 다투는 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 최근 기사에는 우리나라 트롯트로 인기를 끌고 있는 여가수가 자신의 모친과 남동생을 고발하고 빌려간 돈을 갚으라고 하는 것을 보면서 물질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기에 부모와 형제 사이도 벌어질 수 있게 하는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성경은 물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평화를 사랑 할 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자신이 있는 곳에서 화평을 만들어 가는 자입니다. 17:1절에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 하는 것이 제육이 집에 가득 하고도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

평화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가 희생을 해야 합니다. 가족간의 사랑과 평화를 위해서 부모님의 희생과 헌신을 통해서 가족 간의 화평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가족 구성원 들 간의 서로가 양보하지 않고 자기주장만을 고집하고 다른 가족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으면 가족간의 화평을 이룰 수 없습니다. 화평을 가만히 앉아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는 가족의 평화를 위해서 희생이 필요한 것입니다. 아침에 남편이 아침밥을 든든히 먹고 깨끗한 와이샤스를 입고 직장에 출근하기 까지 보이지 않는 아내의 손길이 있었기에 가능합니다. 내 자녀들이 깨끗한 옷을 입고 학교에 가고 학교에서 공부를 할 수 있는 것은 역시 부모의 수고와 헌신에 있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화평도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가족 구성원간의 화평을 위해서 서로 노력하고 수고하고 희생해야 하는 것입니다. 평화를 위해서 노력하는 자, 그 사람이 화평의 사람입니다.

창세기4장에 보면 아담이 그의 아내와 동침하매 임신하여 아들들은 나았는데 가인과 아벨이었습니다. 가인은 농사짓는 농부였고 아벨은 양치는 목자였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하나님께서 가인과 아벨에게 제사를 드리도록 하였습니다. 가인은 농사짓는 사람이었기에 자신의 농작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아벨은 양치는 목자였기에 양을 잡아서 하나님께 양의 첫 새끼와 기름진 것으로 드렸는데 하나님께서 가인은 제사는 받지 않으시고 아벨의 제사는 받으셨습니다. 가인은 제사를 드리고 난 이후 기분이 상하였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동생 아벨의 제사는 받았거든요. 그러니 화가 난 것입니다. 그런데 화가 난 가인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책망하십니다. 네가 어찌하여 화가 나 있느냐, 안색이 변한 것은 어찌 된 일이냐, 네가 올바른 일을 행하였으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느냐, 죄가 지금 너를 잡아가려고 기다리고 있다. 죄를 잘 다스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가인은 이러한 하나님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분을 참지 못하고 자신의 동생 가인을 죽이는 인류 최초 가족 간의 평화를 깨는 살인자가 되고 맙니다.

여기서 우리는 가인이 하나님의 말씀에 경고를 듣고 자신의 분노를 잘 다스렸어야 하는 것입니다. 가인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올바로 제사를 드리지 못해서 하나님께 열납 되지 못한 책임을 동생에게 돌리고 동생을 죽이는데 까지 이른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가인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제사를 받지 않으신 것을 알았을 까요? 그것은 제사를 드리는 본인이 아는 것입니다. 제사를 드리면 기쁨이 오게 되어 있습니다. 자신의 죄를 사죄 받는 시간인데 왜 아니 기쁘겠습니까? 죄인이 의인이 되는 데 그 기쁨이 큰 것입니다. 그런데 가인은 제사를 드렸는데 마음이 기쁘지 않습니다. 새 번역에 보면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사는 반기지 않으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벨의 제사는 하나님께서 반기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릴 때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시는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새 노래로 하나님께 예배드려야 합니다. ‘새 노래란 무엇입니까? 구원받은 감격과 은혜로, 즉 예전과는 다른 새로운 태도와 마음가짐으로 하나님께 찬양하고 예배해야 합니다. 이럴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응답을 주십니다. 구원의 감격과 기쁨을 주십니다. 성령 충만함을 주시는 것입니다. 세상을 이길 힘을 주십니다. 절망을 극복할 능력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배 속에 은혜 받으면 독수리 날개 침 같이 올라가는 새 힘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은혜 못 받으면 어떻게 됩니까? 영혼이 가라앉습니다. 낙심됩니다. 화를 냅니다. 부정적인 말만 합니다. 남을 공격합니다. 비판합니다. 중상하고 모략하고 비방하고 악한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가인이 이러했다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분노를 참지 못하고 결국 자신의 동생 가인을 돌로 쳐 죽이는데 이르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가족 간의 화목을 깨는 것 중의 하나가 분노하는 일입니다. 가인은 분노함으로 쫓겨 다는 신세가 되었고 땅에 유리하는 자가 되었으며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아무리 땅을 갈아도 효력을 보지 못하는 죄인이 된 것입니다. 가인은 자신의 죄값이 너무 무겁다고 하소연하였습니다.

가인의 분노는 가족 간의 화목을 깨뜨리고 땅에서 유리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분노할 때 나오는 말이 더 무섭습니다. 그 말은 타인을 미워하고 증오하고 결국 살인하는데 이르게 되는 것을 봅니다. 요즈음 청소년들의 말이 매우 거칠어진다고 하는 말을 방송에서 들은 적이 있습니다. 내 가족에서 부터 거칠고 험악스런 말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툼이 그냥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가만히 보면 거칠고 상스러운 말, 남을 무시하는 말에서 부처 시작됩니다. 가족 간에도 경어를 사용해야 합니다. 부모님께 존경의 말, 남편에게 칭찬하는 말, 아내에게 사랑스런 말, 자녀들에게 칭찬과 격려의 말을 하시기 바랍니다. 그런 가정 행복한 가정, 화목한 가정이 될 것입니다.

 

북한 중앙방송의 TV뉴스앵커인 리춘히가 하는 말을 들어 보세요. 아주 섬뜩하고 오싹합니다. 금방이라고 전쟁이 일어날 것 같은 과격하고 공격스런 언사를 쏟아냅니다. 골로새서3:8절에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버리고 곧 분함과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4:6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맛을 낸 것 같이 하라

바울은 고전5:18에서 모든 것이 하나님께 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직분을 주셨으니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은 화목하게 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어디서든지 어느 곳에서든지 분쟁과 다툼이 끊이지 않는 세상에서 화목의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가족 간의 화목을 위해서 아브라함처럼 남을 배려하는 관용의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가족 간에 서로 이해하고 희생과 헌신, 자신의 화를 조절하고 말을 조심함으로 가족 간의 화목을 이루는 성도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015년 7월 19일 청주벧엘성결교회 정영진목사 주일 설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