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말씀/...새믿음의 강단

화평케 하는 자의 복(2) 마5;9

gkffpffndi 2015. 7. 30. 17:22

 

 

화평케 하는 자의 복(2) 마5;9

 

지난 시간에 우리는 예수님의 산상수훈 가운데 팔복에서 7번 째 복인 화평케 하는 자의 복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습니다. 먼저 화평케 하는 자란 적극적으로 자신이 속한 곳에서 평화화평을 만들어 가는 사람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특히 가정에서 평화를 만들어 가야 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성경에서 우리는 아브라함을 들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조카 롯과의 영토 분쟁에서 자신이 먼저 조카에게 양보함으로서 삼촌으로서의 모습을 보여 주어 물질보다 가족간의 화목을 중요시 한 믿음의 사람다운 면모를 보여 주었습니다. 후에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돠었고 하나님의 축복울 받았습니다. 반면에 아담과 하와의 아들인 가인과 아벨에 있어서 가인은 자신의 제사를 하나님이 받지 않으신다는 불쾌감으로 동생 아벨을 돌로 쳐죽여 가족을 죽이는 엄청난 죄악을 저지른 인류 최초의 살인자가 되었습니다.

 

성경은 자신의 가족을 죽인 가인을 향하여 이렇게 말함으로 후세에 교훈을 삼고 있습니다. 요한사도는 요한일서3:11-12에서 우리는 서로 사랑할지니 이는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소식이라. 가인같이 하지 말라 그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떤 이유로 죽였느냐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의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라

 

성경은 분명히 가인의 죄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 어떤 변명에도 불구하고 형제간에 불화하는 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가정의 화목을 깨는 일입니다. 하지만 인류 역사를 보면, 아니 우리나라의 이조시대 역사만 봐도 왕권을 차지 하기 위해서 소위 왕자의 난이 일어나지 않습니까? 요즈음 인기 있는 역사 드라마인 화정을 보면 광해군이 자신의 형제들을 죽이고 보좌에 오르고 그리고 조카인 능양군에 의해서 축출 되는 장면이 방영되고 있는 것을 보면서 권력에 눈이 멀면 형제나 가족이 보이지 않습니다. 로마를 건국한 역사에도 형제를 죽이고 심지어는 자신의 보좌를 지키기 위해서 자신의 아들까지도 죽이는 일이 가인의 뒤를 따라가는 인류 역사를 보게 됩니다.

 

이 설교를 준비 하는 중에 우리나라 최고층 빌딜을 짓고 있는 ‘L'회사가 경영권 문제로 장남과 차남이 다투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모두가 가인의 뒤를 따라가는 자들입니다. 하지만 우리 믿음의 자녀들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처럼 자신보다 다른 사람을 더 배려하고 관용하는 마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이제 오늘은 우리의 가족의 울타리를 넘어서서 화목의 개념을 좀더 폭넓게 생각해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쩌면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 핵심적인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핵가족 시대여서 이웃과의 담을 쌓고 지나고 있습니다. 가족간의 우정과 사랑은 더욱 공고해진 반면에 이웃과의 관계는 예전과 같지 않습니다. 제가 어렸을 적 만해도 이웃에 숟가락이 몇 개 인 지 알 수 있을정도로 가까웠습니다.

 

그래서 이웃사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명절때가 되면 이웃집에 들러서 어른들에게 집에서 만든 음식을 싸주시면 이웃집에 가져다 드리고 어른들게 세베를 드리고 나옵니다. 그러면 이웃집 어른 들이 그냥 보내지 않고 또 세배 돈을 손에 주어 보냈습니다. 이렇게 이웃 간의 정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가 산업화가 되면서 도시에 뿔뿔히 흩어져 살게 되면서 내 주변에 낯선 사람들이 살게 되면서 경계의 눈초리가 심해지다 보니 이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만 아파트 7년 이상 살면서도 앞집에 젊은이들이 사는데 마주쳐도 한 번도 인사를 나눈 적이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계단에서 만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하지만 어떤 젊은 부부는 같은 계단을 오르고 내리면서 만날 때 마다 인사를 합니다. 서로가 인사를 자주 하다 보니 친근함이 느껴집니다. 그래서 그 집 아이에 대하여 물어보기도 합니다. 한 번은 모르는 여자고등학생으로 보이는 학생이 올라가길래 가만히 보니 그 집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그래서 남자 막내하고 차이가 많이 나서 물어보니 자기 집 큰 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대화를 하다 보니 그 집 부부하고는 만날 때 마다 웃으면서 인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매일 만나는 이웃과의 관계가 좋으니 이웃을 만나도 반갑습니다. 그 집 아이의 말소리가 계단에서 올라올 때부터 소리가 들립니다. 내 아이처럼 반갑게 느껴집니다. 하지만 현대인들은 아파트 생활로 인하여 이웃과의 소통이 잘되지 않다 보니 작은 일로 충돌하고 그러다가 층간소음으로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있지 않습니까?

 

언젠가 우리나라에서 학교 울타리 없애기 운동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학교 울타리가 붉은 벽돌을 상징처럼 있다 보니 외부에서 학교를 들여다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뭔가 답답하기도 하고 소통이 안된다는 생각에 학교에서 울타리를 없애고 그곳에 꽃을 심어 놓고 동네 주민들이 학교 운동장을 바라볼 수 있게 하니 삶의 질이 높아지고 주님들이 행복해 하는 것입니다.

 

박근혜 정부가 들어서 내건 슬로건이 국민행복시대를 연다고 하셨습니다. 그 슬로건은 이 시대의 맞는 시대적 요구를 잘 선택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요즈음 우리나라는 사람들의 의식이 상당히 높아졌고 요구상황이 많습니다. 개발독재시대처럼 대기업이나 어느 특별한 계층의 행복만을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의 행복을 원하는 것입니다. 그야 말로 국민모두의 행복입니다. 하지만 국민 모두의 행복은 그냥 주어지지 않습니다. 내가 행복하려면 내가 접하고 있는 이웃과 좋은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내가 있는 일터나 직장, 만나는 사람들에게 웃음과 평안과 기쁨을 주어야 합니다. 내 주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할 때 비로소 내가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너무 극단적인 개인주의와 이기적인 생각이 지배하다 보니 우리사회가 삭막하고 무서운 사회로 느껴집니다. 지난 달 17일 경기도 부천의 한 연립주택에서 40대 후반의 중년 남성이 무슨 일인지 알 수 없으나 모자를 찔려 죽이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경찰에서 cctv를 살펴보니 유력한 용의자로 윗 층에 사는 남성을 지목했는데 그 이유는 평상시에도 많이 다투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이웃과의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1025-37절에서 참된 이웃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소위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야기입니다. 한 율법교사가 예수님을 시험하고자 이렇게 말합니다.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러면 율법에는 무엇이라 기록되어 있으며 너는 어떻게 읽었느냐 묻습니다. 대답하여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라고 말했더니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하셨습니다.

 

그러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한 강도를 만나서 거반 죽게 되어 길바닥에 내 팽개쳤다. 그런데 조금 있다가 제사장이 그 자리를 지나갔는데 그냥 지나갔다. 또 조금 있다가 레위인도 지나갔다. 그런데 한 사마리아 사람이 이 광경을 보고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이 사람을 자신의 짐승에 태워서 주막에 맡기면서 돈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 더 줄 터 이니 이 사람을 치료해 주도록 하였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 사회는 참된 이웃이 사라지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사랑이 메마른 세상에서 주님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네 이웃을 사랑할 때 결국 네가 행복해지기 때문입니다. 행복은 나 혼자 몸부림 친 다고해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이웃과의 화목을 유지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대한민국의 행복은 대한민국 혼자만 잘 살겠다고 해서 잘사는 것도 행복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 대한민국은 지정학적으로 강대국, 소위 열강들 틈에 끼여 있지 않습니까? 중국과 러시아, 미국과 일본 그리고 한 형제인 저 북한과의 관계를 잘 해야 합니다. 북한 김정은이가 보기 싫어도 어쩔 수 없습니다. 북한과의 관계가 잘되어야 대한민국이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나라가 한 해 국방비에 들어가는 비용이 천문학적이 숫자입니다. 통일이 되면 이 비용을 다른 데 사용할 수 있다면 얼마나 나라가 발전하겠습니까? 이웃나라와도 화목해야 평화가 유지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5:22-26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가폐쉬운성경에 보니까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에게 화를 내는 사람은 재판정에 설 것이며 자기 형제에게 나쁜 말을 하는 사람도 산헤드린 법정에 설 것이다. 또한 자기 형제에게 바로라고 하는 사람은 지옥 불에 들어 갈 것이다.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예물을 드리기 전에 네 형제가 너에게 나쁜 감정을 갖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제단에 예물을 놓아두고 가서 먼저 네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 후에 다시 와서 예물을 바쳐라. 너를 고소하는 사람이 길에 있을 때에 빨리 화해하여라. 그렇지 않으면 그가 너를 재판관에게 넘기고 재판관이 너를 간수에게 넘겨 옥에 가둘 것이다. 내가 진정으로 말한다. 너희가 마지막 한 푼까지다 갚기 전에는 그 감옥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이 말씀을 보면 우리가 우리의 이웃과의 나쁜 감정을 가진 상태에서는 하나님을 참으로 예배할 수 없고 천국에 갈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사람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를 평화롭게 해야 합니다. 이웃과 벽이 없어야 합니다. 서먹서먹한 관계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먼저 믿는 사람이 가서 손 붙잡고 화해해야 합니다. 화해하고자 하는 마음은 성령이 주시는 마음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트러불 메이커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피스 메이커가 되어야 합니다.

 

복음 성가 가운데 이런 찬송이 있습니다. 1절만 보면, 내가 먼저 손 내밀지 못하고 내가 먼저 용서하지 못하고 내가 먼저 웃음 주지 못하고 이렇게 머뭇거리고 있네 그가 먼저 손 내밀길 원했고 그가 먼저 용서하길 원했고 그가 먼저 웃음주길 원했네 나는 어찌 된 사람인가

! 간교한 나의 입술이요 오! 옹졸한 나의 마음이여 왜 나의 입은 사랑을 말하면서 왜 나의 맘은 화해를 말하면서 왜 내가 먼저 져 줄 수 없는가

왜 내가 먼저 손해 볼 수 없는가 오늘(오늘) 나는(나는) 오늘(오늘) 나는(나는) 주님 앞에서 몸 둘 바 모르고 이렇게 흐느끼며 서있네 어찌 할 수 없는 이 맘을 주님께 맡긴 채로...

 

최근 우리사회는 고소고발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자신은 잘못이 없고 상대방에게만 잘못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 특별히 목사와 장로, 목사와 성도들 끼리 고소고발이 한국성결신문에 광고란에 계재 되어 있습니다. 제가 아는 목사님 자녀 가운데 따님이 판사 이신 분이 계신데요. 자기 아버지 한테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아버지! 목사님들이 세상법정에 오면 판사들에게 웃음거리 밖에 안 된다고, 제발 세상법정까지 오지 말고 화해하라고 하더랍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셨습니다. 반대로 고소 고발한다면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품격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인격을 닮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성품을 말할 대 거룩 성을 말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본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빌립보서2:6-7에 보면,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이웃과의 화목을 유지하는 길은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품격을 가지면 됩니다. 예수님의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마음입니다. 바울은 빌립보서2:3-4에서 "아무 일에든지 간에 다툼으로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의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하라"

 

3:17"위로부터 오는 지혜는 거룩하고 화평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예수님의 성품을 본받아서 이웃과 화평함을 이루면서 살아야 하겠습니다. 이 땅에 평화의 도구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아씨시(Assisi)의 성자 성 프란시스(St. Francis)입니다. 그가 외쳤던 기도문을 읽으므로 오늘 설교를 맺고자 합니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상처가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오류가 있는 곳에 진리를

의심이 있는 곳에 믿음을

절망이 있는 곳에 소망을

어둠이 있는 곳에 광명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심게 하소서.

 

위로 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 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 보다는 사랑하게 하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자기를 버려 죽음으로써

영생을 누리기 때문입니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2015년 8월 2일 청주벧엘성결교회 정영진 목사 주일 설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