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5:9 화평케 하는 자의 복(하나님과 화목하려면)
우리는 계속해서 예수님의 산상수훈 가운데 ‘팔복’의 7번 째 복인 “화평케 하는 자의 복”에 대하여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 땅에서 나타나는 방법은 온갖 불화와 갈등과 미움과 분열이 끊이지 않는 세상에서 ‘화평케 하는 자’ 즉 적극적으로 평화를 만들어 가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먼저는 가족 간의 평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어서 두 번 째 이웃과의 화목에 대하여 말씀을 드렸습니다. 내 주변 사람들 즉, 직장이나 일터, 동네 아파트에서 자주 만나는 이웃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앞에 두 가지는 수평적인 관계 즉, 사람과의 관계를 넓게 하고 좋게 하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세 번 째는 ‘하나님과의 화목’에 대하여 말씀을 드렸습니다. 사람과의 관계보다 더 중요시 되는 것이 하나님과의 화목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소통이 단절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과의 화목을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는 길은 이 땅에 이천년 전에 인류의 모든 죄 값을 지시고 십자가위에서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화목제물’로 돌아가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속자(redeemer)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 까지는 인간은 자신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서 양이나 염소나 소를 죽여서 자신의 죄를 그 짐승에게 전가함으로써 자신의 죄를 ‘속죄’하였습니다. 그러기에 무수히 많은 짐승이 인간의 죄 값으로 희생되었고 제단에 피가 흘렀습니다.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시기 전 까지 인간의 죄를 속죄하는 방법은 짐승의 피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속죄의 방법을 정하실 때 반드시 피를 요구하셨기 때문입니다. 히9:22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죄 사함이 없느리라.” 하지만 이 속죄방법은 계속해서 무고한 짐승이 죄를 지은 인간을 위해서 계속해서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속죄제물이 되셨기에 다시는 양이나 염소나 소를 죽여서 속죄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를 의지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 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히9: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리라.“
히10:12,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히10:19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이제 모든 인간은 구약시대처럼 소나 양이나 염소를 잡아서 제사 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모든 인류를 위해서 화목제물이 되셔서 영원한 속죄 제사를 드렸기 때문입니다. 이제 인간은 하나님과 화목하기 위해서 다른 방법이 필요치 않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공로를 힙 입어 하나님께 나아가기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속죄를 믿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만이 죄 용서받을 수 있고 하나님과 화해 할 수 있습니다.
가끔 식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등산로나 산길을 갈 때 사람들이 정성스럽게 쌓아놓은 돌탑을 봅니다. 이런 돌탑을 쌓아놓는 사람들의 심성은 착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정성을 통해서 알지 못하는 신에게 가까이 가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고 봅니다. 덕을 쌓는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가끔 식 양병 산에 올라 갈 때면 어떤 분이 올라가는 계단에다가 나무를 여러 개 세워두고 꼭대기에 새 모양의 나무를 세워둔 것을 봅니다. 그것도 자기 나름의 종교성을 가지고 선한마음으로 했다고 생각이 됩니다. 언젠가는 아침에 교인을 모시러 가는데 한 아주머니가 문암 들어가는 길목에 큰 바위 앞에서 두 손을 합장하고 정성스럽게 기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예전에는 아주머니 들이 산에서 산신령에게 제사를 드린 후에 북어를 소나무위에 얹어 놓으면서 쌀을 그 나무 아래에 뿌리는 행동을 하였습니다. 또한 정한 수를 떠 놓고 달을 보고 가족의 건강과 무사하기 바라는 마음으로 기도를 드립니다. 이런 행동에는 알지 못하는 자신들의 신에게 다가가기 위함입니다.
사도바울도 그리스 아테네에서 전도하기 시작하였는데 그곳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이렇게 연설하였습니다.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가 섬기는 신들을 다 보았다. 거기에는 별의 별신들이 다 있는 것을 보았는데 그런데 내가 보니 거기에서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는 제단을 보았는데 너희는 알지 못하는 신에게까지 제사를 드리면서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느냐, 그 분은 천지를 주관하시는 분이시며 너희들이 섬기는 신들처럼 신전에 있지도 아니하시고, 또 무엇이 부족하여서 사람이 섬기는 것을 받지도 않으시는 분이시다. 그 분은 우리인간에 친히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주시는 분이시다. 온 인류를 한 혈통으로 만드셨고 그분이 거주의 경계를 정하여서 살고 있는 것이다. 그 분은 우리 각사람 에게서 멀리 계시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우리가 그의 힘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 하나님은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로 새긴 신이 아니다. 무지 하던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그냥 지나가셨지만 이제는 그렇게 할 수 없다. 이 땅에 믿음만한 확실한 증거를 보여 주셨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죽음 가운데 부활하셨다. 그러므로 이제 헛된 것에서 돌이켜 회개하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권면하는 말씀이 행17:22-30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에는 세상의 모든 신들과 제사들은 하나의 실체가 아니라, 그림자입니다. 율법도 실체가 아니라 그림자입니다. 히10:1 “율법은 장차 올 좋은 일의 그림자일 뿐이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나 온전하게 할 수 없느니라” 골2:16-17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을 이유로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그러므로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고 그 분이 영원한 속제를 드리셨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 까지 그림자 역할을 했던 제사
제도는 폐하여 질 수 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구약의 제사제도를 따라서 속죄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이제는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하나님께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데 있어서 다른 어떤 중재자가 필요치 않습니다. 예를 들면, 천사를 숭배한다든지, 성인들의 기도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화해시키는 “중보자”(the mediator)이시기 때문이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의 은혜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다시말하면 하나님과 화해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하여 자신을 ‘단번에’ 희생제물이 되신 “구속자”이기 때문에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음을 믿고 회개하고 하나님께 나오는 사람은 누구나 죄의 용서함을 받고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을 받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예배를 통해서입니다. 죄인된 인간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길은 우리의 화해자이시며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인데 바로 그 것이 예배하는 것입니다.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은 인간을 만나시고 죄를 용서하시고 한없는 은혜와 축복을 주십니다. 예배란? 인간이 하나님께 돌려 드리는 것 중의 최고의 가치입니다.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시고 우리를 축복하십니다.
구약성경에서도 하나님은 제사를 통해서 자신을 계시하시고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삼하24장에 보면 다윗 왕이 자신의 군사와 백성이 많아지자 자신을 과시하고 싶은 나머지 요압장군에게 단에서부터 브엘세바에 이르기 까지 인구조사를 시키자 하나님께서 진노하셨습니다. 진노하신 하나님께서 선지자 갓을 통해서 이스라엘 땅에 심판을 내리시겠다고 하시면서 세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했습니다. 첫째는 7년 기근, 둘째, 왕이 원수에게 석 달 동안 도망 다니는 것, 셋째는 3일 동안 전염병을 퍼지는 것인데 왕이 이 중 세 번 째 것을 선택해서 하나님께서 벌을 내리시는데 무려 7만 명이 죽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자신이 하나님께 크게 범죄하였음을 깨닫고 회개를 합니다. 불쌍한 백성을 치지 마시고 자신을 치라고 부탁합니다. 이 때 갓이 이 재앙을 거두어들이는 방법을 제시하는데 그것은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 타작마당에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신하들과 함께 아라우나 타작마당으로 올라가는데 아라우나가 왕이 자기 쪽으로 오는 것을 보고 마중 나가서 이렇게 말합니다. 어떻게 왕게서 저에게 오시나이까, 왕이 대답하기를 네 타작마당을 사서 여호와께 제사를 드려 이 재앙을 그치게 하려고 한다고 말합니다. 아라우나는 걱정 마시고 제가 이 타작마당뿐 아니라 제사에 필요한 제물과 땔감까지 다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이 말을 들은 다윗이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데 어떻게 값없이 드리겠느냐. 걱정하지 말고 내 그 값을 지불할 터이다. 그러면서 다윗이 은 오십 세겔로 그 밭을 사서 여호와 하나님께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자 이에 여호와께서 그 땅에 내렸던 재앙을 그치게 하셨습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다윗 할 것 없이 그들은 하나님과의 불편한 관계를 해소하고 하나님과 화해하기 위해서 반드시 하나님께 번제와 화목제를 드림으로써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가 있었습니다.
다윗의 제사를 통해서 보았듯이 하나님은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과 화목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화목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예배에 참여해야 합니다. 예배란 단순히 종교적인 의식적인 세레모니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만남((encounter)입니다. 죄 인된 인간이 초월자이시며 영원한 타자이신 하나님을 예배를 통해서 경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이것을 누미너스(numinous)라고 하는데 오토(Rudolph Otto)교수가 말했듯이 이 경함이란 하나님의 신비감과 경외감 그리고 매혹을 느끼는 일이다. 여기서 신비감이란 우리의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신비스러운 감정이나 무아지경의 상태를 말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호렙 산에 오른 모습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출애굽기19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빽빽한 구름 가운데서 내가 임할 것인데 너는 내 말을 듣고 백성에게 내 말을 전하여라. 먼저는 너는 백성에게로 가서 하나님을 만나는 오늘과 내일 그들을 성결하게 하고 그들에게 옷을 빨게 하고 준비하게 하고 기다리면 나 여호와가 백성 앞에서 시내 산에 강림할 것인데 백성들에게 경계를 정하고 그것을 침범하지 못하게 하라, 만약 침법 하는 그 사람은 반드시 죽임을 당할 것이다. 그리고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만나는 삼일에는 여인을 가까이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드디어 삼일 째 되는 날에 시내 산에 우레와 번개가 치면서 빽빽한 구름이 산위에 있고 나팔 소리가 크게 들리면서 사람들은 두려워 떨었습니다. 그리고 시내 산에 연기가 자욱하더니 여호와께서 불 가운데 강림하셨습니다. 온 산이 크게 진동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 시내산 산꼭대기에 강림하셨습니다. 그리고 모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를 보려고 오는 자는 죽을 것이다. 그리고 제사장들에게 몸을 성결케 하라고 하여라. 그렇치않으면 나 여호와가 그들을 칠까 하노라. 그리고 시내산 주위를 거룩하게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예배가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나님의 신비감과 거룩함과 경험하려면 먼저 우리들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성결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거룩하게 하고 자신의 몸과 마음을 성결하게 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고 경험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아라우나 타작마당의 다윗의 제사에서 보듯이 반드시 자기희생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아라우나가 타작마당과 제사드릴 소나 양이나 염소를 거저 준다고 하였지만 그것을 받지 아니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거두고 재앙을 거두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께 드릴 희생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희생이 없는 예배에는 하나님이 응답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지난 시간에 화목제물로 소나 양이나 염소를 번제로 드릴 때 반드시 내장에 있는 기름이나 간 모든 것을 다 태워 드려야 한다 하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마음, 중심을 드려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마6:21절에 “보물이 있는 곳에 네 마음도 있느니라”
하나님을 향해 경외감을 가진 예배 자들은 “희생의 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진정한 희생정신 없이는 하나님께 참된 예배를 드릴 수 없습니다. 말라기 선지자는 거짓 예배에 대해서 하나님이 역겹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말라기2:6-10에 보면 말라기 시대에 사람들이 하나님을 경와함이 없이 제사를 드렸기에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들 마음속에 내가 주인일진대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느냐, 내가 아버지일진대 공경함이 있느냐 너희가 더러운 떡을 주의 제단에 드리고도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하는도다. 너희가 눈먼 것 저는 것 병든 것을 나에게도 드리고도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으며 너를 받아주겠느냐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는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면서 나에게 이렇게 행하니 내가 너희 기도를 받겠느냐 너희가 드린 것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 손으로 드린 것도 받지 아니하리라.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아느냐가 중요합니다. 그 분을 창조주요 전능자요 나의 구속주로 여기는 사람과 단순히 나의 필요를 채워주는 기복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 있어서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하는데 있어서 태도는 확연히 다를 것입니다. 진정한 희생정신 없이는 하나님께 참된 예배를 드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십자가 위에서 자신을 희생 제물로 드림으로써 하나님을 만족시켜 드렸습니다. 즉 자신을 하나님께 완전히 드린 것입니다. 예배란 그와 같은 것입니다. 더 나아가 예배 자가 가져야 할 태도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복종할 마음의 자세를 가지는 것입니다. 마치 아브라함이 자신의 외아들 이삭을 죽여 하나님께 바쳤듯이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는 길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곧 예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고 죄 용서함을 받고 구원의 감격과 은혜를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배하는 자가 준비할 것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감입니다. 몸과 마음을 성결하게 하고 그리고 하나님께 드릴 희생제물을 준비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할 마음의 자세를 가질 때 거룩하시고 위대하신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2015년 8월 23일 청주벧엘성결교회 정영진목사 주일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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