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1) (마5:1-12)
우리는 지난 시간에 이어서 계속해서 예수님의 산상수훈 가운데 ‘백미’라고 할 수 있는 ‘팔복’에 대하여 하나씩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팔복’은 세상적인 관점에서 보면 ‘복’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이 세상의 가치관을 역행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복’의 개념은 구약적인 개념으로서의 ‘복’이 아닙니다. 즉 물질적이고 현세적인 것이 아니라, 미래적이고 종말적인 적인 개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대부분의 많은 군중들이 그리 넉넉하지 않은 아니 가난하고 비천한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그들에게 물질적이고 풍요롭게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복이라고 말했다면 예수님의 말씀이 그들을 변화시키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그 당시 대제사장, 서기관, 바리새인들과 같은 종교지도자들이 부유하고 넉넉하게 잘 먹고 살아가는 것과는 달리 가난하고 어렵게 살아가는 이들에게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과 그 나라에서 보상이 있음을 알리고 그들에게 위로와 격려, 그리고 소망을 주기 위해서 ‘복’의 개념을 새롭게 정리하셨습니다.
예수님의 ‘팔복’의 말씀은 그 당시나 오늘날이나 똑같이 세상적인 가치관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는 개혁적이고 혁명적인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 시간 ‘팔복’ 가운데 두 번째 복인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라는 두 번째 복에 대하여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우리나라 옛날 코미디 프로그램에 ‘웃으면 복이 와요’라고 하는 코미디 프로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고인이 되셨습니다만, 키가 작은 이기동씨 하고 비실비실한 배삼룡씨가 나와서 연기를 하면 온 가족식구들이 티브이에 둘러앉아서 배꼽을 잡고 웃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이후에는 이 주일 씨기 나와서 이상한 걸음과 포즈로 온 대한민국을 웃음바다로 만들어 일약 스타가 되었습니다. 요즈음 젊은이 들이 즐겨보는 코미디 프로에도 많은 시청자들이 티브이 앞에서 정치코미디나 세상 풍자하는 모습에 파안대소하면서 스트레스를 날리지 않습니까? 지금은 돌아가셨습니다만 연세대학교 의대 교수였고 신실한 기독교인이셨던 황수관 박사께서 전국에 교회마다 강연하는 곳에서 웃음을 선사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었습니까?
이렇게 코미디 프로가 인기가 있는 것은 오늘날 사람들이 직장에서 일터에서 가정에서 스트레스가 쌓여 상대적으로 이런 긴장감에서 벗어나고 싶은 강한 욕구가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일상생활의 해방구를 그런 곳에서 찾는 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한 번 기분 좋게 시원하게 웃으면 의학적으로도 좋은 호르몬이 많이 나와서 우리 몸이 건강하게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좋은 소위 ‘웃음효과’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분명한데 그와는 정반대로 예수님은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애통하는’에 해당하는 ‘펜둔테스’의 원형인 ‘펜데오’는 그 뜻이 심히 근심하며 고통스럽게 슬퍼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이 말의 뜻을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못 박혀 돌아가시기 전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셔서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서 그 마지막 밤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시기 위해서 땀방울이 핏 방울이 되기까지 혼신의 힘을 다하여 기도하실 때,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함께 깨어있으라”
예수님께서 여기서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라고 하셨는데 무엇 때문에 주님이 고민하셨습니까? 예수님이 지금 무엇 때문에 겟세마네 동산에 오르셔서 기도하시고 계십니까? 그것은 ‘인류의 죄’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은 바로 모든 인류의 죄로 인해 주님이 ‘속죄양’이 되셔서 죽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 분이 왜 무엇 때문에 고민하신 것입니까? 그것은 ‘죄값’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이 꼭 십자가여야 하는 가 일 것입니다. ‘십자가’는 그 당시 최고의 사형방법입니다. 로마에 대항하는 반역 범이나 살인을 한 흉악범에게 사용된 최악의 고통스런 사형방법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은 이런 방법이 아닌 인류의 죄를 속죄하는 차선의 방법이 있다면 그 길을 가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십자가 앞에서 마26,39에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자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간곡하게 하나님아버지께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고민하여 그의 심정이 죽게 되었다고 하는 것은 그의 마음이 심히 ‘애통’하는 상태에 있었음을 반증해 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애통’이라고 하는 말은 바로 예수님이 인류의 죄값을 치르기 위해서 십자가를 앞에 두고 고민하셨던 것처럼, 오늘 우리 그리스도들은 이런 ‘죄’에 대해서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실 오늘날의 시대는 노아의 시대와 같인 죄에 대하여 슬퍼하거나 아파하는 사람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은 시대입니다.
우리가 사는 대한민국의 한 복판에서 아침저녁으로 쏱아져 나오는 무수한 기사의 내용은 오히려 ‘죄’를 즐기고 조장하고 죄를 벗 삼고 자랑스럽게 살아가는 시대입니다. 그 중에서 요즈음 시대정신이라고 할 수 있는 젊은이들의 문화나 언어를 보면 죄하고 친구삼고 살아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 예로, 청소년들이 사용하는 언어를 가만히 들어보세요. 그 학생들이 지나가면서 하는 얘기를 들어보세요. 소위 욕쟁이 할머니가 따로 있는게 아닙니다. 한참 바른 말을 사용하고, 학교에서 올바른 가치관과 교육을 받아야 할 학생들이 입에 담지 못할 험한 욕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길거리에서 하는 것을 들을 수 있습니다. 요즈음 아이들이나 학생들은 욕이 아니면 대화가 이어가기가 어려운 것 같습니다. 오히려 옥하지 않고 건전하게 생활하는 학생들을 왕따시키는 분위기라고 하는 것입니다. 또한 요즈음 ‘엔테테이먼트’ 소위 ‘연예산업’이라고 하는 것이 한류바람을 타고 국위선양하고 국가의 신 성장산업으로 각광받고 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얼마 전 가수 ‘싸이’가 유트브에서 조회수가 수억이상 올라가서 미국사회에서 큰 반향을 일으킨 적이 있습니다. 그 당시 박대통령이 가수‘싸이’를 올리면서 ‘창조경제’라는 말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물론 우리나라 젊은이 들이 참 뛰어나는 것 같습니다. 특히 여성들이 특히 스포츠나 연예계에서 두각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어쩌다 TV를 켜보면, 우리나라 유명한 아이 돌 가수들이 나와서 노래와 춤을 추는 것을 보면, 제가 구시대 사람인 지 몰라도, 가사도 그렇고 춤도 너무나 선정적이고 성적인 것을 노골적으로 표현하는 것을 보면서 저런 춤을 추어도 아무런 제재를 하지 않아도 되는 가 싶은 경우를 보게 됩니다. 소위 요즈음 아이들 말로 ‘Sexy' 춤을 추고, 이런 행위나 안무가 아무렇치도 않게 버젓이 안방에 방영되고 그것이 어떤 도덕적 기준도 없이 방치되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그야말로 현대사회는 죄가 홍수를 이루는 시대입니다. 죄를 죄로 여기지 않은 사회입니다. 부끄러움이 없는 사회인 것입니다. 최근에 기독교와 충돌하는 사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동성애자의 축제인 ‘퀴어축제’가 서울에서 대학생들이 집중되어 있고 하루 유동인구가 20 만 명인 신촌에서 6월7-15일 까지 열린다고 하여 기독교에서 반대운동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성소수자라고 하면서 차별을 받고 있다고 합니다. 분명히 동성애는 정상이 아닙니다. 부끄러워해야 하는데 오히려 당당하게 대중 앞에서 자신들의 수치를 알리는 행사를 하는데 이들이 이렇게 하는 것은 동성애가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죄’라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반나체의 모습으로 길거리에 나서면, 이런 음란문화가 사람들의 이성과 도덕을 마비시키고 결국 하나님의 진노를 막을 길이 없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롬1:18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27 “그와 같이 남자들로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 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
구약성경에 이사야나 예레미야 시대를 보면 하나님께서 한탄하시면서 유대나라를 심판하시겠다고 하십니다. 그 이유는 그 당시의 사람들이 하나님 대신 우상을 섬길 뿐 아니라, 그들의 도덕적 삶이 타락하고 악을 행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렘6:13에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탐욕을 부리며, 선지자로부터 제사장까지 다 거짓을 행함이라”말씀하셨습니다. 그것 뿐 아니라, 7:9절에 “너희가 도둑질하며 살인하며 간음하며 거짓 맹세하며 바알에게 분향하며 너희가 알지 못하는 다른 신들을 따른다” 하였습니다. 그런데 일반 사람들만 이런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제사장과 선지자에게서 이런 악을 행하였다고 하는 것이 더욱 심각해 하는 것입니다.
이사야5:22 “포도주를 마시기에 용감하며 독주를 잘 빚는 자들은 화있을 진저”11-12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독주를 마시며, 밤이 깊도록 포도주에 취하는 자들은 화 있을 진저 12, 그들이 연회에는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피리와 포도주를 갖추었어도 여호와께서 행하시는 일에 관심을 두지 아니하며,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보지 아니하는 도다. 멸망직전의 유대나라가 술에 취한 사회였습니다. 언제가 조선일보에서 우리나라 대학가를 취재 한 적이 있습니다. <술에 취한 한국사회> 밤새 술집에서 나이트클럽에서 춤추다가 길거리에서 방뇨하고, 토하고 시비 걸고 요지경이 다른 곳이 아닙니다. 우리나라 대학가의 현주소입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대한민국이 유대나라가 멸망직정의 상태와 너무나 유사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유대나라를 심판하신 이유가 그 당시의 사회상이 정의가 실종되고, 도덕적으로 부패하고 부자와 제사장 선지자들은 탐욕스럽고 그리고 사회 전체가 범죄가 끊이지 않는 악한 사회가 된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이사야, 예레미야 선지자를 보내서 그들로 하여금 회개하도록 하였습니다. 지금은 웃을 때가 아니라, 울어야 할 때라고 말입니다.
얼마 전, 시흥 시화 호에서 40대 초반의 시신이 발견되었습니다. 그 범인이 잡혔습니다. 범인은 조선족으로서 돈 때문에 말다툼 끝에 자신의 부인을 토막 내서 죽인 것입니다. 죽인 다음에 자신의 부인한테 미안하다고 하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죽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신의 부인은 지금까지 저축해 놓은 돈을 가지고 중국에 집을 마련하고자 송금하고자 했지만, 카지노에서 도박으로 번 돈을 다 없앤 남편은 부인과 말다툼 끝에 목 졸라 죽인 것입니다. 이런 일들이 잊어버릴 만하면 우리가 사는 이 땅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오늘 대한민국은 남의 가정을 파탄내고도, 살인하고도, 도둑질하고도 남의 인격을 짓밟고도 회개할 줄 모르고, 애통해 할 줄 모르는 사회가 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사회를 가리켜서 마11:16-17에서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교할까 비유컨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하시므로 그 시대의 완악함을 풍자하였습니다.
따라서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사회의 악한모습을 보고 어떻게 해야 합니까? 회개하고 애통해 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시대를 막론하고 하나님은 악인과 악한사회를 그냥 두지 않고 반드시 심판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회악이 바로 나로부터 왔음을 절감하고 이 나라와 민족의 죄악을 위해서 울어야 할 것입니다.
예레미야25:34“ 너희 목자들아 외쳐 애곡하라. 너희 양떼의 인도자들아 잿더미에서 뒹굴라 이는 너희가 도살당할 날과 흩음을 당할 기한이 찼음인 즉 너희가 귀한 그릇이 떨어짐 같이 될 것이라”
이사야12:6 “너희는 애곡할 지어다.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으니 전능자에게서 멸망이 임할 것이로다.” 유다가 멸망 직전의 상황과 오늘날 한국사회의 모습을 보면 매우 흡사한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사회적인 악에 대하여 침묵해서는 안 됩니다. 세상에 외쳐야 합니다.
왜냐하면 역사적으로 하나님은 이런 나라와 국가를 하나님이 반드시 심판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구약의 예레미야 선지자는 ‘눈물의 선지자’라고 부르지 않습니까? 그는 그 시대의 죄악을 보고 울었습니다. 회개하지 않고 하나님을 거역하는 자기민족과 국가를 향해서 애통하며 울었습니다. 예레미야13:17 “너희가 이를 듣지 아니하면 나의 심령이 너희 교만으로 말미암아 은밀한 곳에서 울 것이며 여호와의 양 떼가 사로잡힘으로 말미암아 눈물을 흘려 통곡하리라.”
우리는 부패하고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악한 세상을 보고, 이 세상의 악한 모습에서 우리 자신이 선지자 노릇하지 못하고 세상의 악에 대하여 무관심한 것에 대하여 회개하고 애통해 하여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세상의 악에 대하여 침묵하지 않고 이 사회와 민족과 국가를 위해서 울 때 하나님은 우리 민족을 새롭게 하시고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를 거두실 것입니다. 오늘 우리나라가 강대국인 미국과 중국, 그리고 일본과 러시아, 그리고 북한의 살기어린 호전성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가 되지 않도록 이 대한민국의 죄악을 위해서 야곱처럼 굵은 베옷을 입고 애통하며 울어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이다. 먼저는 우리 그리스도인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나라와 민족의 악함과 죄악과 완악함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 울어야 하겠습니다. 이 나라와 국가와 민족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축복받을 땅이 되도록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2015년 4월 12일 청주벧엘성결교회 정영진목사 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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