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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5,1-12.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gkffpffndi 2015. 3. 18. 10:51

마태복음5,1-12.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예수님께서 공생애 사역하시기 전에 40일 동안 금식하신 이후에 사탄의 시험을 이기시고, 천국복음을 가르치시고 전파하시고 백성가운데 많은 병자를 고치시고 모든 병과 약한 것을 고치시니 그의 소문이 수리아에 까지 퍼지고 모든 앓는 자, 각종 병에 걸려 고통 하는 자, 간질 하는 자 중풍병자를 데려오니 그들을 다 고쳤습니다. 그리하여, 갈릴리와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강 건너편에서 수많은 무리가 따르기를 시작하였습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무리들이 따르게 되자, 예수님은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무리들이 모여들자, 예수님은 입을 열어서 천국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은 소위 팔복이라고 하는 내용입니다. 팔복의 말씀은 예수님의 산상수훈으로 불리는 5,6,7장에서 가장 중요한 예수님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5,6,7장을 산상수훈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에서 천국복음을 전파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예수님의 산상수훈의 말씀을 보면, 그 당시 기득권층인 대제사장, 서기관, 바리새인들에게는 거스리는 말씀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가치관이나 세계관으로 볼 때 예수님의 말씀은 그들의 삶을 지적하는 대립적인 말씀을 전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당시 성전을 중심으로 성전 세를 거두어 자신의 부를 축적하여 대다수의 민중들과는 동떨어진 호화로운 삶을 살아가는 대제사장과 서기관, 그리고 바리새인 등, 종교지도자들에 대하여 신랄한 비판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향하여 말씀하실 때,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의와 인과 신을 버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행하여야 한다고 비판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회당의 높은 자리에 앉기를 좋아한다고 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목사님들이 명예만을 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 신문에 나오는 목사님들의 조직을 한 번 보신 적이 있습니까? 무슨 고문이다. 상임고문이다. 대표다. 상임대표다. 여기서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무슨 조직과 명칭이 많은 지 알 수 없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하고 별 차이가 느껴지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과부의 가산을 삼킨다고 예수님은 지적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당시 부를 축적하여 호화롭게 사는 종교지도자들에게 독사의 자식이라고 맹렬하게 비판하셨습니다.

 

이러한 종교지도자들에 비하여 대부분의 민중들은 병들어도 병원한 번 갈 수 없고 헐벗고 가난하여 한 끼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어디 가서 인간으로 대접받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이 그 당시의 사회의 대부분의 군중이었습니다. 오늘 날로 말하면, 거의 노숙자수준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 다닌 것입니다.

 

호화로운 왕궁에 사는 헤롯이나, 로마정권에 기생해서 자신의 기득권과 부를 축적하면서 호가호위 하는 종교지도자들에 비하면 이들의 삶은 비참한 수준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팔복은 바로 이런 가난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전파한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은 팔복의 첫 번 째 말씀으로 심령이 가난한자가 복이 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에서 나오는 팔복의 말씀이 누가복음 6장에도 있습니다. 하지만,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누가복음6장에서는 심령이라는 말씀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서학자들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을 비교함에 어느 것이 더 예수님의 말씀의 원형에 가까운가에 대하여 누가복음이 원형에 가깝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마태복음의 심령이라고 하는 단어는 후대에 편집할 때 첨가되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원초적인 말씀에 가끼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나니에서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선포하십니다. 사실 그 당시 사회통념이나 사회적 가치관으로 볼 때 가난한 자이 있다고 하는 것은 바른 말이 아닙니다. 왕궁의 있는 헤롯이 자색 옷을 입고, 대제사장인 서기관, 바리새인들처럼 바지에 술이 길게 달린 옷을 입고 다니는 사람이 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옷도 입지 못하는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사회통념상으로 외제 차나 고급승용차를 몰고 다니고, 이름 있는 명품만을 몸에 걸치고 주상복합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이 복 받은 행복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지, 월세나 전세에 살면서 가난하게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복 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늘날도 교회에서 조차 물질적이고 현세적인 복만을 설교하고 그것만이 복의 전부라고 설교하는 목사님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런 설교를 강조하는 목사의 설교를 듣다 보면, 가난한 것이 저주라고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아마, 이것이 보통 사람들의 생각일 것입니다. 아니 세상 사람들 모두가 그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러한 세상적인 가치관을 뒤집어 놓으셨습니다. 부자가 복을 받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복의 개념이 세상과는 다르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의 뜻은 종말적인 성격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미래에 하늘나라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가난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프토코스인데 이는 재산이 어느 정도 있는 사람에게 사용하는 단어가 아니다. 이 단어는 소유재산이 전혀 없는 사람을 말할 때 사용된다. 그래서 신약성경에서는 이 프토코스라는 단어는 눅16:20-21의 거지 나사로, 자신의 전 재산을 바친 두렙돈의 과부(12:42-43) 혹은 왕의 잔치에 강제로 끌려온 거리의 부랑아(14:21)을 가리킬 때 사용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사회, 경제적으로 아주 궁핍한 상태에 있는 사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요즘 말로 표현하면, 사회적 약자, 기초생활자, 노숙자 등 절대빈곤 상태에 있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살아갈 수 없고 온전히 외부의 지원에 의해서 살아가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루하루를 살아가기 위해서 누군가를 절대적으로 의지해야 살 수 있습니다.

 

19-20세기에 인도에서 선교사로 활동한 아일랜드 에이미 카마이클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분은 벨파스트 빈민가에서 온갖 세상의 풍상이 어우러져 있는 상황을 보았다. 그것은 10대 소녀들이 온갖 오물과 악취가 나는 빈민가에서 하루에 12시간 씩 일하면서 그 당시 아일랜드 아마, 아일랜드 셔츠, 아일랜드 밧줄 등 세계적인 것을 만들면서도 노동력을 착취당하여 10대 소녀들이 70대 고령처럼 허리가 굽고 얼굴이 헬쓱한 모습이었는데(이들은 숄을 두루고 있기에 숄리라고 부른다) 이에 충격을 받아 이들을 위해 사역을 하기로 한 것이다. 먼저 이들 숄리를 위해서 성경공부하고 기도할 수 있는 장소가 필요했는데 그만한 부지와 건물을 짓는데 500파운드의 돈이 필요했다. 에이미는 그만한 재정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하다가 교회에서 만난 한 부자 할머니에게 도움을 구하러 갔습니다. 그 집의 현관문을 노크하면서 집을 둘러보니 아름다운 정원에 조각상이 세워져 있었고 공들여 세운 현대식 탑도 세워져 있었다. 이렇게 부자이니 자신의 자선모금에 돈을 아끼지 아니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녀는 얼마든지 집을 지어줄 수 있을 만큼 부자였지만, 거절당하고 말았다. 에이미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다른 사람을 돕기 위해 자신의 돈을 기쁘게 기부할 수 있어야 한다. 그는 돈이 한 푼도 없었기에 숄리사역을 위해서 하나님께 전적으로 기도하였습니다. 그녀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케이트 라고 하는 사람으로부터 한통의 편지가 날라 왔습니다. 거기에는 놀라운 소식이 들어 있었습니다. 숄리 모임을 위한 건물 구입비 전액을 케이트가 대겠다는 것이었다.! 에이미는 케이트에게 돈을 요구한 적이 없었다. 단지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하고 기도한 것이다.

 

바로 여기에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는 말이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가난하기 때문에 아무도 의지할 사람이 없고 오직 주님 밖에 없기 때문에 그들이 복되다고 하는 것입니다. , 물질적으로 빈곤한 상태에서 하나님께 무릎 꿇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기에, 오직 하나님의 구원만을 바라보고 소망하며 의지하는 자이기에 복 되도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종말론 적으로 경제적으로 물질적으로 가난한 사람이 있다고 하는 것은 그가 오직 그분의 은혜와 긍휼만을 사모하며 그 분을 가까이 함으로 복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종국에 천국에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하늘나라에서 이 세상에서는 비교할 수 없는 행복을 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재물은 사람을 본질적으로 교만하게 만듭니다. 하지만, ‘프토코스가난은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만듭니다. 부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구원을 자신의 부를 내세워 거부합니다.

 

그러면 주님은 가난한 자만을 사랑하느냐 입니다. 예수님의 주변에는 귀족이나, 예수님께 자신의 무덤을 드렸던 아리마대 요셉, 부자 마가도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부자나 가난한 자나 할 것 없이 심령이 가난한 자를 당신의 백성으로 삼아 복을 누리게 하십니다.

 

그렇다면, “심령이 가난한 자란 무엇이겠습니까? 여기서 가난한 자에 해당하는 원어는 파산되어 돈 한 푼 없는 빈털터리를 뜻합니다. 부자에 비해 상대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이 아니라, ‘거지들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심령이 가난한 자란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영적으로 파산선고를 받은 자임을 인정하는 자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빈털터리죄인임을 인정하는 자가 심령이 가난한 자입니다. 내 안에 선한 것은 없다. 라고 인정하는 자입니다.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인정하는 자입니다. ,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총을 바라보는 자이다.

 

예수님 당시에 대제사장이나 서기관, 그리고 바리새인들은 착각했습니다. 자신들은 대단히 의롭고 하나님 앞에서 율법을 철저히 지키며 살아가기 때문에 자신들은 넉넉히 천국에 들어간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자신의 의로 가득 찬 종교지도자들에게 자신도 천국에 못 들어가고 남도 못 들어가게 가로막는 자라고 비판하였습니다. 그러시면서 너희들 보다 오히려 창기나 세리가 먼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그 당시 종교지도자들이 자신의 의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누가복음18:9-14에 기록되어 있는 세리와 바리새인의 기도입니다.

 

자신을 의롭다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바리새인과 자신이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세리가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바리새인은 성전에 올라가서 자신은 다른 사람들과 같이 토색하거나 불의하거나 간음하지 안했다고 하면서 세리하고 비교합니다. 자신은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기도하고 소득의 십일조를 드린다고 자랑스럽게 말합니다. 그런데 세리는 성전 앞에 나오지도 못하고 멀리서서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면서 하나님이여 나를 불쌍히 여겨 달라고 하며, 자신은 죄인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의 기도에서 예수님은 바리새인이 아니라 세리의 기도가 의롭다고 인정받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낮추는 자가 높아진다고 말씀하십니다.

 

성도여러분! 신앙은 내가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아무것도 내세울 수 없는 영적 파산자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데서 출발합니다. 그런 사람이 진정 회개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으며,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영접할 수 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란 바로 이와 같은 모습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경제적으로 가난한 사람은 오직 하나님만을 찾고 의지하기 때문에 복이 있다. 라고 말한다면, 심령이 가난한 자는 영적으로 파산자인 자신이 죄인임을 철저히 인식하고 오직 하나님의 긍휼만이 자신을 구원한다는 사실임을 안 자가 복이 있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이 있다. 라고 하는 말은 헬라어로 마카리오스라고 하는 말인데 이 뜻은 행복하다. 라는 의미입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이 세계무역규모가 세계13위이고, 국민소득이 3만 불인 대한민국은 OECD 가운데 자살률이 1위이고, 이혼율이 1위입니다. 사회 곳곳에서 안전망이 무너지고 있고,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무차별적인 폭력이나 방화나 살인들이 일어나고 있어서 국민들은 불안합니다. 행복은 물질과 비례하지 않는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오래 전에 영국에 LSE(London School of Economics and Political Science, 런던정치경제대학)라는 대학에서 그 대학의 로버트 우스퍼 교수가 세계에서 54개국을 상대로 국민들이 느끼는 행복 도를 조사해서 국가별로 그 순위를 매겨 발표했습니다. 그 내용은 행복이란 경제와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 연구에 의하면,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 지수가 높은 국민은 방글라데시였습니다. 가난해서 굶어 죽는 사람이 허다한 나라 사람들이 자신들이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미국은 46위입니다. 일본은 44위입니다. 2위는 아제르바이잔이고요. 3위가 나이지리아, 4위가 필리핀입니다. 경제 대국들은 전부 40위 밖으로 밀려났습니다. 우리나라는 몇 위로 나왔는지 아십니까? 그 조사결과로는 23위입니다.

 

무엇을 말해줍니까? 물질과 행복, 경제와 행복지수는 비례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돈이 많다고 행복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행복은 소유에 있지 않습니다. 행복은 내가 무엇이 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 어떤 사람이 되느냐에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복은 외형적인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면에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행복은 소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이며, 얼마나 큰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인가를 깨닫는 데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가난하다고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행복은 소유에 있지 않습니다. 내가 어떤 사람이 되느냐? 무엇이 되느냐가 중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이 죄인임을 인식하고 자신의 무능함과 연약함을 인정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진정한 행복을 누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015322일 청주 벧엘 성결교회 주일설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