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 크리스토 요15:1-17
지난 8월 7일이 입추 겸 말복이어서 그런지 올 여름은 일찍 시작해서 여름이 빨리 지나가는 것 같습니다. 이제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가을이 벌써 온 것 같은 느낌을 가져다줍니다. 지난 주간에는 아직 여름이 가기가 아쉬운 듯 무더운 한 주간이었습니다. 여름이 더워서 싫긴 하지만 이런 뜨거운 태양이 아니면 당도가 높은 맛있는 포도나 사과, 수박등을 맛볼 수 없으니 이 또한 하나님의 섭리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백화점이난 옷 가게에서 여름옷을 70-80프로 세일 한다는 광고를 보면서 벌써 가을이 왔나 싶습니다. 우리나라는 사계절이 뚜렷해서 봄은 꽃들이 만발해서 화사해서 좋고, 여름은 더웁지만 바다나 계곡으로 피서할 수 있어 좋고 가을은 풍성한 과일이 있어서 결실의 계절이어서 좋습니다.
이스라엘에도 무화과 열매랄지 올리브나무 등, 많은 과일들이 있지만, 포도 나무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인지 성경에는 포도나무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시편80편 8절에 보면 “주께서 한 포도나무를 애굽에서 가져다가 열방을 쫓아내시고 이를 심으셨나이다.”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하나의 포도나무로 비유하신 말씀인데 애굽의 종살이 하던 유다 백성들을 하나님의 절대적인 능력으로 지도자인 모세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해방시켜 가나안 땅인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셔서 그 땅에 거주하도록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5장2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마치 포도나무처럼 그렇게 심었다는 것입니다. “땅을 파고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그 안에 술틀을 팠었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포도를 맺혔도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기대가 엄청나게 커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를 원했지만 하나님의 뜻과는 반대로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고 악한 열매를 맺어 실패한 포도나무가 되었다고 한탄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실패한 포도나무가 되었습니까? 우리가 오늘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면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가르쳐서 포도나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아버지는 포도원의 농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는 이유는 열매에 관한 말씀입니다. 농부기 포도농사를 짓는 이유는 딱 한가지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열매입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포도나무는 관상용이 아닙니다. 자작나무나 편벽나무처럼 사용하기 위함도 아닙니다. 포도나무를 심는 딱 한 가지 이유는 포도열매를 구함입니다. 포도나무에서 나는 포도열매가 우리 사람에게 좋다고 하는 것은 다 알려진 사실입니다. 예수님도 첫 번째 기적으로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습니다.
연간 강수량이 아주 적은 유대나라에 있어서 포도주는 음료수로서 수분을 보충하고 섭취하는데 아주 좋은 음료인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으로 돌아와서 예수님께서 자기 자신을 포도나무라 하시고, 하나님아버지를 농부라하셨습니다. 그런데 또 한 가지 언급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포도나무라고 말하시면서 자신에게 붙어있는 가지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여기서 포도나무이신 예수님에게 붙어 있는 가지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입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주의 백성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에게 있어서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첫째는, 열매 맺는 사람입니다. 둘째는 열매 맺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까? 4절에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즉, 예수님께 붙어 있어야 많을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바울의 말을 빌리면 “엔 크리스토” 그리스도안에 있어야 합니다. 무엇이 그리스도안에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까? 그것은 우리의 생각이나 말이나 사상이나 지식이나 행동양식이나 가치관이나 세계관이 그리스도안에 머물러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예수님께 붙어 있으면서도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해 버리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우리는 어떻게 생각할 수 있습니까? 가지가 분명히 포도나무에 붙어 있으면 열매를 맺는 것은 당연한데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포도나무에 붙어 있으면서도 열매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제거하겠다는 것은 구원에서 제외될 수 있다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지난주에 카톨릭 12억의 수장인 교황이 우리나라를 방문해서 대한민국의 수도인 서울의 중심부인 광화문에서 수십만 천주교신자와 일반시민들이 운집하여, 소위 ‘시복미사’를 집전하였습니다. 어떤 분이 교황의 한국방문과 맞물려, 개신교의 위축된 모습을 지적한 기사를 읽어 보았습니다. 그 기사에 의하면 한국의 개신교는 예전에 천주교보다 20%이상 많았던 개신교는 현재 1980년대를 정점으로 점차 쇠락의 길로 가고 있다고 썼습니다.
천주교가 신유박해 시 순교했던 사람들을 소의 ‘복자’의 반열에 올려놓았습니다. ‘복자’란 뜻은 ‘복 받은 자’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성경에 보면, 복음을 위하여 순교한 자들의 반열이 천국에 따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주님을 위하여 순교한 사람은 분명히 상급이 다르다고 합니다. 그런데 천주교에서 순교한 이 사람들이 왜 순교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유교의 제사가 즉 하나님 앞에 우상숭배라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천주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올 당시만 해도 천주교인들은 조상숭배를 우상숭배로 알고 완강히 거부하다가 순교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이후, 소위 현재 프란치스코 교황이 소속된 예수회 신부들이 조선에 들어오면서 제사문제를 하나의 문화로 보고 조선의 제사를 하나의 문화로 인정하게 되어 오늘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앞에서는 제사를 인정하지 않고 저항하다가 순교한 사람은 어떻게 되는 것이며, 오늘의 천주교를 어떻게 해석할 수 있습니까? 제가 알기로는 최초의 제사를 거부한 천주교 교리가 옳은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이 후에는 세상의 문화와 타협한 것입니다.
이렇게 상황에 따라서 성경말씀을 변개하여 사람들에게 관용의 종교로 혹은 호감을 줄 수 있을지 모르나, 분명히 진리에서 벗어난 것이 천주교입니다. 그렇게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는 것은 그것만이 아닙니다. 술이나 담배이 런 것에서 자유롭습니다. 그래서 요즈음 개신교 교인들 가운데서 천주교로 가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예수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구주이시며, 그 분이 이 땅에 온 인류를 위해서 죽으시고 부활 하셨을 뿐 아니라, 지금도 살아계셔서 역사하시는 분으로 믿고, 그리고 다시 이 땅에 만왕의 왕으로 재림하실 것을 기다리며 성령의 역사를 몸소 체험한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절대로 제사를 드리고 잘못된 교리를 지키는 천주교로 개종할 수 없습니다. 천주교의 교리 중에 지난 15일에 대전 월드컵 경기장에서 교황이 미사를 집전했는데 그 미사이름이 성모승천미사입니다. 성모인 마리아가 승천했다는 것입니다. 천주교는 성모를 하나님 어머니라고 칭할 뿐 아니라. 인간 마리아를 예수님과 같은 위치에 올려놓습니다. 그 뿐 아니라, 교황무오설이 있습니다. 교황이 내린 결정은 무오하다는 것입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서 생각해 보면, 2절에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 하는 가지는” 이 말씀을 우리는 어떻게 해석할 수 있습니까? 분명히 포도나무이신 예수님께 붙어 있는데 열매가 없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교회만 왔다 갔다 하는 종교인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감리교의 창시자인 웨슬레는 사람을 3가지로 구분하였습니다. 첫째는 자연인입니다. 이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그가 생각하고 행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지 못합니다. 아담 이후에 타락한 본성을 가지고 있어서 악을 행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둘째는, 율법아래 있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종교인입니다. 종교를 가지고 있으면 평안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도덕이나 선행으로 구원받으려고 합니다. 세 번째는 은혜아래 있는 사람입니다. 자신이 부패하고 타락한 무능력한 사람인 것을 알고 오직 십자가만을 의지하는 사람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은혜아래 있어야 합니다. 날마다 우리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주님의 십자가 앞에 엎드려야 합니다. 주님의 보혈을 의지하고 날마다 우리 자신의 허물과 실수를 인정하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복음성가 가운데 “보혈을 지나 하나님 품으로, 보혈을 지나 아버지 품으로, 보혈을 지나 하나님 품으로 한 걸음씩 나가네. 존귀한 주 보혈이 내 영을 새롭게 하시네, 존귀한 주 보혈이 내 영을 새롭게 하네.”
오늘 날 우리 주변에는 주님의 보혈을 의지 하지 않고 교회를 하나의 사교장이나, 자신의 사업을 위해서 혹은 인맥 관리를 위해서 나오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물론 제일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하고 나올 수 있습니다. 예전에 중. 고등학교 시절에 그 교회에 가면 예쁜 여학생이 있다는 말을 듣고 나간 적이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교회를 연애 당이라고 한 적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계속해서 오랜 세월이 흘렀어도 그렇게 다닌다면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 날 교인들 가운데서 사회적 지위나 명성을 가진 사람들이 문제를 일으켜서 주님의 영광을 가리 우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것은 결국 예수님 말씀처럼 예수님 안에 들어왔어야 하는데 예수 안에 있지 못하고 예수 바깥에서 머물렀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안에 있기만 반드시 좋은 열매를 맺지 나쁜 열매나 악한 열매를 맺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우리가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한 것은 우리가 예수 안에 있지 않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좋은 열매를 맺으려면 반드시 포도나무이신 예수님께 성도인 우리가 가지처럼 붙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 안에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이 말의 뜻은 무엇입니까?
첫째, 우리가 좋은 열매를 맺으려면 교회생활, 즉 신앙생활을 잘 해야 합니다. 교회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교회에 등록을 하고 세례 받고 주일 성수하고 봉사하고 헌신하는 것을 말합니다. 물을 떠난 고기가 살 수 없는 것처럼 교회를 떠나서 신자는 올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에도 교회가 필요 없다고 하는 무 교회 주의자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김교신, 함석헌이라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들은 자신의 스승인 우찌무라 간조의 사상의 영향을 받은 사람입니다. 김교신 선생은 일제하에서 항상 사직서를 품고 다녔던 사람입니다. 이 분은 “성서조선”이라고 하는 잡지를 발행했는데 그는 “성서를 조선에, 조선을 성서위에”위에 라는 위대한 사상과 철학을 가진 분이었다. 하지만, 후에 이 분은 무교회주의 벗어났습니다. 이 분이 후에 말하기를 “그리스도인으로서 지금의 교계의 혼돈의 책임의 일부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교회생활 잘하는 사람은 믿음이 자라납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장합니다. 착한 사람이 됩니다. 사회에 훌륭한 인물이 됩니다. 우리나라가 일제 36동안 핍박을 당할 때 그 당시 지도층에 있던 사람들 많은 사람들이 교회 다니는 신자들입니다. 남강 이승훈, 남궁억, 김교신 김구, 이상재, 이승만, 김활란 박사 등 말입니다.
둘째,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여기서 예수님 안에 거한다고 하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에 거해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시편기자는 시편 편에서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쫒지 아니하고 죄인의 질에 서지 아니하고 오직 주야로 율법을 묵상하는 자로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많은 열매를 맺으려면 영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을 잘 먹어야 합니다. 육신의 건강을 위해서 잘 먹고 잘 자고 잘 쉬어야 합니다. 그 중에서 잘먹어야 건강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영적 생명을 유지하려면 영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의 떡을 잘 먹어야 합니다. 말씀을 잘 먹는 다고 하는 것은 첫째, 잘 들어야 합니다. 성경은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고 했습니다. 잘 들어주는 그 사람에 대한 예의입니다. 둘째, 말씀을 잘 상고해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잘 읽고 묵상했다는 말입니다. 소가 음식물을 씹고 되새김질 하듯이 말씀의 의미를 찾아보고 알아보고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 묵상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베뢰아 사람들은 바울의 말씀을 간절한 마음으로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고 날마다 성경을 상고했다고 했습니다. 셋째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실천하고 행동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먹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들에게는 많은 열매를 가져 올 수 있습니다.
셋째는, 예수님 안에 거한다고 하는 것은 기도하는 생활입니다. 예수님의 생활은 기도였습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를 지기 전에 하나님 아버지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아버지여 이 잔을 내게서 물리치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십자가 위에서도 주님은 가상칠언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기적을 행하실 때도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실 때도 죽었던 나사로를 살리실 때도 항상 기도하셨습니다. 요즈음 다 종교 사회에 살다 보니 타종교에서도 자신의 경배대상을 향해서 비는 것을 기도라고 합니다. 백일기도니 천일기도니 하면서 말입니다. 하지만 기독교인들이 기도하는 하나님께 하는 기도와, 타 종교인들이 하는 기도는 전혀 대상이 다른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천지와 만물을 주장하시는 살아계시는 조물주 하나님께 하는 것이고 저들은 알지 못하는 신, 우상에게 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지, 우리가 거듭난 신자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느냐 하면 우리가 하나님께 지속적으로 기도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영혼의 호흡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살고 있다면 우리의 영혼은 호흡하고 있기 때문에 살아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기도생활을 멈춘 지가 오래 되었거나 아니 멈추었다면 우리의 영적 생명은 죽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교통할 수 없습니다.
이 세 가지, 즉 교회생활을 쉬고 있다거나, 말씀을 읽거나 묵상하지 않는다거나 그리고 기도생활을 하고 있지 않다면 우리 영혼은 붙어 있느나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고, 아니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결국 그 영혼은 하나님 품으로부터 떨어져 져 나가 메말라 죽어 지고 마침내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될 것이라고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주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열매가 무엇일까요? 8절에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 그리고 그 이후에 계속해서 예수님께서 사랑에 관해서 말씀하시는 것을 보면 사랑의 열매를 요구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17절에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함이니라.” 주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사랑의 열매입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본성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위에서 자신의 사랑을 몸소 보여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 주려면 우리가 하나님의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의 성령이 부어지면 하나님의 사랑이 임합니다. 성령이 임하면 우리가 원수라고 사랑하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줄 수 있습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의 사랑이 충만해지면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게 되고 친절하게 되고 용서하게 되고 사랑하게 됩니다. 오늘 우리 사회가 메마른 광야처럼 삭막하고 메마르고 살벌한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없고 남을 이용하고 이웃을 돌아보지 않는데 있습니다. 성령충만에 대해서 한국교회는 지금가지 무슨 요술 방망이 활용하는 것처럼 말해 왔습니다. 한국교회는 성령 충만의 진정한 의미를 알지 못했습니다. 아니 잘못이해 했습니다. 성령이 충만이 여러 가지 은사가 나타나기도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을 간과 했습니다. 그것은 성령 충만은 사랑의 충만입니다. 이것을 요한 웨슬레는 온전한 성화, 혹은 그리스도인의 완전이라고 했습니다. 이렇듯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의 충만을 받고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사랑이 충만해지면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까지도 사랑하게 됩니다. 그러면 많은 세상 사람들에게 비난받는 것이 아니라, 칭찬받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 사랑을 받는 사람은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는 다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 개신교회가 세상으로부터 비난받고 비방의 대상이 된 것은 어찌 보면 우리 자신에게 있는지도 모릅니다. 오늘 우리 안에 성령이 충만합니까?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 안에 가득합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단 한가지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에게 이러한 사랑의 열매가 맺어지지 아니하면 어떻게 하신다고 했습니까? 6절에 그것을 모아다가 불 살러 버린다는 것입니다. 현대 천문학의 기초를 세운 과학자인 요한 케플러(1571-1630)는 행성이 태양의 주위를 단순히 원형으로 도는 것이 아니라 태양을 초점으로 타원의 궤도를 그린다는 이론을 폈습니다. 신실한 크리스천이었던 그는 말하기를 “천문학자는 스스로의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자연이라는 책에서 무언가 찾도록 허락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종일뿐입니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교회생활을 잘하십시다. 신앙생활, 말씀과 기도생활에 힘쓰십시오. 주님으로부터 떨어져 버리면 말라죽습니다. 지옥에 들어갑니다. 항상 성령 충만하여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충만하여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기를 바랍니다. 2014년 8월 17일 청주벧엘성결교회 정영진목사 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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