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생 (Regeneration) 요3,1-8,행4,12
기독교 역사 2000년 동안 치열하게 논쟁했던 교리 가운데 하나는 구원론에 관한 것이다. 사도행전 16장에 보면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에서 귀신들린 여인을 고쳐준 일로 인해 억울하게 감옥에 갇혔지만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개입으로 옥터가 흔들리면서 옥문이 열리자 그곳 간수가 바울일행이 도망간 줄 알고 자결하려고 하자 크게 소리 지르면서 말하기를 “네 몸을 상하게 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다 하니 간수가 등불을 들고 무서워 떨면서 바울일행을 살피니 진짜 도망가지 않고 자신의 앞에 서 있는 바울 일행을 보고 감동을 받습니다.
보통 죄수들 같으면 그런 천재지변에 상황에서 다 도망하고 감옥의 책임을 맡은 자신은 목숨이 달아날 뻔 했는데 바울 일행이 그 자리에 있는 것을 보고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바울 앞에 선 간수가 말하기를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니까?”라고 질문을 던지자 바울은 즉각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고 주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사람들에게 전하므로 그들이 다 세례를 받고 구원을 받아 온 집안이 하나님을 믿어 구원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렇게 해서 세워진 교회가 빌립보 교회 였습니다.
빌립보 간수가 바울 일행에게 던지 한 마디 “네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 라는 이 구원의 메시지는 초대 교회에 있어서 기독교 복음의 핵심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앉은뱅이를 일으키고 소경을 눈 뜨게 하고 병든 자를 치유하고 죽었던 나사로를 살리시고 물로 포도주를 만드시고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 천명을 먹이고도 12 광주리가 남는 수많은 기적을 베푸신 것은 결국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 인 것입니다. 인간은 육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육적인 욕구를 멀리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도 육신을 가지고 있을 때 배고픔과 추위와 더위, 목마름에서 자유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도 이런 인간의 배고픔과 목마름, 그리고 질병과 고통에 대해서 무관심하지 않으시고 민중들과 함께 하면서 그들과 동고 동락하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보다 궁극적인 구원을 위해서 하늘 높은 보좌를 버리시고 낮고 천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 분은 이 땅에 오셔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사명을 가지고 있었음을 성경곳곳에서 보여 주셨습니다. 본문 앞장에서도 예수님은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사건을 통해서 자신을 계시하셨습니다. 인간이 나무에다가 줄을 만들어 놓고 그 위에서 서커스나 줄타기를 하는 것을 볼 수 있지만 자연법칙을 깨고 물위를 건넌다고 하는 것은 초자연적인 사건인 것입니다. 이러한 초자연적인 사건들은 일반 사람들과는 분명히 예수님이 다르다는 것을 사람들은 인식하였을 것입니다.
바로 그런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 오늘 본문에 나와 있는 니고데모입니다. 니고데모에 대하여 성경은 이 사람이 바리새인이이라고 말합니다. 그 당시 바리새인이란 상당히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입니다. 산헤드린 공회원으로서 종교지도자입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사도바울이 자신을 가리켜 말하기를 바리새인중의 바리새인이라고 말할 정도로 그 당시 바리새인은 상당한 고위직 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 바리새인들은 성경에 박식하고 상당히 능통한 사람입니다. 율법을 공부하고 깊이 연구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상당한 학식을 가진 니고데모가 공식적인 율법학교를 다니지도 아니한 나사렛 출신 목수 예수에게 밤중에 찾아왔다고 하는 것은 이 니고데모가 예수가 범상치 않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밤중에 찾아왔다고 하는 것은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자신은 정상적인 율법학교를 나오고 사람들에게 존경의 대상이 되고 남을 가르치는 사람인데 자신이 나사렛 예수를 찾아 갔다고 하는 소문이 날 경우 자신에게 불이익을 생각했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는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 온 것입니다. 그가 예수님께 찾아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보니 당신은 보통 사람이 아니고 참으로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인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행하는 이 표적 즉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이 사건은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인데 당신이 이런 이적을 행하는 것을 보니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임에 틀림없습니다. 니고데모의 관심은 예수님이 누구신가 하는데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관심은 니고데모의 구원에 있었습니다. 3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오늘 우리는 니고데모처럼 교회에 나올 때 자신의 구원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니고데모가 예수님의 기적만을 쫒듯이 교회에 와서 궁극적인 구원에 대하여는 소홀이 하고 예수를 믿을 때 우리에게 주어지는 세속적인 인기나 인간관계나 사업의 성공 등 가시적이고 물질적인 것에 초점이 맞추어 질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즉 예수를 믿고 교회를 다님으로서 내게 주어지는 부산물. 혹은 전리품에 관심을 가질 경우가 많이 있다 이 말입니다. 그저 예수믿음으로서 자녀들이 잘되고 성공하고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고 사는 것이 전부인 것처럼 살아가는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 믿는 것이 과연 그게 전부이겠습니까? 이런 것들은 값싼 은혜입니다. 우리는 값싼 은혜를 이제 그 만 구하고 보다 귀한 은혜, 궁극적인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구해야 하겠습니다.
바리새인이요 산혜드린 공회원인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 온 것은 자신이 믿었던 종교, 즉 유대교하고는 뭔가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 예수에게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자신은 수 십년 동안 율법을 연구하고 사람들을 가르쳐 욌지만 뭔가 해결되지 않고 충족되지 않는 것이 있었습니다. 오랜 종교생활을 했지만 마음에 기쁨이 없습니다. 만족이 없습니다. 은혜가 없습니다. 아무리 율법을 지키고 종교생활을 해도 마음 한 구석에 채워 지지 않는 그 무엇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니고데모는 밤중에 주님을 찾아 온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형식적인 종교생활이나 신앙생활을 가지고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고 구원의 감격이나 기쁨을 누릴 수 없습니다. 진정으로 구원의 기쁨을 누리려면 예수님을 만나고 중생의 체험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지금 니고데모에게 하시는 말씀은 “중생”의 체험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중생이 무엇입니가? 거듭나는 것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신생”이라고 합니다. 새로 태어난 다는 것입니다. 다시 태어난다는 말입니다. 근본적으로 위로부터 난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예수 안에서 태어나는 것이요, 영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6절에 “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중생” 거듭나야 합니다.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거듭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어리석은 질문을 하는 니고데모에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들어갈 수 없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물이란 ‘하나님의 말씀’ 혹은 ‘세례’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성령’ 인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께서 말씀과 함께 역사할 때 그 사람은 순간적으로 ”중생“의 체험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중생의 체험은 어떻게 오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죄를 하나님 앞에 회개할 때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베드로 사도도 사도행전3장에서 성전 미문에 걸터앉아 구걸하던 앉은뱅이를 고치고 사람들에게 솔로몬 행각에 모여 있을 때 유대인들에게 너희들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살인자라고 강하게 말하면서 19-20에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히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또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예정하신 그리스도 곧 예수를 보내시리니”
행2,38절에서도 베드로는 유대인들을 향하여 말하기를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죄를 자백하고 회개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임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죄인인 것을 깨닫게 되고 자신의 죄를 하나하나 회개하게 됩니다. 이러한 죄의 고백, 즉 회개를 통해서 자신의 죄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 사해졌음을 깨닫게 되는데 이것을 ‘칭의’라고 합니다. 죄인이지만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인정해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칭의와 함께 오는 것이 중생인 것입니다. 그래서 의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요한 웨슬레는 우리가 구원받는 단계를 크게 세 가지로 보았습니다. 첫째는 회개, 둘째는 의인인데 여기에 칭의와 중생이 같이 있는 것입니다. 셋째로 성화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중생” 즉 거듭나기 위해서는 내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요1,12-13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행4,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으로 영접해야 합니다. 로마서10,9-10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우리가 니고데모처럼 종교적인 생활이나 형식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를 영접해야 합니다. 그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나의 구주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우리가 부모로부터 육신적으로 일차 태어나지만 영적으로 다시 태어나야만 하나님의 가족이 될 수 있고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중생의 체험을 한 사람에게 세 가지 특징이 나타납니다. 첫째는 마음의 변화가 있습니다. 마음이 변화가 됩니다. 왜냐하면 중생할 때 하나님의 성품이 부여되기 때문입니다. 선한 것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기쁘게 합니다. 딛3:5 에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롬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즉, 마음이 새로워집니다.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 안에 예수님이 계시고 성령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아담이 타락한 이후에 본성이 부패해졌습니다. 종교개혁자 칼빈의 말을 빌리면 전적으로 타락하여 부패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의지나 노력만으로 선해질 수 없습니다. 타락한 본성이 회복되려면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가 임해야 하는 것입니다. 요한웨슬레는 이것을 선행은총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면 부패한 본성이 회복될 수 있습니다. 마음이 새로워진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중생한 사람을 악한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부패한 인간의 마음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막7, 20-23 또 이르시되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21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22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 23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마12, 34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하지만 중생의 은혜가 임하면 부패하고 타락한 마음이 변화를 가져 옵니다.
둘째는, 중생한 사람은 생활의 변화가 나타납니다. 마음이 변화면 자연스럽게 생활에 변화가 나타납니다. 중생하기 이전에는 삶의 중심이 자신이었습니다. 하지만 중생하고 난 이후에는 예수님 중심으로 바꾸어집니다. 성경중심입니다. 그리고 교회중심으로 바꾸어집니다. 중생이전에는 술집이나 드나들고 좋지 않은 곳이나 가고 싸움이나 하던 사람들이 달라집니다.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릅니다. 늘 원망하고 불평만 늘어놓는 사람이 감사의 사람이 됩니다. 남을 미워하고 시기하던 사람이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게 됩니다.
셋째로, 죄를 멀리하고 하나님을 가까이 합니다. 요한1서3,5-8절에 “그가 우리 죄를 없애려고 나타나신 것을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그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의를 행하는 자는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고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자신을 위해서 살던 사람들이 삶의 목표와 가치가 하나님을 향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갑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최고의 가치로 두고 살아가게 됩니다. 주님을 위해서 기꺼이 희생하고 봉사합니다. 새로운 욕구가 생깁니다. 예전에는 자신의 욕망과 욕심을 위해서 살아갔지만 이제는 그리스도를 위한 삶을 살아갑니다. 말씀을 사모합니다. 성경을 읽고 가까이 합니다. 기도하고 싶습니다. 교회를 가까이 합니다. 주님을 가까이 하고 주의 백성들을 가까이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구원의 확신을 갖게 됩니다. 천국과 지옥이 믿어집니다. 예배가 기다려 지고 즐겁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꿀 송이처럼 달게 느껴집니다. 영적인 기쁨과 즐거움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이 가득합니다. 세상에 있는 것보다 주의 전에 있는 것이 즐겁습니다. 이런 사람, 즉 중생한 사람은 시편 73,27-28절 말씀처럼 이런 고백을 합니다.
“무릇 주를 멀리하는 자는 망하리니 음녀같이 주를 떠난 자를 주께서 다 멸하셨나이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복이라.”
구세군 창설자인 윌리암 부스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현재의 기독교는 6가지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고 했는데 1. 성령없는 종교. 2. 그리스도 없는 그리스도교.3. 회개 없는 용서 4. 거듭남이 없는 구원 5. 하나님이 없는 정치 6. 지옥 없는 천국을 말하면서 마지막 때의 기독교를 지적했습니다.
여기에서 네 번 째인 “거듭남이 없는 구원” 에 대하여 생각해야 합니다. 오늘 날 구원이 값싼 은혜가 결코 아닌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을 받지만 그 믿음은 중생을 은혜를 입어야 합니다. 그리고 중생할 때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성품에 참여 하게 됩니다. 따라서 중생하는 순간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이 변화는 결국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게 하는 즉, 예수 그리스도의 지혜와 거룩한 성품을 닮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생각하는 것을 생각하게 하고 하나님이 느끼시는 것을 함께 느끼고 하나님이 뜻하시는 것을 바라는 성품을 닮는 성화의 단계에 오르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 교회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값싼 은혜로 하나님의 거룩성과 의를 추구하지 않고 예수의 이름이 마치 도깨비 방망이나 되는 것처럼 자신의 탐욕과 목적을 위해서 사용하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에서 부정과 부패와 그리고 각종 비리와 범죄에 교인이 연루되어 있고 여러 가지 죄악에 물들어 있는 것은 무니만 그리스도인 사람들, 즉 중생하지 못한 그리스도인들이 한국 교회 안에 많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의 관심은 예수의 이름으로 이 땅에서 부와 명예와 권세와 물질을 얻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즉, 육신의 편안함이나 안전이나 사회적 명성을 추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엄청난 구원의 은총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자신에게 한번 진지하게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진정 중생한 신자인가. 나는 거듭난 성도인가? 그렇다면 나의 삶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가? 나는 예수님의 거룩한 성품을 추구하고 있는가, 내안에 의의 욕구가 일어나고 있는가. 나는 죄를 멀리하고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삶을 사는가. 2014년 7월20일 청주벧엘성결교회 정영진목사 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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