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후 심판의 기준 /마25:31-46
4세기에 성인으로 불렸던 성 마틴이 있습니다. 성 마틴은 젊은 시절에는 군인이었습니다. 아미앵에서 지내던 337년 어느 추운 겨울날, 그는 거의 벌거벗은 채 추위에 떨면서 성문에서 구걸을 하고 있는 한 거지를 보았습니다. 도움을 주고 싶은데 그가 가진 것이라고는 입고 있던 옷과 칼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칼을 뽑아 자기 망토를 두 쪽으로 잘라 한 쪽을 그 거지에게 주었습니다. 그날 밤 마틴은 잠을 자다 꿈속에서 예수님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자기가 거지에게 주었던 그 반쪽 망토를 걸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마틴은 예수님이 천사들과 대화하며 “마틴이 나에게 준 것일세.”라고 하시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 때 마틴은 큰 감동을 받고 사제의 길을 걷게 되었고, 이후에 성자의 반열에까지 오르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독일에서는 11월 11일에 성 마틴을 기념하는 등불 행진을 한다고 합니다.
초대교회 교부였던 터툴리안이나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는 “너희가 도움이 필요한 형제들을 볼 때 그것은 주님을 보는 것이다.”라고까지 말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흔히 “최후 심판의 비유” 혹은 “양과 염소의 비유” 또는 “세상 종말의 비유” 라고 불리워지고 있습니다. 저는 이 시간 “ 최후 심판의 기준” 이라는 제목으로 함께 본문을 중심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본문의 말씀을 잘 살펴보면 이 말씀은 마지막 날에 주님께서 심판하신 다고 하는 것을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31절에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여기서 인자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살전4.16에 보면,“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살전5,2에 “주의 날이 밤에 도둑 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알기이라. 그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임신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갑자기 그들에게 이르리니 결코 피하지 못하리라” 또한마16,27에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 마19,28절에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 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심판 하리라” 위의 말씀을 통해서 보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 세상을 심판하시는데 그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심판하시고 심판자로 나타나십니다.
그런데 그 심판의 대상이 누구입니까? 그 심판의 대상은 모든 민족입니다. 그레이(S.W.Gray)는 1)모든 인간 2)모든 그리스도인 3)모든 비그리스도인과 비유대인) 4)모든 비그리스도인 5)모든 비유대인을 말한다. 따라서 마지막 심판 때에는 이스라엘 온 민족 뿐 만이 아니라, 예수를 믿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믿지 않는 사람들까지 포함된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을 두 종류로 구분합니다. 첫째, 양입니다. 성경에서 양은 하나님의 백성을 일컬을 때 사용합니다. 주님은 목자이시고 우리는 주님의 양입니다. 그런데 양의 특성이 있습니다. 양은 절대로 목자를 따라갑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시기를 요한복음10,22-27 절에 보면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지 아니하는 유대인들을 향하여 “너희가 내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도다. 내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예수님이 참 목자이시기 때문에 양들은 자신의 생명을 보호해주는 목자를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양은 목자의 음성을 듣고 잘 따릅니다. 순종적입니다. 양은 자기를 보호해 주는 목자를 절대로 받지 않습니다. 마지가 심판의 때에 양은 목자의 오른 편에 있습니다. 양은 의인입니다. 그러기에 오른 쪽은 주님의 보호와 권능을 상징합니다. 오른쪽은 하나님의 특별한 능력이 임하는 곳이다. 목자가 양을 오른 쪽에 둔 것은 구원하기 위함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마지막 심판 때애 의인의 반열, 구원의 반열에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는 염소입니다. 이 염소는 양과 아주 비슷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염소는 순종적이지 않습니다. 양은 일반적으로 흰색으로 나타나지만 염소는 검정색입니다. 염소는 고집이 세고 반항적입니다. 때로는 자신의 뿔로 서로 받습니다. 때로는 주인도 공격합니다. 주님께서 염소를 왼편에 둔 것은 심판하기 위함입니다. 염소는 악인을 상징합니다.
자, 이렇게 양과 염소를 구분하고 임금이 오른편에 자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내가 주릴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그런데 의인들이 대답합니다. 아니 언제 우리가 그런 적을 했습니까? 우리가 언제 주님이 배고프실 데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었고 헐벗을 때에 옷을 입혔으며,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우리가 주님을 가 뵈었습니까? 하니
임금이신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40절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개 한 것이니라 하시고”
여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의인이 되는 기준, 즉 구체적인 사랑의 행동 여섯 가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 굶주리는 자를 먹이는 일, 둘째, 목마른 자를 마시게 하는 일, 셋째, 나그네를 영접하는 일, 넷째, 헐벗은 자를 입히는 일, 다섯 째, 병든 자를 돌보는 일, 여섯 째, 옥에 갇힌 자를 찾아보는 일이다.
이 여섯 가지는 그 당시 선행의 목록 표였다고 합니다. 의인들은 이 여섯까지 사랑의 행위를 그 시대의 작은 자들에게 행한 것이 곧 “인자” 곧 예수에게 행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즉 최후 심판의 기준은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어떻게 대했느냐가 심판의 기준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지극히 작은 자”는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첫째로, 예레미아스(Jeremiss.E.Schweizer)에 의하면 가난하고 어려운 모든 사람을 가리킨다. 소위 오클로스, 가난하고 배고프고 힘없는 민중들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사회적 약자입니다. 우리 주변에 이런 사회적 약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물론 국가가 사회 저소득층이나 빈곤층, 혹은 소년소녀 가장이나 자녀가 돌보지 않은 노인들을 기초생활 보장제를 통해서 혜택을 주어 자립하도록 도와주어야 하지만 국가의 힘만으로 이 가난은 다 해결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성경은 우리 믿은 한 사람이 주변의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 대하여 관심을 가질 것을 말씀하고 있으며 예수님도 세리와 죄인, 그리고 가난한 민중들에게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시기도 하셨습니다. 단순히 우리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을 도와주는 것은 단순히 경제적인 단순한 구제의 차원이 아닌 우리 자신이 구원의 길로 들어선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사람 가운데 하나가 다윗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칭찬하시면서 당신의 뜻을 다 이루시겠다고 했습니다. 다윗은 아무도 하나님의 법궤를 생각하지 아니 한 때 그는 자신은 백향목 궁에 거하면서 하나님의 궤는 천막에 있다고 하면서 가슴아파하던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은 자신보다 늘 하나님 먼저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다윗이 왕이 되기 전에 소위 도망자 생활하던 그 시절에 다윗과 함께 하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무슨 지식인이나 사회적 신분이 높은 사람들이 아닌 다윗과 함께 했던 사람들은 그야말로 ‘지극히 작은 자들’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지극히 작은 자들’과 함께 했던 다윗은 도피생활을 하는 중에도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돕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삼상22,2에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는데 그와 함께 한 자가 사백 명 가량이었더라.” 하나님께서 다윗을 도망자에서 일국의 왕의 자리에 올리시는데 있어서 이런 다윗의 “작은 자”를 귀하게 여기는 마음도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였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다윗은 광야에서의 10년을 바로 이런 이들과 함께 보냈습니다. 그들은 함께 먹을 것을 구하고, 함께 먹고, 함께 기도하고, 함께 싸웠습니다.
둘째는 예수는 “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이 일을 한 것이 사실 상 예수를 위해 그 일을 한 것이라는 말씀을 듣게 됩니다. 예수는 자신을 그의 제자들과 동일시 하였습니다. 예수가 내 형제라고 언급한 것은 일반적인 인간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 공동체의 형제나 자매에 관해 언급한 것이다. 복음서의 다른 곳에서 언급된 “내 형제들”이라고 부른 자들은 제자들을 말하는 것이다. 또한 “작은 자들 중 하나” “작은 자”도 역시 제자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따라서 이 말은 크리스챤이나 예수의 메시지를 전하는 사자, 즉 크리스챤 선교사나 혹은 주의 종들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마지막 때의 최후의 심판의 기준은 무엇인가? 그것은 이 두 가지 상황의 전제된 사람들에게 어떻게 대했느냐가 영생과 영벌의 기준이 될 것이다.
이 비유는 마지막 심판 때의 기준은 영광의 보좌에 앉으신 심판자가 축복받을 자와 저주 받을 자를 구별할 때 그 기준은 적어도 마태복음 안에서 “믿음”이 아니라 행함 곧 “ 사랑의 행위”라는 것이다. 곧 궁한 자에게 사랑의 행위를 베풀어 줌으로써 예수 자신에게 사랑을 베푼 자가 “의인”이고 영생에 들어갈 수 있다. 마태는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보다 사랑으로 말미암은 의를 강조하고 있다. 물론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받는다. 하지만 그 구원은 “already not yet”이다. 그 구원이 아직 완성된 것이 아니다. 구원하는 믿음은 성경 전체 맥락에서 보면 결코 단독으로 있지 않다. 언제나 행함이 따라야 하는 것이다. 구원하는 믿음은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며, 행위들 배후에는 참 믿음이 있다는 것이다. 적어도 두 가지 면에서 그러하다. 첫째러 “형제들에게 베푼 사랑의 행위와 묘사된 이런 종류의 사랑은 형제들을 크리스챤, 크리스챤 선교사 내지는 주의 종과 그들이 전하는 메시지에 호응이 있다는 것이다. 둘째는, 예수의 가르침에는 중립지대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즉각 반응이 일어난다. 하나는 메시지를 수용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든지, 아니면 거부하므로 영원한 불 속에 들어가게 된다. 사람은 그리스도의 편이거나 아니면 그의 반대자 중 하나 인 것이다. 예수님도 나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나와 함께 하는 자라고 말씀하셨다.
마지막 때의 심판의 기준은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얼마나 충실히 지켰는가 성경을 공부하고 암송을 하고 몇 독을 하였느냐가 중요하기도 하지만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주님이 말씀하시는 “작은 자”에게 사랑을 베풀었느냐, 자비를 베풀었느냐 이다. 바울도 “이신득의”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을 강조하였지만, 바울도 갈5,6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 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롬2,13에서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요한 칼빈은 그의 책 『기독교 강요』 에서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들의 행위에 따라 갚으신다. 왜냐하면 각 사람은 그의 행위에 의하여 신자인지 불신자인지 증명할 것이기 때문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마7,21에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사랑의행위에 의해서 영생과 영벌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영생의 축복을 받은 사람은 자신의 행위에 대해서 잊어 버렸습니다. 자신들은 주님이 주린 신 것을 보고 음식을대접 한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영벌의 심판을 받는 사람들은 언제 우리가 당신을 공양하지 않았느냐고 반문합니다. 그들은 “지극히 작은 자”에게 행한 것이 주님께 대한 것임을 알지 못했습니다.
마지막 심판 때의 기준은 심판의 기준은 우리가 범한 악행 죄 혹은 범법 죄가 아니라,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게으름이나 무관심속에서 그냥 지나쳐 버리고 행하지 않은 죄, 즉 태만 죄, 혹은 무관심입니다. 왼편에 있는 사람들에게 임금은 지옥에 가야만 하는 이유를 자세히 설명한다. 그들은 오른편에 있던 사람들이 했던 그 일을 하지 않은 것이다. 즉 “돌아보지 아니하였느니라” 이들의 잘못은 선행을 해야 하는 자리에서 바로 행하지 않은 죄를 범한 것이다.
이 비유에서 “저주받을 자”라고 하여 “영벌에 처하게 될 자”들의 목록에는 그들이 행한 악행은 하나도 언급된 것이 없습니다. 단지 그들이 행하지 않은 일들만 나열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결정적인 죄는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것이었다.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지 않은 것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복 받을 자들”로 인정되어 “영생”에 들어가게 된 자들은 모두 악행이나 범법 죄를 저지르지 않아 서라기보다는 오히려 불쌍한 자들에게 사랑의 행위를 한 것 때문에 “의인”이라고 불리 우고 있는 것이다. 눅16,19-31에 부자와 나사로 비유에서도 부자는 나사로에게 해로운 일을 하나도 하지 않았다. 부자의 죄는 적극적으로 나사로에게 선을 행하지 않은 죄이다. 우리는 우리의 이웃을 우리 자신과 같이 사랑하지 않으면 안된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이웃을 돕는 삶인가 하는 것이다. 이번 세월 호 침몰 사건은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주고 있다. 선장과 승무원들이 선을 행했다면 이런 참사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많은 생명을 구했을 것입니다.
톨스토이가 어느 날 한가하게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그때 남루한 옷을 입은 사람 하나가 적선을 원하며 다가왔습니다. 자기 호주머니를 뒤져 도와주려 하였는데 공교롭게도 돈이 한 푼도 없었습니다. 그는 미안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형제여, 정말 미안합니다. 내가 도와주고 싶은데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하며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습니다. 그러자 거지가 만족한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아닙니다. 당신이 나에게 돈을 주지 않았지만 나를 지금 형제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습니다. 이것으로 충분합니다. 오늘 저는 큰 것을 얻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이 사건은 톨스토이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물질을 주고 물질을 받아서 사랑이 아닙니다. 참 사랑이라는 것은 마음에 있고 또 마음을 주는 받을 때 큰 감격과 기쁨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이 말씀을 통해서 사랑의 행동만을 강조 한 것이 아니라, 그 행동이 “은밀하게” 행해져야 할 것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 속에서 의인은 자신들이 언제 주님에게 목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보았냐고 말합니다. 의인들은 은밀하게 행하고 잊어버렸기 때문에 기억하지를 못했습니다. 사랑의 행위가 은밀한 가운데서 아무도 모르게 행해져야 복 받을 것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은밀한 중에 계신 아버지께서 은밀한 중에 갚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의 행동도 중요하지만 주님은 은밀한 중에 하나님께서 갚으실 것을 믿고 행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의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처럼 오른 손이 한 것을 왼손이 모르도록 하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요즈음 교회가 어떻습니까? 예수님의 말씀대로 은밀하게 행하기보다는 작은 일 하고 신문에, 방송에 크게 보도 하지 않습니까? 그것도 예수님의 이름을 나타내기 보다는 자신의 이름을 앞세우고 홍보하는 것을 봅니다. 이번에 세월 호 참사에서도 너무 많은 봉사자들이 와서 오히려 혼란스럽다고 하는 기사를 읽어 보았습니다. 오늘 날 교회가 세상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봉사하려면 은밀하게 해야 합니다. 그러다가 어쩌다가 선행이 알려지면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것입니다. 이번에도 세월이 유가족들이 정부나 종교지도자들이나 혹은 정치지도자들에게 반감을 왜 갖는 것입니까? 참담한 현장에 와서 라면이나 끓여먹고 사진이나 찍어서 자신들의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자신을 홍보하려고하기 때문에 정치인들이나 종교에서 하는 봉사나 환영받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의 고통을 아파하는 진정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의행동도 소중하지만, 더욱 귀한 것은 그 행동이 은밀한 중에 계시는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은밀한 중에 행할 때 하나님이 보상하시고 영광을 받으시고 영생을 허락하십니다.
45-46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41절에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 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결론적으로 이 말씀에서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상속할 자들은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크리스챤이나 메신저를 영접하고 그들이 전하는 메시지에 호응하는 자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영접하는 자이다. 그리고 순한 양처럼 목자의 음성을 듣고 그 부르심에 응답하며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자이다. 그들은 입으로 고백만이 아닌 그리스도의 사랑을 행동으로 보여 주는 자이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서 마지막 때에 심판이 있을 것이고 그 때에 중요시 되는 것은 사랑의 계명, 즉 “내 이웃을 내 몸과 사랑하라” 사랑의 계명을 얼마나 구체적으로 삶속에서 실천했는가이다. 우리 모두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여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014년 5월 18일 청주벧엘성결교회 정영진 목사 주일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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