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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요21,1-22

gkffpffndi 2014. 4. 25. 19:28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21,1-22

 

유월절 다음 날 막달라 마리아는 새벽에 동산에 있는 무덤에 달려갔습니다. 마리아는 좀 더 가까이서 예수님을 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무덤에 돌이 치워져 있었습니다. 누가 그 큰 돌을 치웠을 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마리아는 허리를 굽혀서 무덤 안을 들여다보았습니다. 거기에는 예수님의 시신을 감쌌던 베옷이 개켜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리아는 빛나는 옷을 입은 두 사람을 발견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누워계셔야 할 그곳에 앉아있었습니다. 천사일까? 마리아여 왜 울고 있느냐? 그들이 물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가져 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나서 몸을 돌렸습니다. 그곳에는 한 남자가 서 있었습니다. 여인이여 왜 울고 있는가? 마리아는 동산지기 인줄 알았습니다. 당신이 무덤에 있는 시신을 어디로 옮겼습니까? 이 때 부활한 예수님이 마리아야하시니 그녀의 눈이 밝아져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예수의 무덤이 비워다는 소식이 유대 당국자들에게 전해지자 그들은 심각해 졌습니다. 이 사실을 경비병 중 몇 사람에게 듣게 된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함께 모여서 의논하기를 이렇게 했습니다. 군인들에게 돈을 주어 매수하고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라고 했습니다. 예수의 제자들이 밤에 와서 우리 군인들이 잘 때 그의 시체를 도적질 해 갔다고 하라 했습니다. 돈에 매수된 군인들은 사람들에게 그렇게 말함으로서 그런 소문이 삽시간에 유대인 가운데 퍼졌습니다.

 

또한 예수의 부활의 사건은 낙심과 절망 속에서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에게도 나타났습니다. 흙먼지를 날리면서 두 사람 중 글로바라고 하는 제자는 슬픈 얼굴을 띤 채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나는 예수님이 그렇게 쉽게 로마에 의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리라고 생각을 못해 봤어? 예수님은 위대한 스승이요, 예언자요 솔로몬이나 다윗 왕처럼 유대 나라를 로마의 지배에서 해방 시킬 분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힘없이 무너지시다니... 글로바는 자신에게 물었습니다. 우리가 속은 걸까? 예수가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었을까? 그들은 길가 바위에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예수님의 놀라우신 이적들. 그리고 예루살렘의 입성 등.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한 낯선 남자가 끼어들었습니다. 함께 같이 동해하실까요? 그럽시다. 그런데 당신들 얼굴은 무척 슬퍼보이는데요? 무슨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제자들이 물었습니다. 아니 당신도 예루살렘에서 오는 것 같은데 거기서 소식을 못 들었던 말이요? 무슨 소식인데요? 나사렛 예수에 관한 말이요? 빌라도가 나사렛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사건 말이요? 당신들은 선지서와 예언서를 읽어 보지 않았습니까? 여러분 모두를 구원하러 온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고 죽으리라고 하는 것이 쓰여져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후에는 하나님의 영광을 받으실 거라 하지 않았습니까? 두 제자는 이 말을 듣고 난 이후 마치 선생처럼 말을 했고 쉽게 이해가 되었습니다. 이제 엠마오에 도착했습니다. 예수가 가려고 하자 글로바는 이제 날이 어두워지기도 하니 우리 집에 쉬었다 가시지요? 그러지요. 그들은 시장기가 돌자 글로바의 아내가 빵과 포도주 우유를 내놓았습니다. 그러자 그 낯선 남자가 둥글고 큰 빵을 들고 자신이 집주인이나 되는 듯이 기도하고 빵을 사람들에게 떼어서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그 사람을 다 쳐다보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사람들이 눈이 환하게 열리게 되었습니다. 떡을 떼어준 사람이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 분이 살아계셨습니다. 그 분이 그들 곁에 아주 가까이에 계셨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 분을 알아보자마자 예수님은 사라지셨습니다. 그 자리는 비워 있었습니다.

 

식탁에 앉아 있던 사람들은 서로를 쳐다보았습니다. 왜 우리는 그 분을 알아보지 못했을까? 우리는 길가에 이야기를 했을 때 알아보았어야 하는 것인데 하면서 그들은 자리를 떠서 사람들에게 예수가 부활하였다고 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빵을 떼었을 때에도 우리와 함께 계셨고 우리가 이야기를 나누었을 때도 함께 계셨던 거야? 우리가 알아보지를 못했을 뿐이지. 이 예수님의 부활의 소식은 제자들에 의해서 전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 예수님은 우리 곁에 계셔! 제자들은 예수의 부활의 소식을 널리 널리 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의 말씀은 예수님이 세 번째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사건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난 이후 제자들은 로마권력 앞에 허무하게 무너지는 예수님을 보고 뿔뿔히 다 흩어졌습니다. 이제 그들은 언제 예수님의 제자였나 싶을 정도로 자신의 사명을 다 잊어버리고 예수님과의 3년 공생애 동안에 모든 가르침과 사명을 잊은 채 과거로 돌아와서 자신의 직업에 충실하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자신의 사명을 잊고 디베랴 바다에서 과거의 직업인 어부로 돌아가서 그물을 던지고 있었습니다. 이제 자신의 사명을 망각 한 채 평범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그들에게 사명을 자각하게하기 위하여 그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거기에는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고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과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야고보와 요한과 또 다른 제자 둘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7명이 거기 있었던 것입니다. 거기서 아마 이들은 예수님과 함께 했던 3년 동안의 화려한 사역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다 옛 이야기가 되었으니 잊어버리고 우리의 본업에 충실하자고 했을 것입니다.

 

한 참 이야기를 하던 베드로가 먼저 일어납니다. 자 이제 그만 하고 나는 이제 고기나 잡으러 가야겠어? 하니 다른 제자들도 같이 가자고 하며 같이 일어나 배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날 밤에 밤새도록 그물을 던져 보았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생각나서 깊은 곳에 던지기도 하고 오른 쪽 왼쪽, 깊은 곳 낮은 곳 할 것 없이 고기가 있을 만한 곳에 다 그물을 던져 보았지만 밤이 새도록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기운이 다 빠졌습니다. 아무리 3년 동안 고기 잡는 일을 쉬었다 해도 이럴 수 있나 그래도 우리들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갈릴리 바다에서 잔뼈가 굵었고 고기가 있을 만한 곳은 다 알고 있는데 말야!

 

진이 다 빠지고 허기가 다 지고 어느 덧 날이 새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배에서 그물을 내리고 내려오려고 할 때 주님이 나타나셨습니다. “애들아! 고기가 있느냐?” 제자들이 대답합니다. 없나이다. 그러면 그물을 배 오른 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그리하여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물을 던지니 물고기가 많아서 그물을 들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잡혔습니다. 그런데 부활한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제일 먼저 안 사람은 주님이 사랑하시는 제자 사도요한이었습니다. 사도요한이 제일 먼저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보고 이렇게 외쳤습니다. “주님이시다이 말을 듣고 있던 베드로는 겉옷을 입고 바다에 첨벙 뛰어 들고 예수님께 달려옵니다.

 

우리는 여기서 부활한 예수님을 제일 먼저 알아 본 사람이 누구였습니까? 주님이 사랑하는 제자 요한이었습니다. 사도요한은 다른 제자들은 다 목숨이 두려워 다 도망했지만, 마지막 십자가에 못 박힐 때 가장 가까이서 여인들과 함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도요한에게 자신의 육신의 어머니인 마리아를 부탁하시면서 네 어머니라 고 하셨습니다. 사도요한이 누구보다도 예수님을 가장 많이 사랑했기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볼 수 있는 눈을 주셨고 아니 예수님께서 이런 축복을 주신 것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마음을 가질 때 그 대상이 가장 먼저 들어오게 되어 있습니다.

 

두 번 째는 베드로의 행동입니다. 베드로는 언제나 행동이 앞서는 것을 보게 됩니다. 베드로가 좀 말이나 행동이 급하기는 하지만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만은 그 누구와 비교해도 떨어지지 않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물고기를 잡은 그물을 끌어 올릴 때까지 예수님은 육지에서 숯불을 켜서 올려놓고 생선과 떡을 굽고 계셨습니다. 밤새 물속에 있었으니 제자들이 얼마나 배가 고프고 추웠겠습니까? 이러한 사실을 잘 아시는 주님께서 제자들을 위해서 사랑을 배푸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이시며, 완전한 인간이시기에 인간의 고통과 슬픔과 배고픔과 인간의 수고를 다 아십니다. 그러기에 다 잡은 생선을 가져오라고 하신 이후에 제자들에게 생선도 구워주기고 떡도 구워주시면서 제자들과 아침 조반을 함께 드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디베랴 바닷가에서 나타나신 것은 세 번째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부활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시신을 훔쳐 가거나 제자들이 너무 사모한 나머지 환영이나 환상을 본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이제 주님은 제자들과 조반을 먹고 나신 후에 본격적으로 주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목적을 깨우쳐 주십니다. 주님은 수제자인 베드로에게 묻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네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십니다. 이르시되 그러면 내 양을 먹이라. 또 두 번 째 물으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르시되 네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그러면 내 양을 치라 하십니다. 세 번 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이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나타나셔서 너는 왜 사명을 망각하고 갈릴리 바다에 다시 왔느냐 묻지 않으셨습니다. 너는 왜 내가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난 이후에 다시 살아난다고 한 말을 기억하지 못하고 내 말을 믿지 않느냐 나무라지도 않으셨습니다. 대신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셨습니다. 기독교의 핵심은 사랑입니다. 부활하시고 나타나신 주님은 분명하게 오늘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일은 믿음의 분량이 아니라, 사랑하는 삶이며 이것은 예수와 베드로와의 대화에서 강조된 것이다.

 

여기서 세 번이나 질문한 것은 베드로가 대제사장의 뜰에서 예수님을 세 번 씩이나 부인하고 저주하고 맹세한 사건을 기억하기 위함일 것입니다. 베드로가 어떤 사람입니까? 믿음이라고 하면 둘 째 가면 서러워 할 정도로 대단한 믿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에게 다른 사람은 다 부인 할지라도 자신은 절대로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고 배반하지 않겠다고 맹세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의 신앙고백이 온전하지 못하고 진실하지 못하고 거짓이었음이 드러났습니다. 이러한 배반은 결국 베드로가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은 하였지만 그 고백이 불완전한 고백이었으며 주님을 온전히 사랑하지 못하였음을 반증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은 베드로에게 세 번 씩이나 물으시면서 그의 사랑이 확고하도록 물으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세 번의 물음을 통해서 자신이 주님을 배반한 것에 대해서 회개하게 하고 장차 주님의 수제자로서 교회의 지도자로서 주님에 대한 사랑을 확실히 다짐해 준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장차 베드로가 어떻게 순교할지를 아셨기에 주님은 자신에 대한 사랑을 세 번 씩이나 물으시면서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주님에 대한 사랑이 확고해야 함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베드로에게 아가파스즉 하나님의 사랑으로 나를 사랑할 수 있느냐? 두 번 씩이나 물으셨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필레오즉 친국의 사랑으로 대답하였습니다. 자신의 연약함을 안 베드로는 자신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으로 주님을 사랑할 수 없고 친구의 사랑으로 사랑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도 자신을 친구라 하였고 친구를 위해서 목숨을 잃으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 하였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주님이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의 시제는 현재형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과거에 네가 나를 어떻게 사랑했느냐를 물으신 것이 아닙니다. 미래에 어떻게 사랑하겠느냐 물으신 것이 아니라, now and here, 지금 여기에서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신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과거에 내가 신앙생활 열심히 한 것 의미 없습니다. 미래에 어떻게 신앙생활 하겠다는 것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현재입니다. 현재 내가 주님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정말 사랑하게 되면 주님에 대한 충성은 말할 필요가 없겠지요. 봉사와 헌신은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주님을 위해서 헌신과 충성과 봉사가 약한 것은 주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모든 에너지의 원천은 사랑입니다. 사랑하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죽음도 불사합니다. 그게 예수님의 제자들이었습니다. 베드로는 로마에서 거꾸로 매달려 죽었으며 사도요한을 뺀 나머지 모든 제자들이 순교하지 않았습니까? 사랑은 그 어떤 힘보다 강하며 위대합니다. 어떤 약보다도 강한 치유의 능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러시아 문호 도스옙스키는 그의 작품 <농부 머레이>에서 어린 시절에 자기 마음에 남은 어느 농부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그가 그 기억을 갑자기 떠올리는 것은 시베리아에서 감옥살이를 할 때이다. 그가 감옥에 있을 때 어는 축제일 감옥 안은 술에 취한 죄수들이 욕하고 두들겨 패는 아수라장으로 변해서 그는 그 모든 것에 특히 러시아의 농부, 죄수들, 하층민들에게 환멸을 느끼고 있던 때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갑자기 20년 전 나뭇잎 썩는 물씬 풍기는 고향 숲속을 거니는 아홉 살짜리 소년으로 돌아갑니다. 갑자기 어디서 늑대가 나타났다는 소리를 듣고 그는 극도의 공포에 휩싸이면서 누군가를 향해 전력을 다해 뛴다. 그 때 암말을 몰면서 일을 하던 농노 머레이의 모습을 보고 그에게 달려간다. 놀란 머레이는 흙 묻은 손으로 아이를 껴안으면서 늑대는 없어, 아가야 늑대는 없어하면서 말하지만 놀란 아이는 연신 농부를 꼭 껴안기만 한다. 흙 묻은 투박한 농부의 손으로 볼을 만지면서 위로를 해준다. 그리고 아이가 정신이 들 대 쯤 성호를 그어주기도 하고 그리스도가 함께 하신다고 하면서 늑대가 나타나면 자신이 가만 나두지 않겠다고 하면서 아이를 집으로 보낸다, 자기 집 개가 있는 것을 보고 안심한다. 농부 머레이는 연신 아직도 먼 곳에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왜 이런 만남의 기억이 가장 힘든 시기에 생각이 났을 까?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농부가 투박한 손으로 아이를 어루만지고 그를 위로한다고 하는 것은 누구도 할 수 있는 일이다. 왜냐하면 그 농부는 자신의 노예였으며 자신은 주인집의 도련님이었기 때문이다. 도스트엡스키기 가장 힘든 시베리아 감옥 에서 이 어린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게 된 것은 그 농부는 자신의 의무감을 넘어선 그 어떤 것을 느꼈다고 한다. 그것은 인간다운 깊은 감정과 얼마나 상냥하고 거의 여성 같은 친밀함을 그 가슴에 간직하고 있었음은 거의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며 자신의 감옥 에서 폭력을 쓰고 욕하고 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전혀 다른 눈으로 볼 수 있게 되었고 증오와 간악함이 자신의 가슴속에서 사라짐을 느낄 수 있었다고 합니다. 도스트옙스키가 시베리아 감옥 에서 가장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을 때 그에게 가장 큰 위로와 힘을 준 것은 이데 올로기가 아니었고 어린 시절의 푸근한 기억이었다. 어린 그를 아무 말 없이 안아주고 어루만져 준 농부의 투박한 손을 떠올리면서 그는 기적 같은 힘을 얻게 되었고 세상을 새롭게 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 즉 사랑은 사람들이 거들떠보지도 않은 농부의 투박한 손길을 통해서 오는 것이다.

 

본문으로 돌아와서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세 번 씩이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신 것은 앞으로 베드로가 교회의 지도자이기 때문이며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제자 베드로의 사랑을 확인 한 이후에 주님은 베드로에게 나를 따르라말씀하십니다. 제자가 스승을 사랑한다면 못 따라갈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영국 캠브리지 대학에 시티 스터드라는 학생이 있었습니다. 크리캣 선수이며 성적도 뛰어난 학생이였습니다. 그에게는 출세의 길이 보장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집회에 참석했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아프리카 선교사로 가기로 결정합니다. 학교 당국자들은 이 학생이 아깝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선교의 길에 나서는 학생에게 권면합니다.

 

여보게, 이것은 자네에게 지나친 희생이 아닌가? 다시 한번 재고해 보게”. 이때 시티 스터드는 말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신 사랑이 사실이라면, 내가 그를 위해서 바치는 희생은 그 어떤 것도 지나친 희생일 수는 없습니다.”

 

희생은 말로 되지 않습니다. 계산해서 되지 않습니다. 나의 만족을 위한 것도 안 됩니다. 오직 주님이 기뻐하시는 희생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한 희생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은 사람들에게만이 가능합니다. 주님은 오늘 나에게도 네가 정말로 나를 위하여 희생할 수 있느냐고 묻고 계십니다.

 

찰스 하워드 박사는 말하기를 당신은 예수를 믿습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구원받아서 천국으로 갈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예수 믿는 사람처럼 살지 못했다면 당신은 그것 때문에 지옥에 가게 될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길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네가 나를 이것들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물으신 것은 네가 여기 있는 배와 그물, 가족관계를 뛰어넘고, 이 세상의 명예나 부와 권세보다 우선순위를 하나님께 두고 나를 따라올 수 있느냐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주님께서 마지막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강조한 것은 사랑이었습니다. 이 사랑이 있어야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사랑이 충만해야 복음도 전하고 이웃도 사랑하고 봉사도 할 수 있습니다.

 

 

2014년 4월 27일 청주 벧엘성결교회 정영진 목사설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