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잔치 비유 /눅14:15-24
지금부터 꽤 오래된 1987년에 상영된 요리영화의 고전이라 할 수 있는 “바베트의 만찬”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이 영화는 덴마크의 바닷가 어느 외딴 마을에서 자신들의 시간과 노력으로 선행을 베푸는 두 자매가 있었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마티나와 필리파였습니다, 이 두 자매는 목사님의 딸들로 검소하고 금욕적인 삶의 모범을 보이면서 가난한 이웃이나 몸 불편한 사람들에게 따뜻한 음식을 나누어 주면서 신도들과 함께 경건한 예배를 보면서 신앙을 지켜 가는 청교도였습니다. 이 두 자매에게도 프로포즈를 하는 남성들이 있었지만 엄격한 아버지로 인해 만남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그 후 35년의 세월이 흘렀고 두 자매는 여전히 선행과 절제된 삶을 살고 있을 때 두 자매에게 한 여자가 찾아 왔습니다. 바로 주인공 바베트입니다. 바베트는 프랑스 내전을 겪으면서 남편과 아들을 잃고 이곳으로 피신 오게 되었습니다. 가정부가 된 바베트에게 두 자매는 요리를 가르쳐 줍니다. 바베트는 이 두 자매를 위해 무려 14년간을 헌신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바베트가 오고 난 이후 살림이 풍성해지고 마을 사람들이 하루를 감사하다는 기도를 하며, 특히 바베트를 보내주셔서 감사하다는 기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바베트는 10000프랑의 복권에 당첨이 됩니다. 복권에 당첨된 바베트는 두 자매의 아버지 추도 정찬을 준비 하겠다고 합니다. 바베트는 프랑스로 돌아가서 자신의 조카에게 만찬에 사용할 재료를 준비시킵니다. 그리고 마침내 재료가 도착해서 요리가 시작됩니다. 언제나 절제된 생활로 물에 불린 빵, 죽과 가자미 스프만 먹었는데 괴상망측한 재료와 와인들이 속속 도착하고 거북이 요리와 스프, 각종 재료를 채운 메추라기를 바삭하게 구워낸 요리 등. 최고급 요리들이 속속히 상에 올려지고 사람들이 말없이 식사 하는 동안 바베트는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냅니다.식사들 하는 동안 사람들이 얼굴 표정이 밝아지고 서로 헐뜯고 예민했던 사람들이 식사가 끝나면서 모두를 서로 축복해 줍니다. 저절로 마음에서 우러나와서 말입니다. 복권에 당첨된 바베트는 폭탄 발언을 합니다. 한 끼 식사에 10000프랑을 다 써 버린 것입니다. 바베트는 프랑스 일류 요리사 였던 것입니다. 바베트가 준비한 정찬은 최고의 재료와 와인과 식기로 준비한 것입니다. 두 자매가 말합니다. 그럼 다시 가난해 진 거냐고? 깜짝 놀란 두 자매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예술가는 가난하지 않아요” 그리고 이런 말도 하지요.“자신이 최선을 다하면 사람들을 행복하게 할 수 있죠” 바베트의 정찬에 초대 받은 마을 사람들의 행복은 오래 기억에 남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행복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이와는 비교할 수 없는 ‘왕의 잔치’ ‘ 큰 잔치 비유’로 알려져 있습니다.본문에서는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배설하고 많은 사람을 청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만 마태복음에서는 초청자가 ‘어떤 임금’ 으로 나와 있습니다. 이 임금은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풀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누가복음에서의 어떤 사람은 곧 ‘왕’ 임을 알 수 있습니다. 왕이 자신의 아들 혼인 잔치에 사람들을 초청한 것입니다. 요즘도 신분이나 사회적 명망이 있는 자제들이 결혼할 때 아무나 초청하지 않습니다.
1세기 팔레스틴에서 잔치를 베푸는 것과 관련된 관습을 알아보는 것이 본문을 이해하는 하는데 좋을 것입니다.희랍 사람들은 하루에 보통 세 번 식사를 하며, 로마 사람들은 하루에 네 번 식사를 하는데 비해서 팔레스틴의 유대인들은 하루에 오직 두 번만 식사를 합니다. 첫 번 째 식사는 오전 10시경에 갖는 늦은 조반이고 두 번 째 식사는 더 이상 일하기가 곤란한 어두운 저녁 때 먹게 되는 석식이다. 관례적으로 잔치는 저녁때에 베풀어졌는데 누가의 큰 잔치 비유에서 “잔치”라고 번역된 단어는 신약성서 다른 곳에서 흔히 “저녁식사”로 번역되어 있는 단어입니다.
당시 관습에 의하면 손님 초청을 위해서는 두 번 초청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첫째로, 종들에게 보내어 손님들에게 앞으로 잔치가 있을 것이라고 알려주게 된다. 15절에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람을 청하였더니” 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잔치가 벌어질 때에 다시 초청을 하는 것이다. 17절에 “잔치할 시각에 그 청하였던 자들에게 종을 보내어 이르되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하매” 이것은 당시 예루살렘의 상류사회에서 실행되던 것이었다. 일단 잔치가 시작되면 처음 얼마간은 늦게 도착한 손님들의 입장이 허용되었다. 하지만 식사의 처음 순서가 끝난 후에는 환영의 표식도 떼어내고 입장이 허용되지 않습니다. 이 잔치 비유의 요점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큰 잔치 비유의 요점은 장차 올 세대의 축복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미래에 도래 할 메시야 시대의 “메시야 잔치”가 벌어질 시대로 상징화 한 것이다. 이 비유는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실현을 나타내기 위해 이용된 것으로 예수가 사용한 “잔치”란 은유는 종말론적으로 메시야 시대의 잔치를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 할 수 있다.
왜냐하면 15절에 말씀이 이를 말해주고 있다. 15절b에 “무릇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 되도다 하니” 즉 마지막 종말의 때에 하나님 나라의 천국 잔치에 참여하는 자가 복 되도다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교회생활을 하고 봉사생활을 하는 것은 결국 내세에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참여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천국잔치를 혼인잔치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대단히 큰 잔치입니다. 왕이 자신의 아들의 혼인잔치에 사람들을 초청하였지만 어떻게 되었습니까?
18절에 “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사람들이 왕의 초청 잔치에 호응하지 않았습니다. 마태복음에는 22,2-3절에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왕의 1차 초청에 사양하거나 오기를 싫어하는 사람은 누구이겠습니까? 유대인입니다.예수님이 유대인으로서 유대 땅에 오시어 천국복음을 전파하셨고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을 누차에 걸쳐 말씀하셨음에도 그들은 예수를 영접하지 않았습니다.오히려 예수를 죽이려 하지 않았습니까? 이 비유에서 처음 초청된 사람들은 바리새인이나 서기관, 그리고 대제사장들 등 종교인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메시야를 갈망했던 유대인 인지라, 이들이 가장 먼저 예수님을 영접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시기하고 질투하고 모함하여 마침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는데 앞장서고 지금까지 그들은 예수를 메시야로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오지 않은 이유가 나와 있습니다. 첫 번 째 사람은 자신은 밭을 샀기 때문에 아무래도 나가 보아야겠다고 합니다.요즈음도 부동산을 산다고 하는 것은 많은 돈이 투자가 되어야 살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은 많은 수고와 노력을 해서 아끼고 저축해서 자신들의 삶의 터전을 마련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그러니 얼마나 애착이 가겠습니까? 그 밭에다 어떤 농사를 지어야 수익이 창출될 수 있을 까 생각하니 왕의 잔치가 남의 일로 생각되는 것입니다 특용작물을 지어야 수입이 많아 질 까 생각이 많습니다. 할 일이 많습니다. 그러니 왕의 초청이 무관심합니다.
두 번 째 사람은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합니다.소 다섯 겨리는 열 마리입니다.이 사람은 밭을 산 사람보다 더 바쁜 사람입니다. 다서 겨리를 샀다고 하는 것은 대단한 능력을 가진 사람입니다. 소 열 마리가 갑자기 생겼으니 소 밥 주고 풀 깍아주고 부려야 하니 얼마나 바쁘겠냐 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너무 바빠서 죽을 시간도 없다고 하는 사람입니다. 바쁘기 때문에 왕의 잔치에 참여할 수 없다고 합니다. 한국 사람의 특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외국에 나가면 외국 사람들이 한국 사람들에게 사용하는 말이 있습니다.한국인의 특징을 잘 설명해 줍니다. 미국에서 있었던 일인데요.미국에 훈련소에서 미국 교관이 훈련받는 훈련생들에게 “hurry” “hurry” 대신 “빨리” “빨리”라고 외치니 거기 있던 미국인들이 반사적으로 알아듣고 몸을 빨리 빨리 움직였다고 하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이렇듯 한국 사람들은 뒤를 돌아볼 겨를도 없이 빨리 빨리 문화에 익숙해져 있어서 뒤를 돌아볼 여유가 없습니다.
세 번 째 사람은 “자신은 장가들어서 가지 못하겠다고” 말합니다. 인륜대사 가운데 중요한 일입니다. 어떤 사람은 처녀 시절에는 열심히 교회 나왔는데 결혼하고 나서 교회에 안 나오고 예수님을 멀리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물론 결혼을 하였기 때문에 가정을 돌보고 아내를 사랑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 세 가지, 즉 밭을 샀기 때문에, 소 다섯 겨리를 샀기 때문에, 장가들었기 때문에 왕의초청 잔치에 올 수 없다고 하는 것은 왕의 초청 잔치에 얼마나 소중하고 중요한지를 모르고 하는 소리입니다.이 세 사람이 거절한 이유도 일면 타당한 면도 없지 않지만, 이 세 가지를 종합해보면 이것들은 얼마든지 왕의 초청잔치에 갔다 와서도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왕의 초청 잔치는 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자신들의 삶의 문제를 일단 미루어도 되는 것입니다. 왕의 초청잔치는 기회가 다시 오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들이 왕의 초청잔치에 임하지 않은 것은 왕의 초청보다 자신의 일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들은 세상일에 얽매여서,분주한 나머지 천국잔치에 결국 참여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이 소식을 종들이 왕에게 전했습니다. 왕이 어떻게 반응했습니까?21절에 “종이 들어와 주인에게 그대로 고하니 이에 집 주인이 노하여 그 종에게 이르되” 주인이 화가 잔뜩 난 것입니다. 이렇게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했습니다. 주인은 포기하지 않고 2차 초청을 합니다.
21b에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하니라” 그 당시 종교지도자들인 바리새인이나 서기관 대제사장들이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 했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 당시 세리와 창녀등 사회적으로 멸시 당하고 소외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누가의 관심은 사회적으로 천대받고 소외당하는 “변방 인생” 들을 생각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여기서 성경이 이런 사회적 약자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교회는 일반적으로 사회적 지도층보다는 사회적으로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관심과 사랑을 베풀어야 합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시기를 선행을 베푼다 할 때 내가 베풀어서 다시 나에게 갚을 수 없는, 즉 여력이 없는 사람들에게 선행을 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만큼 베풀면 나에게 반사이익이 올 것을 계산하고 하지 말아야 하늘나라에서 상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22절에 “종이 이르되 주인이여 명하신 대로 하였으되 아직도 자리가 있나이다 ” 가난한 사람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해도 아직도 빈자리가 있습니다. 이에 주인이 3차 초청을 하게 됩니다. 3차 초청은 “길과 산울타리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자, 여기서 1차 초청은 바리새인, 서기관 대제사장들 종교지도자들이었습니다. 2차 초청은, 그 당시 변방에 있던 사회적 약자, 소외된 사람들인 세리와 죄인들이었습니다. 그러면 3차 초청은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들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길과 산울타리 넘어서라고 하는 말은 성 밖을 말하는 것으로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으로 볼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만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민의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방인들은 구별되지 못하고 할례 받지 못한 자들로서 하나님의 구원에서 제외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사도인 베드로도 유대인으로서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에 백부장 고넬료를 통해서 이방인에 대한 편견을 깨뜨리고 이방인에게도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이 있음을 욥바에서 하나님이 보여주신 보자기 환상을 통해서 깨닫게 되었습니다.
누가에 있어서 두 번 째 초청 즉,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초청한 것은 누가의 인도주의(Humanism)의 표현이고, 세 번 째 초청인 이방인에 대한 초청은 세계주의 (Universalism)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마태복음에서는 다른 사람들을 초청하는 이유가 “청한 사람들이 합당치 않기 때문” 이지만 누가복음에서는 다시 초청하는 이유가 아직 자리가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그래서 주인은 나가서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강권하여” 라는 말은 “팔을 비틀어서 라도” 데려오라는 말입니다. 이 말의 뜻은 그 만큼 급박하고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예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순종하지 않은 유대인에게 하신 말씀인데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거부한 결과 그 뒤로 30후인 A.D 70년경에 로마의 티토 장군에 의해서 예루살렘 성은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은 폐허가 되었습니다.이 때 로마 군인들에게 밭도 빼앗기고 가축도 빼앗기고 다 잃어버렸습니다. 100만 명이상이 죽었습니다. 마태복음22,7에 “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고” 라는 말씀이 이루어진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육신의 복만을 추구하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아니하고 이 세상 부와 쾌락만을 추구한 결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이 오기 전에 하나님의 구원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 구원의 소식을 전해서 멸망 받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에 왕은 이러한 심판을 알기에 강권하여서라도 하나님의 교회에 데려오라고 하는 것입니다.
cts 방송 프로그램 가운데 “내가 매일 기쁘게” 라고 하는 방송을 보는 도중에 새에덴 교회 이철휘 장로님의 간증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 분은 시골에서 아주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다고 합니다. 공부는 잘하셔서 서울에서 대학을 다녔다고 합니다.자신은 원래 예수 믿는 사람들을 못 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어서 그 어렸을 적에 교회에서 흔히 주는 사탕이나 빵 하나 받아 본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분이 친한 친구의 강권적인 인도로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이 분은 대학 다닐 때 학자금이 없어서 다닐 수가 없었는데 마침ROTC에서 장학금을 준다고 하여 ROTC 장학금을 받아서 대학3,4학년을 다녔다고 합니다. 학사 장교로 근무하면서 중대장 시절에 자신의 중대원이 크레모아 폭약을 밥에 비벼 먹어 가지고 서울 수도 통합병원에 실려가 그 책임으로 전역할 뻔 했는데 2주 만에 병사가 퇴원하여 군 생활을 지속적으로 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 분이 사단장이 되면서 하나님께 아침기도를 약속하고 2년 동안 새벽기도에 참석했다고 합니다. 한 번은 주일 아침에 일찍 자신의 부하들과 함께 교회에 갔는데 목사님이 설교하시는 강단에 먼지가 뿌였게 쌓여 있는 것이 보여서 그 때부터 하나님이 자신에게 교회 청소하라고 하시는 줄 알고 목사님께 말씀드려서 앞으로 자신이 교회청소를 하겠다고 하니 목사님이 당황하시더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단장의 말씀을 이해하고 그 때부터 투 스타 사단장이 부관과 함께 매주 일찍 교회에 나와서 2년 동안 교회를 청소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단장으로 제직하던 그 해에 장로님 지휘하던 그 부대가 무려 대통령상, 국무총리상, 국방부장관상, 참모총장 상등 4개의 상을 다 받았다고 합니다. 이러한 일은 전무후무한 일이라고 합니다. 이 일로 인해 군단장에 승진하고, 군단장이 승진하고 난 이후에는 보직 한 두게 거쳐야 대장에 승진하는데 이 장로님은 군단장 이후 보직을 거치지 않고 바로 대장에 승진하였다고 합니다. 억울한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자신의 아들도 소대장으로 전방 근무하였는데 자신이 승진할 즈음에 인사 청탁을 하였다고 하는 억울한 일이 발생하여 자신이 해명할 기회도 없이 승진에 누락이 되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군 승진 명단에 자신의 이름이 청와대에 올라가지 않았는데도 청와대에서 자신을 승진시켰다고 하는 기이한 일이 발생했는데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이 하셨다고 하시면서 4성 장군이신 그 분이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면서 이 분이 하시는 말이 있습니다. 자신의 경험을 들어서 어떻게든지 사람들을 교회에 데려오면 그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하나님이 하신 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을 길과 산울타리에 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 올 책임은 종들인 오늘 우리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강권하여 하나님의 교회를 채울 것을 원하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심판받지 않고 구원 받기를 원하십니다. 마태복음22장에서 혼인 잔치에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을 끌어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예복이란 선행이나 회개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회개하지 않고 선행, 즉 착한 행실이 따라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이들을 향해서 임금이 이렇게 말합니다.13절에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 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와 믿지 않는 사람들을 초청하십니다. 하나님의 초청은 명령이요, 간절함입니다. 이 천국잔치에 빠진 사람들의 마지막이 어떠한지 아시기에 간곡하게 초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려 우선순위를 영혼에 두고 하나님의 교회를 채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일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책임져 주시고 축복하십니다. 잔치를 거절한 사람들은 다시금 기회가 주어지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영혼구원만큼 소중하고 중요한 일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세상일을 뒤로 미루고 왕의 초청 잔치에 우리 주변에 가족, 친족과 이웃을 강권하여 하나님의 집을 채워드려 주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014년 6월 15일 청주벧엘성결교회 정영진목사 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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