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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과 예수 요8:1-11

gkffpffndi 2014. 2. 13. 21:10

율법과 예수 요8:1-11

 

성경의 형성 과정에서 본문은 요한복음의 원본이 아니라는 주장이 제기된 단락입니다. 그 이유는 다른 복음서들과 비교한 결과 신학적 차이가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본들을 비교한 결과 다른 중요한 사본들에게서 본 단락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이 본문은 후대에 편집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 하는 증거로 본 단락에 나타난 단어 가운데 요한복음에 사용되지 않은 단어가 사용되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서기관이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다른 복음서에는 많이 언급되어졌지만, 요한복음에서는 이곳에서만 언급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것은 교회가 간음한 여자를 용서한다고 하는 것은 그 시대 사회통념상 용인 될 수 없는 것을 교회가 용인함으로서 교회가 사회적인 비난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교회는 후대에 이 내용을 삽입함으로서 교회는 율법보다 사랑과 용서를 더 중요시 하는 공동체임을 분명하게 밝히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 시간 “율법과 예수” 이런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1. 서기관과 바리새인들

 

예수님 당시에 대 제사장이나 서기관 그리고 바리새인들은 그 당시에 종교지도자이었습니다. 이들은 율법을 연구하고 체계화 하여 일반 사람들에게 가리키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전혀 배움의 기회를 가져 보지 못한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키기 시작하자 사람들은 모여 들었고 군중들이 서서히 나사렛 예수를 선지자 내지는 그리스도로 인식하기를 시작하자 이들은 자존심이 상하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하였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들은 예수를 시험에 빠뜨리기로 결심을 하고 성전에서 하나님 말씀을 가르치기를 시작하자, 그 앞에 간음한 한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아 현행법으로 체포해 그녀를 예수 앞에 끓어 엎드리게 했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모세는 율법에 이렇게 간음한 여자는 돌로 치라 명하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하고 말했습니다.

 

요한복음의 기자는 이러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행위가 의도성이 있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6a절에 “그들이 이렇게 말함은 고발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 함이러라”

 

다시 말하면 선한 의도를 가진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를 곤경에 빠트리기 위함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는 정통적인 학습을 통해서 가르침을 받은 교사나 랍비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은 율법에 관한한 많은 공부를 한 사람입니다. 소위 정식 학위를 받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정식적으로 공부를 한 적이 없는 나사렛 시골 출신 예수가 율법을 논하고 대중을 가르칠 때 그들에게 예수는 눈에 가시였습니다. 그러기에 율법을 잘 알고 있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를 곤경에 빠트리기 위해서 간음한 여자를 예수 앞에 세운 것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그 당시 상당한 지식을 가진 지식인이었고 어느 정도 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회적으로 상당한 지위를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들이 율법을 연구하고 적용하는 과정에 있어서 율법의 정신보다 율법의 형식만을 고집하여 많은 사람들이 이로 인해 율법으로부터 자유하기 보다는 구속을 당하였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들이 말하는 바는 듣지만 그들의 행위는 본받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말과 행위, 즉 언행이 일치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마23:2-3절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않았으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하고 행하지 아니하고”

 

최근에 한국교회의 기윤실은 2월 5일 서울 명동 열매나눔빌딩 나눔홀에서 전날 발표한 '2013년 한국교회의 사회적 신뢰도 여론조사' 결과를 발표하였는데 사회적 신뢰도 여론조사에서 '한국교회를 신뢰한다'고 답한 응답자는 전체에서 19.4%에 불과했다. 반면 신뢰하지 않는다고 답한 응답자는 44.6%로 두 배 이상의 차이가 났다. 사람들이 한국교회를 신뢰하지 않는 대표적인 이유는 말과 행동이 다르기 때문으로 나타났다. 한국교회를 신뢰하지 않는다고 답한 응답자의 24.8%가 기독교의 언행 불일치를 이유로 꼽았습니다. 교회의 비리·부정(21.4%), 타 종교에 배타적인 태도(10.2%), 강압적인 전도(10%)가 뒤따랐다.

 

이러한 조사 결과만 놓고 본다면 오늘 날 한국교회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에 빠져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율법으로 다른 사람들을 곤경에 빠트리고 심판하고 정죄하는 자리, 즉 모세의 자리에 않아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율법으로 자신을 비추어 보아야 하는데 자꾸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심판함으로 자기의 의, 즉 교만에 빠져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책망하셨습니다. 회칠한 무덤이라고 하셨습니다.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속에는 온갖 더러운 탐욕과 명예와 욕망으로 가득 차 있어 죽은 사람의 뼈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 우리도 서기관이나 바리새인처럼 남을 정죄하는 자리에 있지 않습니까? 남을 곤경에 빠트리지는 않습니까? 언행이 불일치하는 삶을 살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2.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간음한 여자를 예수 앞에 세운 이유는 율법에 정통한 이들이 예수님을 곤경에 빠트리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당시 모세 율법에 의하면 간음한 여자는 현장에서 돌에 맞아 죽어야 했습니다. 만약 모세의 율법에 따라서 예수님께서 돌로 치라고 하였다면 그들은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사랑의 정신이 거짓이었음을 나타냄과 동시에 로마법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은 로마법에 저촉되어 범법자로 잡혀 갔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로마에서 다른 것은 유대나라의 법을 따라도 문제가 되지 않지만, 범법을 가리는 재판은 로마법에 따르도록 하였기 때문입니다. 또한 돌로 치지 말라고 했다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아무튼 이들은 어떻게든 함정에 빠뜨리려고 교묘한 계획을 세웠던 것입니다. 이러한 음모를 아신 예수님께서 어떻게 행동하셨습니까?

 

먼저는 “예수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예수님께서 손가락으로 허리를 굽혀서 글씨를 쓸 때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시선이 땅에 고정되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어떤 말씀을 쓰셨는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쓰시고 난 이후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예수님께서 다른 사람의 허물만을 보고 정죄하는데 혈안이 되어있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을 향하여 정곡을 찌르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땅에 태어나 모든 사람은 죄 없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로마서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이 이르지 못하더니” 그렇습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기에 하나님의 영광의 나라에 들어 갈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다른 사람의 눈에 있는 티를 보기 보다는 내 눈 속에 있는 대들보를 먼저 보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 소위 종교지도자들이 자신의 의만을 지나치게 내세운 나머지 자신의 허물과 죄를 간과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 그들을 향하여 “독사의 자식들” “회칠한 무덤” 겉과 속이 다른 “외식하는 자” 라고 신랄하게 책망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하셨을 때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깨닫고 물러가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렇치않았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기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뭐라 쓰셨는지 알 수 없지만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양심에 가책을 받고 거기 모여 있던 어른으로부터 시작하여 젊은이 까지 다 그 자리를 떠났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주님께서 무슨 말씀을 쓰셨기에 그들이 양심에 가책을 받고 그 자리를 떠났는가 하는 것입니다. 저도 이점이 궁금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천지를 만드시고 우주와 역사를 주관하시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이신 것을 믿는 다면 우리는 어렵지 않게 예수님께서 쓰신 내용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이 간음한 여자에게 돌을 든 사람과 간음한 여인과의 차이가 있다면 간음한 여인은 드러난 것이고 다른 사람들은 드러나지 않은 것뿐입니다. 그리하여 자신의 죄를 숨긴 채 한 생명을 죽이려고 하는 서기관들에게 예수님은 그들의 죄목을 구체적으로 밝힌 것입니다. 그래서 아마도 최근에 지은 죄부터 시작해서 가장 큰 죄에 이르기 까지 세세하게 땅에다 기록하였을 것입니다. 거기에는 간음하였지만 아직 드러나지 않은 죄까지 나열하였기에 그들은 여인에게 돌을 던지려고 하였던 돌들을 하나 둘씩 내려 놓고 그 자리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처럼 우리 자신의 허물과 죄를 잊어 버린 채 다른 사람의 허물과 실수에 대하여 관용하지 못하고 쉽게 정죄하고 판단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 볼 수 있습니다. 특히 한국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분열과 갈등의 표출은 이런 것 들을 반영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느 유명한 정치인이 말했습니다만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 이란 말이 있듯이 자신에게 대하여 지극히 관대하면서 남의 실수나 허물은 용서나 관용하지 못하는 모습을 가져서는 안되겠습니다.

 

바울은 로마서2:1절에서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 모두 죄인 인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 자신의 죄에 대해서는 엄격하지만. 다른 사람의 실수와 허물과 죄에 대하여 관용하고 용서하는 마음을 갖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 하노라.

 

아무도 그 자리에 없는 것을 아신 예수님께서 10절에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11절에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예수님의 위대한 용서의 선언입니다. 복음의 승리입니다. 지금까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가지고 사람들의 허물과 실수를 고발하였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율법의 재판관으로서 정죄하고 심판하였고 율법준수를 강요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율법 준수가 사람들에게 고통이요 무거운 짐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서 자신들이 천국 문을 막고 있으면서 다른 사람들까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게 한다고 책망하셨습니다.

 

율법주의자는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줍니다. 고통을 줍니다. 심판하고 판단함으로써 하나님을 무서운 재판관으로 오해하게 만듭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을 엄격하신 하나님으로만 알게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하나님은 사랑과 용서의 하나님이심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마18:32-33에 보면 용서 할 줄 모르는 종의 비유가 있습니다. 한 왕이 자기 종의 막대한 빚을 갚아 주었다. 그 종이 돌변하여 일백데나리온의 자신의 빚을 갚지 못하자, 그를 감옥에 가두었다. 한 데나리온은 하루 품삯밖에 되지 못하였다. 그러자 그종의 주인이 불러다 놓고 말했다. “이 악한 종아, 네가 간청하기에 내가 네게 그 빚을 다 탕감해 주었더니 너는 내가 너를 불쌍히 여긴 것처럼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겼어야 할 것이 아니냐?‘ 주인이 그를 용서하기로 마음먹었던 것을 철회하고 그를 감옥에 넘겨 그가 빚진 것을 갚을 때 까지 가두게 하였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예수는 엄히 경계하시면서 이렇게 결론을 내렸습니다. ”너희가 각각 진심으로 형제나 자매를 용서하지 않으면 내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즉 하나님은 사전에 보답이나 선물을 받으시지 않으시고 용서 하시지만,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사람을 용서하지 않으실 때에는 용서를 철회하신다는 것이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Ernest Hemingway는 자신의 단편소설집에서 ‘세상의수도 The Capital of the World' 라는 잊지 못할 짤막한 이야기를 다음과 같은 말로 시작한다.

 

마드리드에서는 파코Paco 라는 이름을 가진 소년들을 흔하게 볼 수 있다. 파코라는 이름은 프란체스코라는 이름의 애칭이다. 마드리드에는 한 아버지에 대한 우스개 이야기가 회자되고 있다. 그 아버지는 마드리드에 가서 <엘 리베랄>이라는 개인잡지에 광고 한편을 게재 하였다. “파코 화요일 정오에 몬타나 호텔에서 만나자, 다 용서했다. 아빠가.” 광고를 보고 800명의 젊은이가 모여 들었고 그들을 해산 시키지 위해 구아르디아 민간 기병대를 호출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 우스개 이야기는 스페인 어디서나 접할 수 있는 “파코”라는 이름에 얽힌 이야기다. 이 이야기가 설득력을 갖는 이유는 아들이든 딸이든 어머니든 아버지든 친구이든 동료이든 간에 용서받고 싶어 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갈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본문으로 돌아와서 예수님은 간음한 여자에게 “왜 그런 죄를 지었느냐?고 책망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율법학자인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 의해서 돌에 맞아 죽을 뻔 하였던 이 여자가 주님의 ”용서의 은총“을 입어 새사람이 되었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를 인정하고 회개함으로써 “용서”라는 선물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 하실 때 첫째, 하나님은 “잘못을 따지지 않으신다.(롬4:8;시32:1-2) 2. 하나님은 죄를 ”덮어주신다“(시32:1;롬4:7) 3. 하나님은 우리의 악행을 ”자기 등 뒤에“ 감추신다.(사38:17) 쇠렌 키르케고르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감추신다고 말한다.4. 하나님은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멀리 옮기신다.(시103:12) 5.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지워 없애신다.(사43:25) 마치 잉크물이 엎질러진 옷을 깨끗게 하신다는 것이다. 6.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안개처럼 사라지게 하신다.(사44:22) 그리고 기적 중의 기적은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기억하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사43:25;렘31:34;히8:12;10:17)

 

우리는 간음한 여자처럼 율법에 의해서 돌에 맞아 죽을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대신 속죄제물이 되어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화해하게 되었습니다.(롬5:10)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통해서 우리는 용서 받은 자가 된 것입니다. 용서 받은 자로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면서 살아갈 때 우리가 사는 이 사회와 가정과 교회는 아름다운 세상으로 바꾸어 질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서기관들과 바리새인처럼 언행이 일치하지 않은 삶을 살아서는 안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 죄인임을 잊지 맙시다. 그리고 또한 이 땅에는 용서받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음을 기억하고 예수님의 엄청난 용서를 받은 우리들이 상처받고 찢긴 심령들을 정죄하고 심판하기 보다는 사랑하고 용서 하면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014년 2월16일 청주벧엘성결교회 정영진 목사 주일 설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