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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있는 사람 /시1:1-2

gkffpffndi 2014. 1. 10. 19:19

복있는 사람 /시1:1-2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복 받기를 좋아했던 민족이었습니다. 제가 어렸을 적에 설명절이 되면 동네마다 복조리를 가지고 다니면서 가정에 들어와서 팔아서 저희 할머니께서 복조리를 사가지고 집안에 걸어두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집안에 이불에도 ‘복’자가 써 있었던 기억이 있고, 수저에도 ‘복’ 베게에도 ‘복’ 상에도 ‘복’ 자가 써있었습니다. 그리고 봄철이 되어 입춘이 되면 대문 양쪽에 저희 할아버지께서 “입춘대길” “소문만복래” 라고 써 붙였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이렇듯 우리 민족은 ‘복’ 받기를 사모했습니다.

 

이러한 것을 보면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거의 비슷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럼 성경에서 말하는 복은 어떤 것인가? 오늘 본문 시편 1편은 복 있는 사람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시편1편에서 말하는 복은 세상에서 말하는 ‘복’ 하고는 다르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먼저는 ‘브라카’라고 하는 복이 있습니다. 이 뜻은 복은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아쉬레’가 있습니다. 이 복은 ‘브라카’의 복을 받은 사람을 축하하고 행복해 하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길을 제시해 주고 그 길을 따라 살 것을 권면하는 의미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복 있는 사람이란 히브리어로 “아쉬레 하이쉬” 라는 뜻으로 이렇게 살 때 “인생은 행복하다” 라는 의미입니다.

 

저는 이 시간 “복 있는 사람” 이런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1. 복 있는 사람은 악한 계획을 세우지 않습니다.

 

시편1편에서 어떤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까? 성경은 물질을 많이 가지고 있고, 권력을 쥐고 흔드는 사람이 행복하다고 하지 않습니다. 악인들의 꾀란 히브리어로 <아찻 르샤임>인데 이 뜻은 악한 생각이나, 악한 계획을 말합니다.

 

악한 생각을 가지고 힘없고 의지 할 곳 없는 사람들을 미혹하여 수렁에 빠지게 하는 것입니다. 요즈음 우리사회 그런 일이 얼마나 많이 일어나는 지 알 수 없습니다.

 

얼마 전 북한의 2인자가 북한정권에 의해서 김정은의 고모부인 장성택이 처형되었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쯤 해서 저에게 아는 지인으로부터 이런 카톡이 왔습니다. 장성택 처형 장면을 볼 수 있다는 카톡을 열면 수십만원이 결재되니 절대로 열지 말라는 것입니다. 한번은 저희 집으로 전화가 왔습니다. 국민은행인데 국민은행 계좌번호와 주민번호를 알려 달라는 것입니다. 저는 국민은행을 거래하지도 않는데 말입니다.

 

얼마 전에 우리교회 모 집사님 댁에 대 낮에 젊은 청년이 문을 열어 주었더니 혼자 사시는 노인인 줄 알고 자신이 교회도 다니고 절간도 다녔다고 하면서 자녀들이 평안하게 지내고 몸이 아프지 않으려면 상당공원 까지 가서 제사를 지내야 한다고 그러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집사님은 나는 교회 다니니까 그런 제사 안 지낸다고 해도 막무가내로 젊은이가 가자고 하더라는 거예요. 그러면 고집사님이 끼고 있던 금반지를 욕심을 내더니 그 반지를 빼달라고 하더라는 겁니다. 그러면서 이 집사님이 잘 말을 안듣고 안간다고 하니까? 말을 잘 듣는다고 하면서 투덜내고 나가더라는 것입니다. 대낮에 혼자 사는 노인들을 노리고 이런 악한 계획을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스더에 보면 유다가 페르시아 왕 아하수에로왕 시절에 하만이라는 총리대신이 왕의 신임을 받고 권력을 쥐게 되자 하만 앞에서 왕의 대신들과 신복이 다 꿇어 엎드려 절하였지만, 에스더의 삼촌 모르드게 그 앞에 절하지 않자 괘심하게 생각한 총리대신 하만은 모르드게 뿐 아니라, 모드드게가 속한 유다민족 까지 몰살할 계획을 세우고 유다인들을 죽일 달을 제비뽑았으니 그 달은 ‘아달월’ 곧 12월이었습니다. 그리고 왕 앞에 나가 이렇게 참소하였습니다.

 

「어느 한 민족이 왕의 나라 각 도의 백성 중에 흩어져 거하는데 그 법률이 만인보다 달라서 왕의 법률을 지키지 아니하오니 용납하는 것이 왕에게 무익하니이다 왕이 옳게 여기시거든 조서를 내려 저희를 진멸하소서 … 」 그리고 왕이 그 조서에 인장반지로 서명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12월 13일 하루 동안에 유다인을 노소나 어린아이나 부녀를 무론하고 죽이고 도륙하고 진멸하고 또 그 재산을 탈취하라!」이 소식을 들은 유다인들은 대성통곡하고 모르드개가 왕후 에스더에게 알리어 금식하고 재옷을 입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유다인 모르드개는 왕후인 에스더에게 사람을 보내어 왕께 청해 이 위기에서 넘겨주기를 구하니 “네가 왕후의 위(位)를 얻은 것이 이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아느냐” 왕후 에스더가 왕 앞에 부름을 받고 자신의 잔치에 하만과 함께 참여할 것을 말합니다. 왕후의 잔치에 초청받은 하만은 즐거워합니다. 왕은 그 밤에 역대일기를 검토하는 중에 자신을 죽이려고 모반을 일으킨 자를 알려 준 모르드개에게 아무런 보상을 하지 않음을 알고 하만을 불러 이런 사람에 대하여 어떻게 하였으면 하고 말하자, 하만은 자신에 대하여 말하는 줄 알고 그런 사람은 왕의 나귀에 태우고 왕관을 씌우고 성중거리로 다니면서 왕이 존귀게 하는 사람은 이같이 기뻐할 것이다라고 말하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만은 모르드게를 죽이기 위해서 장대를 22.5m를 높이 세웠으나 왕후 에스더는 잔치에 초대된 왕의 앞에서 자신과 자신의 민족에 대해서 고하는데, “왕이여! 나와 내 민족이 팔려서 죽임을 당하게 되었나이다. 만일 우리가 노비로 팔렸더면 내가 잠잠하였으리이다 ”

 

“감히 이런 일을 심중에 품은 자가 누구며 그가 어디 있느뇨” 왕후와 왕후의 민족을 죽이려 하는 자가 있다는 말을 들은 아하수에로 왕은 노기가 등등하였습니다.

 

“적과 원수는 이 악한 하만이니이다!”

 

결국 유다인을 죽이려고 했던 원수 하만은, 모르드개를 매달려고 세워 둔 장대에 자신이 매달리게 되었고 죽기로 작정되었던 유다인들에게는 사는 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악한자의 생각이나 계획이 성공할 리가 없습니다. 유다 민족을 멸하려는 사탄의 계획을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교회를 잘 나오던 사람이 갑자기 안나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악한자의 꾀에 빠진 것입니다. 2014년 행복한 한 해가 되기를 원하신다면 악한 생각이나 악한 계획을 세워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악한 세상을 심판하십니다. 우리 사회가 악한 자들이 발붙이지 못하고 선한 사람이 평안하게 살아 갈 수 있는 사회가 될 때 하나님이 복을 주시고 다수가 행복한 사회가 될 것입니다.

 

2) 죄인들과 같이 행동하지 않습니다.

 

두 번 째, 죄인의 길에 서지 않는 사람입니다. 여기서 이 말의 뜻은 히브리어로 <브레덱 핫타임>인데 죄인들의 길 안에 들어서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죄된 행동을 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영국의 유명한 설교자인 스펼죤 목사님은 “참새가 내 머리위로 날아가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참새가 내 머리위에 둥지를 트는 것은 내 책임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죄 많은 세상에 살고 있기에 죄 된 환경에 노출되어 있기에 우리의 생각이나 의식 속에 죄 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죄된 생각을 하는 것 하고 그것을 행동에 옮기는 것 하고는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여자를 보고서 음욕을 품은 것은 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다른 사람에 대하여 악감정을 가지고 미워하고 질투하는 것도 살인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마음속에 있는 죄는 도덕적인 비난은 받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오래 마음속에 머물러 있다가 행동으로 나타난다면 이것은 커다란 중범죄가 되고 도덕적 비난과 함께 법적인 책임을 면할 수 없습니다.

 

대게는 범죄 하는 사람들은 혼자 죄를 범하지 않습니다. 반드시 공범이 있습니다. 범죄를 일으키기 위해서 여러 사람들이 모여서 일을 분담하여 범죄를 저지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범죄에는 반드시 여자가 끼여 있다는 것입니다. 어쩌다가 이러한 악한 사람들과 범죄의 자리에 서 있다면 단호히 그것을 끊고 나와야 합니다. 그 사람들과 행동을 같이 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야 복 있는 사람.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사무엘상2:12이하에 보면 엘리의 아들들인 홉니와 비니하스가 하나님 앞에서 범죄한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엘리의 두 아들들은 아주 불량자였는데 제사들일 때 고기를 삶고 있으면 하나님 앞에 드리기도 전에 자신들이 먼저 좋은 부위의 고기를 가져다가 먼저 먹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제사 드리는 사람이 하나님께 드릴 기름을 먼저 태운 후에 네가 원하는 것을 가져가라고 하였는데도 불구하고 막무가내로 고기를 빼앗아 갔습니다.

 

그러므로 삼상2:29절에 “너희는 어찌하여 내가 내 처소에서 명령한 내 재물과 예물을 밟으며, 네 아내들을 나보다 더 중히 여겨 내 백성 이스라엘이 드리는 가장 좋은 것으로 너희들을 살지게 하느냐”

 

뿐만 아니라, 엘 리가 매우 늙어 기력이 쇠하여지고 판단이 흐릿해질 때 회막에서 수종드는 여인들과 동침하여 자신의 아버지가 이 소식을 듣고 분노하여 꾸짖었으나 그들은 듣지 아니하여 결국 하나님께서 그들을 죽이시기로 하였습니다. 이런 죄악으로 하나님께서는 불레셋 나라에게 법궤를 빼앗기고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전쟁에서 불레셋 군대에 의해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들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30b절에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

 

엘리 제사장은 하나님의 제사장임에도 불구하고 자녀교육, 신앙교육을 제대로 시키지 못하여 하나님의 법궤를 빼앗기는 치욕과 함께 자신의 두 아들 하나님의 심판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런 기사와 함께 사무엘서는 사무엘의 경건함을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엘리의 가정은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함으로 쇠락의 길을 가는 반면, 한나의 아들 사무엘은 어렸을 적부터 세마포 에봇을 입고 하나님을 섬기고 점점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은총을 받고 있다고 대조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을 경외하고 죄에서 떠난 사무엘은 점점 더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을 받으면서 이스라엘의 마지막 선지자와 사사로서 제사장으로서 새로운 시대를 여는 복 있는 사람으로 나타나는 반면에 엘리의 집안은 끝없이 추락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복있는 삶을 원하십니까? 죄된 길에 들어서지 말기를 바랍니다. 죄된 행동에서 벗어나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3) 오만한 자리에 않지 않는 사람입니다.

 

오만하다라는 뜻을 가진 히브리어는 ‘레츠’인데 그 뜻은 큰소리치다. 야유하다, 거드름을 피우다, 하나님의 권위를 업수히여기고 함부로 큰소리 치고 떠들어 대는 사람을 가리킨다.

 

즉 오만한 사람은 죄악의 극치를 가리키는데 이 사람은 하나님을 향해 조롱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입니다. 사탄이란 뜻은 ‘하나님을 대적한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오만한 사람입니까?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고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에 도전하는 사람입니다.

 

성경에 보면 오만한 사람의 대표자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첫 번 째 왕인 사울입니다. 사울은 본래 겸손한 자였습니다. 사무엘이 왕으로 삼으려고 했을 때 자신을 행구사이에 숨겨 자신은 왕이 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왕이 되고 나자 사람이 달라졌습니다. 계속된 전쟁에서 승리하자 교만한 마음이 그에게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제사장이 할 수 있는 권한까지 자신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사무엘이 전쟁에 나가기 전에 제사를 드리기 전에 도착하지 못하자 사무엘을 대신하여 자신이 제사를 드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말렉 과의 전쟁에서 얻는 짐승들을 다 죽이라고 하였지만 하나님의 말씀보다 물질에 욕심이 생겨 죽이지 않고 있다가 사무엘이 이 사실을 지적하자 하나님께 제사드리기 위해 남겨둔 것이라고 거짓말을 서슴없이 하는 비양심적이 사람으로 전락한 것입니다.

 

결국 사울은 이러한 오만으로 인해 하나님께 버림을 받는 결정적인 실수를 하게 된 것입니다. 사울이 처음부터 오만해진 것은 아닙니다. 자신이 점점 인기가 올라가고 전쟁에서 승리하자 교만이 싹트기 시작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인생을 살다 보면 항상 어려운 것도 아닙니다. 어려운 상황이 계속되어 질 것 같아도 그렇치않습니다. 조금만 인내하면 좋은 시절이 옵니다. 또한 항상 좋은 날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 항상 높은 데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려 올 때도 있습니다. 인생은 스케이드 보드 같아서 올라갈 때도 있고 내려 갈 때도 있습니다. 올라갈 때 교만해서 안됩니다. 그렇다고 내려갈 때가 있는데 너무 주눅 들거나 낙심할 필요도 없습니다.

 

오만한 사람의 특징은 다른 사람들을 무시한다는 것입니다. 자신만이 최고 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실패한 사람이나 사회적으로 약자인 사람을 대할 때 긍휼의 마음이 없습니다. 작은 자에 관심이 없습니다.

 

여기 오만한 자리에 앉지 말라는 것은 그런 사람과는 사귀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 그룹에 속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만한 사람과 사귀면 그의 생각이나 생활태도가 전염되기 때문입니다. 결국 하나님과 멀어지기 때문입니다. 오만한 사람에게는 하나님은 없습니다. 그 심령은 병들어 죽게 되어 있습니다.

 

4)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주야로 묵상하는 자입니다.

 

시편기자는 결론적으로 누가 복있는 사람이고, 행복한 사람인가?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며, 주야로 묵상하는 자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묵상한다라는 말의 뜻은 영어 성경에는 ‘메디테이토’ 라고 나와 있지만, 원어의 뜻은 ‘읊조린다’ ‘중얼거린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참으로 행복한 사람은 옛날에 서당에서 학생들이 한문을 중얼거리며 따라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말씀을 입술로 중얼거리면서 즐거워 한다는 의미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마치 정통유대인들이 성경을 미간에 붙이고 손목에 붙이고 몸을 앞뒤로 흔들면서 성경을 중얼 거리는 것을 유대인의 통곡의 벽 앞에 가보면 그런 사람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적으로 암송하고 되 뇌이면서 중얼거리는 사람이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는 사람입니다. 그것도 주야로 말입니다. 밤낮으로 중얼거리는 사람이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인물 가운데 가장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은 다윗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원인은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시편19:7-10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생시키며,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며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법도 진실하하여 다 의로우니 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 꿀보다 더 달도다.”

 

하나님은 말씀을 즐거워하며 주야로 읊조리며, 금은보화보다, 더 귀하게 여기고 송이 꿀처럼 말씀을 사모하는 다윗을 위대하게 하셨고 복있는 인생, 행복한 인생이 되게 하셨습니다. 시편기자는 복있는 사람이란 하나님의 말씀, 즉 ‘토라’에 대한 계속적인 묵상을 통해서 인생의 행복과 기쁨을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한 다윗에게 나단 선지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역대상17:7-8에 “ 또한 내 종 다윗에게 이처럼 말하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처럼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목장 곧 양 떼를 따라 다니던 데에서 데려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고 네가 어디로 가든지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 모든 대적을 네 앞에서 멸하였은즉 세상에서 존귀한 자들의 이름 같은 이름을 네게 만들어 주리라”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2014년 악인의 유혹에 빠지지 말기를 바랍니다. 죄인들과 함께 해서도 안됩니다. 하나님을 조롱하는 오만한 자와 함께 해서도 안됩니다. 복있는사람이 되기를 원하신다면 다윗처럼 하나님 말씀을 즐거워하며 송이 꿀보다 더 사모하고 주야로 읊조림으로 다윗처럼 복있는 인생, 행복한 인생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2014년 1월 12일 청주벧엘성결교회 졍영진목사 주일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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