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데스다 연못/요5:1-15
오늘 본문 말씀은 유대인이 명절이 되어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게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문중에 “양문” 이라는 곳이 있는데 그 옆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 라고 하는 연못이 있었습니다. 고고학자들에 의하면 ‘베데스다’ 라고 하는 지명은 과거에는 꾸며낸 이름으로 알았으나 고고학적인 발굴로 역사적 사실로 드러났다. 그 연못은 1871년에 발굴되었는데 실제로 5개의 행각이 정확히 있었고 예루살렘 북쪽에 있었다.
이 베데스다 라는 연못의 뜻은 ‘자비의 집’ ‘은혜의 집’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아마도 전설에 의하면 베데스다 연못이 움직이는 때가 있는데 그 때는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와서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그 때 제일 먼저 들어가는 환자는 어떤 병도 고침을 받는다는 전설이 내려오기 때문일 것입니다.
베데스다 주변에는 이런 이유가 환자가 물이 동하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거기에는 많은 환자들이 있었는데,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마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베데스다 연못가의 모습은 오늘 날 현대인들의 축소판입니다. 거기에는 경쟁이 있습니다. 물이 동할 때 서로 들어가려고 아수라장이 될 것입니다. 저는 이 시간 “베데스다 연못”이란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1) 38년 된 병자가 있었다.
유대인의 명절인 그 어느 날 예수님은 화려한 예루살렘을 올라가시기 전에 거랭 뱅이 들이 모여 있는 베데스다 연못가를 찾아 오셨습니다. 주님은 언제나 그렇듯이 가난과 질병과 고통 속에 살아가는 민중 속에 나타나셔서 그들을 위로하시고 함께 하십니다.
베데스다 연못가에 모여 있는 사람들은 삶에 지친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에 지치고 패배의식으로 가득 찬 사람입니다. 좌절과 절망 속에 아무런 소망 없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 시대에 아무도 관심도 주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의 의식 속에는 고통인 질병은 죄로 인해서 오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아마도 그들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서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그 당시의 사회 통념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이러한 사회적인 통념이나 편견을 깨시고 온갖 환자들이 모여 있는 베데스다 연못가를 찾아 오셨습니다. 그런데 그곳에도 살벌한 경쟁이 있었습니다. 그 곳에도 계급이 있었습니다. 차별이 있었습니다. 아마도 힘 있는 사람들은 베데스다 연못가에 가장 먼저 뛰어들기에 좋은 장소에서 기다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곳에도 보이지 않는 치열한 생존경쟁이 치열한 삶의 자리였습니다. 그래서 물이 끓어오를 시기가 되면 그 장소는 은혜의 자리가 아니라 서로 먼저 들어가기 위해서 밀고 밀치다 보니 서로에게 상처가 되고 미움과 시기와 질투의 자리가 되었습니다. 내가 먼저 들어가야 내 병이 낫는다고 생각하니 이웃에 대한 사랑은 생각할 수 없는 살벌한 생존경쟁만이 남아 있었습니다.
요즈음 50대 중년층이 직장에서 퇴직하면서 손쉽게 가게를 차리는데 치킨 집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너무나 치킨 집이 많이 생기다 보니 경쟁이 치열해져 심지어는 처남 매부지간에도 경쟁하는 관계가 되어 손찌검이 오고 가는 극단의 현상이 지난주에 기사에 나왔던 것을 보았습니다. 미국에서는 이러한 현상이 한국경제에 위험요인이 될 수 있다고 하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치킨 집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요즈음 한의사들도 많이 배출되다 보니 문을 닫는 한의원이 많이 있다고 합니다. 의사 변호사들도 과잉 배출하다 보니 파이가 갈수록 작아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요즈음은 공무원이 가장 인기 있는 직종이 되었습니다. 너도나도 공무원 시험에 매달리는 것을 봅니다.
사람들이 삶이 각박하다 보니 사회곳곳에서 묻지마 살인이나 무차별적인 방화 불특정 다수 범죄의 대상이 된다고 하는 사실은 우리 사회가 불공평하고 뭔가 사회적 약자에게 불이익을 주는 사회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오늘 예수님처럼 가진 자의 편에 서지 말고 가난하고 소외된 자, 병든 자 즉 사회적 약자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들이 내 교회에 나와야 한다는 조건방식으로 사람들에게 선을 베푸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이 세상에 대하여 한을 품는 사회적 약자를 품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예수님처럼 사람들은 화려하고 떠들 썩 한 곳에 관심이 있었지만 주님은 그 당시 유대인들이 죄인 취급하는 병든 자들이 모여 있는 베데스다에 찾아 가셨고 그 중에서도 가장 불쌍한 38년 된 병자에게 은혜를 베푸셨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아마도 이 38년 된 병자는 절망 가운데 있었을 것입니다. 가족에게도 버림받아서 아무도 자신을 물이 동할 때 밀어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저 멀리서 다른 사람들이 물이 동하여 움직일 대 고침을 받는 사람들의 모습만을 바라보면서 희망을 접었을 것입니다. 자신의 병은 너무 오래 되었고 고칠 수 없는 병이라고 체념 한 채 하루하루를 살아갔을 것입니다. 베데스다 연못가 환자 가운데 가장 중한 환자였습니다. 이 38년 된 중병 환자는 오늘 날 좌절과 절망 가운데 살아가는 현대인을 상징하는 지도 모릅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일어 설 수 없는 무력감에 빠진지 오래 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사람에게 찾아 오셨습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인간에게 찾아오시는 하나님으로 나와 있습니다. 아브라함을 찾아오시는 하나님, 바울을 찾아오시는 하나님, 죄인을 찾아오시는 하나님, 그 분이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찾아오십니다. 내가 가장 힘들고 고통스럽고 무력감에 빠져 있을 때 무관심하지 않으시고 찾아오셔서 엘리야에게 떡과 물을 주셨듯이 우리에게 힘을 주실 줄로 믿습니다.
2) 네가 낫고자 하느냐
예수님께서는 38년 된 병자를 고치시기 위해서 그에게 다가 갔습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아니 무슨 말입니까? 예수님! 이게 무슨 말입니까? 제가 낫지 않기를 원하고 있다는 말입니까? 낫지 않기를 원한다면 제가 이 자리에 있을 리 없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낫지 않기를 원하다니요? 말이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누구이십니까?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창주주이십니다. 그러므로 38년 된 병자의 심령 상태를 이미 아시고 그에게 물으신 것입니다.
이 병은 38년이나 되었기에 이미 그 사람은 마음은 원하지만 자신이 병이 오래 되었기 때문에 무슨 의사나 무슨 약을 사용하지 않했겠습니까? 그러므로 이 사람은 다른 사람의 병이 치료되는 것은 수없이 보아 왔지만 자신의 병은 중한 병이어서 고칠 수 없다고 하는 절망이 그의 마음을 차지하고 있었기에 주님은 그에게 “네가 낫고자 하느냐” 물으신 것입니다.
제가 20여 년 전에 경기도 안성 시골에서 약 6년 동안 목회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곳에서 저는 여러 가지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체험하기도 하였습니다. 기적도 많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한 번은 저희 교회에 그 집 딸이 열심히 나왔는데 어머니 간간히 교회에 나오던 분이 계셨습니다. 그 분은 술을 많이 드신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 분이 하루는 자기 집에 심방하러 오라 하여 그 집에 방문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작은 방으로 안내하여 들어 가보니 한 남자가 반드시 누워서 있었습니다. 그 분은 남편이었습니다. 방안에는 있기 힘들 정도의 찜찜하고, 이상한 냄새가 코를 진동하였습니다. 그 부인이 말씀하시기를 자신의 남편인데 그 당시 그렇게 누운 지가 제 기억으로는 8년 쯤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 동네는 감나무 동네입니다. 감나무가 많은데 가을에 감을 따기 위해서 감나무에 올라가다가 떨어져서 이렇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8년 동안이나 누워있으니 얼만 답답하겠습니까? 그래서 제가 물었습니다. 얼마나 답답하시고 힘드십니까? 그랬더니, 체념 하듯이 괜찮습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그 부인이 저를 당신의 남편께 인도 한 것은 예수님께 한 가닥 희망을 걸어보려고 한 것입니다. 그 당시 저희 교회에 나오신 집사님 가운데 원 집사님이 계셨는데, 그 분이 농약을 자시고 생명이 위독하셨는데 병원에서 죽음을 준비하라 하셨는데 목사인 저와 우리 성도들이 함께 기도하여 기적적으로 살아났습니다. 그 때 즈음입니다.
그러니까 그 부인은 젊은 전도사에게 무슨 능력이 있지 않을 까 하여 자기 남편에게 안내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제가 그 분을 위해서 예배하고 그 분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였는데 기도할 때 오는 감동은 그 분의 마음이 이미 얼음장처럼 닫혀 있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내 병이 오래 되었고. 다 손을 써 보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는데 무슨 대단한 사람이라고 일개 전도사가 내 병을 고칠 수 없다고 하는 그 사람의 마음이 나에게 전달되어 제가 생각하기를 어렵겠구나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물론 저에게도 예수님과 같은 능력은 없었겠지요? 하지만 중요한 것은 간절함이라는 것입니다. 간절함만 있으면 기적은 오늘 날도 일어납니다. 하나님은 역사하십니다.
2008년도 뉴욕타임즈, 아마존 종합베스트 셀러 1위 가장영향력 있는 사람 100인 가운데 선정된 미국 카네기 멜론 대학교 교수인 랜디 포시가 쓴 마지막 강의라는 책이 2008년에 출간 되었습니다. 이 책은 2006년 9월 췌장암으로 퇴임이 예정된 상황에서 마지막 강의를 한 것인데 학생들을 위한 것이 아니고 아빠 없이 이 땅에서 살아갈 자신의 자녀들을 위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어렸을 적에 꿈은 축구선수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축구코치는 자신에게 너는 틀렸다. 돌아가라, 다시해라, 너는 탈락이다. 라고 하며 책망했다고 합니다. 또 하나의 꿈은 대학을 졸업하고 디즈니 입사였는데 불합격 통지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하나 둘 쌓이면서 정말 열심히 공부를 해서 대학 교수가 되었고 디즈니에 꼭 필요한 기술을 개발해서 디즈니의 일원으로 알라딘의 마법 융단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는 꿈을 이루기 위해서 수없이 도전했고 이를 통해서 인생의 장애물이란 게 존재하는 지 배웠다고 하면서 장애물은 우리를 지나가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장애물을 통해서 우리는 그 꿈이 얼마나 간절한지를 깨닫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하다 보면 커다란 장벽에 부딪칠 때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벽에 주저앉습니다. 하지만 꿈을 이루고자 하는 사람은 절대 포기하지 말아야 하며, 그것이 간절함, 절실함의 증거, 즉 그 절실함이 장벽을 넘어 꿈에 도달하게 한다는 말입니다. 간절함이 그 어떤 장벽이나 장애물을 넘어설 수 있고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38년 동안 그가 누워 있는 동안 그의 마음속은 좌절과 절망으로 가득 차 있었을 것입니다. 그의 마음은 돌처럼 굳어 있었습니다. 그에게 희망의 빛은 없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간절함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네가 낫기를 원하느냐 물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네가 낫고자 하느냐” 라고 38년 된 자에게 물으신 것은 너에게 이러한 간절함, 절실함이 있느냐 물으신 것입니다.
3)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예수님께서 38년 된 병자에게 네가 낫고자 하느냐 물었을 때 네가 좌절과 절망 속에서 체념하지 말고 네 속에 간절함을 가지고 있으면 기적은 일어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대답에 38년 된 병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7절에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이 말속에는 불평과 원망에 소리가 담겨 있습니다. 내가 몸이 성하기만 하면, 누워있지만 않아도 내가 먼저 달려 갈 수 있을 것인데 그렇치 못하다는 것입니다. 저 사람들만 아니어도 나는 벌써 병이 나을 수 있었는데 저들 때문에 내가 이런 상태에 있다는 원망의 소리인 것입니다. 이러한 원망의 소리로 가득한 38년 된 병자에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8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일어나되 먼저 ”네 자리를 들고“ 말씀하십니다. 네 자리는 어떤 자리입니까? 38년 동안 좌절과 절망 가운데 눌러 앉아 있었던 자리입니다. 원망과 불평의 자리입니다. 낙심과 한숨의 자리입니다. 간절함이 없는 자리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미워하고 시기했던 자리입니다. 고통과 아픔의 자리입니다. 상처 난 자리입니다. 그 자리는 영적으로 교만한 자리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자리에서 과감히 떨쳐 버리고 일어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더 이상 그런 자리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하십니다. 과거의 자리에서 털고 새로운 세계를 향하여 미래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적으로 보면 38년 이라는 세월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생활한 시간인데 이 기간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얼마나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하였습니까? 그 결과, 그들은 가나안 땅을 밟지 못했으며 광야에서 다 죽었습니다. 그리고 광야에서 태어난 새 세대들만 약속의 땅을 밟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여호수아와 함께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정착하여 새로운 세계가 그들에게 열렸던 것입니다.
L.W. 커티스 박사는 <헬스컬쳐 Health Culture>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 ····메사츠세츠 주에 최초의 맹인 전통요양소를 건립할 무렵 위원회에서는 경비를 절약하기 위해 창문을 내지 않기로 했다. 환자들이 볼 수 없기 때문에 빛이 필요 없다는 논리였다. 창문은 없었지만 환기시설은 훌륭했다. 갈 곳 없는 맹인들이 하나 둘씩 병에 걸리고 기력을 잃어갔다. 이유도 없이 괴롭고 불안하고 무엇인가를 갈망했다. 모두가 병이 들고 두 사람이 죽자, 위원회에서는 창문을 내기로 결정했다. 햇빛이 건물 안으로 들어오고 맹인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맹인들은 활기차고 명랑해졌다. 그리고 건강도 회복되었다. ”
정신과 의사인 빅터 프랭클은 그의 책 <죽음의 수용소>에서 삶의 의미를 세 가지 방식으로 찾을 수 있다고 하였다. 1) 무엇인가를 창조하거나 어떤 일을 함으로써 2) 어떤 일을 경험 하거나 어떤 사람을 만남으로써 3) 피할 수 없는 시련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기로 결정함으로써 삶의 의미에 다가갈 수 있다
프랭클은 죽음의 수용소의 꽁꽁 얼어붙는 추위와 배고픔 속에서 살아남는 사람은 삶의 의미를 찾고 그 의미에 희망을 두고 살며 그 희망을 붙잡는 사람이었다고 말합니다. 내일을 향하여 희망을 가지고 있지 못하면 새로운 삶은 창조되지 않습니다. “인간의 존재가 가장 어려운 순간에 있을 때 그를 구원해 주는 것이 바로 미래에 대한 기대이다” 라고 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절망과 원망과 탄식 가운데 앉아 있습니까? 이런 자리에서 일어나 주님께로 달려 나올 수 있기를 바랍니다. 원망과 불평의 자리에서 희망과 긍정의 자리로 나올 수 있기를 바랍니다. 과거의 슬픔에서 소망의 미래로 나올 수 있기를 바랍니다. 불순종의 자리에서 순종의 자리로 나와야 합니다.
38년 된 병자에게 “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는 말씀은 바로 이런 뜻일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베데스다 연못가에 앉아 있는 사람들처럼 무력하게 잊지 말고 네가 낫고자 하는 주님의 물음에 장벽을 뛰어넘는 간절함으로, 38 년된 병자 처럼 과감하게 원망과 불평, 좌절과 절망의 자리를 털고 일어나 희망찬 미래를 향하여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013년 10월 6일 청주벧엘성결교회 정영진목사 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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