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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과 예수 /요5:9-18

gkffpffndi 2013. 10. 11. 17:24

 

율법과 예수 /요5:9-18

 

지난주에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좌절과 절망과 한숨 가운데 소망 없이 살아가던 38년 된 병자에게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므로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일어나 걸어갔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날이 안식일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안식일에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사건에 대하여 유대인들은 문제를 삼았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안식일 규정에 어긋났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해 예수님은 유대인의 율법을 파괴하는 자로 생각하여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데 까지 이른 것이다.

 

저는 이 시간에 본문 말씀을 배경으로 “율법과 예수” 이런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1. 안식일 규례에 관한 것입니다.

 

수천 년 전 유대교는 자신만의 유대 전승문헌인 토라, 미쉬나 게바라, 탈무드, 미드라쉬, 할라카, 아가다 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유대교에는 그들만의 법과 율법 종교 윤리 전설 철학 등 여러 가지 주제들을 포함하고 있다. 이러한 최고학식을 가르치는 선생, 혹은 지도자를 ‘랍비’ 라고 부르고 유대인들은 이들에게 이러한 지식을 배워 나갔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유대문헌 중에서 으뜸은 모세오경인 토라이다. 모세오경은 우리가 아는 대로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를 말한다. 이 토라에는 종교 철학 전설 윤리 도덕 등이 들어있습니다.

 

그런데 이토라에는 예를 들면 선언적으로 안식일을 지키라고 명령하지만 안식일에 일에 관해서 어디서부터 일이고 어디까지는 일이 아닌지에 대하여 세부사항이 명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랍비들이 이러한 토라의 내용에 관하여 실천할 수 있도록 해석을 덧붙이게 되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이 해석집이 방대한 양이 되어 내려오다가 서기 2세기에 미쉬나라고 불리면서 기록되었다. 이 미쉬나는 63권이며, 총 6개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제라임은 11권으로 농업에 관한 내용으로 적혀 있고, 모에드는 12권으로 안식일, 신년전, 성찬 등 축일에 관한 기록이며, 나쉽은 7권으로 결혼 이혼에 관한 설명, 네지킨은 10권으로 되어 있으며, 법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다. 코다쉼은 11권으로 많은 방식의 예배에 대한 설명이다. 그리고 이러한 토라를 해석한 미쉬나를 확대, 보충하여 부연 설명이 추가 되었는데 이것을 게마라라고 한다. 이 게마라와 미쉬나를 합해서 해석을 해 논 것이 탈무드이다. 이 탈무드는 유대인의 사상과 철학, 그리고 문화가 집대성한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미쉬나의 모메드에 나오는 안식일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 모메드에는 총 39개의 금지사항 적여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병을 고쳐서는 안 된다는 규정이 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가 자기들의 유대율법인 미쉬나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였기 때문에 예수님을 대적하였고 유대교의 적으로 간주하여 예수를 정죄 한 것입니다. 이러한 39 개의 금지 사항에 각 6개씩 해석을 붙여 234개의 조항을 만들어 사람들을 율법의 노예가 되게 하였습니다. 예를 들면, 안식일에는 2000 규빗 이상 걸으면 죄가 됩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에 보면 행1:12을 보면 “감람원이라 하는 산으로부터 예루살렘에 돌아오니 이산은 예루살렘에 가까와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길이라” 는 기록이 있습니다

 

또한 서기관은 안식일에는 빈대가 옷에 있어도 털지 말라는 등의 엉터리 법을 만들어서 멍에를 씌었습니다. 여자가 끈을 자기 허리에 매는 것은 죄가 안 되지만 물통을 치켜 올리려고 허리에 매면 죄가 된다. 또 유대인 집주인이 문 밖에 유대인 거지가 왔을 때 동냥을 주는 것도 한 물건을 다른 곳으로 옮기려고 걸으니 죄가 된다고 합니다.

 

이렇듯 구전으로 내려온 미쉬나에 의해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 중에 하나가 바로 병 고치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이 38년 된 환자를 고친 사건은 병 고친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 날이 안식일이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안식일에는 일을 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0절에 보면.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라고 말하자 이 환자는 나를 낳게 한 사람이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했다고 말합니다. 이때까지 고침을 받은 38년 된 환자는 예수가 누구인지 몰랐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조상들이 하나님 말씀을 해석해 놓은 것으로 다른 사람의 자유를 제한하고 율법으로 옳아 매었습니다. 율법의 진정한 의미를 알지 못하고 율법의 전통과 형식만을 고집하는 유대인들에 대하여 예수님과 유대인과의 갈등은 점점 노골화 되고 심화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2:25-28절에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밀밭사이로 가시다가 이삭을 잘라 먹은 것을 보고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 즉 이삭을 비비는 일을 했다고 그것 가지고 시비를 거는 것을 봅니다. 이 때 주님은 다윗의 군사들이 배고픔 속에 아비아달 제사장 시절에 하나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만이 먹을 수 있는 진설병의 떡을 먹은 것을 비유로 안식일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막3:1-5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손 마른 사람을 고치신 장면이 나오는데 여기에서도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병을 고침으로 안식일을 범하게 되면 고발하려고 자신의 행위를 감시하는 유대인들을 향하여 4절에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물으시고 손 마른 사람을 고쳐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유대인들이 말하는 율법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계명이 아닌 사람의 유전으로서 사람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에 대하여 거부한 것입니다. 법이라고 하는 것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지 그 법이 사람을 해롭게 하고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즉 법보다 사랑을 더 중요시 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든 사람을 구속하고 자유를 제한하였기 때문입니다.

 

2. 안식일과 주일에 관하여

 

구약성경 출애굽기 20:8-11에 보면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 즉 너와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천지를 만드시고 제 칠일 째 되는 날에는 안식했기에 피조물인 우리 인간도 마땅히 하나님 안에서 안식을 누릴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유대인들은 이 말씀을 근간으로 하여 수천 년이 지난 오늘에도 안식일을 지키고 있습니다. 성경에도 보면 예수님과 사도바울도 안식일 규례를 따라서 회당에 가셔서 성경을 읽으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안식일은 금요일 해질 때부터 시작해서 토요일 어두워 질 때까지를 가리키는데 유대인들은 금요일 저녁에 모이면 가정예배를 드렸다고 합니다. 신명기6:4-9절에 있는 쉐마에 있는 말씀을 낭독하고 예언서와 시편을 읽고 기도하고 그리고 축도로 예배를 마쳤다고 합니다.

 

안식일은 십계명의 제 4계명으로서, 유대인들은 이 날을 거룩하게 지켰으며 또한 그 날을 하나님께서 분명히 복을 주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그러기에 수 천 년이 지난 오늘 날에도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지키고 있습니다. 유대교처럼 오늘 날도 안식일을 고집하는 교파가 있는데 우리가 아는 대로 제 칠일 안식일 교회입니다. 또한 안상홍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이들은 오늘 날도 주일 날 예배드리지 않고 토요일에 예배를 드립니다.

 

그들이 토요일에 예배를 고집하는 것은 구약성경을 기준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일에 예배드리는 정통교회를 비방하고 정통교회를 다니는 교인들은 구원받을 수 없다는 논리를 펴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 칠일 안식일 교회가 토요일에 예배를 드리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이런 문제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골2:16“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을 이유로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 17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 이니라 18 아무도 꾸며낸 겸손과 천사 숭배를 이유로 너희를 정죄하지 못하게 하라 그가 그 본 것에 의지하여 그 육신의 생각을 따라 헛되이 과장하고 19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받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시므로 자라느니라”

 

구약은 신약의 그림자입니다. 유대교의 절기나 안식일 논쟁으로 소모적인 논쟁을 할 때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주님도 안식일 논쟁을 일삼은 유대인을 향하여 인자가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독교가 탄생하기 전에는 구약의 율법을 따랐지만 이제 새 시대가 되어서 안식일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안식일의 정신과 의미가 더 중요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시기 전 까지는 안식일인 토요일에 예배 하였지만 예수가 부활하신 이 후에는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바꾸어진 것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안식 후 첫 날인 주일에 부활하셨기에 그래서 기독교에서는 유대교의 안식일을 대신하여 주일을 안식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에게 나타나신 날도 안식 후 첫날 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날도 안식 후 첫날 이었습니다. 밧모 섬에서 요한이 환상을 본 것도 안식 후 첫 날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초대 교회 교부들에 의한 기록에 보면 주일 에 예배를 드린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주후 98-118년 사도요한의 직계 제자이며 안디옥 교회 감독 이그나티우스의 마그네시아 사람들에게 보내 편지에서 “이제 안식일을 지키지 않고 주님의 날에 의해 살게 되었습니다.” 주후 100년경인 기독교 예배 지침서인 디다케에는 “주의 날은 특별한 날이므로 날마다 함께 모여 떡을 떼며 감사를 돌릴 것입니다.” 4세기 초 알렉산드리아 주교 페트로스는 “ 주일을 기쁨의 날로 지킨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그 날에 살아나셨기 때문이다. ”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구약의 안식일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주일로 대치되었습니다. 율법의 형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담겨진 율법의 정신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율법의 형식만을 고집한 유대인들인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신 것입니다. 기독교인은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야 합니다.

 

3. 예수는 율법보다 사랑을 더 중요시 하였습니다

 

이 세상에는 크게 나누어 두 가지 종류의 종교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율법종교이고 다른 하나는 사랑의 종교, 은혜의 종교입니다. 전자에 속하는 대표적인 종교는 유대교, 이슬람교, 안식일교, 안상홍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이들은 철저하게 율법을 준수해야 천국에 갈 수 있고 구원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안식일에 관한 것 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아는 대로 모세오경에다가 거기에 해석을 붙인 미쉬나, 그리고 게마라와 탈무드에 이르기 까지 엄청난 양의 율버을 준수하도록 강요 하였던 것입니다. 구약성경에 나와 있는 율법은 613개인데 그중에 ‘하라’ 는 것은 248개이고 ‘하지 말라는 것’ 은 365개입니다.

 

그러니까 구원은 이 613가지를 하나도 빠짐없이 다 지켜야 구원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불완전한 인간이 어떻게 이 613가지의 율법을 다 지킬 수 있습니까? 불가능합니다. 그런데도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 즉 바리새인들은 이러한 조상들의 유전까지 율법의 범주에 넣어서 사람들의 자유를 억압하고 고통스럽게 하였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그들의 잘못된 종교적 신념을 깨뜨리시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이러한 율법주의가 하나님의 뜻과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이들의 잘못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이러한 율법주의로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고 궁지로 몰아넣는 종교인들에게 대하여 마 23:13에 “화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도다”

 

이러한 율법주의 신앙관에 빠지면 다른 사람에 대해서 자신이 재판관이 되고 쉽게 판단하는 잘못을 범할 수가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사울입니다. 예수를 만나기 전 사울은 다메섹에 예수 믿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고 거기에 까지 달려가서 대제사장의 공문을 가지고 가서 잡으려고 하였습니다. 또한 사울은 초대교회의 최초의 순교집사인 스데반을 돌로 쳐서 죽이는데 가담하였던 사람입니다. 무엇이 사울을 그렇게 만들었습니까? 율법주의입니다.

 

그는 자신이 배웠던 유대교의 율법주의에 빠져 사람을 죽이는데 까지 가게 된 것입니다. 율법주의는 용서가 없습니다. 거기에는 정죄와 심판이 있습니다. 자기하고 다른 사람은 모두가 적으로 간주하여 심판의 대상입니다.

 

오늘 날 한국교회가 세상으로부터 배척당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율법주의 빠져 있지 않았나 하는 반성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강단에서 사랑과 용서보다 타 종교인이나 이방인에 대해서 유대인들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는 사람들이라고 무시하지 않았나 하는 것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전도하는 방법에 있어서도 처음 우리나라에 들어왔던 130여 년 전에는 ‘예수 천당’ ‘불신 지옥’ 이라는 구호가 전도하는데 효과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21C 포스트 모더니즘 시대에 과연 적당한 구호인가 하는 것입니다. 제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느냐 하면 개신교가 다른 사람이나 다른 종교에 대하여 이해하고 배려하는 마음이 적었다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주의를 배격하셨습니다. 그 예로 요한복음8:1-11절에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음행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선생님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혀 끌려 왔습니다. 모세는 율법에 의하면 이런 여자는 돌로 쳐 죽이라 하였는데 선생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 때 예수님께서 허리를 숙여서 땅에 손가락으로 뭐라고 쓰셨습니다. 그리고 허리를 펴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중에서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다시 땅에 쓰시니 예수님과 여자만 남았을 때 주님은 이 여인에게 11절에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셨습니다.

 

유대교나 이슬람은 율법종교입니다. 하지만 기독교는 율법종교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을 질타하신 것은 그들이 율법의 형식만을 고집하고 율법의 근본정신인 사랑을 외면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율법으로 정죄하고 심판하는 율법종교에 종지부를 찍으시고자 십자가로서 당신의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여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과 은혜를 보여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교회는 주님의 사랑을 보여 주기보다는 율법주의에 머물러 다른 사람에 대하여 쉽게 정죄하고 판단하는 잘못을 범하지 않았는지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제 칠일 안식일 교회나 안산홍 하나님의 교회에서는 안식일을 고집하고 안식일을 주일로 지키는 정통교회는 구원이 없는 것처럼 말하는 율법주의에 빠져 있습니다. 우리가 바로 알아야 하는 것은 율법을 앞세워 우리의 형제를 심판하거나 정죄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갈2: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안식일이냐 주일이냐? 율법이냐 예수이냐입니다. 예수는 분명히 사랑을 말씀하셨습니다. 율법은 정죄하고 심판하지만 복음은 용서와 사랑입니다. 남을 쉽게 판단하고 정죄하는 자리에서 벗어나 예수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2013년 10월 13일 청주벧엘성결교회 정영진목사 주일설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