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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지자 세례요한 요3:22-30

gkffpffndi 2013. 9. 19. 11:04

선지자 세례요한 요3:22-30

 

요한 사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심판하려는 것이 아니고 이 세상을 심판에서 구원하고자 하신 다고 했습니다 세상이 심판 받는 이유는 빛 되신 예수님이 오셨지만 그들이 자신의 행위가 악하므로 예수님을 영접 지 아니 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자신들의 행위가 악하기 때문에 어둠의 행위가 말씀의 빛으로 인해 들어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은 악한 자에게 속하여 있어서 어둠을 좋아 하기 때문입니다.

이 어두운 세상에 빛 되신 예수님을 증언한 사람이 있습니다. 세례요한입니다. 이 세례요한은 당시 최고의 권력층인 헤롯 안티바의 불륜을 지적한 죄로 목숨을 잃고 순교하였습니다.

 

이 시간에는 선지자 세례요한에 대하여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성령 충만했습니다.

 

구약성경 말라기 이후에 약 400년 동안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이 사라지고, 없었던 시기에 마지막 때에 하나님께서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의 길을 예비하는 전령자로 이 땅에 보내신 마지막 선지자이다. 이 세례요한을 하나님께서 특별히 선택하셔서 이 땅에 보내신 것을 알 수 있는데 그것은 그의 출생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세례요한의 아버지는 제사장으로서 사가랴였으며 어머니는 엘리사벳이었다. 제사장 사가랴가 제사장의 전례를 따라서 분향하러 올라갔다가 주의 사자인 천사가 그에게 나타나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가랴야 무서워 하지 말라, 너의 간구함이 들려서 하나님께서 너에게 아들을 주실 것인데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그러면서 그로 인하여 너도 즐거워하고 많은 사람이 그의 태어남을 기뻐하리라“

 

천사가 말하기를 그는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아니할 것이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많은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할 것이다. 이 일 후에 세례요한의 아버지인 사가랴가 말을 하지 못하고 직무를 다하고 집으로 돌아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 그의 부인 엘리사벳이 임신하고 요한을 해산하였는데 팔일이 되어서 아이를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사가랴로 이름을 지을 려고 하였으나 아버지 사가랴가 서판에 이름을 쓰기를 요한이라고 쓰자 사람들이 다 놀라게 되었는데 그것은 그의 어머니 엘리사벳이 생각한 것하고 같았기 때문입니다.

 

이후 세례요한에 대하여 성경은 그가 심령이 강하여 졌다고 말하고 그가 빈들에 있었다고 말합니다.

 

성경에 세례요한의 성장과정에 대하여 자세히 나와 있지 않기 때문에 어떤 생활을 한지는 알 수 없지만 문헌에 의하면 세례요한은 쿰란 공동체에 속해 있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쿰란 공동체란 에세네파로서 그 당시 경건한 공동체로 오전에는 정결의식과 성경을 필사한 공동체인데 오늘날 성경 사본은 쿰란 공동체에서 필사한 것들이 많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곳 쿰란 공동체에서 생활한 세례요한이 마태복음 3:1에서 광야에서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광야에서 나타난 세례요한이 어떤 메시지를 전했습니까? 그 당시 기득권자인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을 향하여 “독사의 자식들아” 라고 외치면서 회개를 촉구하고 있습니다.

 

세례요한은 그들에게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말하면서 속으로 너희들이 우리는 선택된 민족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자부하지 말라고 강하게 비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여기 길가에 떨어진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들 수 있다고 하면서 그 당시 기득권자인 종교지도자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여 있으니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말합니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는 찍어서 불에 던져 버리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뒤에 오시는 분은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울 것이라고 말합니다.

 

요한의 메시지는 회개의 메시지였습니다. 그런데 이 요한의 회개의 메시지를 듣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 강 사방에서 나와서 그에게 자신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400년 동안의 침묵을 깨고 나타난 선지자 세례요한의 메시지가 회개의 메시지 였다고 하는 것은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오늘의 이 대한민국에 세례요한 같은 선지자를 보내신다면 이 시대에 어떤 메시지를 주시겠습니까? 20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사람의 죄 성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도 아마도 “회개하라”고 외쳤을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회개해야 하는 지는 우리들 각자가 하나님께 기도하면 생각나게 하실 것입니다. 회개할 때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회개한 자만이 천국백성이 될 수 있습니다. 회개할 때 성령 충만하게 됩니다. 성령 충만 하면 만사가 형통합니다. 하는 일이 잘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 모두 성령 충만하여 담대하게 주의 복음을 거리낌 없이 전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청빈한 삶을 살았습니다.

 

세례요한의 삶에 대하여 마태기자는 3:4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이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을 먹었더라.”

 

지금부터 2000년 전에 생활이 얼마나 열악했는지 우리는 알 수 없지만, 대부분의 서민들은 비참한 삶을 살았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킨 장소도 빈들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굶주림을 채울 길 없어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곳에서 배를 채웠던 대다수 사람들의 민중들은 가난한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당시 모두가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왕족이나 귀족, 그리고 대제사장이나 종교지도자들은 호화롭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였습니다. 우리가 아는 로마 황제 네로가 있지 않습니까? 언젠가 로마에 갔을 때 네로 황제가 쓰던 목욕용기가 전시 되어 있었는데 사기그릇으로 되어 있는데 엄청나게 큰 욕조가 있었습니다. 2000년 전에도 지배계급에 속한 사람들은 오늘 날 시대에가 못지않은 향락과 사치 속에 호화롭게 살았습니다.

 

대부분의 민중들은 가난과 궁핍과 질병 속에 살아가야 했습니다. 세례요한은 자신의 아버지가 제사장으로서 그 당시 넉넉한 생활을 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버리고 광야에서 생활하므로 선지자로서의 야성과 영성을 소유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만약에 세례요한이 편안하고 안락한 생활을 하면서 사람들에게 회개의 메시지를 전했다면, 그의 메시지가 호소력을 가질 수 없었을 것이고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오늘 날 한국교회가 비판의 대상이 되는 것은 한국교회가 너무나 물질적으로 부유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것은 대부분의 미자립교회나 개척교회에는 해당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오늘 날 세상이 한국교회를 바라보는 시각은 수백억내지는 수천억을 들여서 교회건축을 하고, 과도하게 대출받아지은 건축으로 인해 교인들은 부담이 되어 교회를 떠나고 이러한 교회건축은 교회세습으로 이어지고 있는데 이렇게 무리하게 교회를 크게 지은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앞세우지만, 결국 이런 교회는 자신의 아들에게 물려주는 것을 봅니다.

 

이런 교회들이 한국교회의 대표적인 교회들입니다. 물론 자녀가 뛰어나서 또 교회가 원해서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교회를 자신의 소유로 생각하는 데서 오는 것입니다. 작은 교회일 경우에 그렇게 까지 자식에게 물려주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자신의 교회를 물려주는 경우는 대부분은 엄청난 물질과 명예와 권력이 함께 따라오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아들을 참 목자로 만들려면 오히려 세례요한처럼 자신의 안락한 삶을 포기하고 광야에서 영성을 키워야 할 것입니다. 오늘 날 한국교회가 지탄의 대상이 되는 것은 목회자가 참 영성, 즉 사막의 영성, 청빈의 영성을 소유하지 못하고 세속화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날 한국교회 강단에서 선포되어 지는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회개의 메시지는 없고 물질적인 풍요와 안녕과 성공과 부 만을 강조하는 메시지가 주류가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교인들도 성공만을 위해서 쫓아가다 보니 세속화되어지고, 세상 사람들로부터 비난과 멸시와 조롱을 받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도 부천에 어느 대형 교회 목사가 집을 8채를 보유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부동산 투기도 하여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다는 방송이 보도 되었습니다. 이런 내용들을 보면 이것은 순전히 물질 때문에 일어난 일입니다. 교회 건축을 하는 과정에서 무리하게 부채를 지고 이 부채를 해결하기 위해 땅 투기를 하고 이로 인해 거룩한 교회가 분쟁이 일어나서 세상에 알려져 주님의 영광을 훼손하고 있는 일들이 한국교회에서 반복적으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일들은 교회에 물질이 넘쳐서 일어나는 부작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가 목사가 분에 넘치게 살면서 세상에 대하여 선지자적인 메시지를 전할 수 없습니다. 부유하고 넉넉한 곳에서 사막의 영성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물론 모든 교회가 목사가 부유해서는 안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지나칠 정도로 욕심을 부리는 것은 탐욕이며 이것은 죄악입니다. 오늘 날 교회가 세상에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는 교회가 너무 부유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세례요한의 영성을 우리가 소유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청빈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너무 가진 것이 많습니까? 나누어 주세요. 집안에 썩혀 두지 마세요! 오늘 우리는 너무 가지고 있어서 문제가 됩니다. 불필요하고 너무 많은 것들은 버리고 나눌 수 있는 영성, 세례요한처럼 청빈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3) 자신의 사명과 역활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세례를 베푸신 것을 볼 수 있다. 22절에 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유대 땅으로 가서 거기 함께 유하시며, 세례를 베푸시더라. 그런데 요한도 살렘 가까운 애논에서 세례를 베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한의 제자들이 가만히 보니 당신의 선생인 세례요한이 세례는 원조인데, 원조 선생인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는 사람들보다 갈릴리 나사렛 새파란 청년 예수에게 세례를 받는 사람들이 더 많은 것입니다. 이것을 본 요한의 제자들이 세례요한에게 충동질합니다. 선생님! 선생님한테 세례를 받았던 예수라고 하는 청년에게 사람들이 세례를 받으러 가는데 선생님께 오는 것보다 더 많습니다!.

 

이 말은 들은 요한은 무엇이라고 말했습니까? 요한도 사람이기 때문에 자신의 인기보다 예수의 인기가 치솟을 때 시기하고 질투할 수 있겠지만 요한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27절에,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얼마나 멋있고 여유 있고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는 말입니까? 세례요한은 자신의 역할과 사명을 알았습니다. 자신은 사명은 “광야의 외치는 자의 소리” 임을 알았습니다. 자신의 역할을 안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의 뜻은 예수님에게 사람들이 많이 가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그 만한 권위를 주신 것이다. 그에게 사람들이 몰려드는 것은 당연하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러한 여유와 남을 포용하고 인정하는 마음이 있으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행복한 세상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그러치가 못합니다. 남이 자신보다 잘되고 성공하면, 인정해주기 보다는 시기하고 질투하게 됩니다.

 

세례요한은 자신의 역할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았습니다. 자신은 메시야, 즉 그리스도가 아니고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 이다고 말하면서 자신은 신랑이 아니고 신랑의 친구로서 신랑이 신부를 취하는 것으로 기뻐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자신은 신랑이 신부를 취하는 것만으로 기뻐하고 즐겁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자신의 사명과 역할이 어디까지 인지 분명히 알고 자신은 메시야가 아니고 메시야를 위해서 존재하는 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자신은 낮추고 예수님을 높이는 것을 봅니다.

 

사실 그 당시에 세례요한이 예수님에 대해서 인정해 주지 않았다면 세례요한의 제자들과 예수님의 제자들 사이에 갈등이 심했을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사역에 많은 고충이 따랐을 것입니다. 하지만 세례요한은 자신이 많은 사람들에게 인기를 누리고 자신의 명성을 누릴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 자신이 지금까지 쌓아온 명성을 예수님께 이양하고 자신은 무대 위에서 사라지는 것을 봅니다.

 

여러분! 이것이 쉽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자신이 한 일에 대하여 이익을 얻기를 원하지 자신이 이루어 놓은 것을 다른 사람에게 쉽게 넘겨주기가 쉽지 않습니다.

 

세례요한은 더 나아가 30절에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자신의 역할은 여기서 끝나고 예수의 역할은 이제부터 시작되는 것이기 때문에 자신은 망해도 예수님은 흥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마11:11절에서 여자가 낳은 자중에 가장 큰 자라고 말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교회 안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의 이름을 빌려 자신이 흥해 볼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출세하고 성공하고 자신의 명성을 쌓으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반면에 세례요한처럼 자신은 죽고 예수를 높이는 사람입니다. 자신은 쇠하여 지지만 하나님을 높이고 주님의 영광과 교회의 영광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종류의 사람입니까? 자신의 영광과 명예를 위해서 살아갑니까? 아니면 교회의 영광,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갑니까? 나와 내 집만 흥하기를 위해서 살아갑니까? 아니면 나는 쇠하여도 하나님의 교회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갑니까?

 

오늘 날 우리 사회가 나 자신만을 위해서 살아가고 내정당의 이익만을 추구하다 보니 사회가 혼란스럽고 정치가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국민에게 평안한 삶을 주지 못합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이 누구입니까? 나는 쇠하고 주님의공동체는 흥하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내 명예나 이익을 잃어도, 주님의 영광이나 명예나 이익을 앞세우는 사람일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교회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세례요한처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이런 정신으로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프라 윈프리는 자신의 삶의 롤 모델을 성경에 나오는 모세라고 말하면서, 자신은 가난함도 부유함도 꿈도 근심도 자신에게 부닥치는 모든 것을 사명으로 받아 들였고, 그녀의 자서전 ‘이것이 사명이다’에서 자신의 인생철학 네 가지를 말했습니다.

 

첫째, 남보다 더 가졌다는 것은 축복이 아니라 사명이다.

둘째, 남보다 아파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고통이 아니라 사명이다.

셋째, 남보다 설레는 꿈이 있다면 그것은 망상이 아니라 사명이다.

넷째, 남보다 부담되는 어떤 것이 있다면 그것은 짐이(문제) 아니라 사명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선지자 세례요한에 대하여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그는 성령이 충만하였습니다. 그는 청빈한 삶을 살았습니다. 이 세상에 것에 너무 욕심 부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자신의 사명과 역할에 충실하였습니다. 우리 모두 이 시대에 세례 요한의 정신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발바니다. 2013년 9월 22일 청주벧엘성결교회 정영진목사 주일설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