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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들을 부르심 /요1:35-51

gkffpffndi 2013. 8. 7. 14:35

제자들을 부르심 /요1:35-51

 

오늘 본문 말씀은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주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사역을 위해서 제자를 삼으시는 내용입니다. 사도요한은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는 나사렛 출신의 이 젊은 청년은 단순히 사회를 개혁하는 개혁자나 어리석은 민중을 선동하는 운동가나 로마권력에 항거하는 민족주의자가 아니라, 지상에 하나님 나라의 구현과 인간구원을 위해 이 땅에 오신 구약에 예언된 메시야요, 구세주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제 세례를 받으심으로 공적사역의 인증을 받은 예수님은 이제 지상에서의 하나님 나라의 사역을 위해서 제자를 부르시는 내용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주님이 어떻게 제자를 부르시고 헌신한 동기가 무엇인지 이 시간 말씀을 중심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와 보라 (come and see) 입니다.

 

제자를 부르시는 장면이 공관복음에는 다르게 나와 있습니다. 마태복은 4:18-22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 잡는 시몬 베드로와 그의 형제 안드레에게 자신을 따라오라고 말씀하심으로 제자 삼는 내용이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두 형제 세배대의 아들 야고보와 형제 요한도 주님이 부르시는 장면이 나와 있습니다. 세배대의 아들인 요한이 바로 요한복음을 기록한 사도 요한입니다.

 

하지만 요한복음에서는 그 이전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전에 있었던 상황이 상세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본문 말씀 속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수제자였던 시몬 베드로와 그의 형제 안드레가 세례요한의 제자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35절에 “또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중 두 사람과 함께 섰다가” 예수가 마침 거리에 지나가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 두 사람 중 한사람이 자신의 형 시몬을 예수님께 인도한 안드레였습니다. 그러니까 안드레는 원래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전에 세례요한의 제자였습니다.

 

세례요한의 위대함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보통사람 같으면 자신이 공들여 키운 제자를 다른 사람이 빼앗아 간다고 생각하면 그 사람과의 관계가 악화 될 것은 뻔 한일입니다. 하지만 세례요한은 그렇게 사람이 옹졸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무엇보다 자신의 시대가 마감하고 새로운 시대가 열리고 있음을 깨달은 것입니다.

 

자신의 러더쉽을 마감하고 새로운 지도자에게 자신의 리더쉽을 이양해야 할 때임을 알았습니다. 자신의 사명은 예수 이전까지임을 깨달아 알았습니다. 세례요한은 자신의 시대가 마감하고 예수 시대가 도래했음을 안 현명한 지도자였습니다. 자신이 물러 날 때가 되었음을 깨달은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은 세례요한을 향하여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라고 칭찬 하신 것입니다.

 

이제 본문으로 돌아와서 보면 세례요한의 두 제자 가운데 하나는 안드레인데 다른 하나는 이름이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학자들은 이 한 사람이 요한복음에 자주 등장하는 주님의 ‘예수께서 사랑했던 제자’ 인 사도요한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째든 이 두 제자가 세례요한의 제자에서 예수님을 쫒는 제자로 설정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어쩌면 세례요한이 자신보다 주님을 따르도록 보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지나가자 세례요한은 36절에 “보라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라고 말함으로써 구약에 예언된 메시야가 바로 나사렛 예수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소리를 들은 두 제자는 곧 바로 예수를 따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두 제자가 예수님을 계속해서 따라오자 주님이 묻습니다. 도대체 나를 따라오는 이유가 무엇인가? 즉 네게 무엇을 원하는냐? (What do you want? 우리가 예수의 제자가 되려면 예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그리고 예수님에게 무엇을 구하려고 하는지를 분명히 알아야 주님의 참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이 질문에 두 제자는 선생님이 계신 곳이 어디 입니까? 저희가 그곳에 가서 말씀을 듣고자 합니다. 여기 길거리에서 주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지 않습니까? 주님을 배우려면 적어도 주님과의 평안한 가운데서 시간적인 여유를 가져야 진리에 이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런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배우려면 적어도 주님과의 대화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주님과의 깊은 대화를 위해서는 상당한 시간의 투자가 필요한 것입니다. 길거리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정도 가지고는 하나님을 깊이 알 수 가 없고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적극적인 믿음생활이 필요하다 이 말입니다.

이런 두 제자의 질문에 예수님이 대답하셨습니다. “와 보라” (Come and See) 주님의 초청입니다.

 

여러분! 유력한 사람이나 유명 음악회에 초청 받을 때 기쁨 있지 않습니까? 대단한 자긍심이 발휘 됩니다. 대통령이나 장관이 여러분을 초청해서 여러분과 1시간 동안 시간을 내서 대화 한다고 생각해보세요. 영광이지 않습니까? 얼마 전 세계적인 투자의 귀재라고 불려지는 워런 버핏 과의 점심식사를 위해서 2억 5000천만원을 지불한다고 하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비싼 점심인데도 수많은 사람이 예약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 분과 점심 한 끼 먹으면서 많은 시간을 할애해서 얻는 정보가 그 만한 가치를 상회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예수님과의 대화가 그것과 비교가 될 수 있겠습니까? 두 제자는 그 날에 예수님을 따라갔고 밤새도록 대화 한 결과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41절에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라고 자신의 형인 베드로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형! 우리가 구약에 예언된 메시야를 만났어! 메시야를 만났다구? 우연히 길거리에서 만나 밤을 새우며 이야기 해보니 그가 메시야였다니! 그런데 그가 나사렛 예수라니! 그들은 예수를 만남으로써 삶의 일대 대 전환이 이루어 졌고 새로운 인생이 시작된 것입니다. 이렇 듯 주님을 만나면 그의 인생은 변화되고 위대한 생애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와 보라! (Come and See) 는 주님의 부르심에 많은 영혼을 초대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나를 따르라 (Follow me)

 

안드레가 자신의 형 베드로에게 자신이 메시야를 만났다라고 증언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사건이나 충격을 받으면 그 사실을 증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안드레는 예수님을 만난 그 날 그 밤을 잊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꿰뚫는 신비감, 자신을 응시하는 자애로운 눈빛, 끊이지 않는 진리에 대한 이야기 등 보통 사람과는 다른 매력 속에서 안드레는 주채 할 수 없는 은혜와 감동의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지나온 인생에 있어서 잊혀 지지 않는 감동의 물결이 아직도 가시지 않는 사건들이 누구나 한 두가씩은 있습니다. 일생에 있어서 첫 결혼식, 첫 아이를 낳고 엄마가 되었을 때 기쁨, 멋진 음악회에 초청 받아서 갔던 가슴 뭉클한 감동, 사랑하는 사람과 멋진 여행에서의 추억등 말입니다. 이러한 감동은 쉬 잊어지지 않아서 사람들에게 그 때의 감동과 추억을 말하게 됩니다.

 

저는 지난 주간에 2012년 에 개봉된 영화는 2009년도 스타킹에 출연한 김호중의 씨의 인생역전을 영화화 한 파바로티를 집에서 인터넷에서 시청하였습니다. 이 영화는 건달 출신인 배우 이제훈이 세계적인 성악가의 기질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기질은 교회에서부터 온 것이라는 것을 영화에서 잠깐 보여 줬습니다. 한 장명 내용 중에서 주인공이 교회에서 간 야외 수련회에서 참석한 장면이 눈에 들어 왔습니다.

 

원치 않은 깡패의 길로 들어섰지만, 노래 공부를 하려고 한 이 학생에게 스승인 배우 한석규씨가 그에게 먼저 노래이전에 인성을 가지는 것이 기본이라는 것을 깨닫게 한다. 노래를 배우려고 해도 학교선생님인 한석규씨는 가르쳐 주지는 않는다. 이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자신은 성악을 배우는 것을 포기하고 다시 깡패 소굴로 가려했을 때 깡패 가운데 선한 사람인 형이 선생님이 너를 조직에서 뻬달라고, 그러면 자신의 다리라도 내 놓겠다 했다는 말을 듣고 감동을 받고, 본격적으로 연습하여 참석하러 오던 중 다른 조직의 깡패들에게 맞아 제 시간에 도착하지 못하고 낭패를 당하게 됩니다. 이 와중에서 선생님은 자신의 학생을 한 번만이라도 연습을 정말 많이 했으니 무대에 올려 달라고 애걸하지만 담당자들에게 선생님이 번번히 제지당했다. 이 때 무대 뒤에서 자신이 연습한 곡으로 아름다운 선율로 노래를 불렀으나 입상하지 못했다. 이 말을 듣고 다시 선생님 품으로 돌아와서 본격적인 레슨을 시작해서 이탈리아로 유학을 보내게 됩니다.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이제훈은 선생님이 꿈이었던 곡으로 선생님이 주신 정장을 입고 세계적인 음악대회에 나가 자신의 이름을 알리게 되어 성악가로 대성하게 되는 내용입니다. 이 영화는 선생님과 학생, 스승과 제자와의 만남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아주 감동적인 내용의 영화입니다. 학생의 재능을 발견하고 그를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희생한 결과 위대한 성악가가 탄생한 것입니다.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만남입니다. 이 학생이 이 선생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여전히 범죄의 소굴에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선한 선생님을 만남으로써 그의 인생은 보석처럼 빛나는 인생이 된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를 만나느냐가 중요합니다. 누구를 따르는냐가 더 더욱 중요합니다.

 

오늘 인류가 따라야 할 영원한 스승이 있습니다. 그게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 인생을 밤하늘의 별처럼 아름답게 하실 분이 계십니다.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나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할 분이 누구이십니까? 예수 그리스도! 우리를 질병과 고통 속에서 자유케 하실 분이 누구이십니까? 예수 그리스도! 이 세상을 전쟁과 가난과 질병 속에서 건지실 분이 누구이십니까?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이 지금 여러분에게 말씀하십니다. 빌립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나를 따르라” (Fllow me) 말씀하십니다.

 

영화 파파로티처럼 주인공이 까다로운 선생님의 지도를 받기를 거부하고 그가 다시 깡패의 조직 속으로 다시 들어갔다면 그는 성악가로서 주목을 받지 못하고 그의 인생은 비참한 인생, 깡패인생이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깡패의 길을 버리고 스승의 지도를 받고 따름으로써 위대한 인생이 된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단순히 고기만을 잡는 인생이 되었다면 위대한 주님의 제자가 되지를 못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위대한 스승과의 대화를 통해서 메시야를 발견하고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즉시 따랐기 때문에 위대한 하나님 나라의 사역의 사도들이 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단순히 고기만을 잡는 인생에 머물러서는 위대한 인생이 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예수님은 오늘도 너의 길을 포기하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Follow me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음성에 즉각 순종하는 여러분이 되셔서 하나님 나라의 위대한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저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로다.

 

예수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실 때 거기에서 빌립을 만나게 됩니다. 주님은 빌립에게 “나를 따르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의 뜻은 지금 하던 일을 멈추고, 머뭇거리지 말고 즉시 “나를 따르라”는 의미입니다.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함께 뱃세다 사람인데, 그는 곧 바로 나다나엘에게 가서 자신이 만난 나사렛 예수가 구약에 예언된 메시야라고 증거하는 것을 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예수님이 제자를 부르시는 장면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이 안드레는 부르셨는데 안드레는 자신의 형인 베드로에게 자신이 메시야를 만났다고 증거함으로 그를 예수님께 데려 옵니다. 빌립도 자신이 만난 나사렛 예수가 구약에 예언된 메시야 라고 하면서 자신의 가까운 친구인 나다나엘에게 예수님을 소개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예수님의 전도방법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내 주변의 가까운 이웃이나 친척, 그리고 가족들에게 먼저 전해야 합니다. 이 말의 뜻은 내 가족이 다 구원 받고 난 이후에 이웃을 전도하고 친구를 전도하는 것이 아니라, 동시적으로 전도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니까 주님이 지상명령인 행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 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에서 순차적인 전도가 아니라 동시적인 복음 전파를 의미하는 것처럼 동시적으로 우리는 전도해야 합니다. 즉 내 가족이 구원받고 난 이후에 내 이웃과 친족을 하는 게 아니라, 동시적으로 한다, 이말입니다. 그렇치않다면 세계선교가 이루졌겠습니까? 그래서 단기선교도 가고 나가서 노방전도도 하고 그러는 것입니다.

 

본문으로 돌아와서 요한은 나다나엘에 메시야를 만났다고 고백합니다. 바로 그 사람이 나사렛 예수라고 말합니다. 이 말을 들은 나다나엘은 즉각 반응하기를 무슨 나사렛에서 선한 것이 나올 수 있겠느냐고 말합니다. 즉각적인 비난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내가 예수를 만났는데 그 분이 메시야라고 말을 하면 사람들의 반응이 어떨까요? 요즈음 같은 분위기에서 교회이야기, 예수 이야기 꺼내지도 말라고 입을 막을 것입니다. 미국에서 근무했던 간호사의 이야기입니다만 미국 병원에서도 환자들에게 종교이야기를 하지 못하게 되어 있다고 합니다. 주마다 다르겠지만 말입니다. 우리나라도 공공기관이나 학교에서 종교적인 담화를 하는 것을 금기시 하는 분위기입니다.

 

이런 사회적인 분위기에서 전도하는 방법도 세련되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사람으로, 세련되고 매너 있는 사람으로 각인되어야 그 사람이 전하는 예수를 받아들이지 않겠습니까?

 

사실 나사렛 이라고 하는 동네는 그 당시에 알려져 있지 않은 시골동네인 것입니다. 그리고 메시야는 베들레헴에서 나신 다고 했으니 나사렛 예수라고 하니 나다나엘의 귀에 들어 올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자신을 비판한 나다나엘을 향하여 예수님은 그를 칭찬하셨습니다. 뭐라 칭찬하셨습니까? 47절에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곳에 간사함이 없도다” 이 말을 들은 나다나엘은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습니다. 자신은 예수에 대하여 비난을 서슴치 안했는데 주님은 자신을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칭찬했으니 얼굴이 부끄러워졌을 것입니다. 이 때 궁금증이 폭발합니다. 나다나엘에 묻기를 어떻게 저를 아십니까? 예수님이 충격적인 말을 합니다.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나는 네가 무화과 나무아래에서 있을 때 보았노라”

 

자신을 향하여 참 이스라엘 사람이요, 간사한 사람이 아니라고 한 것도 몸 둘 바를 모르겠는데, 자신이 무화과나무에 있었던 것 까지 아는 통찰력과 예지력에 그만 꼬꾸라졌습니다. 그리고 즉각 그는 49절에 “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라고 고백합니다.

 

예수님의 칭찬을 받은 이 나다나엘이 후에 주님의 제자가 되었음은 말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성경학자들은 이 사람이 “바돌로매” 라고 하는데 이 말의 뜻은 아람어로 “톨마이의 아들” (son of Tolmai) 이고 그의 본명은 나다나엘 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보면 불같은 성격의 베드로, 계산이 빠른 빌립, 차분한 안드레, 간사함이 없는 나다나엘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간사함이 없다는 말은 정직하다는 말입니다. 순수하다는 말입니다. 이중적이지 않다는 말입니다. 주님이 나다나엘을 부르시는 모습을 통해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단점보다 장점을 칭찬해주고 그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어떤 사람이 한 식당에서 식사를 하려고 식당에 들어가는데 창문 밖에서 식당 안을 쳐다보는 한아이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분은 그 아이에게 얘야 뭘하니? 자 나랑 같이 들어가서 식사하자! 하면서 식당 안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리고 주문을 시켰습니다. 그러고서 애냐 먹어라! 그런데 이 소년이 먹지 않고 창밖에만 쳐다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왜 그러고 있니 먹지 않고! 했더니 저 창문을 가리키면서 저 아이가 제 동생 이예요! 동생이 굶고 있는데 어떻게 저 혼자 먹을 수 있겠어요? 그러더랍니다. 그 말을 들은 이 사람은 그럼 동생을 데리고 들어와! 했더니 맛있게 음식을 먹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지금 내 가족이 지옥의 길로 걸어가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냥 가만히 있으렵니까? 시간이 지나가면 해결되는 것입니까? 먼저는 주님께 와 보라고 초청해 보십시오. 그리고 주님을 따르는 자가 되십시오. 그리고 나다나엘처럼 칭찬해 주고 순수하고 정직한 사람이 되어보십시오. 그리하여 주님의 참 제자가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2013년 8월 11일 청주벧엘성결교회 정영진목사 주일설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