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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로보니게 여인의 믿음 막 7:24-30

gkffpffndi 2013. 5. 29. 09:24

수로보니게 여인의 믿음 막 7:24-30

 

예수님께서 갈릴리 지역을 떠나 두로 와 시돈 지역인 이방사람들이 거주하는 곳으로 이동하신 것은 예수님의 사역이 이방인을 향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두로 와 시돈은 지중해 변에 있는 항구 도시로써 최초의 도시국가연합의 페니키아로써 최초로 알파벳을 만들어 그리스와 로마로 전한 나라입니다. 페니키아 사람들은 자신을 가나안 사람이라고 불렀으며 페니키아란 뜻은 조개패에서 나온 자주색 염료를 일컫는 말입니다. 그 당시 지중해 해상 무역을 통해 많은 부를 축척하였습니다. 이곳에 휴식을 취하기 위하여 한 집에 들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곳 까지 예수님의 소문이 퍼져 있어서 그곳에 자신의 딸이 귀신들려 고통에 있는 한 여인이 예수님 발 앞에 엎드렸습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을 향하여 귀신들린 자신의 딸을 고쳐 달라고 간청하는 내용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저는 이 시간 ‘수로 보니게 여인의 믿음’ 이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적극적인 믿음

 

본문 26절에 보면, “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 자기 딸에게 귀신 쫒아내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여기서 헬라인이라고 하는 것은 이방여인임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수로 보니게 족속이라는 말은 수로는 ‘시리아’ 보니게는 베니게라는 말로 페니키아를 가르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수리아지방에 페니키아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마태복음 15장에서는 이 여인을 가나안 여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이 여인은 이방여인으로써 하나님을 알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살던 지역은 이스라엘과 접경지역이기 때문에 예수의 소문이 이 지역까지 퍼져서 이 여인은 이 기회에 자신의 귀신 딸을 고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유대인이 이방인들을 어떻게 대하는 지 알 수 있습니다. 사마리아 우물가에서 예수님은 수가 성 여인과의 대화를 통해서 유대인들과 사마리아 인들과 상종치 아니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마리아인은 같은 민족인데도 그러한데 이방민족인 이 수로보니게 여인에 대하여 이 여인과의 대화에서 알 수 있듯이 유대인들은 ‘개’라고 표현함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이 3가지 감사하는 내용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 이방인으로 태어나지 않은 것에 대해서 감사하고, 둘째는, 여자로 태어나지 않은 것에 대해 감사하고, 셋째, 노예로 태어나지 않은 것에 대하여 감사한다고 합니다.

 

이것을 보면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에 대한 편견이나 요즈음 말로 인종차별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도 급격한 외국인 노동자들이나 국제결혼 등으로 인해서 다문화 가정이 많아지고 거기에 따른 사회적 편견이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이런 인종차별내지는 민족적 편견이 예수님 당시에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방인이 이 여인이 유대인인 예수님에게 나오기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여인이 예수님 앞에 나와서 자신의 귀신 들린 딸을 고쳐 달라고 한 것은 이러한 사회적 편견이나 민족적 차별의 두터운 벽을 뛰어 넘어 선 것입니다.이 수로보니게 여인은 이러한 사회적 종교적 인종적 편견을 넘어서 이 여인은 예수님께 나아갔습니다.

 

마태복음 15:22절에 보면,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 들렸나이다”

 

이 말씀 속에서 이 여인이 오직 귀신 들인 딸이 얼마나 급한지 다급한 목소리로 예수님을 향하여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큰 소리를 불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여인의 적극적인 믿음을 본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앞에 지나가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지나가셨지만 예수님의 발걸음을 잡아 놓기 위해서 적극적인 행동을 취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려면 이런 적극적인 믿음이 필요합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열정적인 믿음, 뜨거운 믿음 말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예수님에게 간절히 매달리고 간청하는데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반응은 싸늘합니다. 전혀 대답을 하지 않습니다. 한 마디도 말하지 않습니다. 옆에서 뒤에서 따라오던 제자들이 급기야 예수님께 말을 합니다. 예수님! 저 이방여인이 따라오면서 슬프게 간청하는데 뭐라도 한 말씀을 하여야 하지 않습니까?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시는 예수님에 대하여 이 여인은 포기하지 않고 더욱 소리를 질러 다윗의 자손이여 제 딸을 불쌍히 여겨 달라고 매달리는 것을 봅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자신에게 빨리 반응하지 않는다고 하여 발걸음을 돌렸다면 이 여인의 딸은 고침을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 여인은 자신의 부르짖음에 주님이 응답하실 것을 믿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몇 번 외쳐보고 포기하거나, 몇 번 기도하다가 낙심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나의 기도에 응답하실 것을 믿고 적극적인 믿음과 긍정적인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마7:7에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라.”

 

이 수로보니게 여인의 외침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딸을 고칠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심을 믿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수로 보니게 여인의 믿음은 적극적인 믿음이었습니다. 이 믿음을 소유하시기 바랍니다.

 

2) 환경을 극복하는 믿음

 

이 여인은 간절하게 부르짖어 예수님의 도움을 요청하는데 주님의 반응은 침묵으로 일관하다가 드디어 예수님의 입에서 한 마디를 하시는데 주님의 말씀은 위로의 말이나 격려의 말이나 소망을 주는 말이 아니고, 수로보니게 여인에게 마음의 큰 상처를 줄 수 있는 말이었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27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

 

이 말의 뜻은 앞서 말한 대로 유대인들은 이방인을 ‘개’로 표현했습니다. 왜냐하면 어떻게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지 못하냐는 것입니다. 하늘의 해와 달과 별들을 보고 공중 나는 새를 보고 자연만물이 주는 혜택을 누리며 살면서 이방인들은 하나님이 없다고 하며, 우주가 법칙에 의해서 그냥 돌아간다고 생각 하냐는 것입니다. 그러니 저들은 개 보다 못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이 말씀은 그 당시 유대인들이 생각했던 편견을 그대로 반영한 말입니다. 이 수로보니게 여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예수님은 다르실 줄 알았는데 전혀 그게 아닙니다. 이 말씀을 듣는 순간 보통 사람들 같으면 인격적 모멸감으로 인해 발길을 돌렸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여인은 이런 굴욕을 참아냈습니다.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이 여인은 상처 받지 않았습니다. 아니 이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이 여인은 이러한 환경을 믿음으로 극복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의 동화에 ‘새들의 불평’ 이라는 것이 있다. 창조주가 각양각색의 동물을 만들어 산과 들과 바다로 그들을 내려 보냈다. 그런데 새들은 입이 뾰로통하게 튀어나와 있었다. 우리는 신의 사랑을 받지 못했다. 호랑이와 사자를 보라. 그들에게는 튼튼한 다리와 날카로운 이빨이 있다. 왜 우리에게는 이렇게 가느다란 다리를 주셨는가 그리고 양 어깨에 ‘날개’ 라는 무거운 짐을 매달아 준 것은 무엇인가? 새들은 저마다 불평을 늘어 놓았다. 창조주는 빙그레 웃으면서 새들을 타일렀다. “너희들이 무거운 짐으로 생각하는 날개를 활짝 펴보아라.” 독수리가 맨 먼저 거추장스러운 짐으로 여겼던 날개를 활짝 펴 움직여 보았더니 그 순간 독수리는 깃털처럼 가벼워지면서 푸른 창공을 힘차게 날아올랐다. 새들의 양 어깨에 붙은 것은 ‘짐’이 아니라, 창공을 나르는 ‘날개’ 였다. 새들은 호랑이나 사자가 같지 못한 날개를 소유하고 있었다. 거칠 것 없이 드넓은 창공이 바로 새들의 삶의 터전이었다. 거추장스럽게 생각했던 짐이 바로 비상의 도구 였던 것이다.

 

‘하나님의 연주자’ “하나님이 나를 연주하시면 내 인생이 달라진다!”라는 이 책의 저자는 송 솔나무인데, 어린 시절 대치동에서 살았고 겨울이면 매년스키장에서 스키를 타고, 여름이면 서울 최고급호텔에서 수영을 하고 휴식을 취했으며, 해외여행이 자유롭지 못했던 1983년에 가족모두가 전 미국을 여행 할 정도의 풍족한 삶을 살았다. 하지만 어느 날 아버지 회사의 부도로 인해 하루아침에 집안은 몰락하여 미국에 피신하여 미국에서의 악몽 같은 생활이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자신은 공부도 못하고 자신의 누나는 한국에서 전교1등에 항상 누나의 그림자에 가려 누구의 동생이라고 불려 질 만큼 자신의 존재감은 없었다고 합니다. 미국에서도 어머니는 자신의 누나에게 음악 레슨을 시켰지만, 자신은 관심도 없었다고 합니다. 그는 미국에서 동양인이라 하여 악몽 같은 학교생활을 보냈는데 쉬는 시간만 되면 애들이 한 대 씩 툭툭 치고 가고 자신이 먹던 도시락에 우유를 붓기도 하고, 아이들에게 맞아서 귀가 찢어지기도 했지만 이런 환경 속에서 하나님께 화장실에 가서 울면서 기도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 따지듯이 하나님 왜 내가 이런 고통을 당해야 하나요? 왜 누나처럼 공부도 잘해서 엄마의 사랑을 받게 하지, 나는 공부도 못해서 맨 날 야단맞게 하나요? 울면서 부르짖어 기도했더니 성령님이 자신에게 오시는 것을 느껴지면서 ‘나무야, 내가 여기 있잖니 너와 늘 함께 있잖아 내가 너랑 친구 해주면 안 되니? ’왜 나하고 친구를 해주시나요? 모두가 날 싫어해요.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심지어 교회에서도 그래요 나는 태어나지 말아야 되지 않았나요? 실수로 태어난 건 아니냐구요!‘ ’그렇치 않단다. 나는 내 머리카락까지 세는 네 하나님이다. 내가 널 만들었단다. 이 사건 이후에 어느 날 밴드부의 연습소리에 한국에서 조금 배운 풀롯이 인연이 되어 밴드부에서 풀롯 연습을 하였습니다. 저자는 자신이 폴롯을 연주하기에는 불리한 신체조건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폐도 정상인들보다 좋지 않고 천식도 심하고, 왼손 새끼손가락은 남과 비교했을 때 한 마디가 더 짧다 십자인대가 파열된 오른쪽 다리는 한 번 더 수술해야 하고 이런 몸으로 연주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는 이렇게 말을 한다. 이런 연약함을 통해서 나는 예수님이 왜 똑똑한 사람들이 아닌 병든 자와 못 배 운자 죄인들을 찾아가시고 그들을 부르는지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은 강한다리와 손을 가 진자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순종하는 다리와 손을 원하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지금은 전 세계 80개국을 다니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연주하고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이 지금 어떤 환경에 있든지 하나님을 붙잡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환경을 극복할 수 있는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3) 자기를 낮추는 겸손한 믿음

 

예수님이 자신은 마15:24-26절에서 자신은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다고 하면서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다고 했습니다. 이 말의 뜻은 이 수로보니게 여인에게는 대단한 모욕적이고 자존심 상한 말이었습니다. 소위 인격살인 적인 말입니다. 도저히 참기 어려운 말이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사람들이 어떤 때에 화가 납니까? 자신의 자존심을 상하게 했을 때입니다. 심한 모멸감 내지는 굴욕적인 면박을 당했을 때입니다. 이 말의 뜻은 한 마디로 말하면 이방인인 개와 같은 너희들에게 하나님의 자녀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는 은혜를 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이 떨어지자 이 여인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막 7:28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맞습니다. 저는 그런 개와 같은 이방인입니다. 하지만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지 않습니까? 자녀들이 먹고 남은 부스러기라도 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 우리 딸에게 줄남아 있는 것 없습니까? 좋은 것이 아녀도 좋습니다. 이러한 말은 자신을 부정하지 않고서는 말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이 여인의 믿음을 시험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예수님의 시험에 합격한 것입니다. 이러한 대답은 자신을 낮추지 않고서는 나올 수 없는 대답입니다.

 

빌립보서2:6-8“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즉 예수님의 정신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어떤 사람입니까? 자기를 낮추는 겸손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높여 주시고 위대하게 사용하십니다.

 

우리 교단 삼성제일교회 전 과기처 장관이셨던 정근모 장로님이 이번에 “소명 앞에 무릎 꿇는 신실한 크리스챤들” 이란 책을 출판하셨는데 이 분은 1951년 제1회 국가고시에서 수석을 차지해 경기 중, 경기고를 수석입학하고 경기고등학교를 4개월 만에 졸업하고 서울대를 차석입학하고 석사과정은 생략하고 미시간 주립대학 박사과정에 들어가 2년 6개 월 만에 졸업하여 24살 때 미국 플로리다대학교 교수가 되어 교수들로부터 꼬마교수로 불리워졌다. 이런 이력으로 사람들은 그를 천재라고 했다. 그는 1974년 미국으로 건너가 간염 치료를 받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아들 진후가 만성 신장염을 앓게 되었고, 현대의학의 한계를 알고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 하였다. 1980년 아들에게 신장을 이식하고 여러 번의 고비를 넘기면서 신앙적으로 성장했고 고난을 통해서 그는 더욱 겸손해 질 수 있었다고 한다. 그는 말하기를 현대 과학이 하나님을 부정하지만, 최고의 과학자들은 모두가 신실한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이다. 그가 만난 지미카터, 억만장자의 길을 포기하고 전 세계 해비다트 운동의 창시자인 밀라드 풀러, 제임스 레이니 주한 미국대사, 고함 맘슈타트 박사, 하나님 말씀에 의한 국가건설을 꿈꾸는 존 바두흐 로잔 공대 총장 그 외 다수의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분야에서 최고에 오른 그리스도인으로서 모두가 겸손한 인격을 가진 신앙의 귀족들이다. 1월말이나 2월초에 미국의 수도 워싱턴에서 국가조찬기도회가 열린다. 대통령을 비롯한 3부요인 세계 각국에서 초청된 정. 재계 지도자들 4000여명이 일주일간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예수 안에서 우정을 돈독히 하는 기도모임이다. 그런데 이모임에 평생을 바쳐 봉사한 덕 코 박사가 있다. 20대에 이 일을 시작한 이 분은 온화한 미소와 밝은 모습으로 매달 600여 통의 편지를 쓰고, 매주 수십 회의 기도모임을 갖고, 끊임없이 걸려오는 전화를 받으면서, 50년 동안 지속적으로 해오고 있다. 그런데 이 분의 만남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몸에 밴 겸손이었다고 정근모 장로는 말하고 있다. 세계 각국의 지도자들과 교제하면서도 자신을 전혀 드러내지 않는다고 한다.

 

정근모 장로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어떤 학력이나 경력보다 크리스챤인 것을 가장 자랑스러운 이력으로 생각한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특권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수로보니게 여인의 믿음은 어떤 믿음이었습니까? 적극적인 믿음입니다. 환경을 극복한 믿음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낮추는 겸손한 믿음이었습니다. 우리 모두 이 여인의 믿음을 소유하므로 “주님께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칭찬받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013년 6월 2일 청주벧엘성결교회 정영진목사 주일설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