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된 그리스도인의 생활 골3:1-17
이 서신은 바울이 전해들은 골로새 교회에 대하여 골로새에 가는 두기고 편에 AD62년경에 전해진 서신이다.
골로새라는 도시는 에베소에서 내륙으로 약 100마일 정도 떨어진 곳이며 라오디게아와 히에라볼리에서 가까운 초대 기독교의 중심지였다. 이 골로새 교회는 바울이 직접 세운 교회는 아니고 바울이 에베소에서 복음 전파를 할 때 그 곳에 와 있던 골로새 출신 에바브라가 바울의 제자가 되어 자신의 고향에 가서 세운 교회이며 빌레몬의 집에서 시작되었지만 한번 도 바울은 방문 한 적은 없다.
바울은 골로새 교회에 이단인 거짓교사들에 의해서 흔들리던 성도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오 교회의 머리이시며, 그는 만물보다 먼저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창조되었다고 말씀합니다. 이 하나님의 구원의비밀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났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 받아 새사람이 된 거룩한 성도들은 옛 사람을 버리고 새사람을 입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오늘 본문은 새 사람 된 성도의 삶은 어떠해야 하는 지 말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저는 이 시간 참된 그리스도인의 생활이 무엇인지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위에 것을 생각하며 사는 자입니다.
헬라어로 사람을 ‘안트로포스’라고 하는데 이는 ‘위를 바라보는 존재’ 라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사도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에게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이제 부터는 새 생활을 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새 사람 된 성도는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라고 말한다. 위에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이 계신 천국’을 사모하는 삶을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도 이 땅이 전부가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가 계신 영광의 나라가 있음을 알리기 위함입니다. 땅에 것이 전부인양 살아가는 인간 군상들에게 눈을 높이 들어 하늘을 바라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늘에는 하나님 아버지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사57:15절에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거하나니”라고 하셨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많은 사람들은 하늘을 바라보았습니다. 아브라함도 하늘을 바라보고 믿음을 가졌습니다. 사도요한은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본다고 했습니다.
하늘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땅에 것에 집착하거나 욕심 부리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본 사람들은 이 땅에 것을 과감히 버립니다. 사도바울이 그런 사람이 아닙니까? 그는 이 영광의 나라에 참여하기 위해 자신의 신분이나 명성이나 아니 목숨까지도 초개처럼 버리고, 단두대의 제물이 되어 기독교 역사상 위대한 사도가 되어 우리에게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역사학자 토인비가 말했듯이 바울이 탄 배가 오늘 날 기독교 유럽문명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지난 1월 9일자 국민일보에 기독교인들에게 널리 알려진 베스트셀러 ‘내려놓음’의 작가인 이용규 선교사의 근황이 기사가 되어 보도 되었습니다. 그는 서울대와 하버드 대학 박사과정을 마치고 유수한 교수자리가 보장되어 있는 길을 내려놓고 황무지와 같은 몽골지역에 들어가서 몽골국제대학을 세우고 그곳에서 사역을 마치고 하나님께서 이번에는 이슬람 국가인 인도네시아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인도하셨기에 몽골에서의 사역을 정리하고 현재 인도네시아에서 기독교 대학을 추진 중에 있는데 췌장에 종양에 생겨 서울 모 병원에 입원 중이다. 그는 췌장의 종양을 성공적으로 제거 했지만 이후 급작스런 폐렴으로 췌장액이 다시 새기 시작하여 극심한 고통을 느끼는데 온 몸의 세포가 일어나는 느낌을 받는 다고 했습니다. 기자가 물었습니다. 믿는 자들에게 가장 소중 한 것이 무엇인가요? 그는 말합니다. “하나님이 부르신 목적대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목적은 자신과 연합하기 위함입니다. 그 분과 동행하는 것 그분의 거룩함을 입는 것이 가장 소중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깊이 깨달은 사람들은 이 거룩한 나라의 영광에 참여하기 위해 이 땅의 것을 포기한 사람입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후서 3:18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으로 이르게 되나니”
그러므로 우리는 위에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도 마6장에서 땅의 것만을 추구하고 살아가는 자에게 먼저 구할 것이 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25-26절에 “그러므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 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 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마6:33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리스도인은 먼저, 다시 말하면 우선순위가 그의 나라와 영광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가리켜 교회라고 말합니다. 바울이 고린도후서 11: 24-28절에 보면 자신이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다가 당한 고난과 고통에 대하여 언급하기를 수없이 맞기도 하고 죽음직전에 가지고 했으며 먹지도 못하고 자지도 못하고 많은 위험이 있었지만 이보다 더 염려가 된 것은 주님이 피 값으로 세우신 교회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가 전파되기 때문이요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28 절에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우리 그리스도인은 땅의 것을 생각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아닙니다. 땅 에것 만을 추구하는 자의 모습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골3:5,8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여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곧 우상숭배니라. 8절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고 곧 분함과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왜냐하면 우리의 시민권은 땅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자입니다. 이 땅에 살고 있지만 땅의 일만을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비록 이 땅에 두 발을 붙이고 살아도 우리의 이상은 하늘나라이기 때문입니다. 하늘나라의 시민답게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위에 것을 생각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2013년도 어떻게 사시겠습니까? 땅에 것만을 추구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위에 것을 생각하며 사시겠습니까? 하나님나라와 교회를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용서하고 사랑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지난주에 저희 안 사람하고 오랜 만에 시내에 있는 극장을 찾았습니다. 세기의 명작인 빅토르 유고가 지은 레미제라블을 관람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주변에서 아주 감명 깊게 보았다고 하여 극장의 문을 두드리게 되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장발장으로 널리 알려진 프랑스 민중들의 비참한 삶과 1832년에 있었던 프랑스 6월 혁명을 소재로 만들어 졌다. 이 영화의 장면은 자신의 가족의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빵 한 조각을 훔친 죄로 19년 형을 살고도 형을 다 살지 못했다는 죄로 사회에서 박해를 받는다. 성당에 들어간 장발장은 은식기에 손을 대지만 신부는 은촛대까지 주면서바른 삶을 살도록 권유한다. 이 용서의 사건을 계기로 장발장은 변화되어 마들렌이라는 새 이름으로 사장으로 시장으로 가난한 이들을 도우며 지낸다. 그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의 삶이 너무나 가혹하고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가족의 생계를 위해 인간의 삶을 포기한 채 하루하루를 연명하고 있었다. 이런 시대 상황에서 마리우스와 몇 명의 청년을 중심으로 시민혁명이 일어난다. 그들의 노래 가운데 이 어둠이 지나가면 새날이 온다는 노래 말이 와 닿았다. 정체를 숨기고 그러던 중 장발장은 운명의 여인, 판틴(앤 해서웨이)과 마주치고, 죽음을 눈앞에 둔 판틴은 자신의 유일한 희망인 딸, 코제트(아만다 사이프리드)를 장발장에게 부탁한다. 그러나 코제트를 만나기도 전에 경감 자베르(러셀 크로우)는 장발장의 진짜 정체를 알아차리고, 다시 체포된 장발장은 코제트를 찾아 탈옥을 감행한다. 탈옥수로 숨어살게 된 장발장과 그를 찾아내려는 경감 자베르, 시민혁명군인 마리우스는 코제트를 사랑하게 됩니다. 시민군과 정부군 사이에 전쟁이 일어날 때 시민군에 위장하여 잠입한 자베르 경감이 들통나 붙잡혀 죽음 일보 직전에 있을 때 장발장은 자신이 경감 자베르를 처치하겠다고 하면서 자신을 쫓아다닌 원수를 용서하고 그를 풀어 준다. 경감 자베르는 자신을 풀어주면 후회하게 될 것이라고 하면서 죽이라고 하였지만 끝내 장발장은 그를 용서해 줍니다.
혁명이 막바지에 이르고 정부군에 의해서 시민군이 진압 당하고 코제르를 사랑한 마리우스를 죽음직전에 하수구를 통해서 도망 나오는 출구에 경감 자베르가 그를 지키고 있어 한 발자국이라고 움직이면 총살하겠다고 하자, 장발장은 지금 죽어가는 마리우스를 위해 단 몇 시간만이라도 기회를 달라고 한다. 결국 엄정한 법 집행의 화신인 자베르는 장발장의 사랑과 용서 앞에서 갈등하다가 물속에 빠져 운명 을 달리한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마리우스와 코제트가 결혼 하는 날 장발장은 자신의 죄인임을 밝히고 그들을 떠나게 되지만 장발장이 어느 수도원에서 마지막 임종을 맞이한다고 하는 소식을 전해 듣고 코제트오 마리우스 청년이 달려가 마지막 임종을 맞는 순간에 장발장이 사랑한 코제트의 어머니 판틴이 환영으로 나타나 그 동안의 이 땅에서 고생과 질병과 어둠의 시간이 다가고 기쁨과 축복과 영광의 새 날이 다가온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이 영화는 마무리 짓게 된다.
저는 이 영화를 보면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19C 의 프랑스 혁명당시 처럼 많은 사람들이 인생의 무거운 짐인 가난 과 질병과 고통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순수한 사람들 속에는 오직 부만을 추구하고 자신만을 위해 사는 악질 사채업자 같은 인간 이하의 사람들도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엄격한 법질서로 사회의 기강과 질서를 세우려고 하는 경감 자베르 같은 국가도 있습니다. 하지만 장발 방처럼 변화되어 가난하고 불쌍한 약자들을 위해서 자신의 힘과 물질을 사용하여 이웃에게 선을 베풀고 자신의 원수까지라고 용서하면서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장발장 같이 일생을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엄정한 법질서를 강행한 자베르는 죄 된 인생을 끝까지 추격하는 죄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죄는 우리를 끝까지 추격해서 우리를 죽음으로 몰아넣습니다. 하지만 이 죄는 장발장의 사랑과 용서 앞에서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종말을 고한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이 영화가 주는 메시지는 이런 가난과 질병과 불평등과 고통과 억울함이 있는 세상에서 장발장처럼 남을 이해하고 용서하고 사랑하면서 살아야 하며 이런 삶을 산 사람만이 이 어둠의 세상을 떠날 때 영원한 영광의 새 나라 새 날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골3:12-14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 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 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사랑 받는 자처럼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3. 말에나 일이나 항상 주예수의 이름으로 항상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이 땅을 살아가는 참된 그리스도인은 마지막으로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살아가라고 합니다. 물론 우리가 감사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해 있을 수 있습니다. 하루아침에 욥처럼 재산이 날라 간다든지 갑자기 집안에 우환이 찾아온다든지 다니던 직장에서 퇴출당한다든지 여러 가지 인생사에서 좋은 않은 일들이 있을 때가 있습니다. 물론 감사하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 때에도 감사하라고 말합니다.
하박국은 3:16-17절에서 자신이 민족이 위태하고 그야말로 풍전등화와 같고 자신이 뼈가 떨리고 창자와 입술이 타들어가며 뼈마디가 녹아내리는 듯한 상황에서 그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비록 포도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 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시리라.
한마디로 좋은 소식이 하나도 없습니다. 요즈음 말로 하며 많은 돈을 농협에서 대출해서 소를 기르고 외양간을 고치고 밭에다 농사를 지었음에도 소득은커녕 갑작스런 태풍으로 인해 아무 것도 건지지 못하고 헛수고 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런 때에도 하나님께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다 잃어도 우리에게 건강주시고 생명 주신 것에 대하여 감사해야 합니다. 건강만 하면 생명만 있으면 다시 일어 설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할 것은 나의 생명을 구원하신 그 분께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지옥 갈 영혼을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받은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어떻게 감사해야 합니까? 16절에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다시 말하면 우리의 심령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거하게 해야 합니다. 신령한 말씀, 영의 양식이 부족하지 않게 말씀을 먹어야 합니다. 말씀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말씀이 여러분의 마음에 있으면 영적으로 풍성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내 영혼이 자유롭습니다. 기쁨과 즐거움이 넘칩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입술에서 감사가 나오고 찬양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바울과 실라는 빌립보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 옥중에서 찬송을 부르고 감사했더니 착고가 풀리고 감옥에서 나오는 기적을 체험하였습니다.
지난 1월 8일자 국민일보에 고 한경직 목사님의 50년 동역자 이자 지인인 고 최창근 장로의 신앙에 대한 기사가 실렸습니다. 이분은 북한에서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아버지의 사업실패로 가계가 어려워지자 가게 점원으로 시작하여 신의주 제이교회에서 고 한경직 목사님을 만나서 한 목사님의 동역자가 되었는데 이 분의 생전철학은 “ 우리의 소유는 하나님의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께 돌려 드림으로 얻는 기쁨과 은혜를 누려야 한다” 고 강조했다고 합니다. 이 분은 교육과 선교 사업에 헌신을 하였는데 사업이 승승장구하던 30대 중반 그는 “신앙관과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는 사건이 있었는데 초대형 태풍이 동해를 강타했던 48년 12월 22일 선원들과 함께 타던 배가 난파 직전에 처했다고 합니다. 그 당시 그는 내가 ”돈을 욕심을 부리니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하시는 구나“ 하고 간절히 회개하였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사일생으로 살아 그의 삶이 180도로 바꾸어 졌습니다. 그는 생전에 ”하나님이 나에게 사업체를 맡겨 주신 것은 기독교적인 사업 경영으로 성공해서 하나님 사업에 많이 사용하라는 뜻“ 임을 알았다고 합니다. 그는 일생 교육과 선교사업에 3000억 원이 넘는 돈을 하나님께 드렸으며 일선에서 은퇴한 이후에도 ‘유산 남기지 않기 운동’ 을 펼치며 한국사회에 모본을 보이고 사랑의 쌀 나누기 운동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 했다.
윌리암로오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성자가 누구인지 알기를 원하는가? 그는 기도를 제일 많이 하고 금식을 제일 많이 하는 사람이 아니다. 자선을 제일 많이 하고 절제와 정숙과 공의에 있어서 가장 탁월한 사람도 아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성자는 언제나 하나님께 감사하는 사람이다".
17절 “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새해에 참된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갑시다. 위에 것을 생각하면서 살아갑시다. 하나님나라를 생각하며 교회를 생각하며 살아갑시다. 그리고 이웃 사람들을 용서하며 사랑하면서 살아갑시다. 더 나아가 말이나 일에나 항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하나님아버지께 감사하면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2013 년 1월13 일 청주벧엘성결교회 정영진 목사 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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