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은혜에도 풍성하게 할지니라. 고후8:1-9, 9:6-13
AD 1세기 경 예루살렘은 기근으로 인해서 많은 어려움 가운데 있었는데 바울은 이러한 소식을 접한 이후에 예루살렘 교회의 가난한 형제들을 위해 구제 활동을 펼치게 된다. 그의 3차 전도여행의 목적은 소아시아와 마게도냐와 아가야 지방을 두루 돌면서 모금한 금액을 예루살렘에 전달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다른 지역과는 달리 비교적 부유한 교회인 고린도교회는 1년 이상이 지났음에도 구제에 대한 모금실적이 저조하자 사도바울은 오늘 고린도후서 8장과 9장을 통해서 성도가 헌금을 해야 할 당위성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1년의 시간이 흘렀음에도 가시적인 성과가 보이지 않으므로 자신의 동역자인 디도를 고린도 교회에 파견함으로써 이 풍성한 은혜에 참여 할 것을 독려 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시간 “이 은혜에도 풍성하게 할지니라” 이러한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은혜 받은 자의 표시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가 은혜라는 단어입니다. 적어도 다섯 번 이상이나 등장하고 있습니다. 1절에 보면,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리노니"라고 했고, 4절에 보면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7절에도 마지막 부분에 보면 "이 은혜에도 풍성하게 할지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든 일에 풍성한 것 같이 이 은혜에도 풍성하기를 기대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9절에도 보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은혜라는 단어가 계속 반복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은혜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 혹은 호의를 말합니다. 즉 내가 받을 만한 자격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배 푸시는 사랑입니다. 내가 잘나고 능력이 있어서 주어진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구원받은 것이 누구의 은혜입니까?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지요? 에베소서 2장 8절에 보면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성경은 분명히 우리에게 베풀어진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하나님 앞에 드리는 헌금의 행위는 은혜 받은 자의 응답의 형식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자, 은혜를 깨달은 자만이 할 수 있는 행위가 바로 헌금입니다.
저는 저의 교회 나오셨다가 다른 교회에 가신 분이 있습니다. 이 분은 자신의 남편을 전도해서 저한 테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 동네 가까운 아파트에 사셨는데 한 때는 청원군에 까지 이사 간적이 있었습니다. 연세는 많으셨지만 고위 공무원으로 퇴직하셔서 생활에는 어려움이 없는 분입니다. 헌데 우리 교회에서 한 40분 이상 거리인데도 불구하고 가까운 교회에서 와서 자신의 교회 나오라고 성화해도 나는 정 목사님 설교 듣게 다고해서 몇 년을 나오셨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그 분의 부인 집사님이 저한테 말하기를 자신의 남편은 자신의 돈으로 교회에다 헌금을 준비해서 낸 적이 없다고 하면서 저한테 걱정하면서 자신을 위해서는 아낌없이 돈을 사용하면서도 교회에다 단돈 1000원 내는 것도 아까워 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더니 지금은 교회도 나가지 않고 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여기 오늘 본문 8장1-2절에 보면 바울은 마케도냐 성도들의 헌금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마케도냐 성도들의 헌금에 대하여 말하는 것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1년 전에 말하였지만 아직 수행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10-11절에 “이 일에 관하여 나의 뜻을 알리노니 이 일은 너희에게 유익함이라. 너희가 일 년 전에 행하기를 먼저 시작할 뿐 아니라, 원하기도 하였은즉 이제는 하던 일을 성취할지니 마음에 원하던 것과 같이 완성하되 있는 대로 하라” 벌써 모금이 완성되었어야 하는데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에 대하여 질책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가난한 마케도냐 성도들도 이미 그들이 극한 가난과 많은 시련 가운데서 풍성한 연보를 드린 것을 상기시키면서 고리도 교인들에게 이 은혜에 참여할 것을 독려하고 있습니다. 8장2절에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게 하게 하였느니라” 다시 말하면 여유가 있어서 드린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깨달은 사람만이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고 가난 가운데서도 넘치는 헌금을 드릴 수 있습니다.
반면, 고린도 교인들은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고 넉넉한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이 이 은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못한 이유는 어디에 있을 까요? 한 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부유한 교회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교회의 가난한 성도들을 돕는데 인색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한 영적으로 어린아이의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헌금하기가 어려운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건강주시고 지혜주시고 재능을 주셔서 내가 사업도 잘하고 공부도 잘하고 직장생활도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노력하고 수고해서 잘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물질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를 못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감사한 마음으로 드릴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마케도냐 성도들은 바로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하는 마음으로 풍성한 연보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7절에, "오직 너희는 믿음과 말과 지식과 모든 간절함과 우리를 사랑하는 이 모든 일에 풍성한 것 같이 이 은혜에도 풍성하게 할 지니라"고 합니다.
2) 자신을 주께 드리는 것입니다.
바울은 마케도냐 교인들이 많은 환난과 극심한 가난 가운데서 넘치는 연보를 드렸다고 말합니다. 3절에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주님을 사랑하는 자의 모습입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 앞에 은혜에 자리에 참여할 뿐 아니라, 더 넘치게 드릴 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헌금을 드림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먼저 자신을 주님께 드려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헌금을 드리기 전에 먼저 자신을 주님께 드려야 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헌금이 물질의 문제이기 보다 마음의 문제요 영적인 문제요, 자신을 드리는 헌신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물질을 드리기 전에 먼저 자신의 마음을 담아 드려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BC6세기 경 말라기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이 그 시대 제사장들과 백성들에게 말라기 1:6-10에 말씀하셨습니다. 6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나 만군의 여호와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아들은 그 아버지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버지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진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하는도다 7 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제단에 드리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하는 도다 이는 너희가 여호와의 식탁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말하기 때문이라 8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 먼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을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 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으며 너를 받아 주겠느냐
9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는 나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면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여 보라 너희가 이같이 행하였으니 내가 너희 중 하나인들 받겠느냐 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제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가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이 말씀은 말라기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의 영적 도덕적 타락을 책망하신 것입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면서 살아가는 주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제단에 그냥 나올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앞에 가려면 제물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 사람들은 물질에 욕심이 생긴 것입니다. 그래서 가축도 좋은 것은 시장에 고가로 내다 팔고 시장에 내다 놓아도 상품가치가 없는 저는 것 병든 것을 하나님 전에 가져와서 드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화가 나신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너희 총독에게 가져가 보아라 그것을 받겠는냐 는 것입니다. 총독이란 관리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시 96:8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그에게 돌릴지어다 예물을 들고 그의 궁정에 들어갈지어다
마케도냐 교인들이 물질만 바친 것이 아니라 먼저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드린 것이기 때문에 소중한 것입니다. 우리가 물질을 드리면서도 우리의 마음이 없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드리는 물질은 신앙의 바로미터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시기를 네 보물이 있는 곳에 네 마음도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물질을 어디에 쓰는 지를 보면 그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얼마 전에 봉명동에 어느 보쌈집에 가족들과 함께 들어 간 적이 있습니다. 여 주인과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는 주에 자신의 자녀이야기를 했습니다. 자신의 큰 딸이 서울 모 대학에 다니던 중 프랑스에 유학 중에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프랑스 학비가 만만치 않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연간 약 4000천 만 원에 매월 200만원씩을 보낸다고 했습니다. 어림 계산해도 작지 않은 금액입니다. 그래서 이 작은 가게에서 그렇게 수입이 있냐고 했더니 작년부터 경기가 좋지 않아 어려웠는데 남편하고 같이 벌어서 감당한다고 했습니다. 저가 전도 대상자로 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저가 대화를 듣는 중에 우리 한국 부모들은 교육열이 대단 하구나 이렇게장사 해서 모든 수익을 자녀 교육에 올인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반면, 성경에 나와 있는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과부는 두 렙 돈을 드렸지만 주님은 그것을 가리켜 생활비 전부를 드렸다고 칭찬하셨습니다. 예수님께 향유 옥합을 깨어 자신의 머릿결로 주님의 발을 씻겼던 마리아는 자신의 결혼 예물 전체를 드림으로써 복음이 전해지는 곳에는 이 여인의 행한 일이 알려지리라고 하심으로써 그를 축복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독자 이삭을 드림으로써 하나님 아버지를 기쁘게 해드리고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주님 앞에 드려지는 물질은 사실 우리 자신을 드리는 것입니다.
고후8:5절에 “우리가 바라던 것뿐 아니라, 그들이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에게 주었도다.”
3) 주님이 부요케 하시는 방법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앞서 고후 8:9절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창조주 이신 주님께서 아니 이 우주의 주인이신 주님께서 가난하고 낮은 이 땅 그것도 말구유에 오신 이유가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는 신학적으로 자기 비움 즉 “케노시스”라고 하는데 그것은 자신의 가난하심을 통해서 그의 백성을 부유케 하고 자신의 낮추심을 통해서 우리를 높이기 위함이라고 사도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우리를 부요케 하기 위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땅에서 우리가 부요케 되는 방법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법칙을 따르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9장 6-7절에 보면, “이것이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자연의 법칙에도 적게 심으면 적게 거두고 많이 심으면 많이 거두는 것이 세상의 이치 인 것처럼 영적인 법칙에도 똑 같이 적용된다는 것입니다. 지금 예루살렘 어려운 교회를 위하여 선행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늘나라에 보물을 쌓아두는 것이요. 이 땅에서 축복받을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축복 받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말고 즐겁게 감사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풍성한 연보를 드리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헌금을 할 기회가 올 때 사실 망설여 질 수 있습니다. 십일조나 감사헌금, 절기 헌금, 혹은 구제헌금이나 선교헌금이나 건축헌금을 드린다고 하는 것은 자신의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므로 이것은 희생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희생을 통해서 복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구약성경 사무엘하 24장에 보면 다윗이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인구조사를 실시했다가 전염병으로 인하여 7만 명이 죽었습니다. 이제 거의 몰살 지경에 이르렀을 때 선지자 갓이 재앙을 모면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줍니다. 그것은 아라우나 타작마당에서 재단을 쌓고 번제를 드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다윗은 아라우나 타작마당에 가서 제사를 지내려고 하자 아라우나가 이렇게 말합니다. 왕이시여 어찌하여 저에게 오시나이까 하고 땅에다 얼굴을 대고 말하니까 다윗이 너의 타작마당을 사서 여화와께 오는 재앙을 그치게 하려는 것이다. 그랬더니 아라우나가 말하기를 왕이 원하시는 대로 하소서 번제에 쓸 소도 있고 땔 나무도 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모든 것을 주겠다고 다윗이 내게 말하니 다윗이 말하기를 24절에“ 아라우나야 아니다, 하면서 내가 값없이는 내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지 아니하리니 다윗이 은 오십 세겔로 아라우나 타작마당을 사서 거기서 제단을 쌓고 번제를 드리고 하나님께 기도하므로 그 땅에 재앙이 그쳤다.” 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왕이었기에 아라우나가 준다고 하는 타작마당을 덥썩 받을 수 있었겠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적어도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을 분명히 구분하였기에 하나님께서 재앙을 거두셨고 다윗을 위대하게 하셨고 부요케 하신 것입니다.
또한 아브라함은 창세기 14장에서 조카 롯을 구하고 그돌라 오멜과 함께 돌아 올때에 살렘왕인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인 멜기세덱이 마중 나와 아브라함을 이렇게 축복하였습니다. 19-20절에 “ 천지의 주재이시여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
아브라함은 이미 율법이 십일조를 정하기 전에 하나님께 자신이 전장에서 얻은 전리품의 십일조를 드림으로써 하나님께서 그 이후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시고 후손을 주실 것을 약속하셨고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처럼 축복해 주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내 것을 얼마나 드리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떠한 마음으로 드리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은 가난해 지는 길이 아니고, 오히려 더 풍요로워지며 더 부유해지는 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께 드려지는 헌금은 은혜 받은 자만이 드릴 수 있는 특권입니다. 그리고 그 헌금은 물질이상입니다. 그것은 자신을 주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늘나라에 보물을 쌓아두므로 이 땅에서 더 풍성해지고 부유해지는 축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2013년 1월20일 청주벧엘성결교회 정영진목사 주일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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