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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를 만난 사람들 (2) 한 문둥병자의 감사 눅17:11-19

gkffpffndi 2012. 11. 7. 17:48

 

예수를 만난 사람들 (2) 한 문둥병자의 감사 눅17:11-19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열 명의 문둥병자를 고치신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내려가실 때 사마리아와 갈릴리로 지나가시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한 동네에 들어가시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나병환자 열명이 예수를 알아보고 멀리 서서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 때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제사장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라!” 이 말의 뜻은 너희들이 문둥병이 가는 동안에 나을 것이다. 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더니 가는 도중에 깨끗함을 받게 되었습니다.

 

모두가 다 깨끗함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아홉은 예수님께 나와서 감사했다는 말이 없습니다. 하지만 단 한 사람 문둥병자는 제사장에 가지도 않고 자신의 가족이나 친지나 친구에게 가지고 않고 그는 자신의 병을 치료해 주신 예수님께 나와 크게 감사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이들이 문둥병을 고침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기 때문입니다. 순종이 기적을 일으킨 것입니다.

 

저는 이 시간 “ 한 문둥병자의 감사” 이런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문둥병자는 우리 자신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당시에 많은 사람들의 육체적 질병을 고치셨습니다. 당시에 병든 자 귀신 들린 자 간질 하는 자 중풍병자 들이 예수님께 나아와서 고침 받았다는 소문이 갈릴리 호수를 중심으로 한 가버나움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에 이르기 까지 소문이 짝 퍼졌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가시는 곳에는 항상 많은 무리들이 따라 다녔습니다. 이때도 예수님 지나가신다는 소문이 삽시간에 다 펴졌고 열 명의 문둥병자에게 까지 이 소식이 들어간 것입니다.

 

이들은 율법에 의하면 사람들이 살 수 있는 곳에 모여 살 수 없었고 가족과 사회로부터 격리되어야 했습니다. 이들은 사람들이 있는 곳에 갈 수 없었습니다. 어쩌다 사람들과 마주 칠 때는 레위기 13:45-46 말씀을 따라 얼굴을 가리고 “나는 부정하다” “나는 부정하다” 하면서 사람들이 자신들에게 접근해 오는 것을 막아야 합니다.

 

우리나라도 저가 어렸을 적 만해도 문둥병 환자가 돌아 다녔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한 곳에 모여 살고 있습니다. 전라남도 소록도 섬에 가면 나병환자들이 모여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저는 가보지 않았습니다만 가보신 목사님들에 의하면 갔다 오면 은혜를 받는 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신체가 온전치 못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찬양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손가락이 없기도 하고 코가 없기도 합니다. 이것은 문둥병은 살이 썩어져 가는 질병이기 때문입니다.

 

문둥병은 최초에 피부에 반점이 생기면서 시작되는데 피부에서 고름이 나오면서 손이 갈고리처럼 오그라들고 이것이 점점 살을 썩게 만들어 신체의 일부가 떨어져 나가다가 서서히 수 십 년에 걸쳐서 진행 된다는 것입니다. 이 문둥병은 진행형의 질병으로 서서히 죽어간다는 것입니다. 문둥병에 있어서 가장 무서운 것은 감각을 상실한다는 것입니다. 화로 불에 손을 집어넣어도 아프지도 않다는 것입니다.

 

문둥병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모습입니다. 나병환자가 서서히 그의 몸이 썩어 가듯이 오늘 날 인간들은 죄로 인하여 그의 영혼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문둥병이 감각을 상실 하듯이 하나님을 떠난 인간들은 죄에 대한 감각에 무디어져 있습니다. 그 죄 때문에 고통이 오고 죽음이 온다는 사실을 잊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죄를 물마시듯이 공기를 들이 마시듯이 먹으면서도 그것이 악인 줄을 알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얼마 전 신문기사에 30대 후반의 직장인이 저녁 12시가 넘어 늦게 회사에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5살 된 아들이 장난감을 사주기 위하여 근처 편의점에 갔습니다. 근데 그곳에 중고생 학생들이 앉아서 침을 뱉고 욕을 하고 있어서 훈계한다고 한 것이 싸움이 되어 한 학생의 가격에 뇌를 다쳐서 병원에 갔으나 끝내 소생하지를 못했습니다. 가해자 부모들이 앞길이 창창한 아이들이니 모든 장례비용이나 치료비를 어떻게 해서든지 갚겠다고 해서 선처해 주었더니 가해학생들은 풀려났으나 피해보상이나 전화를 해도 받지 않고, 피해자 가족들은 경제적인 고통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가끔씩 가해 학생들을 마주 치는데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은 채 비웃고 지나간다 합니다. 피해 가족 아이들은 정신적으로 불안 증세를 보여 사람들을 보면 피해 다녀 심리 치료중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모습을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습니다. 감각을 상실한 문둥병 환자처럼 이 시대 사람들은 분명 죄에 대해서 회개할 줄 모르고 죄에 대해서 무감각 한 모습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그리스도를 떠난 인간의 절망적인 모습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도저히 양심이 없는 금수와 같은 세상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 믿는 신자들조차도 이런 죄에 대해서 무감각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죄악에 대한 경계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들이 노래방 가는 것을 예사로 여기는 것입니다. 노래방이라고 하는 것이 건전한 곳이 아닙니다. 얼마 전에는 참으로 믿기지 않은 일이지만 우리나라 내노라 하는 교단 소속 목사님들이 노래방에 갔다는 기사가 나왔습니다. 참으로 죄에 대해서 무감각해진 영적으로 문둥병에 걸린 신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로마서 3:9-18 9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또는 그들만 못하뇨10 기록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13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14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15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16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17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18 그들의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그러므로 양심이 마비되고 죄에 무감각해진 인간을 누가 구원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죄악 된 인간을 아시고 당신이 친히 십자가에 달려 피 흘려 죽으심으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주님의 긍휼을 힙 입을 수 있는 길은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죄로 무감각해진 문둥병을 고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거룩한 보혈의 피가 우리의 죄를 대속하고 하나님 앞에 가까이 갈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4장 16절에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 이니라

 

2) 감사를 잊어버린 아홉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열 명의 문둥병자는 그들에게 있어서 행운이요 축복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예수님이 계신 곳 까지 가까이 왔습니다. 그리고 주저함 없이 예수님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계속해서 불러대는 이 저주받은 인생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면 하나님의 은혜가 임합니다. 병 고침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실패한 자가 성공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긍휼을 얻어내기 위하여 예수의 이름을 불러야 합니다. 예수라고 하는 뜻은 ‘구원자’ 란 의미입니다.

 

죄와 질병과 사망아래 놓여 있는 인생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주님 나를, 우리 가정을 불쌍히 여기소서” 이 문둥병자처럼 주님의 이름을 사모하고 불러야 합니다. 시편 18:6절에 내가 환난 중에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그가 그의 성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그의 앞에서 부르짖음이 그의 귀에 들렸도다.

 

성경의 역사를 보면 예수 이름을 불러서 손해 본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가버나움의 중풍병자도, 회당장야이로의 딸과, 12해 동안 혈루병으로 앓았던 여인도 소경 바디메오도 인생의 고통에서 예수 이름을 불러 그들의 인생은 행복한 인생으로 바꿔졌습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만나기만 하면 인생의 모든 문제가 해결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문둥병자도 예수를 만남으로써 그들의 저주와 고통이 사라지고 축복받은 인생, 행복한 인생이 된 것입니다. 문둥병자의 간절한 외침에 예수님은 그의 발걸음을 멈추고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가서 제사장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이 말의 뜻은 그 당시 문둥병이 나은 사람들은 제사장에게 가서 자신의 몸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소위 확인증을 받아야 사회생활을 할 수 있고 가정으로 돌아갈 수 있었는데, 예수님 당시만 하더라도 제사장이 의사 역을 대신 한 것입니다. 이 말의 뜻은 너희 병이 나을 것이니 곧장 제사장에게 가라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기쁜 소식이 어디 있습니까?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전혀 의심을 품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14절 b에 보니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문둥병이 기적 같이 치료 된 것입니다. 피부에 고름이 가득하고 살이 썩어 팔이 오그라들고 코가 삐뚤어진 신체들이 거짓 말 처럼 어린아이 살처럼 하얗고 깨끗해 진 것입니다.

 

이런 기적이 어디 있습니까? 어떻게 해서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하나님이신 그 분만이 하실 수가 있습니다.

 

히브리서 1:3절에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오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히13:8 예수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그런데 예수님께서 문둥병자를 치료하신 사람은 열 사람이었습니다만 한 사람만 예수님께 나아와서 감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지만 나머지 아홉은 예수님께 돌아와서 감사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 감사하지 않은 아홉 사람에 대하여 주님은 지나치지 않으시고 물으셨습니다. 17절에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했느냐 아홉은 어디 있느냐” 감사할 줄 모르는 아홉에 대하여 질타하시는 말씀입니다.

 

감사할 줄 모르는 아홉에게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는 어떠한 가 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하루하루를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가운데 살면서 감사하는 삶을 사는 가입니다. 감사하지 않는 사람들은 모든 일이 하나님의 은혜로 생각하지 않고 우연이거나 자신의 능력으로 돌리는 것입니다. 육체가 썩어서 감각이 무딘 문둥병자처럼 일상생활에서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를 그냥 지나갑니다. 여기 감사하지 않은 아홉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에 무감각한 우리 자신입니다.

 

바울은 타락한 세대에 대해 롬1:21에서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라고 하였습니다.

 

3) 한 사마리아인의 감사입니다.

 

똑같이 문둥병이 나았음에도 불구하고 아홉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우연이거나 아니면 잊어버려서 혹은 예수님보다 자신의 가족에게 이 기쁜 소식을 먼저 알리기 위해서 예수님께 나오지 못했지만 유대인이 아닌 이 사마리아인은 가장 먼저 자신의 문둥병을 고쳐 주신 예수님께 먼저 달려 나와 감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감사도 때와 시기가 있습니다. 감사의 시기와 때를 놓치면 지나가거나 잊어버릴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감사의 기회나 감동이 주어 질 때 미루거나 놓쳐서는 안 됩니다, 이 이방인인 사마리아 사람은 기회를 미루지 않고 주님께 먼저 옴으로써 그의 육신의 병뿐만 아니라 영혼까지 구원 받은 축복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19절에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 하였느니라. 반면에 감사하지 않은 아홉에 대해서는 책망하셨습니다.

 

초대교회의 교부 어거스틴은 “궁핍과 고통 중에도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자는 가난과 질병을 쫓아내고 큰 복을 받는다”고 말했습니다. 독일의 시인 하이네는 “하나님께 감사할 때 모든 질병이 쫓겨난다.”고 말했고,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하나님께 거룩한 감사 절기를 기쁨으로 드릴 때 자손을 축복하시고 장막의 지경을 넓혀주신다”고 말했습니다.

 

지난주에는 가까운 교회에서 부흥회가 있어서 갔더니 그 강사 목사님이 자신의 연봉이 상당한데 지난 1년 동안 하나님한테 헌금한 것이 자신의 연봉만큼 되는데 그래도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자신은 통장에 모아 둔 돈은 없어도 세계 80여 개국에 다니면서 복음을 전한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작년 추수 감사절에 지난 1년간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생각하면서 1년 365일이니까 하루에 천 원씩 감사해서 365000원을 드리자고 작년에 제안했더니 몇 가정이 순종하여 따라 준 성도들로 인해 교회 재정의 부족분이 채워졌습니다. 어떤 분은 추수감사헌금을 처음 배울 때 자신을 인도하신분이 1년 수입의 십일조를 드리는 걸 따라했더니 하나님의 큰 축복을 받았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이 성숙한 사람입니까? 누가 은혜 받은 자입니까? 은혜에 보답하는 자입니다. 자녀들이 성숙해지기 시작하면 부모의 고마움과 은혜를 알고 보답하는 것처럼 성숙한 신자도 자신이 받은 은혜를 어떻게 보답할 까 생각하게 됩니다.

 

지난 11월17일자 국민일보 신문에 대한민국 교육 봉사단 우창록 이사장과의 인터뷰 기사가 보도 되었습니다. 이분은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1974년 16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그는 처음부터 변호사의 길을 걸었다. 변호사의 길을 선택한 것은 권력보다 봉사의 삶을 좀 더 일찍 하고픈 욕망이 자리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것은 어린 시절 가난했던 때 공부를 포기했지만 초등학교 6학년 담임이 장학금으로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고 고등학교 선생님은 그에게 일본에서 나온 수학 문제집을 쥐어주면서 상급학교에 진학하도록 도와주었다. 그는 현재 법무법인 율촌 대표로 있으면서 ‘나눔과 동행을 통한 변화’라는 캐치프래이즈로 씨드 스쿨 (Seed School)을 만들어 미국의 비영리 단체인 TFA (Teach For America) 을 모델삼아 정체성이 혼란한 중학생을 대상으로 1대1로 만나 전인적 돌봄과 맞춤학습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이 씨드 스쿨의 명성이 알려지면서 전국적으로 신청이 몰려들고 있다 합니다. 얼마 전 이 씨드 스쿨을 통해서 자살을 예방하는 사례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는 외할머니 어머니의 신앙을 이어받아서 신앙의 중심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화단에 몇 개의 씨앗을 뿌리는 것도 잎과 열매에 이르는 데 도움을 주는 물과 바람과 햇빛에 대해서 무한히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죠” “자신이 선택할 수 없는 과거의 상황 때문에 미래가 불행해진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죠 취약한 환경에 있는 아이들은 점점 더 나쁜 방향으로 빠질 위험이 있습니다. 누군가 손을 잡지 않으면 세상을 놓아버리죠, 요즈음 아이들에게 영혼의 양식이 제대로 공급되지 않아 그렇습니다.”

 

그는 지난날의 받은 은혜를 보답하는 마음으로 권력의 자리가 아닌 봉사의 자리에서 지금도 사회복지법인 밀알복지재단 감사, 한민족복지재단 이사, 기독교 윤리운동실천 운동이사장 등 국내 5대 로펌을 이끌면서도 굿소사이어티를 맡는 등 봉사와 선교에 힘쓰고 있습니다.

 

여기 아홉 사람은 유대인이면서도 감사할 줄 몰랐습니다. 받은 은혜를 잊어버린 무감각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한 사마리아인 문둥병자는 은혜를 아는 사람입니다. 받은 은혜에 잊지 않고 보답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시 116:12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내가 여호와께 무엇으로 보답할까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번 추수 감사절을 지키면서 여러분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우리 문둥병자처럼 저주 받은 인생이었지만 주의피로 구원받고 축복받았습니다. 그러므로 감사를 잊어버린 아홉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보답하는 삶을 사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012년 11월 11일 청주벧엘성결교회 정영진목사 주일설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