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그네 같은 인생 벧 전1:15-23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 국어 교과서에 청록파 시인 가운데 한 분인 박목월의 시 가운데 [나그네] 라고 하는 시가 있었습니다.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 삼 백리/ 술 익은 마을 마다 타는 저녁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또한 우리가 잘 아는 대중 가수 가운데 최희준씨가 부른 노래 가운데 <하숙생> 이 있습니다. 인생은 나그네 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 는가 구름이 흘러가듯 떠돌다 가 는 길에 정일랑 두지말자 미련일랑 두지말자 인생은 나그네 길 구름이 흘러가듯 정처 없이 흘러서간다
이렇듯 우리네 인생을 나그네로 표현하는 내용은 노래나 시, 혹은 여러 가지 문학의 표현에서 찾아 볼 수 있다. 특히 요즈음처럼 노오란 가로수 낙엽이 도로 위를 뒹굴고 가을 찬바람이 옷 속을 파고 들 때 떨어지는 낙엽과 함께 잠시 인생의 의미를 생각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 24절에서 베드로 사도는 인생의 무엇인지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라고 말함으로써 인간의 유한성 내지는 허무함을 시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시간 “나그네와 같은 인생” 이런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나그네로 있을 때 두려움으로 삽니다.
‘나그네’라는 단어는 성경 원어 헬라어로 ‘파로이키아스’(paroikiva")인데 이 말의 뜻은 ‘지나가다’ 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오래 머물러 있을 곳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목적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마치 여행 하는 사람이 여관이나 호텔에 잠깐 머무는 거와 같습니다. 잠시 쉬었다가 목적지를 향해서 나가야 합니다. 그런데 잠시 쉬어가는 인생의 여정을 ‘나그네’로 표현하였는데 이 ‘나그네’ 인생여정을 가는 동안 ‘두려움’으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늘 날 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의 삶이 전부라고 생각하면서 자기 멋대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창조주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고 살아갑니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 않습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다음 세상이 있는 지 없는 지도 모르겠고 지금 삶이 고단하고 힘이 드는데 확실하지 않은 내세에 대해서 생각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창주주 하나님, 소위 신(절대자)을 믿는 다고 하면 그것은 자신의 삶이 제한 받는 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영생이나 천국, 그리고 심판에 대해서 생각하고 싶지가 않은 것입니다.
하지만 내가 생각을 않는다고 해서 실재하는 것이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부정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계획이 무효화 되지도 않습니다. 성경은 천지는 없어지겠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일점일획이라고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어진다고 말씀하시면서 한번 죽는 것은 정한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고 하십니다.
왜 하나님의 심판이 필요한 것입니까?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극악무도한 범죄가 하루가 멀다 하고 일어나는 악한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다행히 경찰이나 검찰, 혹은 판사가 법정에서 잘 판단해서 흉악한 범죄자를 중형에 처하면 괞찬습니다만, 가끔식은 억울한 판단이 나오거나 엉뚱한 사람이 형이 받거나, 아니면 영원히 미궁에 빠지는 범죄가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얼마 전에도 참으로 안타까운 소식이 전해 진적이 있었습니다. 단역배우였던 두 자매가 성폭력으로 인해 자살로 생을 마감하자 아버지마저 자살로 생을 마감했는데 피의자들은 어떻게 된 것인지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 사건뿐만 아니라 억울한 누명이나 죽음을 맞이한 사람이 어디 한 두 사람이겠습니까? 이런 사람들의 억울함을 누가 풀어 줄 수 있습니까? 그러기에 심판자이신 절대자 하나님이 필요한 것입니다. 본문 17절에 하나님은 외모로 보시지 않고 행위대로 심판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세상에서 나그네로 60년을 살든, 70년을 살든, 아니 100년을 살아도 지나온 삶에 대하여 반드시 행위대로 심판하시고 보상하십니다.
벧후2:4-7 이하에서 베드로사도는 하나님의 심판의 확실성에 대하여 과거의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는데, 첫째는 타락한 천사에 대한 예입니다. 하나님께서 원래 사탄은 천사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존재요, 하나님 곁에서 가장 사랑을 많은 받은 자였지만, 자신의 위치를 잊어버리고 하나님께 대적하다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지옥에 떨어졌습니다. 타락한 천사가 하나님께 심판 받은 죄는 저가 교만하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심판하십니다. 둘째는 노아홍수심판의 예입니다. 노아시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지 않고 그저 먹고 마시고 시집가다가 홍수가 임하기까지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다가 물로 심판을 받았습니다. 셋째는, 소돔과고모라 성의 멸망입니다. 음행과 동성연애를 당연시하는 세상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지진으로 유황을 비 오듯 내려 심판하셨습니다. 지난 18일 자 신문에서 강남 한 가라오케 술집에서 야구선수와 가수들이 합석한 술집에서 칼부림이 일어나서 유명연예인이 전처가 죽고 야구선수가 중상을 입었는데 이 술집이 트랜스 젠더, 즉 성전환수술자들이 춤추는 곳이라고 합니다. 참으로 이 시대는 소돔과 고모라와 같습니다.
미국의 대 전도자 빌리 그레함 목사님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여러분은 죽는 것을 두려워하십니까? 나는 오히려 사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죽고 난 뒤에는 우리 모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행한 대로 보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짧은 인생을 살 동안에 가져야 할 바른 삶의 자세는, 두려운 마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땅에 사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살아갑니다.
롬3:14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15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16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17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18 그들의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함과 같으니라.
로마서2:6-7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8-9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는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며
2. 믿음과 소망을 하나님께 두고 삽니다.
국민일보 10월 19일자 신문에는 서울 망원동 망원시장에서 속옷가게를 운영하는 조태섭(56)씨의 기사가 실렸습니다. 이 시장에서 18년 째 하루 12시간 씩 일하고 있다고 합니다.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배운 것이 없어도 장사하기는 괜찮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해마다 매출이 줄어서 2001년과 비교할 때 매출의 30%가 줄어서 지금은 아이들이 직장에 나가서 생활하지, 요즈음 수입으로는 자녀들을 대학에 보내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특히 인근에 대형마트가 들어오면서 더 그렇다는 것입니다. ”내일, 더 좋아질 것이라는 희망조차 없다고···“ 말합니다. 요즈음 대선을 앞두고 여야 후보들이 자영업자들을 위한 정책을 내놓지만 전혀 기대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지난 18일 국세청이 집계한 '2011년 개인사업자 폐업 현황'을 보면 작년에 폐업한 개인사업자는 82만9천669명으로 2010년에 비해 2만4천여명(3%) 늘었다. 전체 개인사업자 519만5천918명 가운데 16%이며 2007년 84만8천명 이래 가장 많은 규모다.
최근에는 애그플레이션이라 하여 지난여름 극심한 가뭄으로 인해 농산물 가격 급등하여 장바구니 물가가 급격하게 올라가고 있습니다. 또한 유엔식량계획(WFP)에 의하면 매일 2만 5천명이 굶주림으로 고통 받고 있다. 전 세계의 기아 인구 중 98%가 저개발국에 살고 있으며 10억 명이 굶주림으로 죽어가고 있으며 매년 저개발국에서는 1090만 명의 5세 이하 아동이 영향실조와 기아 관련 질병으로 사망하고 있다.
최근에 김기덕 감독의 영화인 <피아제> “신이여! 자비를 베푸소서.” 라는 뜻으로 베니스 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하여 세계를 떠들썩하게 했습니다. 이 영화의 배경은 청계천 4가를 배경으로 그곳에서 금속을 가공하고 주물을 하여 어렵게 생활하는 사람들에게 사채업을 하는 이강도<이정민> 가 이름그대로 원금의 10배를 이자로 착취하고 만약 값 지 못할 경우에 대비 산재보험을 들어서 프레스로 손을 절단하거나 고공에서 떨어뜨려 상해를 낸 이후 보험금을 타내 생활하는 악마의 모습을 한 악덕 사채업자의 행태를 고발한 사회성이 있는 내용임과 동시에 우리 사회가 이런 악에 대하여 침묵하는 것 자체가 악한 사회임을 고발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악마와 같은 이강도에게 어느 날 갑자기 엄마라고 하는 여인이<조민수> 찾아와서 돈만 아는 냉혈한 인간 이강도에게 엄마의 사랑을 알게 해줍니다. 하지만 이 여인은 엄마가 아니라, 사실 이강도에게 사채 때문에 죽은 엄마였던 것이다. 자신의 아들이 죽은 고통을 이강도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위장하고, 자신의 죄 때문에 괴로워하는 이강도에게 복수하고자 죽음을 선택하게 됩니다. 결국 이강도는 이 죄 값을 치루기 위해 자신에 의해 한 가정이 무참히 파탄된 한 가정을 새벽에 찾게 됩니다. 불구가 된 남편을 집에 두고 새벽에 작은 트럭을 몰고 일터로 나가는 부인의 그 트럭 밑에 자신이 들어가 자신의 몸을 묶은 채로 트럭이 움직이면서 죄 값을 치르는 장면이 엔딩으로 마무리 짓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이세상은 21세기 최첨단을 달리고 있고 최고의 풍요와 여유를 살고 있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하루 식사 한 끼를 해결하지 못해서 굶어죽어 가고 있으며 집 없이 거리에서 노숙하는 사람들이 전 세계에서 해마다 늘어나고 있으며, 세계에서 가장 잘 사는 대륙이었던 유럽마저도 구제 금융을 신청하는 신세로 전락하고 급격하게 중산층이 무너지고 빈곤층이 되는 것을 보면서 현재 유명한 경제학자들은 신자본주의의 위기가 왔다고 이구동성으로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 없는 물질만을 추구해 왔던 자본주의의 몰락을 그저 바라보고 있을 뿐입니다. 이 세상에는 소망이 없습니다. 이 세상만 바라보면 좌절과 절망과 한숨과 분노와 아픔과 질병과 고통만이 가득 찬 세상입니다.
이태리 밀라노의 대성당에는 문이 셋이 있는데 첫째 문은 아치형으로 되어 있는데 “모든 즐거움은 잠깐이다”라는 글이 새겨 있고, 둘째 문은 십자가형으로 되어 있는데 “모든 고통도 잠깐이다”라고 새겨져 있고, 셋째 문에는 “오직 중요한 것은 영원한 것이다”라고 새겨져 있습니다. 참으로 중요한 문구들입니다. 인생의 모든 즐거움도 잠깐이요 고통도 잠깐입니다. 중요한 것은 영원한 것입니다.
인간은 영원한 존재이기 때문에 영원한 것을 붙잡기 전에는, 즉 영생을 얻기 전에는 참 평안과 행복을 얻을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 소망을 갖지 말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다 지나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도 정욕도 권세도 다 지나가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그렇게 호령하던 영웅호걸도 한줌의 흙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1장 24-25절에 보면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인생이 금방 살아있는 것 같고 권세를 가지면 대단한 것 같아도 마치 풀이나 나뭇잎에 눈이나 서리가 맞으면 금방 시들듯이 풀의 꽃이 떨어지듯이 인생의 부귀나 영화도 무상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믿음과 소망을 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영원한 것에 소망을 가져라 는 것입니다. 죄와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인류의 소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없는 세상은 좌절과 절망과 한숨과 분노만 가득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이 세상에 소망입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에게 희망을 줄 수 있습니다.
요한 1서2: 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21절 하반 절에 보면,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3. 형제를 마음으로 뜨겁게 사랑합니다.
사도베드로는 본문 22 절에서 마음으로 뜨겁게 사랑하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것은 남녀 간의 사랑이나 친구간의 우정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주안에서 성도들 간의 사랑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믿음의 형제들로서 서로 뜨겁게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의 피로 구속받은 자 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 가족이라는 말입니다.
18-19절에서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찬송가 가사에 나와 있는 것처럼 한 피 받아 한 몸 이룬 형제요 자매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대 사도인 사도요한 요한 1서4:7-11에서 이럴게 말씀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 하셨은 즉 우리도 서로 사랑함이 마땅하도다.”
요한1서19-21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18세기 독일 작센에 진젠도르프(Zinzendorf 1700∼1760)라는 귀족이 살고 있었습니다. 넓은 영지를 가진 백작이었습니다. 진젠도르프 백작이 어느 날 미술관을 방문했습니다.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는 그림들을 하나하나 보는데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의 그림 앞까지 왔습니다. 그 그림을 보는데 문득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흐르는 피가 실제로 흘러내리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진젠도르프 백작은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회개의 기도를 드렸다고 합니다. '오 예수님, 예수님은 나의 죄 때문에 피를 흘리고 죽으셨습니다. 그런데 나는 예수님을 위해 한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 다음부터 진젠도르프 백작은 주님을 위해 많은 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모라비안 교도들이라고 경건하게 사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들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 진젠도르프 백작의 영지로 피난을 왔습니다. 진젠도르프 백작은 기쁜 마음으로 자기 영지의 일부를 내주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헤론후드(Herrnhut)라는 신앙공동체라고 합니다.
뉴욕에 '에드워드(Edward)' 병원이 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사랑이 많은 병원이라고 합니다. 다른 병원에서 고치지 못하는 병을 다 고칩니다. 많은 의사들과 제약회사들이 비결을 물었더니 에드워드(Edward)의사가 말합니다. "우리가 쓰는 약은 T.L.C입니다". 처음 들어보는 약 이름이었습니다. 에드워드가 약에 대해 설명을 합니다.
"T.L.C는 Tender, Love, Care 의 약자로 부드러운 사랑으로 치료를 한다는 뜻입니다." 약 한 알을 줄 때도, 주사를 놓을 때도 사랑의 마음으로 부드럽게 치료하면 효과가 더 크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안에서 하나 된 형제나 자매를 뜨겁게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요1서3:18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나그네 인생길에서 어떻게 사는 것이 지혜로운 삶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을 기억하면서 두려운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일시적인 명예나 권세나 세상적인 욕망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영원하신 하나님 예수그리스도께 소망을 두고 삽시다. 그리고 잠시 있는 동안 미워하지 말고 서로 뜨겁게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2012년 10월 21일 청주벧엘성결교회주일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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