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야를 기다리는 사람들 (2) 마2:1-12
예수님이 탄생하기 전 약 700여 년 전에 이미 이사야 7장 14절에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이요” 이 말씀에 의해서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오기만을 기다렸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강대국 앗수르와 바벨론에 의해서 포로로 끌려가서 노예로 종살이하였기 때문입니다. 메시야가 오면 자신의 나라는 평화와 전쟁이 없는 자유의시대가 올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중 예수님이 오시기 직전 역사상 가장 어두운 시대가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도덕적으로 부패하고 종교가 제 구실을 하지 못할 때 사람들은 더욱 메시야를 대망하게 되었습니다. 어둠이 깊어갈 수록 빛을 그리워하듯 그 당시 사람들은 메시야가 나타나기를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이 메시야 사상은 구약사상에서 나왔지만 이스라엘 백성이 포로 생활을 하면서 바벨론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전해졌다고 합니다. 바로 동방박사들이 이러한 메시야 사상을 유대인으로부터 전해 들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민 24:17 저가 지금 없으나 내가 보고 저가 가깝지 아니하나 내가 바라보도다. 한 별이 장차 야곱의 집에서 나옴이여 한 홀이 장차 이스라엘에서 일어나리로다. 이 메시야에 대한 말씀을 알고 있었으리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동방 박사 들은 오늘 날로 말하면 천체를 연구하는 학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매일 천체를 연구하던 중 이상한 별을 발견하고 그 별을 따라 유대 베들레헴에 까지 왔는데 역사에 의하면 그 세 사람의 이름은 6세기 말에 이르러 그들의 이름이 멜콘(Melkon) 발다살(Balthasar) 가스퍼(Gasper) 라고 밝혀졌습니다.
오늘은 지난주에 이어서 메시야를 기다리는 사람들 두 번 째 로 동방 박사에 대해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동방박사는 하늘을 바라보았습니다.
본문 1절에 “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여기서 역사적 서술이 정확하게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날 당시 유대왕은 제 3의 성전이라 불리우는 헤롯성전을 지은 헤롯대왕입니다. 이 사람은 유대인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 약 40년 동안 성전을 지었다고 합니다. 이 때 동방으로부터 박사가 예루살렘에 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동방”이란 유대나라로부터 동쪽을 가리키므로 그 당시 천문학이 발달한 바벨론이나 페르시아 지역인 오늘날로 말하면 이란이나 이라크 지역을 가리킵니다. 이단인 신천지는 동방이 대한민국이라고 하고 그 중에서도 이만희가 살고 있는 과천이 동방의 중심이라고 잘못 가르치고 있습니다.
역사가에 의하면 이 사람들은 하늘, 즉 천문을 연구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옛날에는 점성술이 발달해서 하늘의 별자리를 보고 인간의 운명을 판단했습니다. 하지만 이들이 단순히 인간의 길흉화복만을 말하는 점쟁이가 아닌 당대의 천문학자였기에 상당한 지식인에 속하는 그 분야에 전문성을 가진 박사였습니다. 이들은 유대인들이 포로생활을 하면서 구약성경이나 경전을 통해서 메시야 사상에 대해서 알고 있었고, 그 때 한 별이 나타난다고 하는 구약의 말씀을 들었기에 하늘을 주의 깊게 연구하였을 것입니다. 이 때 그들은 하늘에 이상한별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상한별이란 유난히 크고 빛나는 별 입니다. 그들은 이 별을 발견 하자 메시야가 나타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가정과 직업을 잊은 채 별을 따라 움직이기를 시작했습니다. 산을 넘고 물을 건너서 광야의 뜨거운 바람과 밤의 추위를 견디며 오로지 성경에 예언된 메시야 가 있는 곳으로 낙타를 타고 수개월을 약 2500키로 가 되는 먼 거리를 온 것입니다. 이들이 예루살렘에 도착하기 까지 그들을 인도한 한 것은 하늘의 별이었습니다. 무수한 별들 가운데 가장 크고 빛난 별을 놓치지 않고 따라 왔기에 그들이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 이들이 하늘의 별을 보지 않았다면 아마도 예루살렘에 오기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수많은 장애물이 있었을 것입니다. 좌절과 절망, 포기하고 싶은 여건들이 많이 있었지만 그럴 때마다 밤하늘의 별을 보면서 메시야를 만난다는 기대감과 설레 임이 그들이 그 먼 길을 포기하지 않고 달려온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사람은 현재의 삶이 고달프고 힘들어도 미래에 대한 꿈과 이상이 있으면 절대로 삶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희망의 불꽃이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좌절하는 것입니다. 국민일보에서 우리나라 미래의 주역인 10-20 대를 이르는 말이 있습니다. 뭔지 아세요? “파란 (FARAN)세대"라고 합니다. 사회 석학들과 각계 전문가들로부터 이들의 의견을 청취하고 이들의 특징을 규정한 것입니다. F는 좌절의 (Frustration) 목표의식의 (Aim), 위험감수 (Risktaking),재미 (Amusement), 네트워크 (Network)를 의미하는 영어의 첫 글자를 땄다. 이들이 자신의 할아버지나 아버지 세대 보다 훨씬 풍요롭고 안락한 살고 있음에도 왜 좌절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 이유가 도대체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들이 땅에 것만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현실적인 면만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현실적인 삶이 중요합니다.
하지만 인간이란 말의 원래의 뜻은 헬라어로 ”안트로포스“ 즉 ”위를 바라보는 존재“ 라는 뜻입니다. 사람은 무엇을 바라보느냐 에 따라서 그의 인생이 달라지는 것입니다.예수님 당시에 백성들은 소위 팍스 로마라 해서 로마가 전 세계를 힘으로 지배하여 로마제국이 형성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 귀족이나 부유층들은 권력에 힘입어 사치스러운 삶을 살았지만 대다수 민중들은 고통과 가난 질병 속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폭정에 시달렸습니다. 과중한 세금과 억압과 착취로 인해 백성들은 희망을 상실했습니다. 아마도 사는 것이 고욕이었을 것입니다. 종교는 백성들에게 소망을 주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은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메시야가 오시면 우리를 이 고통 속에 있는 현실에서 구원해 주실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때에 주님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신학자들은 예수님이 오신 초림 때처럼 사람들이 좌절하고 절망 속에 있을 때 주님이 오셨던 것처럼 마지막 때 주님이 오실 때도 처음 주님이 오셨을 때처럼 도덕적으로 퇴폐하고 양심이 마비되고 정치가 제자리를 잡지 못하고 종교가 제 구실을 하지 못하여 사람들이 좌절과 절망 속에 역사의 밤이 깊어갈 때 주님이 오신다고 보는 것입니다.
오늘의 이 세대가 젊은이들이 쉽게 분노하고 좌절하면서 집단적인 행동을 보이는 것은 하늘에 소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이 영원한 것이다”라고 말씀합니다.
슈바이처 박사는 “현대인이 하루에 몇 분만이라도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우주를 생각했더라면 현대 문명이 이렇게 병들지는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오늘 우리 시대가 무엇을 쫒고 있는 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오직 물질만을 추구하면서 살아왔지만 우리 인생에게 남는 것이 무엇입니까? 오늘의 한국이 세계 경제대국이 되었음에도 하루가 나라가 편할 날이 없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땅에 것만을 추구하였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소망을 말하지만 이 세상에는 소망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세상이 힘들고 어렵고 어두울수록 우리는 “위에 것” 하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들이 메시야가 나타나는 별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자나 깨나 하늘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동방박사들이 하늘의 별을 보고 아기 예수가 계신 베들레헴에 온 것처럼 위에 계신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고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 할 수 있습니다. 동방박사처럼 하늘을 바라보고 살아갈 때 여러분의 삶속에 새 희망이 넘치게 될 것입니다.
② 사모하는 마음과 열정이 있었습니다.
동방인 바벨론이나 페르시아에서 예루살렘까지 오기까지는 쉽지가 않습니다. 앞에서 말씀 드린 대로 수 천 키로 되는 곳 까지 정확한 목적지도 모른 체 오로지 하늘의 별만을 보고 산을 넘고 강을 건너 왔습니다. 가는 길이 결코 쉬운 길이 아니었습니다. 광야를 지나는 동안 맹수의 밥이 될 수도 있습니다. 강도를 만나서 가진 것을 다 빼앗기고 메시야를 만나기는 커녕 목숨을 빼앗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이 자신의 생명을 걸고 예루살렘 까지 온 것은 메시야를 사모하는 마음과 함께 열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사모하는 마음이 있으면 반드시 열정과 열심히 나타난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사랑하는 곳에는 시간과 물질을 아낌없이 투자 합니다. 그렇치않습니까? 여러분의 자녀들이 원하는 것이 있다면 원하는 대로 다 해 주지 않겠습니까? 옷으로부터 시작해서 나이키 신발, 그가 갖고 싶어 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해 줄 수 있으면 해 주고 싶은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이 없는 곳에는 시간을 내놓거나 물질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는 시간 보내는 것이 즐겁습니다. 시간이 언제 갔는지 모릅니다. 마음이 편합니다. 아무리 물질을 써도 아깝지가 않습니다. 사모하는 마음은 반드시 열정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태어날 당시 메시야를 가다린 사람들이 동방박사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여기 본문에서 동방박사들이 예루살렘에 도착해서 헤롯 왕 앞에 서서 말하기를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왔는데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이가 어디냐가 물었을 때 그 당시 헤롯왕은 대 제사장과 서기관들을 모아놓고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냐 물으니 대제사장과 서기관은 대답하기를 유대 베들레헴이라고 말하면서 미가서 5장 2절 말씀을 근거로 이야기 하는 것으로 보아 이들도 메시야 대해서 잘 알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메시야에 대해서 알고 있었고 어디에 나실 것이란 것도 알고 있었지만 메시야를 만날 생각도 하지 못했습니다. 제사장은 성전에서 제사를 드릴 때 로마 화폐를 유대 화폐로 환전하는 과정에서 소위 수수료를 많이 챙겼습니다. 서기관은 율법을 해석하고 기록하는 사람으로 사람들에게 존경의 대상이었습니다. 헤롯은 메시야가 오면 자신의 자리가 위태롭다고 생각했기에 아기 예수를 경배하고자 함이 아니라, 죽이기 위해서 아기 예수가 있는 곳을 알려 달라고 했습니다. 이들 모두 아기 예수가 계신 가까운 곳에 있으면서도 얼마든지 경배할 수 있었음에도 그들은 경배하지 않았고, 가지도 않았습니다.
여러분! 신앙이 온전한 신앙인지 아닌지 알 수 있는 길은 지식에 있지 않습니다. 행함에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가 지탄의 대상이 되는 것은 행함이 없는 신앙 때문입니다. 야고보 선생님이 말씀하셨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말입니다. 이들은 동방 박사들에 비하면 좋은 환경에서 메시아를 만날 수 있었지만 만나지 못했습니다. 신앙은 환경이 아니라 열정과 사모하는 마음입니다. 성경을 가장 잘 알았던 사람들이 아기 예수를 외면하고 반대하고 끝내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참으로 역사의 아이러니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는 것과 믿는 것, 지식과 신앙은 다른 것입니다. 이런 종교인은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옛날 어느 나라 왕에게 한 충성스러운 신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신하가 갑자기 중병에 걸렸습니다. 그 신하는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왕은 그를 찾아갔습니다. 왕은 안타까운 듯이 그를 바라보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대는 지금까지 내게 충성을 다했네. 그래서 내가 그대에게 마지막으로 무엇인가 보답하고 싶네. 그대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말해주게나. 내가 다 들어주겠네."
그러자 그 신하는 숨을 헐떡거리면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폐하, 제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미처 못 한 것들이 있습니다. 그러니 단 며칠이라도 좋습니다. 제 목숨을 좀 연장시켜 주시면 좋겠습니다."
그 소리를 들은 왕은 안타까운 듯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여보게, 미안하네. 내가 막강한 권세를 가지고 있는 왕임에는 틀림이 없네. 그러나 그 일만큼은 내가 할 수 없네. 그 일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자 그 신하는 한숨을 쉬면서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폐하, 저는 지금까지 너무나 어리석었습니다. 저는 이 세상의 왕을 섬기는 일에만 바빴습니다. 하늘의 왕을 섬기는 일에는 너무나도 소홀했습니다. 이제 곧 제가 하늘의 왕 앞에 서야 하는데 면목이 없어서 떨리는 심정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지난 한 해 동안 우리의 모습은 어떠했습니까? "우리가 사업하고 돈 벌고 성공을 위해서, 나 자신의 명예와 영광을 위해서는 열심히 살았지만 주님을 위해서는 얼마만한 열정을 가지고 봉사 충성했는지 뒤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이 시대의 교회의 위기는 안티 기독교나 내부의 분열과 함께 주님을 향한 사랑이 식어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번 성탄절을 통해서 먼길을 마다하지 않고 달려온 동방박사처럼 주님을 향한 사랑과 열정을 회복하므로 주의 재림을 준비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그들은 별을 보고 매우 기뻐하고 기뻐하였습니다.
헤롯이 베들레헴으로 가는 길을 알려 줌에 따라서 별 따라 베들레헴으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동방에서부터 보았던 그 별이 문득 인도하다가 아기 있는 곳에 머물러 서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그 별을 보고 매우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얼마나 감격스러웠겠습니까? 낙타를 타고 수천키로를 낮과 밤을 수없이 지나서 생사의 위험과 고비를 넘기고 드디어 구약성경에 예언된 인류의 메시야가 탄생한 그 장소에 도착했으니 그 감격은 형언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기뻐하고 기뻐하였다고 말씀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이런 기쁨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주님을 만난 기쁨 말입니다. 구원의 감격과 은혜와 내 안에 샘솟듯 넘쳐야 합니다. 그런 사람은 얼굴과 표정이 다릅니다. 늘 항상 얼굴에 웃음이 있습니다. 뭐 즐거운 일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예수님 때문에 기쁜 것이지요. 그들은 그 기쁨을 말로만 표현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아기 예수께 경배하였습니다. 예전에 우리가 명절에 가족 식구들이 모이면 어떻게 했습니까? 웃어른부터 엎드려 절했지 않습니까? 여기서 경배하다는 말의 뜻은 “가까이 가서 입 맞추다”라는 뜻입니다. 즉 존경의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아기 예수께 경배를 드렸다는 것은 이 아기 예수가 경배 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이시라는 뜻입니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나의 생전에 만왕의 왕이신 예수께서 재림하셨으면 좋겠다. 왜냐하면 내 생전에 내가 쓴 왕관을 그 발 앞에 벗어 드리고 싶기 때문이다“
그리고 떠날 때부터 준비한 예물이 있었습니다. 황금과 유향과 몰약입니다. 황금은 예로부터 왕을 상징하였습니다. 그래서 왕들이 사용한 옷이나 의자 왕관등이 금으로 입혀진 것을 압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이집트 박물관에 가면 이집트 왕인 바로가 사용하던 관이 황금관으로 전시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말구유에 오신 아기 예수가 인류의 왕이시며, 왕권을 가지신 분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유향은 성전에서 제사장이 분향할 때 사용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대제사장이시기 때문에 그 분에 합당한 예물을 드린 것입니다. 몰약은 시체에 바르는 방부제입니다. 이것은 인류의 대속을 위한 십자가의 죽음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 예물에 담긴 의미는 예수는 우리의 왕이시며, 하나님께 나아갈 유일한 대제사장이시며,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구속주가 되신다는 의미입니다.
이 3가지 예물은 당시에도 가장 귀한 예물이었습니다. 예물은 그 사람의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최고의 귀한 예물을 드린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동방박사로부터 배워야 할 신앙입니다. 만왕의 왕이신 주님께 우리는 언제나 최고의 것을 드려야 합니다. 쓰다가 남은 시간이나 억지로 마지못해서 드리는 예물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은 그들의 가장 존귀한 것을 아기 예수께 경배하기 위해 드리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도 동방박사처럼 메시야를 기다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땅의 고통과 아픔, 좌절과 절망의 현실만 보지 말고 위를 바라보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주님을 사모하는 마음과 열정으로 충성, 봉사하면서 기다려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예물을 준비하여 주님 오실 때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011년12월 11일 청주벧엘성결교회 정영진 목사 주일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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