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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교회 행 2:42-47

gkffpffndi 2011. 5. 21. 18:39

 

예루살렘 교회

(행 2:42-47)

 

  예수님의 부활 승천 이후 제자들은 예수님이 말씀 하신대로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서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라고 약속하신 대로 그들이 한 곳에 모여서 한 마음으로 약속하신 성령을 받기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던 중 오순절 날에 바람 같은 성령, 불같은 성령이 각 사람위에 하나 씩 임하여 있더니 그 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로 말하기를 시작 하였습니다. 그 당시 오순절이었기 때문에 경건한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모여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제자들이 각국 나라 방언으로 말을 하기 시작 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모여든 각국 사람들은 바대인, 메대인, 엘람인과 메소포타미아, 유대와 갑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브르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아,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과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입니다. 이들이 제자들이 복음을 전할 때 각국 언어로 듣게 되는 신비한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리고 나약한 제자들이 아니라 예루살렘 거리에서 담대히 베드로와 열한 사도가 이러한 신비한 현상은 선지자 요엘로 통하여 말씀하신 것이 이루어 진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요엘 선지자는 요엘서 2:28-32에서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은 예언 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 들은 꿈을 꾸리라 그 때에 내가 내 영을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주리니 그들이 예언 할 것이요 또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를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라고 말하면서 자신들이 각 나라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이미 성경에 예언된 말씀임을 상기 시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너희들이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는 하나님께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베드로의 설교를 듣던 유대인들은 우리가 어찌 할 꼬 하고 각성이 일어났습니다. 이 때 베드로가 회개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하였습니다.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고 하루에 삼천 명이 구원 받는 놀라운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렇게 놀라운 부흥의 배경에는 다음 몇 가지 중요한 요인이 있었습니다.

 

 1.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초대 교회의 중요한 메시지는 역사적 예수가 하나님께서 구약에 예언된 메시야 즉 그리스도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사도들의 가르침의 내용은 무엇 이었을까요 그것은 예수의 탄생, 기사와 표적 죽으심 부활과 승천 이었습니다. 이것이 초대 예루살렘 교회의 케리그마 입니다. 초대교회는 이 케리그마에 대해서 조금도 의심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과 함께 먹고 마시고 생활하고 기사와 이적을 수 없이 목격한 제자들, 즉 사도들이 살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함께 생활했던 제자들, 즉 사도들이 하나, 둘씩 이 세상을 떠나게 되자 예수님의 행적을 기록하여 보존할 필요를 느끼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이 이 세상을 떠나고 난 후 30년 이후부터 성경이 기록되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최초의 복음서를 마가복음이라고 신학계에서는 알고 있습니다. 이 마가복음의 저작 시기가 AD 65년경으로 보고 있습니다. 마가복음의 주제는 하나님의 종으로 오신 예수님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을 바탕으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이 형성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살아 있을 때는 부활과 승천을 목격한 증인들이 있기 때문에 그 앞에서 반론을 제기 하지 못했던 사람들이 예수님이 제자들이 이 세상을 다 떠나자 일어서기 시작한 것입니다. 과연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 맞느냐, 예수가 어떻게 그리스도가 될 수 있느냐 인간 예수가 어떻게 세상을 창조한 ( Logos) 가 될 수 있느냐, 예수님의 신성이나 인성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는 기독론에 대하여 논쟁이 가열되기 시작 한 것입니다. 그 당시 AD 66세기에는 에비온주의 (Ebionitism )가 나타나 예수는 평범한 사람으로 마리아와 요셉의 아들이라고 했으며,그리스도의 선재(preexistence)와, 성육신(incarnation)과 동정녀 탄생을 부인했습니다. 그 이후 1C말- 3C에 걸쳐서 그 당시 페르시아 종교 혼합주의 적인 성격을 띤 영지주의의(Gnosticism) 가 발현되었습니다. 영지(gnosis) 란 비밀스런 지식, 앎, 혹은 깨달음이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비밀스런 의식을 통해서 깨닫는 지식이 인간을 구원한다고 보는 종교적 철학적 이원론을 표방한 종교 혼합주의 (Sincritism)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이 창주주요 구원자라고 말합니다. 금욕주의를 표방하지만 내면에는 밀교 아래 음란행위가 이루어졌습니다. 이 영지주의가 초기 기독교가 태동하는 시점에 교회 안에 들어와서 예수의 동정녀 탄생을 부인하고 예수와 그리스도를 분리 하였습니다. 또한 도세티스트들은 그리스도의 몸이 실지의 혈육이 아니라 단지 눈을 속이고 지나가는 유령이었다고 주장 하였습니다. 이러한 이단들의 발효로 초기 기독교는 예수의 신성에 논쟁이 격화 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아리우스와 아타나시우스의 논쟁입니다. 아리우스(Arius, 250년 또는 260년 - 336년)는 초기 기독교시대에 활동했던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기독교 성직자이자 신학자입니다.그는 ‘성자’ 예수는 영원한 존재가 아닌, 단지 인간일 뿐이고 ‘성부’에게 종속적인 개념이라고 주장하였고 그의 주장은 아리우스주의라는 초기 기독교 분파로 발전하였다. 당시 그의 주장은 대중적인 인기를 끌고 폭넓게 받아들여졌지만 결국 325년 콘스탄티누스 1세가 직접 주재한 제1차 니케아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결정되었다. 그는 아들은 창조물입니다. 그가 아버지와 같지도 않고 원래 그가 아버지의 진정한 말씀이나 진정한 지혜가 아니다, 라고 주장 했습니다.

 

아리우스는 성령은 성자가 만든 최초의 피조물 이라 하여 삼위일체를 부인하게 되었다. 오늘날 이 아리우스의 주장을 계승하는 이단이 여호와의 증인 인 것입니다. 여호와의 증인은 예수를 피조물로 볼 뿐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을 부정합니다. 그 이후 칼케돈 공의회(Council of Chalcedon)는 451년 10월 8일부터 11월 1일까지 소아시아의 비티니아의 도시 칼케돈(현재의 터키)에서 근 600명의 동방교회 주교(主敎)가 참석하였는데, 서방측에서는 각 2명씩의 아프리카 주교와 교황청 대표만 참석했다. 이 회의에서는 에우티케스를 이단으로 단죄함과 아울러, 그의 그리스도의 단성설(單性說)이 부정되고 예수는 완전한 하나님이시며, 완전한 인간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비로서 예수 부활 승천 이후의 기독론 논쟁은 종지부를 찍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계속해서 이단들은 예수님의 신성을 부정해 왔습니다. 오늘날 교회는 이 사도들의 전통, 즉 가르침에 서 있습니다. 이 가르침에서 벗어난 거짓 교사들에 의해서 거짓된 가르침, 영지주의적인 이단사설이 오늘날 교회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 십자가에서 자신이 예수처럼 십자가에서 죽음으로 예수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실행한 그 사람은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전직 목사라고 하는 사람의 카페에 가입하여 종교혼합주의 영향을 받은 자 인 것입니다. 이 전직 목사라고 하는 사람은 어디 신학을 하였는지 밝히지 않고 있으며 그의 카페의 글은 종교 혼합주의 색채가 다분한  이 시대의 영지주의 자인 것입니다. 교회라고 간판 달았다고 해서 똑 같은 교회가 아닌 것입니다. 그들의 신앙고백을 분명히 들어야 합니다. 예수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이 가르침위에 교회는 세워져 있으며, 여기서 이단과 정통이 갈라지는 것입니다.“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엡2:20).

 

 2. 교제와 나눔이 있었습니다.

 

 초대교회가 부흥할 수 있었던 이유는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고 오로지 기도하였기 때문입니다. 무슨 교제가 있었습니까? 영어성경에 보면 이들은 함께 (together) 늘 같이 있었습니다. 교제란 “코이노이아” 라고 하는데 사귐이라고도 번역합니다. 성도들 간에 교제와 사귐이 풍성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자주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본문 2장 46절에 『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라고 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서로가 좋아서 매일 마음이 하나가되어 성전에 모인 것입니다. 먼저는 하나가 되었습니다. 하나가 되지 못하면 만나도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다음에 만나자고 하면 이러저런 핑계를 대서 빠지려고 할 것입니다. 안보면 보고 싶고 궁금하고, 만나고 싶은 모임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가 한 마음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영적, 신앙적 지도자의 가르침에 순종하고 따랐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들은 교회에서만 모인 것이 아니라 가정에서도 모였습니다. 성전에서만 떡을 뗀 것이 아니라, 가정에서도 떡을 떼었습니다. 떡을 떼었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죽음을 앞두고 유월절 만찬을 하시면서 자신의 몸을 상징하는 떡을 떼시고 받아먹으라는 주님의 최후의 만찬을 기억하면서 주님이 부탁하신 유언적 말씀을 기억하면서 자신들이 한 피 받아 한 몸 이룬 형제자매임을 기억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이 이 세상을 떠난 뒤에는 혼자 있지 않게 하고 함께 늘 있었습니다. 그리고 떡만을 뗀 것이 아니라, 46절에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했습니다. 같이 공동식사 했다는 것입니다.

 

한 식탁에서 같이 식사 한다고 하는 것은 한 가족이나 가까운 사람이 아니면 할 수 없습니다. 나하고 친한 사람이 아니면, 식탁교제에 초청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식탁에 초청했다고 하는 것은 친밀함의 표시인 것입니다. 우리교회도 예배 후에 공동식사를 하면서 성도들이 식사 중에 이야기꽃을 피우면서 교제를 나누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제가 청년 시절에 그 당시 넉넉하지 않은 시절이었지만 성도들 간의 식탁교제가 아름답게 이루어 졌음을 기억합니다. 작은 교회였기 때문에 재정이 여의치 않아서여도 그렇지만 성도들이 기쁨으로 봉사하였습니다. 예배 후에 성가대들이 교인들이 집집마다 매주 초청하여 성가대원들이 식사를 했던 추억이 있었습니다. 간단한 칼국수나 라면을 대접하기도 했는데 이러한 식탁교제가 교인들 간의 풍성한 교제와 사랑을 느끼게 하였고 성도들 간의 끈끈한 정이 쌓여 공동체를 화목하게 하고 하나 되게 하여 교회 성장의 원동력이 되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가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 옷깃까지 내림 같고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시133-1-3).

 

또한 초대교회는 나눔이 있었습니다. 44절에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이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여기서 통용 했다 는 말은 영어로 common 은 공동, 혹은 공통이란 뜻으로 공산주의 com·mun·ism 이 여기서 나왔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아무튼 초대교회는 자신의 소유를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재산을 팔아 공동으로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없는 사람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성령의 임재와 충만을 누리는 예루살렘 성도들은 먼저 자기 것을 주장하지 않고 자신의 유익을 따지지 않았습니다.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것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많이 소유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참 모습인 것입니다. 내가 남다른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이 물질이든 지식이든 재능이든 기술이든지 넘치는 것을 나누고 다른 사람들에게 흘려보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나라 속담에 콩 한 조각이라고 나눈다는 말이 있습니다. 나누는 사회가 건강하고 아름다고 행복한 사회인 것입니다.

 

정운찬 전 국무총리가 기업이익의 초과분을 중소기업과 나누자고 했더니 우리나라 대표기업인 삼성의 이건희 씨가 무슨 공산주의자냐고 공격했습니다. 나눔의 정신이 부족 한 것입니다. 나만 잘 사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잘 살아야 합니다. 나만 행복한 것이 아니라 모두가 행복한 사회가 건강한 사회 인 것입니다.

 

누가복음 6:38절에는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미국 캘리포니아 북부에 가면 세코야 국립공원이 있습니다. 이 공원은 거대한 붉은 삼나무 숲을 이루고 있습니다. 캘리포니아 삼나무는 무려 130m까지 자랄 수 있다고 합니다. 보통 나무는 커봐야 2~30미터, 해글리 공원 안에 있는 큰 나무라고 해도 4~50미터에 불과한 것 같은데, 130미터까지 자란다는 것은 대단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삼나무가 엄청나게 크게 자라는데 비해, 뿌리는 의외로 땅속 깊이 뻗어가지 않고 얕게 뻗어간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삼나무가 그렇게 크게 자랄 수 있는 이유는 뿌리들이 서로 얽혀 강력한 그물망을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지간한 비바람이나 거센 태풍에도 쓰러지지 않고 130미터까지 자라는 것입니다.

 

삼나무 이야기가 무엇을 교훈하고 있습니까? 함께 할 때 힘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초대교회가 이단과 핍박 가운데서 하나가 될 수 있었던 힘은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풍성한 교제와 나눔으로 인해 하나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함께 할 때 교회는 부흥되고 성장 합니다.

 

  3. 초대교회는 온 백성에게 칭송 받았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나눔의 정신으로 살았습니다. 나홀로가 아닌 함께(together), 즉 공동체 정신으로 살았습니다. 그랬더니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다같이 47절을 보겠습니다.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교회가 세상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도 너희는 세상의 빛이요, 소금이라고 하셨습니다. 교회의 빛이요, 소금이 아니라 불신자들이 있는 직장이나 일터 마을이나, 아파트에서 선한 행실로 칭찬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칭송이라는 단어는 영어로 favor인데 이는 호의 친절 평판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은 매우 친절하고 호감이 있다는 평판을 받은 것입니다.

 

그 당시 예루살렘 교회는 세상 사람들로부터 좋은 평판을 얻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아 주고 자신의 재산을 팔아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봉사하고 섬김의 모습을 보여 주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감동을 받은 것입니다. 요즈음 시대를 감성의 시대라고 하지 않습니까? 의식적이고 형식적인 것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사람을 사랑하고 자신을 희생하는 모습에서 사람들은 감동을 받고 따르는 것입니다. 교회에대한 평판이 좋아집니다. 선한 일을 많이 해야 합니다. 믿음위에 덕을 세워야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교회도 초대 예루살렘 교회처럼 세상에 감동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교회는 부흥하고 성장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라”고 했습니다 (빌4:8)

 

베드로사도는 (벧후1:5-7 )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

디모데전서 3장 7절에 『 또한 외인에게서도 선한 증거를 얻은 자라야 할찌니 비방과 마귀의 올무에 빠질까 염려하라 』고 했습니다.

 

초대교회와 같은 성령의 역사가 우리나라 평양에서 평양대부흥회가 1907년 1월 2일-15일 까지 남자 사경회가 성령의 임재를 간절히 사모하는

가운데 시작되었다고 헌트(William B. Hunt)는 말한다. 그 당시 사람들이 예수를 믿어도 신자들이 예배에 잘 참석하지 않았고, 성적으로 타락하였으며 도둑질이 횡행했으며 교인들끼리 다툼이 심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성찬을 금하고 제명하기도 했다 합니다.

 

장대현 교회에서 성령의 불이 임하자 사람들이 달라졌습니다. 교인들이 서로 미워하던 것들을 통곡하며 그 당시 별로 죄악시 되지 않았던 축첩 노비소유, 조상숭배 등을 회개하였고, 그날 많은 사람들이 사기, 공급횡령, 그리고 실제적인 도둑질을 고백했다.”

 

그 사경회에 참석자 중에는 300리를 달려온 자들도 있었고, 360여리 먼 곳에서 온 자들도 있었다. 대부분의 참석자들이 2주간의 사경회에 참석키 위해 영하 수 십도를 오르내리는 혹한을 무릅쓰고 산과 들을 거쳐 그곳에 도착하였다. 그들은 사경회 장소까지 오는 교통비는 물론 사경회 기간 중의 숙박비 등은 자신의 부담하여야만 했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사경회 기간 동안에 먹을 양식을 등에 메고 왔던 것이다. 정말 대단한 열정으로 그들은 집회에 참석하였던 것이다.

 

날연보, 성미, 새벽기도, 통성기도 등의 한국교회의 많은 실천들이 즈음에 형성되었다. 또한 당시 기독교인들은 주일성수를 철저히 지켰다. 그것은 그들의 신앙적인 열정을 말해준다. 그들의 주일성수의 철저함은 다음의 보고를 통해 알 수 있다. “이곳에서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무엇인가 대가를 치른다.... 그 한 가지가 주일성수이다. 매 5일마다 전주에서 장이 열리는데 농부, 상인, 공업 종사자- 모든 사람들이 팔 것을 가지고 온다.... 매주 주일에 장이 선다. 하루를 장사하거나 거래하지 않고 성스럽게 주일을 지키는 것은 수입의 7분의 1일 포기하고, 이웃의 조소와 조롱을 감내해야 할 뿐만 아니라 재정상의 큰 손실도 감수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 당시의 그들의 예배에의 열심을 잘 보여준다. 그리고 이 불이 사회를 변화시켰습니다. 1903-1907년 사이에 신자수가 75000명, 3배나 성장하였습니다. 1907년 대 부흥 운동은 일종의 전인적인 변화를 추구하는 운동이었다. 부흥회를 통한 영적 각성으로 대 사회적인 변화를 가져 왔으며학교와 병원 설립으로 이어져 자연스럽게 대 사회적 영향력을 확대 해 나갔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초대 예루살렘 교회는 가장 이상적인 교회의 원형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세상으로 지탄받는 이유가 어디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먼저는 사도의 가르침을 잘 받아야 합니다. 예수가 주요 그리스도이심을 확실히 고백해야 합니다. 이에서 벗어나는 것은 이단이요, 거짓교사요 거짓 가르침입니다. 성도간의 교제가 교회와 밖에서 풍성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내 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 예수 사랑을 실천할 때 세상으로 부터 교회는 칭찬받고 부흥하게 될 것입니다.

 

<2011년 5월22 청주 벧엘성결교회 정영진 목사설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