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의 아들 시몬아 ! (요한복음 21:15-19)
성경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편지입니다. 특히 누가복음 15장에는 하나님이 인간을 향한 사랑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잃은 양을 찾는 비유, 잃은 드라크마를 찾는 여인, 잃은 아들을 찾는 비유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 주십니다. 끝까지 포기 하지 않으시고 찾으시는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시고, 끝까지 책임져 주십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실패하고 실수하여 낙담 가운데 있는 시몬 베드로에게 주님이 직접 오셔서 그의 영혼의 깊은 상처와 아픔을 만지시고 회복시키시어 위대한 하나님 나라의 사명자로 삼으시는 내용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여러분의 영혼이 치유되고 회복되어 베드로 사도처럼 위대하게 쓰 임 받는 인생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 요한의 아들 시몬아 !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입니다.
요한복음 21장 14절 에 보면 이것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옛날에 삶의 터전 이었던 갈릴리 바다에 나타나신 것은 그들이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고 죽으신 이후에 믿음을 상실하고 자기의 사명을 잃어버린 제자들에게 다시금 사명을 회복시키기 위함 이었습니다.
특별히 주님을 그토록 사랑한다고 고백했던 베드로는 자신의 연약함으로 자신의 스승 앞에서 3번씩이나 부인했던 자신에 대해서 부끄럽기도 하고 좌절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자신을 믿을 수 없음에 자괴감에 빠져들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에게 주신 사람 낚는 어부의 사명을 망각한 채 하나님 나라의 위대한 사명은 접고 옛날 고기 잡던 시절로 돌아갔습니다.
그래서 바닷가에서 도마와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 또 다른 제자들과 함께 있다가 시몬 베드로가 먼저 나는 물고기 잡으로 간다고 하니 다른 제자들도 배에 올라가 그 날 밤에 밤새 어두컴컴할 때부터 새벽녘 동틀 때 까지 그물을 던졌지만 예전처럼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날이 새어갈 때에 그들 앞에 주님이 서셨지만 알지를 못했습니다. 이 때 주님께서 얘들아 고기가 없느냐 그물을 오른편에 던져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하시니 던져졌더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게 되었더라. 이 때 주님이 사랑하는 제자 요한이 주님을 먼저 알아보고 주님이시다. 라고 외칩니다. 이 소식을 듣고 베드로가 너무 기뻐서 겉옷을 두르고 배에서 바다로 첨벙 뛰어내려 주님이 계신 곳으로 올라옵니다. 올라 와보니 주님이 육지에서 밤새 고생한 제자들을 위해 떡과 고기를 구우시면서 잡은 고기를 더 달라고 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아침식사를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식사가 끝난 이후에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와 일대일로 숯불을 앞에 놓고 예수님이 베드로의 마음의 아픔과 상처를 치료하십니다. 사실 이 때 베드로는 주님이 살아 돌아 오셨다는 말에 기뻐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예수님의 얼굴을 볼 수 없을 정도로 난처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은 누구보다도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지 않았습니까? 예수님께서 갈릴리 바다에 제일 처음 오셔서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 낚는 어부 되게 하리라 하실 때 제일 먼저 주님을 따라 나섰습니다. 또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주님이 사람들을 누구라 하느냐 물으실 때 주님은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이렇게 고백하므로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자 못하리라. 는 축복을 받기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자신을 떠나는 것을 보면서 너희들도 가려느냐 물으실 때 주여 영생이 말씀이 있으매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겠습니까? 그리고 예수님께서 마지막 최후의 만찬 때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 하리라. 말씀하실 때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그런데 어떠했습니까? 며칠 되지 않아서 그 고백을 언제 말했느냐 하듯이 작은 소녀 앞에서 주님의 말씀대로 세 번 씩 그것도 주님이 재판받는 바로 앞에서 사람들이 두려워 자신의 스승을 저주하고 맹세하면서 나는 절대 예수쟁이가 아니다. 고 선포한 것입니다. 그 때 예수님 말씀대로 닭이 울었습니다. 베드로는 전에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생각나서 밖으로 나가 심히 통곡하며 울었다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에 대한 실망감, 자신에 대한 비애, 자신의 비겁함과 연약함으로 인해 자책에 빠졌습니다. 그래서 다른 제자들과 함께 있을 때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면서 갈릴리 바다로 고기 잡으러 간 것입니다. 이런 마음으로 주님 앞에 앉아 있는 베드로에게 다정스럽게 그의 옛 이름을 부르시는 것입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사도 베드로가 아니라, 한 낯 나약한 모습의 인간임을 상기 시키는 것입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은 주님이 베드로라는 이름을 주시기전 세속 이름입니다. 이 이름을 부르신 이유는 무슨 의미이겠습니까? 어부 시몬은 나약 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입으로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해도, 아무리 신앙 고백을 위대하게 했어도 성령이 없는 신앙고백, 성령이 없는 열심은 결정적일 때, 자신의 이익과 반할 때 언제든지 주님을 떠날 수 있고, 주님을 반대할 수 있고, 비판자의 자리에 설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모든 행위는 가짜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주님은 그의 죄를 떠올려 진정한 회개를 통해 그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다시 세우시기 위해 똑 같은 질문으로 세 번 물으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 보다 나를 더 사랑 하느냐 ? 이 때 주님은 앞에 두 번은 아가페의 사랑으로 물었지만, 베드로는 자신 있게 대답하지 못하고 필로에, 친구의 사랑으로 좋아 한다고 대답합니다. 예전 같았으면 자신 있게 아가페 사랑, 즉 제가 주님을 위해서 희생하겠습니다. 대답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주님 앞에서 그렇게 대답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의지와 고백이 얼마나 무력한지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물으실 때마다 베드로는 예 제가 주님을 좋아 합니다. 또 물으십니다. 예 제가 주님을 좋아 한다니까요? 왜 가슴 아픈 일을 상기 시키십니까? 주님은 다 아시지 않습니까? 여러분! 예수님은 왜 똑같은 질문을 3번씩이나 물으십니까? 상처 주기 위해서입니까? 아닙니다. 세 번 반복하여 주님에 대한 사랑을 고백할 기회를 주시고 베드로의 가슴에 새겨진 상처를 치유해 주시기 위함입니다. 돌이킬 수 없는 자신의 허물을 속죄할 수 있는 기회를 부활하신 주님께서 친히 찾아오시어 베풀어 주셨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다 보면 베드로 와 같이 실수 할 때도 있고 잘못할 때도 있습니다. 우리는 연약해서 자신도 모르게 예수님을 부인하게 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를 결코 부인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저버리지 않으시고 우리를 끝까지 책임져 주시고 사랑하십니다. 이것이 주님의 사랑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고 변함없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2. 네가 이사람 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물으십니다.
지금 주님은 요한의 아들 시몬아 ! 옛 이름을 부르시면서 지난날의 허물과 실수를 상기시키면서 위대한 주님의 사역자로 다시 부르시는 것입니다. 3번의 실수를 통해서 한없이 자신에게 낙담 해 있는 그의 영혼을 치료하시고, 그에게 다시금 위대한 하나님의 사역자로 사용하시기 위해서 물으시는 것입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 네가 이 사람들 보다 나를 더 사랑 하느냐 물으십니다. 여기에서 영어 성경에서는 이 사람을 (these, 혹은 all thing) 이것들보다. 베드로는 이 모든 것보다. 로 대답합니다. 그러므로 지금 베드로가 갈릴리 바닷가에 찾아 간 것은 사명을 잃어버리고 세속적인 목적으로,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배를 탄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과 베드로가 대화 하는 바닷가의 모습은 어떤지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물고기를 가득 잡아 왔기 때문에 고기가 여기 저기 널려 있습니다. 고기 잡는 기구와 그물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주변에는 자신과 함께 잔뼈가 굵어 지도록 함께 일한 동료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염두에 두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첫 번째는 네가 이 잡아온 고기들 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물으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한다고 고백하는데 네가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서 고기를 잡고 파는, 이 사업보다도 나를 더 사랑 하느냐 입니다. 여러분이 타고 다니는 자동차 보다 주님을 더 사랑 하느냐 입니다. 여러분이 집에서 기르는 애완견 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느냐 묻습니다. 생계를 위해서 하는 사업이나 장사를 하는 것보다 조금만한 수입 보다 더 주님을 사랑하십니까? 여러분이 소유하고 누리는 것보다 주님을 더 사랑 하십니까?
두 번째는 제자들의 삶의 터전은 갈릴리 바다입니다. 갈릴리 바다는 세상입니다. 주님은 이 세상이 주는 편안함과 안락함, 풍요와 사치, 인기, 조금한 명예 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느냐 물으십니다. 이 세상의 썩어 없어질 것보다 더 주님을 사랑하느냐 물으십니다. 조금 전 까지만 해도 베드로는 분명 세상을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바닷가에 나왔습니다. 하지만 주님을 만나고 나니 세상은 갈릴리 바닷가처럼 파도가 밀려오고 풍랑이 심하고, 주님 없이는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하는 공허한 세상임을 깨닫고, 주님! 제가 이 세상이 주는 그 어떤 것 보다 주님을 사랑합니다. 고백합니다.
세 번째는 여기 네가 생사고락을 같이한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물으십니다. 네가 오랜 세월동안 인간관계 이해관계 친인척 관계로 사업관계로 맺었던 사람들보다 더 사심 없이 이해관계 없이 희생적인 사랑으로 주님을 사랑하느냐 물으십니다. 하지만 우리가 얼마나 주일이면 이러한 정든 사람 정든 친구 정든 친척들로 인해 주일 성수 하지 못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하지만 그 고백이 얼마나 진실 된 고백이었던지 베드로는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단언할 정도였습니다. 자신이 이제 주님을 가장 귀하게 여기고 있음을 주님께서 이미 아신다는 것입니다. 한 인간이 전정으로 주님을 사랑하는지, 이 세상에서 주님을 가장 귀하게 여기고 있는지의 여부는, 이 세상 사람은 아무도 모를지라도 그 당사자와 주님만은 정확하게 알고 계십니다. 내가 정녕 주님만을 귀하게 여기며 사는지 이 세상 것을 더 귀하게 여기며 사는지 나 자신은 정확하게 알고 있지 않습니까?
주님은 베드로야 네가 나를 위해 희생할 수 있겠니? 세 번 다 아가페로 물으셨지만 끝까지 자신은 친구의 사랑으로 밖에 대답했습니다. 왜냐 하면 자신을 연약함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세 번 주님을 사랑한다는 고백으로 이미 주님이 자신의 마음을 알고 있으리라 생각 했을 것입니다.
오늘 주님이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에게 갈릴리 호숫가에서 물으셨던 주님이 오늘 이 자리에서 여러분의 이름을 부르시면서 지금 물으십니다. 누구야 네가 정말 날 사랑하니? 물으십니다. 이 질문에 이 시간 예 제가 주님을 자신 있게 사랑합니다. 고백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그러면, “나를 따르라”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물음에 베드로는 예 제가 예전처럼 자신 있게 고백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내가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것만은 아시지 않습니까? 하고 고백했습니다. 주님은 즉시 내양을 먹이라, 내양을 치라, 내양을 먹이라. 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사명자로 다시 나서라는 것입니다. 네가 진정으로 나를 사랑한다고 세 번 씩이나 고백한 것을 말이 아니라 삶으로 행동으로 보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고 순종하는 모습 희생하는 모습, 십자가를 지는 모습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네가 참으로 참회 하였다고 하면 나에게 사랑의 행위를 보여 주라는 것입니다. 주님 앞에 진정성을 말이 아니라, 행함으로 보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내가 진실로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 가리라.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베드로가 장차 어떠한 죽음을 당하게 될 것인지 예수님이 암시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베드로가 십자가에서 팔을 벌임 으로서 순교를 당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찰스 하워드 박사(Dr. Charles B. Howrad)는 말하기를 "당신은 예수를 믿습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구원 받아서 천국으로 갈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당신이 예수 믿는 사람처럼 살지 못했다면 당신은 그것 때문에 지옥에 가게 될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 오래전에 상영된 <쿠오바디스>라는 영화를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쿠오바디스 도미네”? 라는 말을 줄인 것입니다. 여기서 “쿠오“라고 하는 말은 라틴어로 ”어디로“하는 의문사입니다. 또 ”바디스”란 말은 “가십니까”? 라는 말이고 “도미네” 라는 말은 “주여!” 하는 것입니다. 즉 “쿠오바디스 도미네?”는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 라는 말입니다. 베드로가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핍박이 얼마나 심한지 모릅니다. 도저히 견딜 수 없습니다. 베드로가 핍박을 피해서 로마를 빠져나와 막 달음질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맞은편에서 베드로와 보조로 로마 성을 향해서 가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어딘가 낯이 익은 모습입니다. 점점 가까이 왔습니다. 베드로가 깜짝 놀랐습니다. 그 사람은 바로 예수님이셨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쿠오바디스 도미네?” <주어 어디로 가십니까?> 예수님이 슬픈 음성으로 이렇게 답변하셨습니다. “나는 네가 지기 싫어서 벗어놓은 십자가에 매달리기 위해서 저 로마 성으로 가노라.” 그 말을 들은 베드로는 마음속에 깨달음이 왔습니다. 그래서 그 자리에서 다시 되돌아섰습니다. 베드로는 로마로 돌아갔습니다. 담대하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급기야 핍박 자 에게 잡히고 말았습니다. 베드로는 십자가에 못 박는 그들을 향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매달린 십자가에 바로 매달릴 자격이 없다.” 그러면서 자기를 결국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서 순교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의 팔을 벌임 으로서 주님을 향한 자기의 사랑이 얼마나 진실하였는지 증명했습니다.
주중대사로 통일부 장관을 역임하셨던 하나님의 대사의 저자인 김하중 장로님은 그의 책에서 나는 고난을 겪지 않고 예수를 믿게 된 대신에 하나님이 나를 축복하시는 만큼 내 자신이 힘든 길을 가기로 했습니다. 가능한 한 세상적인 즐거움을 멀리하고 시간만 나면 무릎을 꿇고 기도하면서 하나님 말씀에 충성하는 삶을 살기로 했다. 지위가 높아질수록 내 생활은 더욱 힘들어졌다. 청와대 시절도 그랬지만 대사로 있을 때도 마음 놓고 잠을 자기가 쉽지 않았다. 토요일도 공휴일도 없었다. 일 년 내내 기도 아니면 남을 돕는 일이 전부였다. 하나님이 축복을 주실 때는 나와 내 가정만을 위해 사용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축복을 받은 만큼 하나님 나라와 그 백성들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 축복을 받은 만큼 작은 십자가라도 져야 한다. 고 고백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 질문에 무엇이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주여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이렇게 대답하신다면, 여러분의 삶에서 주님을 사랑함이 진실함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성도로서 가장 작은 일로부터 주님이 피 값으로 사신 교회를 사랑해야 합니다. 나의 시간과 재능과 물질을 드리고,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전하는 일에 앞장서서 헌신함으로 주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2011년 3월 6일 주일설교
'.........은혜의 말씀 > ...새믿음의 강단' 카테고리의 다른 글
좋은 것 주시는 하나님 마태복음 7장 7-11 (0) | 2011.03.26 |
---|---|
마태복음 6장 19-24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0) | 2011.03.10 |
마태복음 7:13-14 생명에 이르는 길 (0) | 2011.02.25 |
산을 옮기는 믿음 ( 마 17장 14-20) (0) | 2011.02.19 |
딤후 3장 14-17 좋은 교사 (0) | 2011.02.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