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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7:13-14 생명에 이르는 길

gkffpffndi 2011. 2. 25. 22:53

 

마태복음 7:13-14 생명에 이르는 길

 

우리의 인생항로에는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생명의 길, 좁은 길입니다. 또 세상이 보여주는 넓은 길이 있습니다. 사망의 길이 있습니다. 이 두 가지 길 가운데 어느 쪽 길을 선택하느냐의 선택은 우리에게 달려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반드시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어느 길을 선택하든지 자유지만 그 결과는 엄청난 결과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엘리야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아놓고 말했습니다. “너희가 언제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거리겠느냐? 바알이 참신이면 바알을 쫓고 여호와가 하나님이 참신이면 여호와 하나님을 좇을 것이니라. 그렇습니다. 교회를 다닌다고 하면서,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둘 사이에서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머뭇머뭇 거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이냐, 세상이냐? 주의 일이냐, 육신의 일이냐? 이 둘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세상과 동시에 하나님을 섬길 수 없습니다. 생명의 길로 가든지 아니면 멸망의 길로 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생명의 이르는 길에 대하여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좁은 문

 

예수님은 좁은 문이 있고 반면에 넓은 문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은 문이기 때문에 좁은 문을 통과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을 좁은 문이라고 하셨을까요? 그 이유를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요 10;9절에서 자신을 가리켜서 문이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 그러면서 누구든지 예수님 자신인 문을 통과하면 다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른 말로 바꾸어 말하면 문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과하지 않고서는 이 세상에 구원받을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는 말씀입니다. 행 4장 12절에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일이 없음이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과하지 않고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서는 하늘나라에 갈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볼 때 이문은 구원의 문이요, 믿음의 문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이 문이 넒은 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난 목요일 자 국민일보 신문에 기사가 낳는데 일반 공무원 9급 공채시험 1529명 뽑는데 14만2732명이 몰려 평균 93.3대1, 9급 공채 교육행정직은 513대 1이라고 합니다. 그야 말로 바늘 귀 만큼이나 좁은 문입니다. 졸업 후에 취직의 문도 넓지 않습니다. 대학입시의 문은 어떻습니까? 오늘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그런 문이 아니라 구원의 문입니다. 하지만 이 문도 넓은 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마19장 16-26절에 보면 한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나아와 묻습니다.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그 때 네가 생명을 얻으려면 계명을 지키라. 그랬더니 이 청년이 말합니다. 저는 그런 것 잘 지키고 있습니다. 그러면 네가 가지고 있는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에 부자 청년은 심히 근심하고 주님을 떠났다고 말씀하십니다. 23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24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25제자들이 듣고 몹시 놀라 이르되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26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천국에 가는 문이 결코 넓은 문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씀에 역사적 배경이 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 성 뒤 쪽에는 아주 좁고 작은 문이 있었습니다. 문이 너무 작아서 사람들이 그 문을 가리켜서 일명 “바늘귀 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이 바늘 귀 문 좌우는 아주 가파른 비탈길입니다. 다른 곳으로 둘러갈 수도 없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 방향에서 와서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는 유일한 통로가 이 바늘 귀 문입니다. 상인들이 멀리서 약대의 등에 많은 물건을 싣고 와서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고자 바늘귀 문을 통과하려 할 때는 갖은 곤욕을 다 치릅니다. 우선 약대 등에 있는 모든 짐들을 다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약대의 머리를 숙이게 하고 무릎을 꿇게 하고 나서야 바늘 귀 문을 통과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아마 예수님이 우리들에게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하실 때는 이 바늘 귀 문을 염두에 두고서 말씀을 하셨을 것입니다. 약대가 바늘 귀문을 통과 하려면 먼저 짐을 다 내려놓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좁은 문을 통과하려 할 때는 우리가 진 짐을 내려놓고 나서야 좁은 문을 통과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죄의 짐 그 무거운 짐을 지고서는 좁은 문을 통과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요한이 광야에서 제일 처음 외친 말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즉 회개의 문을 통과해야 합니다. 그 다음에 약대가 바늘 귀 문을 통과하려면 머리를 숙이고 무릎을 꿇어야 하는 것처럼 우리가 좁은 문을 통과하려면 겸손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에서 팔복을 말씀하실 때 제일 먼저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 가난한 심령이 되어야 좁은 문을 통과 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누구든지 예수 믿으면 구원 받고 천국백성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천국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통과해야만 하는 문이 있습니다. 이 문은 좁은 문입니다. 먼저는 자신이 죄인임을 알고 회개해야 하는 회개의 문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모든 짐을 다 내려놓아야 합니다.

 

미국 텍사스에서 큰 목장을 경영하는 돈 많은 한 부자가 세계여행 중에, 그렇게 보고 싶던 버킹검 궁전 앞까지 왔습니다. 그는 문지기에게 1000$짜리 지폐를 주면서, ?이 정도면 이 문안으로 들어갈 수 있겠지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때 그 문지기는 ?아닙니다. 이 왕궁은 돈을 주고 들어가는 곳이 아닙니다. 아무리 많은 돈을 내도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초청을 받은 사람은 단 1$도 들이지 않고 자유롭게 들어갈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천국의 문을 들어가려면 회개의 좁은 문을 통과해야 합니다. 회개의 문을 통과하면 그 문은 은혜의 문이요, 구원의 문입니다.

 

2.좁은 길

 

천국의 길로 들어서기 위해서는 반드시 좁은 문을 통과해야 합니다. 여기서 좁은 문이란 회개의 문이요, 구원의 문입니다. 이 문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결단해야 하는데 그것은 자신의 무거운 죄 짐을 내려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 문을 통과한자는 좁은 길로 들어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14장 6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곧 자신을 가리켜서 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좁은 길이라고 하는 것은 한 마디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입니다. 길 되신 예수 그리스도룰 따르는 길은 쉽지 않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십자가를 지는 길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 16:24) 구원받은 성도의 삶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 길은 첫째, 자신을 부인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삶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타락한 인간은 본성적으로 자신을 드러내려고 하지, 감추려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구원의 은혜를 체험한 성도는 자신보다 주님을 더 드러내고 나타냅니다. 거기에서 기쁨과 영광을 얻습니다. 자신을 부정함으로써 주님이 영광이 받으시고 주의 나라가 세워짐을 알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부정해야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으며 길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따라갈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유명한 권사님이 있었습니다. 이분은 특별히 신유의 은사를 받아서 많은 집회를 통해서 여러 병든 사람들을 고쳤습니다. 그 덕분에 명성도 높아지고 또 재산도 많이 모을 수 있었습니다. 이 권사님이 하루는 꿈을 꾸었습니다. 꿈속에서 그렇게도 그리던 천국에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천국에 가서 보니 예수님이 그곳에 계셨습니다. 너무나 반가워서 인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이 아는 척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권사님이 한 발자국 더 가까이 다가서서 큰 소리로 인사를 했습니다. 예수님 저 000 권사입니다 제가 주님을 위해서 얼마나 열심히 일했습니까? 제가 주님을 위해서 얼마나 많은 환자를 고쳤습니까? 그랬더니 예수님이 그 소리를 들으시고 정색을 하면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네가 나를 위해서 일했다고 ? 네가 지금까지 너 자신을 위해서 일했지, 언제 나를 위해서 일했느냐 권사님이 깜짝 놀라서 꿈에서 깨어났습니다. 권사님 마음에 깨달음이 왔습니다. 권사님은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면서 처절하게 회개를 했습니다. 하나님 중심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지 못했던 것을 회개 했습니다. 그리고는 자기가 그 동안 모아놓은 수십억이나 되는 재산을 하나도 남김없이 북한 선교를 위해 다 헌납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땅에서 아무리 큰일을 한다 할지라도 마음속에 하나님이 새겨져 있어야지 마음속에 자기 이름이 새겨져 있고 자기 명예가 새겨져 있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둘째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는 길입니다.

 

자신의 십자가란 자신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하나님께서 맡겨준 사명을 말합니다. 십자가란 죽음을 상징합니다. 죽음을 각오하고 자신의 희생을 각오하고 주님을 따라야 함을 말씀합니다. 주님을 따르는 길은 십자가의 길이요, 희생과 헌신의 길임을 말씀합니다. 신앙의 길이란 결국 좁은 길로 가는 것입니다. 그 길은 넓고 편한 길이 아닙니다. 성지 순례를 하다 보면 광야나 깊은 골짜기에 아름답고 넓은 수도원이 자리 잡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수도원 입구까지 가는 길은 상당히 좁고 협소하고 위험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입구에 들어서면 수도원은 그렇게 크고 넓게 자리하고 있습니다. 신앙의 길이 무엇인지 상징적으로 우리에게 암시 해주는 것 같습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은 때로 어렵고 힘이 듭니다. 부담이 됩니다. 주일 성수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헌금생활 하는 것 쉽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희생과 헌신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고 골고다 까지 자신의 사명을 지고 올라갔듯이, 십자가가 고통스럽고 힘이 들지만 끝까지 잘 지고 가는 자에게 부활의 영광과 축복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독일에 가면 마르크스키르게 라는 유명한 교회가 하나 있습니다. 대단히 큰 교회입니다. 본래는 조그만한 교회로 시작했는데 지금처럼 그렇게 부흥하게 된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처음 그 교회를 세울 때 이 교회의 주인은 예수님이십니다. 주님께서 친히 우리 교회를 돌보아 주시옵소서. “이러한 마음으로 예수님의 동상을 정성스럽게 세웠습니다. 그런데 그만 전쟁이 터지고 말았습니다. 주위에 폭탄이 수없이 떨어졌습니다. 그 바람에 주변에 있는 많은 건물들이 파괴되었습니다. 그 와중에 예수님의 동상도 그만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전쟁이 끝났습니다. 교인들이 예수님의 동상을 일으켜 세웠더니 안타깝게도 예수님의 두 팔이 잘라져 나갔습니다. 교인들이 모여서 두 팔이 부서진 예수님의 동상을 어떻게 할 것인가 의논을 했습니다. 의견이 분분했습니다. ”땅을 깊게 파고서 예수님의 동상을 그곳에다가 묻어 버립시다.“ 예수님의 두 팔이 부서졌으니 두 팔만 새로 만들어 붙입시다. 여러 가지 의견이 나왔습니다. 드디어 결론이 내려졌습니다. 그 교회 교인들은 두 팔이 없어진 예수님의 동상을 두 팔이 없는 채 본래 있던 자리에다가 그대로 세우기로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 대신 예수님의 동상 밑에 이러한 글귀를 적어놓았습니다. ”예수님은 두 팔이 없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두 팔이 잘리시기까지 우리를 섬기셨기 때문입니다. 주님, 이제는 우리가 주님의 두 팔이 되겠습니다. 이제는 당신을 대신해서 우리가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의 두 팔이 되겠다는 각오를 가지고 주님을 대신해서 열심히 일했습니다. 몸으로 뛰고 시간으로 봉사하고 물질로 봉사했습니다. 머지않아 그 교회가 그 지방에서 가장 큰 교회로 성장하고 부흥한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와 같은 희생과 헌신이 있어야 합니다. 이제는 우리가 주님을 대신해서 주님을 위해서 열심히 뛰겠습니다. 모두가 주님의 두 팔이 되겠다는 각오와 마음가짐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신앙의 길은 결코 넓고 편한 길이 아닙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길이요. 자신의 사명의 십자가를 지는 희생과 헌신의 길입니다. 그러기에 좁은 길입니다

 

3. 생명에 이르는 길

 

우리 앞에 두 가지의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넓은 길입니다. 이 길은 크고 넓은 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길입니다. 다니기가 쉽습니다. 편합니다. 거리끼는 것이 없습니다. 최근 10년 사이에 천주교는 신자가 100 % 가까이 성장했습니다. 물론 천주교가 가지고 있는 장점이 많습니다. 먼저는 교파가 개신교처럼 많지 않아서 선택하기가 쉽습니다. 또 우리나라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제사문제에 있어서도 자유롭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술, 담배 있어서 죄악시 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종교에 접근하기가 쉽습니다. 구속하지 않아서 좋다는 것입니다. 편리주의를 추구하는 현대인에게 있어서 잘 맞아 떨어지는 것입니다. 종교가 자신들의 삶에 이래라 저래라 간섭하지 않아서 좋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성향이 대체적인 것 같습니다. 개신교인들도 작은 교회보다는 큰 교회를 선호합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교회가 점점 대형화 되어가고 있습니다. 대형화 되어가는 이유는 사람들이 큰 교회에 가면 간섭받지 않는 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교회 가끔씩 빠져도 표시 안 나서 좋고, 헌금을 안 해도 아는 사람이 없을 것 같고, 교회 나와서 봉사하라 청소하라 하는 사람이 없어서 편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태도는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좁은 길의 태도가 아닙니다. 넓은 길의 방식입니다. 반면에 좁은 길이 있습니다. 이 길은 좁고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다고 말씀하십니다. 좁은 길은 편한 길이 아닙니다. 힘든 길입니다. 자기희생의 길입니다. 그러나 그 길은 생명의 길입니다. 어느 교회나 마찬가지입니다만 교회에서 봉사하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늘 하는 분이 합니다. 집사라고 하는 말의 헬라어는 “디아코노스 ”입니다. “디아”라는 전치사가 갖는 뜻은 “이리저리” 이라는 뜻입니다. “코노스”라는 말은 “ 먼지를 일으키는 사람” 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집사라는 뜻은 이리저리 여기저기 다니면서 먼지를 일으키며 교회 안팎의 먼지를 털고 청소하고 봉사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김연아 선수는 7곱살 때부터 하루 8시간씩 13년 동안 꾸준히 노력해서 세계적인 피겨스케이팅 선수가 되었습니다. 그는 3번도는 스핀을 연습을 완벽하게 구사하기 위해 하루에 6번 씩 1년에 1800번에 엉덩방아를 찧는 고통을 이겨내고 세계 정상의 자리에 우뚝 선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안철수 씨는 의과대학에 다니면서 켬퓨터 백신 프로그램을 개발하기 위해 하루에 잠을 2-3시간 밖에 자지 않았고, 때로는 이틀에 하루만 자면서 백신을 개발 했다고 합니다. 이렇듯 자신의 꿈과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잠을 줄이고 고통과 싸우면서 이마에 땀을 흘려야 인생에서 성공할 수 있습니다. 하물며 영원한 하늘나라의 생명을 얻는 일에 있어서 잘 것 다자고, 즐길 것 다 즐기면서 편안하게 세상의 즐거움과 향락을 누리면서 자신의 사명에 나태해도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다고 생각 한다면 큰 잘못입니다.

 

그래서 눅13장 24절에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하였습니다. 이 세상에서도 성공하려면 그냥 되는 법이 없습니다. 노력해야 합니다. 공부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을려면, 힘을 써야 합니다. 열심히 기도생활 해야 합니다. 전도생활에 힘써야 합니다. 경건생활에 힘써야 합니다. 예배생활에 힘써야 합니다. 찬양생활에 힘써야 합니다. 선한 일에 힘써야 합니다.

마태복음 25장 31-46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모든 민족을 모아 놓고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심판을 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오른편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아버지께 복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이에 의인들이 우리가 어느 때에 그랬습니까?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지 않는 자는 영벌에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한자는 영생에 들어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구원의 문을 통과하고 나서 넓은 길, 편한 길, 쉬운 길로 왔다고 한다면 과연 우리가 생명의 길에 이를 수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의 문을 통과 했다면 우리의 길은 넓은 길이 아니라 좁은 길이어야 할 것입니다. 자기 부정의 길이요, 십자가의 길입니다. 희생과 죽음의 길입니다. 이 길이 종국은 생명의 길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고난 뒤에 영광, 십자가 뒤에 부활이 있다고 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 가운데 아직도 좁은 문을 통과하지 않은 분이 계십니까? 여러분의 마음의 문을 활짝 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구주로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이 순간 주님을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미 좁은 문을 통과하셨지만 아직도 넓은 길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분은 없습니까? 돌이키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따라서 좁은 길로 가시기를 바랍니다. 이 길은 때로 힘들고 어렵습니다. 또 끝까지 견뎌야 들어갈 수 있는 문입니다. 그것은 십자가의 길이지만 그것을 통해서 나를 부인하고 내 자신을 포기하고 나아갈 때 우리에게 참 평강과 행복과 기쁨을 주십니다. 이 길은 생명의 길이요, 구원과 영생의 길임을 믿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2011년 2월27일 주일설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