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야를 만난 시므온 (누가복음 2: 25-32)
우리나라는 음력이나 양력을 사용하지만 초기원시 그리스도인들은 교회력을 따로 사용하였습니다. 성탄절 주일 4주전부터 대림절 이라고 하는 교회력이 시작 됩니다. 대림절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가 오신다는 뜻입니다. 성경은 미가서 5장 2절에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유다 땅 베들레헴에서 탄생 할 것을 700여 년 전에 예언 했습니다.
미가 5장 2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심은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첫 번째 성탄을 기다렸던 사람들처럼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자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시므온의 삶을 통해서 우리가 어떤 자세로 주님을 기다려야 하는지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자였습니다.
옛날 서구 문화에서는 강림절 기간에 촛불을 켜서 세상의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화했습니다. 특별히 독일과 미국에서는 가정에서 강림절을 많이 지켰는데, 강림절 화환이라고 해서 집집마다 특별한 꽃을 장식합니다. 테이블 위에다 꽃을 만들어놓고 네 개의 초를 꽂아놓고 매주일 하나씩 불을 붙여서 크리스마스 때까지 네 개의 초를 밝혀주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또 재미있는 일은 아이들을 위해서 집안 빈 공간에다 말구유를 만들어놓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아기 예수님이 좋아할 만한 것을 너희들 아이디어로 장식해라!”라고 합니다. 그러면 아이들은 거기에 말구유간과 같이 밀짚 같은 것을 까는 아이들도 있고, 그렇게 하면 예수님이 싫어하실 것이라고 생각해서 고급 카페트천을 가져다 깔기도 하고, 어떤 아이들은 유모차를 갖다 놓기도 하고, 맛있는 사탕, 과자, 장난감 등 별의별 것을 다 갖다놓고 12월 24일까지 계속 장식합니다. 그래서 12월 25일 새벽이 되면 큰 인형을 준비해서 아기 예수라고 중앙에 갖다 놓고 온 가족들이 아침 예배를 드립니다. 이 때 부르는 찬송이 있습니다. “곧 오소서 임마누엘 오 구하소서 이스라엘 그 포로 생활 고달파 메시야 기다립니다 기뻐하라 이스라엘 곧 오시리라 임마누엘 곧 오소서 소망의 주 만백성 한맘 이루어 시기와 분쟁 없애고 참 평화 채워주소서 기뻐하라 이스라엘 곧 오시리라 임마누엘” 아침 예배를 드림으로 대강절을 끝내고 크리스마스 행사를 진행하게 됩니다.
제가 어렸을 때는 크리스마스 시즌인 12월이 되면 흰눈이 무척이나 기다려집니다. 성탄절을 준비하기 위해서 12월에는 교회에 매일 저녁 나와 성탄절 연극준비, 성탄절 칸타타 준비를 합니다. 그리고 성탄 전야인 24일 에는 온 성도가 모여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서 그동안 준비한 것들을 발표하면서, 성탄의 기쁨을 나누고 여러 성도들이 준비한 떡과 과일을 먹으면서 즐거운 시간을 갖습니다. 그리고 새벽녘에는 성도들 집집마다 들리어 새벽송 으로 각 가정에 그리스도의 탄생의 소식을 전하고, 온누리에 퍼져서 성탄의 기쁜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또한 성탄절 카드를 사서 가깝고 평소에 소식을 잘 전하지 못했던 이웃이나 친구들에게 보냄으로써 12월에는 성탄절 분위기가 집집마다, 거리마다, 형성되었지만 요즈음은 학생들이 방학도 늦게 하고 공부에 밀려 성탄절을 준비하기가 쉽지 않게 되었습니다. 교회종탑에서조차 성탄 트리를 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성탄문화가 활성화 되도룩 적극적으로 성탄 카드보내기 운동, 성탄절행사를 통해 이웃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의 기쁜소식을 전하여야 하겠습니다.
기다림은 성숙한 자의 모습입니다. 노아는 120년 동안을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기를 기다렸습니다. 노아가 기다릴 수 없었더라면 하나님의 뜻도 나타날 수 없었습니다. 아브라함도 아들이삭을 얻기까지 오래 기다렸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기다림을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시는데 사용하십니다.
괴테는 "서두르지 않는다. 그러나 쉬지도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서두르지 말고 잘 기다립시다. 그렇다고 쉬지도 맙시다. 기다리는 것은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고 시간을 허비하는 것도 아닙니다. 기다림은 풍성한 열매를맺기 위한 필연적인 과정인 것입니다.
농부는 뜨거운 태양과 태풍, 비바람을 지나고 난 이후에 풍성한 가을의 수확을 기다립니다. 3년 동안 밤잠을 미룬 채 형설의 공을 쌓은 수험생들 은 합격의 영광을 기다립니다. 10개월간의 불편함과 해산의 고통을 지난 후에 새 생명의 축복을 기다리 듯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마음을 가져야 주님을 영접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수많은 사람들이 메시야 오심을 알았지만 주님은 만난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시므온은 26절에 내 눈이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라. 하면서 주의 오심을 기다렸습니다. 만나기를 사모했습니다.
이 시므온은 유대인이기 때문에 하루에 3번씩 하나님께 기도했을 것입니다. 늘 하던 대로 그는 그날도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 가다가 마침 아기 예수를 안고 오는 마리아를 보고 시므온이 아기 예수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며,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 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하고 말합니다.
그런데 어디에서 주님을 기다렸습니까? 광야에서 입니까? 시장에서 입니까 아니면 노래방입니까? 주점에서 입니까? 아닙니다. 성전에서입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집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기다렸습니다. 성전을 사랑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기다림 속에서 내일의 희망을 가져 봅니다. 그런데 그 기다림의 대상이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주식이나 부동산이 오르기를 기다립니다. 자식이 잘되고 성공하기를 기다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누구를 기다려야 하겠습니까? 첫 번째 성탄절에 이 땅에 나를 구원하기위해 오신 구세주를 기다린 시므온처럼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2.의롭고 경건한 자였습니다.
25절 말씀에 예루살렘이라는 사람이 있으니 의롭고 경건하여, 라고 말씀합니다. 누가 그리스도를 맞이할 수 있습니까? 의롭고 경건한 자입니다. 의롭다. 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를 말합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의로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그의 신앙이 인정받은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사람에게 인정받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어디가나 어디서나 사람에게 인정받는 사람이 되어야 하지, 질타 받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사도행전 10장에 보면 이방인이면서 로마군대 백부장인 고넬료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이 사람은 이방인이면서도 유대사람들을 도왔을 뿐 아니라, 하나님께 인정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에 대하여 사도행전 10장 2절에 그가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이 이방인을 통해서 이방선교의 문이 최초로 열리게 되는 과정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고넬료가 자신의 하인 둘과 경건한 사람 하나를 베드로가 기숙하는 욥바로 보내게 되는 데 고넬료가 보낸 하인의 말을 전해들은 고넬료가 이렇게 말합니다. 35절에 하나님은 각 나라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을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과 의를 행하는 것은 같은 선상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간다고 하는 것은 경건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경건의 삶의 모습은 기도생활로 나타납니다. 고넬료는 항상 시간을 정해놓고 기도했다고 말씀합니다. 초기 유대교인들은 화요일과 목요일에 금식을 했다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수요일과 금요일에 금식했다고 합니다.
바울은 딤전 6장 11절에서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쫓으며” 라고 말합니다. 경건생활은 기도생활과 따로 생각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경건한지, 경건하지 않은지 그 판단의 근거가 무엇이라 생각합니까? 기도생활입니다. 일상생활에서 시간을 따로 떼어놓고 주님과의 깊은 교제의 시간을 가지고 있다면 경건한 그리스도인입니다. 하지만 기도생활이 빠져 있다면 경건하다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다니엘도 바벨론 나라에 포로생활 중에도, 생명의 위협 속에도 하루 3번씩 자신의 조국을 향해서 기도했습니다. 바울은 바다 한 가운데 유라 굴라 풍랑에서도 하나님께 기도하여 한 생명도 죽지 않고 보장해 주신다는 응답을 받았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제 9시 기도시간에 성전에 올라가다가 나면서부터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웠습니다.
프랑스 부르고뉴 남부에 위치한 떼제 공동체는 전 세계에서 연간 10만여 명의 크리스천 젊은이들이 찾아가는 곳입니다. 한국에서도 매년 수백 명이 이곳을 찾는다고 합니다. 떼제는 1940년 스위스 출신의 로제(1915~2005) 수사가 만든 세계 최초의 개신교 남자수도회다. 매주 2000명 안팎의 ‘젊은이’들이 이곳을 찾기 때문에 떼제는 이들이 원하는 기간만큼 생활하고 기도와 노동에 참여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갖춰 놓고 있습니다.
종신서약을 한, 세계 25개국 출신 100여 명의 수사들이 하루 세 번의 기도와 도자기 굽기 등 작업을 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실제로 20~30대가 대부분이라고 합니다. 젊은이들은 수사와 마찬가지로 하루 세 번 기도와 노동을 하며 단순한 생활을 합니다. 우리나라 화곡동에도 떼제 공동체가 있습니다. 거기에서 “우리는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우리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식의 짧고 단순한 곡조의 노래가 대부분이다. 모두 프랑스 떼제 공동체가 만든 곡을 번역한 것이다. 2층에서 십자가와 성화가 놓인 앞쪽에 촛불만 몇 개 밝힌 채 기도회가 시작 되었다. 앞서 배운 노래 몇 곡을 반주도 없이 반복해 불렀다. 부르다 보면 누군가에 의해 화음이 들어가고 돌림노래가 되기도 했다. 미리 정한 순서에 따라 한 참석자가 성경을 읽었다.
중보 기도가 이어진다. 참석자 일부가 연평도 포격, 중국 선교, 비정규직 노동자 문제 등에 대해 짧게 기도했다. 수사의 기도로 마무리되고 다시 노래와 짧은 침묵기도를 반복하다보니 9시가 훌쩍 넘었다. 그리스도를 닮아가고, 타락하고 세속화된 세상 한 복판에 그리스도를 따르는 거룩한 무리들이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약 1:27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경건을 구시대의 유물로 취급하는 타락하고 세속화 된 세태 속에서 어떻게 우리의 신앙과 믿음을 유지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경건한 자로 살아갈 수 있습니까?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의롭게 살아갈 수 있습니까? 기도하는 일입니다. 시므온은 어두운 시대에 성전에서 기도함으로써 자신의 경건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3.성령에 감동된 자였습니다.
시므온은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예수의 부모가 아기를 안고 오는 것입니다.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성령의 감동을 받아 예언적인 말을 합니다. 29절에,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 도다. 무슨 말씀입니까? 시므온의 소원이 무엇이었습니까? 성전에서 기도한 내용이 무엇입니까? 그가 나이 많은 노인 이었지만 성경에 예언된 메시아를 자신이 보기를 간절히 사모했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생전에 그 꿈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 당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메시야가 베들레헴에 탄생 할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성령으로 감동된 시므온이 하나님의 아들을 뵈옵는 은총을 경험한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 때나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성령 충만할 때입니다.
그는 아기 예수에 대하여 31-32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만민이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먼저는 만민이 예비하신 것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갑자기 오신 것이 아닙니다. 미가서 5장 2절에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주님이 오시기전 700년 전에 미가 선지자를 통해 예언하신 것이 이루어 진 것입니다. 베들레헴은 예루살렘에서 약 8km 떨어진 시골에 조그만 마을에 불과 합니다. 베들레헴이란 뜻은 떡집이란 뜻으로 예수님이 우리인생의 생명의 양식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시고자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분이 인간의 몸을 입고 가장 낮은 곳에, 말구유에 오신 것은, 예수님이 이 땅에 가장 낮은 곳, 절망적인 곳, 소망이 없는 곳에 오셨음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소망이 없는 곳에 빛으로 오셨습니다. 이방을 비추는 빛이라는 뜻은 그런 의미입니다. 예수그리스도가 없는 나라나 민족은 아직도 어두움과 무지 속에서 살아갑니다. 우리나라도 그런 나라였습니다. 이사를 가더라도 날짜를 받아야 하고, 못 하나도 마음대로 박을 수 없고, 부적을 온 집안에 붙여야 하고, 결혼날짜도, 무당이나 점쟁이에게 달려가지 않습니까? 하지만 예수의 빛, 복음의 빛이 이 나라에 비치면서 이 나라가 가난과 무지와 질병에서 벗어나 축복받은 나라가 된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전 세계에 2만 여명의 선교사들이 나가 있습니다. 우리 선교사들이 가난한 아프리카에 가서 선교활동을 하면서 학교를 세우고, 병원을 세우고, 농업기술을 전수하여 생활을 향상시키고 삶의 질을 높여 줍니다. 오늘날 인간이 왜 불행 합니까?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떠날 때 죄의 길에 들어서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불행해지는 것은 하나님을 떠나 죄에 매여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인간을 불행하게 하는 죄를 멸하기 위해서입니다.
존 번연은 말하기를 ‘하나의 틈이 배를 침몰시키는 것처럼 하나의 죄가 우리의 삶을 다 파멸시킨다.’라고 말했습니다. 아무리 큰 건물 큰 집 큰 기업 큰 권력 이 세상에 남이 갖지 않은 모든 것을 가져도, 죄는 우리를 넘어뜨리고 파괴합니다. 죄가 우리의 아름다운 것, 소중한 것을 모두 빼앗아 갑니다.
죄에 빠진 우리를 건지시고 죄짐을 벗기시며, 우리의 상처와 아픔을 다 치료해 주시기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가장 큰 은혜는 죄에서 용서함을 받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큰 축복은 없습니다. 죄에서 벗어나는 길이 있습니다. 성령 충만 하는 것입니다. 에녹은 300년동안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령 충만한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한 다윗도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하니까 일개 목동에서 왕에 자리에 오르게 된 것입니다.
필립스 브룩스(Phillips Brooks)는 성공하지 못한 교사였습니다. 그가 가르치는 학생들은 브룩스를 존경하지 않았습니다. 학교에서 괴로움을 당하던 어느 날 그는 친구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나는 지금 몹시 피곤하고, 불행하고, 거의 죽을 지경입니다". 얼마 후 브룩스는 해고되었습니다. 나는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그러나 그가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성령 충만한 자가 되었습니다. 신학교에 들어갔습니다.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성령에 충만하여 찬송시를 썼습니다. "오 베들레헴 작은 골 너 잠들었느냐 별들만 높이 빛나고 잠잠히 있으니 저 놀라운 빛 지금 캄캄한 이 밤에 온 하늘 두루 비춘 줄 너 어찌 모르나." 19세기 위대한 목사가 되었습니다. 성령 충만하면 하나님이 사용 하십니다. 시므온은 성령이 충만한 자가 되어 주님을 기다리다가 주님을 만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는 대강절 두 째 주간에 와 있습니다. 첫 번 째 성탄절에 주님을 만난 시므온처럼 간절하게 주님을 기다려야 하겠습니다. 의롭고 경건한 삶, 기도로 깨어 있어야 하겠습니다. 성령에 충만한자, 성령과 함께 동행하므로 이번 성탄절을 기다릴 뿐 아니라, 다시 오실 주님을 맞이하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2010년 12월 12일 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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