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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리아에가신이유? 요한복음 4장 5-18,27-29

gkffpffndi 2010. 10. 15. 16:35

예수님이 사마리아에 가신 이유? 요한복음 4장 5-18,27-29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그 당시 민족적 지역적 편견을 뛰어 넘어,

유대인들의 경멸의 대상이자 지역인 사마리아 지역의 수가라는 곳에서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에 관하여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 내용입니다. 저는 이 본문 내용을 중심으로, 주님이 왜 사마리아에 가셨는지, 말씀을 통해서 깨우치고 하시는 내용은 무엇인지 몇 가지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1.편견의 장벽을 깨기 위함입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에는 감정의 골이 깊었습니다. 그것은 역사적인 유래에 기인합니다. 솔로몬 시대이후 남북이 분열되어 남왕국 유다, 북왕국 이스라엘로 분할되었습니다. 그러다가 BC722년 북왕국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의해 점령당하게 됩니다. 이때 앗수르인 들이 북쪽 사마리아 지역에 내려와 살면서 유대인과 결혼하면서 자연스럽게 피가 섞이게 됩니다. 반면 유대나라는 BC586년에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지만, 그들은 거기서 순수한 혈통을 유지하게 됩니다. 이 일로 인해서 유대 사람들은 북쪽 사마리아 사람들을 경멸하고 조롱 하게 됩니다. 또 하나는 예배의 장소 문제입니다. 유대 사람들은 하나님의 성전은 유일하게 예루살렘으로 보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리심 산을 하나님이 주신 예배장소로 보는 것입니다. 이런 두 가지 이유로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무시했습니다. 유대인들은 기도할 때에, 이렇게 했습니다. 내가 여자가 아닌 것을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이방인이 아닌 것도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사마리아인이 아닌 것도 감사드립니다. 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과 식사 하지 않습니다. 대화 하지도 않습니다. 같은 민족이면서도, 저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린 사마리아 사람들을 차별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은 북쪽 지역에 있는 장소를 방문 하고자 할 때 가까운 사마리아를 통과 하지 않고 우회 도로인 베레아 지역을 통과 하는 먼 길을 택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러한 지역적, 민족적인 편견을 깨기 위하여 부러 유대인으로서 사마리아 지역을 통과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에도 이러한 내용이 드러나 있습니다. 9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야곱의 우물에서 물을 좀 달라 하실 때 수가성 여인이 이렇게 대답 합니다.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인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시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 말씀합니다. 여기에서 상종하지 아니 한다. 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 다는 말입니다. 끼워 주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만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고 말하고 민주 사회 라고 얘기 하지만 보이지 않는 신분이나 계층이 존재 합니다. 우리나라도 재벌그룹 자녀들의 모임이 따로 있습니다. 부유한 가정의 자녀와 가난한 가정의 자녀, 중국에도 고위급 자녀들의 모임이 있다고 합니다. 부유한 아파트에 사는 자녀와, 가난한 아파트에 사는 자녀들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장애인과 정상인 간의 두터운 벽이 있습니다. 백인과 유색인종간의 인종적 편견이 엄연히 우리 시대에도 엄연히 존재 합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계층 간 민족적 인종적인 편견을 깨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주님은 가장 고귀한 신분이지만, 낮고 낮은 이 땅에 오셔서 가난한자 병든 자 소외된 자 힘없는 자 무식한 자 와 함께 어울리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모든 편견과 차별을 철폐 하십니다. 하나님은 한 영혼 한 영혼을 귀하게 보십니다. 이사야 55장 8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 이니라 여호와의 말씀 이니라 9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 이니라 사도행전 10장 9절 이하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방인 선교를 열기 위해서 베드로의 편견을 깨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가 시장하여 먹고자 할 때에 환상 중에 하늘에서 한 보자기가 내려오는 데 그 안에 땅에 있는 각종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이 있고 소리가 나기를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먹으라. 하나 자신은 지금까지 속되고 깨끗하지 않은 것은 먹은 일이 없다. 하므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깨끗하다 한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고 하십니다. 이 환상이 무슨 뜻인지 이해 못하고 있을 때 고넬료 가 보낸 사람들이 도착하게 됩니다. 이로 인해 베드로는 이방인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계획이 있음을 알고 고넬료의 집에가 설교하면서, 이방인에 대한 선교의 길이 열리게 됩니다. 이처럼 사도들도 이방인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깨닫지 못했는데, 이것은 다른 사람이나 민족에 대한 우월감이 잘못된 편견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이러한 유대인의 우월감과 편견은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경멸하는 교만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사람이나 타 민족에 대한 우월감이나 편견을 버려야 합니다. 또한 예수님은 예배장소에 대한 편견도 지적 하셨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그리심 산을 말하고 ,유대인은 예루살렘을 예배장소로 삼는 것에 대하여 주님은 예배장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배하는 자의 자세가 중요하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리로 예배할 지니라.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무소부재 하십니다. 어떤 특정한 장소에 머물지 않습니다. 우리가 어느 곳에 있든지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곳에 계십니다. 교회에 와 있어도 마음은 다른 곳에 있으면 의미 없습니다. 교회가 아니라도. 가정 직장 일터에도 주님은 계십니다. 그곳이 예배장소가 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이러한 민족적 우월감이나 편견을 깨뜨리기 위해서 아무도 지나지 않는 사마리아 지역에 가신 것입니다. 잘못된 민족적 우월감과 편견이 엄청난 비극을 가져 오는 것을 역사에서 배웁니다. 예를 들면 공산주의가 그런 것 아닙니까? 독일의 히틀러가 유대인 600만 명을 가스실에서 죽인 것도 게르만 민족의 우월감으로 인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잘못된 우월감이나 편견으로 남을 멸시하거나 무시 하지 말고 예수님처럼 인간관계의 편견을 허물고 긍휼과 사랑이 충만한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2.상처받은 한 영혼을 치유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사마리아 여인에 대해서는 이름이 나오지 않습니다. 성경시대에도 여자들이 무시당하는 시대이지만 이름을 가진 여자들이 많습니다. 예수님 어머니 마리아, 예수님께 향유를 부은 막달라 마리아 그 언니 마르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인물 가운데 아브라함의 부인인 사라, 이삭의 아내 리브가, 야곱의 아내 라헬 레아 등 많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여인의 이름은 없습니다. 그래서 사마리아 여인, 혹은 수가성 여인이라고 부릅니다. 아마도 이 여인은 떳떳지 못한 삶으로 인해 자신을 드러내기가 어려웠습니다. 본문 6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길 가시다가 피곤하여 우물곁에 앉은 시각이 여섯시쯤 되었더라. 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시간은 정오가 되는 시간입니다. 이 시간에 우물에 나왔다고 하는 것은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서 나온 것입니다. 예수님과의 대화 속에 나오듯이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던 여자이고 현재 여섯 번째 남자하고 살고 있습니다. 참으로 기구한 인생입니다. 나름대로 사정이 있었겠지만, 이 여자에 대한 사람들의 시선이 좋았을 리 없습니다.

동네에서 이 여자를 환영 할 리 없습니다. 이 여자와 같이 하면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습니다. 왕따 당합니다. 그러니 이 여인은 항상 외롭습니다. 마음에 상처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에 가기가 싫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없는 뜨거운 정오에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우물가에 나온 것입니다. 대인 기피증이나 우울증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이 여인의 상한 감정을 치유하기 위해서 일부러 사마리아 땅을 찾으셨고 우물가에 앉아 이 여인을 기다린 것입니다. 주님이 이 여인에게 먼저 말을 건넵니다. 나에게 물을 좀 달라. 사마리아 여자가 대답합니다.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말합니다. 사마리아인 인 자신에게 유대인이 관심을 갖는 것을 이상히 여기는 것입니다. 여러분 ! 이 여인은 그 누구도 자신을 가까이 하지 않았습니다. 가장 가까운 남편이나 가족 친지 동네 이웃들로부터 따돌림 당했습니다. 아무도 자신을 인격적으로 대해 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말을 거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러데 주님께서 대화상대로 생각하고 자신에게 말을 거는 것입니다. 그것도 유대인이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나라가 자살률이 세계 최고 수준입니다. 그런데 자살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사람들이, 가족들이 관심을 갖지 않기 때문 입니다. 한 가족인데도 부부 인데도 하루 종일 아니 오랜 세월동안 말을 하지 않는다면 참으로 무관심 한 것입니다. 관심이 없다는 것은 마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없다는 것은 사랑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관심이 없다고 생각할 때 외롭게 되고, 우울증이 오고 자살을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우리 가정에서 필요 없는 존재 구나. 어쩌면 이 여인이 이런 상황에 놓여 있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 여인을 치료하기 위해서 그 곳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여인에게 부드러운 말로 대화를 시작 합니다. 나에게 물을 좀 달라. 이 여인이 충격을 받았습니다.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유대인이 말을 건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에게 있어서 유대인은 상처를 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자기 앞에 서있는 이 유대인은 전혀 다른 사람인 것입니다. 자신에게 말을 거는 것입니다. 대화의 상대로 인정해 주는 것입니다. 자신을 인정해주는 예수님에게 이 여인은 마음의 문을 서서히 열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 사람은 자신을 인정해주고 사랑해주는 사람에게 마음이 끌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유명한 심리학자인 머슬로우는 (Maslow) 인간에게 5가지 욕구가 있다고 했습니다. 1.생리적 욕구, 2. 안전의 욕구, 3.사회적 욕구, 4.존경의 욕구, 5. 자아실현의 욕구입니다. 그 가운데 4번째 존경의 욕구가 인정받고 싶어 하는데 적용 됩니다. 현대인의 70%가 정신질환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미국 시민의 2억 명인데 그 중의 3000만 명이 정신질환을 가지고 있고 매일 90만 명이 병원에 입원, 치료받고 있으며, 우울증과 불안으로 시달리는 사람이 많으며, 수면제 신경안정제 등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이 팔린 다고 합니다. 현대인들은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살고 있지만 내면적으로, 인간관계로 인한 고통과 상처가운데 외로움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처를 치유 하는 길은 인정해주고 대화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상처받은 영혼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그를 위해 기도하고 찾아가야 합니다. 사랑해주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품어야 합니다. 주님은 상처받은 한 영혼을 치유하기 위해서 그 먼 길을 걸어 사마리아 수가 동네에 이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 주변에 수가 성 여인처럼 마음에 상처받고 괴로워하는 사람은 없습니까? 고통과 외로움 속에 사는 사람은 없습니까? 찾아 가십시오. 만나서 사랑의 따뜻한 대화를 나누십시오. 그리고 손을 꼭  잡아 주십시오. 그러면 그 영혼이 회복되고 치유 될 것입니다.

 

3. 목마르지 않는 영원한 생수를 주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가 계속 이어집니다. 이 여인은 이 야곱의 우물에서 오랜 시간 동안 물을 길렀습니다. 10절에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예수님은 이제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를 다루십니다. 이 여인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생수를 얻을 수 있습니까? 당신이 우리 조상 야곱보가 크니이까? 이 말의 뜻은 우리조상 야곱이 판 우물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목을 축이고 있다. 이 야곱의 우물은 그 당시 약 150m쯤 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 깊은 곳에 우물물을 긷는데도 상당한 노력과 수고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 우물은 생수가 아니라 빗물이 흘러 땅속에 스며드는 건천수입니다. 이 우물도 수가 성 지역 사람들에게 있어서 귀중한 샘입니다. 그런데 자신 앞에 서있는 유대인이 건천수가 아닌 생수를 주겠다고 하니 의아한 생각을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13절에 “주님께서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라고 말하자 이 여인은 그런 물이 있으면 나에게 주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 않게 하옵소서. 이때 주님은 전혀 다른 말씀으로 여인의 근원적인 목마름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네 남편을 데려오라. 여인이 말합니다.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주님이 말씀합니다.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맞다. 전에는 다섯이 있었지만, 없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다 라고 말하자. 이 여인이 예수님을 선지자로 인식하기를 시작합니다. 예수님께서 단순히 먹는 물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아닙니다. 네가 주는 이 야곱의 우물물을 먹어도 목마르듯이, 이 세상에서 누리는 부귀영화 명예 지식 향락 인기 성공의 우물물을 아무리 마셔도 인생의 근원적인 목마름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마치 바닷물을 마시면 마실수록 더 갈증이 더해지는 이치와 같은 것입니다. 인생의 근원적인 목마름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생수를 마시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생수가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7장 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39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또 어떤 곳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합니다. 이 여인이 자기 앞에 서 있는 유대인이 메시야 인 것을 알고 난 이후 자기가 가지고 지금까지 생활수단이었고 그녀가 의지했던 물동이를 버려두고 자신의 동네에 들어가 29절에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면서 자신이 메시야를 만났다고 고백 하는 것을 봅니다. 메시야를 만났기에 더 이상 그에게 있어서 물동이는 의미가 없습니다. 주님을 만나기 전에는 물동이가 없어서는 안 되는 소중한 것이었습니다. 생활 수단 이었습니다. 물동이가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주님을 진실로 만난자의 모습입니다. 주님이 우리의 모든 것 되십니다. 파스칼은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이 만드신 하나의 공간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 공간은 하나님이 아니면 채울 수가 없는 공간입니다. 명예로, 권력으로, 돈으로, 쾌락으로 지식으로 채울 수 없습니다. 어거스틴은 "오 하나님, 우리는 하나님에게서 지음을 받은 피조물이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 앞으로 돌아가기 전에는 내 마음에 진정한 평안이 있을 수 없나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1977년 하워드 휴즈 라는 미국의 대부호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미국 항공 산업의 개척자이자 영화 제작자였던 하워드 휴즈는 억만장자였지만 영양실조로 죽었습니다. 그는 정신적인 고독과 공허를 달래기 위해 방탕한 생활을 했고, 건강이 나빠지자 주변에 그의 재산을 노리는 사람들이 몰려들어, 모든 사람을 불신하는 강박장애에 빠졌습니다. 주위 사람들이 자기를 독살하려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집에서 요리사를 불러 놓고 주스만 마시고 살았습니다. 영양실조에 걸려 죽었을 때 그의 머리털은 정강이까지 길게 내려왔고 손톱은 매의 발톱처럼 되었습니다. 정신이상이 걸려 죽은 것입니다. 억만장자가 되었지만 수없이 결혼하고 이혼했으므로 죽었을 때 그를 위해 울어주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고 모두다 재산만 탐했습니다. 그는 결코 행복하지 못했고 고독하고 쓸쓸한 사람의 대명사로 세상을 뜨게 된 것입니다.

유명한 흑인 오페라 가수인 제시 놀만(Jessye Norman)이 만델라가 남 아프리카 공화국의 대통령이 된 것을 축하하여 영국 런던 웸블리 스테디엄에서 열린 음악 공연회에 출연한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녀의 순서는 맨 마지막이었습니다. 그날 대부분의 출연자들인 인기 록 밴드 그룹들과 록 가수들이었습니다. 한 사람 한 그룹이 무대에 올라 공연할 때마다 7만 이상의 군중들은 광란에 가까운 괴성과 흥분으로 온 종일 열광했다고 합니다. 무려 10시간이상의 광란의 열풍이 지나간 후 어두워진 밤 제시 놀만이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무대에 올랐습니다. 그녀는 한동안 미동도 하지 않고 무대에 두 손을 모으고 서 있었다고 합니다. 기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잠시 후 그녀는 반주도 없이 아카펠라로 천천히 노래를 시작했습니다. 그녀의 노래는 뜻밖에 찬송가였습니다. 죄의 노예가 된 인류를 구원하신 그리스도의 은혜를 찬미하는 전직 노예상인이었다가 회개하고 구원받아 노예 해방을 위해 일하면서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가 된 존 뉴턴이 작사한 찬송이었습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큰 죄악에서 건지신 주 은혜 고마 와 나 처음 믿은 그 시간 귀하고 귀하다. 장래는 숨소리하나 들리지 않도록 조용해 졌습니다. 3절이 시작되자 여기저기서 사람들은 잊혀졌던 이 찬송을 따라 조용히 노래하기 시작하기 시작합니다. "이제껏 내가 산 것도 주님의 은혜라. 또 나를 장차 본향에 인도해 주시리. 거기서 우리 영원히 주님의 은혜로 해처럼 밝게 살면서 주 찬양하리라" 노래가 끝났을 때 사람들은 울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한동안 그곳을 떠나지 못했고 사람들은 깊은 적막 속에서 침묵에 잠겨 있었다고 합니다.

한 기자는 그 날 그곳에 성령이 임하셨다고 보도했다고 합니다. 그날 그 제시 놀만의 노래는 다음 주일 적지 않은 사람들의 발걸음을 교회로 향하게 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도 주님은 편견의 장벽을 깨뜨시고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또한 상처 받은 한 영혼을 치료하고 구원하기 위해 먼 길을 오십니다. 세상 헛된 것에 목말라 하는 우리 주변에 가족 친지, 이웃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인생의 목마름을 해결해 주시는 영원한 생수 이십니다. 그 분만이 인생의 참 만족과 행복을 주시는 분이라고 증거 하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010년 10월 17일 주일설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