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문 말씀은 이웃사랑에 대한 말씀이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이웃을 자신의 동족으로 제한하였고 사마리아 사람들이나 이방인들은 이웃의 범주에 들지 않았다. 이러한 유대인들의 편견에 대하여 새로운 이웃 개념을 도입하시고 율법을 지킨다고 하는 것은 매일 율법을 공부하고 암송하는 것이 전부가 아닌 그 율법을 실천하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임을 말씀하고 있다.
25절에 한 율법사가 예수님께 대하여 질문하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다. 그 질문은 ‘영생’에 관한 질문이다. 사실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도 궁극적인 질문은 삶과 죽음, 그리고 죽음 이후에 삶에 대한 질문 일 것이다. 이 율법사는 인간의 근원적인 질문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질문에 대하여 예수께서는 역으로 질문하신다. 26절에 율법에 무엇이라고 기록되어 있느냐?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읽느냐? 이 말의 뜻은 너는 그 말씀을 어떻게 해석하느냐 이다. 하나의 사건을 두고도 해석을 달리하는 경우가 많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견이 생기고 이해가 충돌되어 부딪치게 되는 것이다. 사물을 어떻게 보고 해석 하느냐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하나의 컵에 물이 반잔이 남아 있는 상태를 보고 한 사람은 물이 반 잔 밖에 안남아 있다고 부정적인 생각을 가진 반면 한 사람은 아직도 물이 반 컵이나 남아 있다고 하는 긍정적인 마인드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율법사가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에 대한 질문에 대하여 주님은 역으로 질문하여 본인 자신의 해석을 듣고 싶어 하였기 때문이다.
율법사가 대답하기를 7절에 “네 마음을 다하여 목숨을 다하여 힘을 다하여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이에 대하여 예수께서는 “내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사실 이 말씀은 십계명의 핵심이다. 모세가 하나님의 산 시내 산에서 40주야를 금식하면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친수로 기록하신 언약의 말씀이 십계명이다. 출애굽기 20:1-17절에 제1은 너는 나 외에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제2는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제3은 너는 네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제4는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제5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제6은 살인하지 말라. 제7은 간음하지 말라. 제8은 도적질 하지 말라. 제9는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 하지 말라. 제10은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십계명은 모세가 하나님의 산 시내 산에서 구름이 빽빽한 가운데 나타나셔서 우레와 번개와 나팔 소리가 울리는 것을 멀리서 보며 떨면서 말하기를 하나님이 친히 말씀하지 말게 하소서 우리가 죽을까 두렵습니다. 하였을 때 모세가 말하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이 이렇게 임하시는 것은 너희를 시험하고 너희로 경외하며 범죄 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을 만나면 인간은 두려움에 빠집니다. 그리고 찾아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다.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모르고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가질 수 없고 경외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을 잘 섬길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면 인간은 두려움 마음을 갖게 되고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된다.
시내 산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레와 천둥소리와 함께 큰 진동 가운데 나타나셔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언약의 말씀인 십계명을 주셨다. 이 십계명은 1-4계명은 하나님 사랑에 대한 계명이고 5-10계명은 이웃에 대한 사랑 실천에 대한 계명이다.
바로 오늘 선한 사마리아 사람에 대한 비유는 이웃이 누구이며 이웃에 대한 사랑 실천에 대한 말씀인 것이다.
율법사가 그러면 네 이웃이 누구냐고 묻는 질문에 예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사람이 있었다. 그런데 이 사람이 강도를 만나서 가지고 있는 것 다 빼앗기고 옷도 벗겨서 거의 시체가 되기 직전 상태에 있었을 때 마침 그리고 지나가는 제사장이 있었는데 이 사람은 그냥 피하여 갔고 조금 있다가 레위인이 지나갔는데 이 사람도 거반 죽어 있는 상태인데도 모른 채 하고 지나갔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사마리아 사람은 그냥 두고 지나가면 반드시 죽을 수 밖에 상태에 있는 이 사람을 불쌍히 여겨 타고 있던 나귀에게서 내려 가지고 가까이 가서 상처가 난 부위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주막에 데려가 돌보아 주었다. 여기서 참된 사랑은 이웃에 대해서 긍휼한 마음을 가지는 것,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갖는 것이 사랑의 출발점이다. 예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셨던 동기도 무리들을 불쌍히 여겼다라고 하셨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마음속에는 예수님의 마음이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우리 주변에 누가 강도를 맞아 상처가 나서 고통 속에 살고 있는지 알고 그들을 돌보아 주어야 한다.
선한 사마리아 인은 그 이튿날에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주고 말하기를 내가 일을 다 마치고 난 이후에 다시 올라와서 반드시 이 사람에 대한 치료 경비를 다 드릴 것이다. 라고 말하고 떠났다. 끝까지 책임을 지는 것이다.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하고 질문 하였을 때 율법사는 가로되 자비를 베푼 자이니다. 라고 말할 때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행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예루살렘은 고지가 760미터로 높은 곳에 위치 해 있고 여리고는 해수면 보다.250미터 낮은 지역에 있다. 예루살렘과 여리고 두 지역 간의 거리는 약36키로 미터로 도로가 상당히 가파르고 좁은 길로 돌도 많고 도둑이 자주 출몰하는 지역이다. 제롬(Jerome)에 의하면 A.D. 4세기 말까지도 그 길에는 강도떼들이 자주 출몰했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곳에서 한 사람이 노상 강도를 당하고 그곳으로 제사장과 레위인이 지나갔다는 상황 설정은 매우 개연성 있는 것이다.
율법에 의하면 제사장들은 예루살렘에서 일정 기간 봉사하는데 이 제사장 은 의무 기간을 마치고 여리고에 있는 자기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의도적으로 사고 현장을 우회하여 지나갔음을 분명하게 확인시켜준다. 그러면 제사장은 레위인은 왜 죽어 있는 상태에 놓여 있는 사람을 보고도 그냥 지나쳐 갔을까? 그것은 첫째로 그곳은 강도나 도둑이 자주 나타나는 지역이기에 자신도 강도를 만날 수 있다는 불길한 예감 때문에 그 자리를 속히 벗어나고 싶은 두려움이 작용했을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의 심리가 이와 같을 것이다. 그 장소에 오래 있고 싶지 않은 것이다. 자신도 어떤 봉변을 당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 어떤 여자 분이 지나가다가 길 가던 개가 갑자기 달려들어서 물어뜯기고 넘어 졌을 때 먼저 지나가던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냥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그 뒤에 사람이 와서 구해 주었는데 먼저 본 사람이 이 사람을 개로부터 구했다면 크게 상처를 받지 않했을 거다. 그런데 그냥 지나 가 버린 것이다. 왜 그랬을까요 두렵기 때문이다. 반면에 대만에서는 자신하고 아무 상관도 없는 여자를 쫓아가서 흉기를 가지고 찌를 때 비명을 지르고 도망가자 지나가던 남자 세 명이 쫓아가서 그 범인과 싸워서 사람을 살려내고 흉악한 강도를 잡은 사건도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환경에 쳐해 있을 때 자신도 당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두려움 마음에 도망치듯 나가는 것이다.
둘째, 제사장이 그냥 지나간 것은 제사장은 레21:1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에게 말하여 이르라. 그의 백성 중에서 죽은 자를 만짐으로 말미암아 스스로를 더럽히지 말려니와” 다시 말하면 시체를 만져 자기를 더럽혀서는 안 된다는 율법 때문에 그 자리를 피하여 갔을 것이라고 추정 할 수 있다. 하지만 이유여하를 불문하고 죽어가는 사람을 무심코 모른 채 하고 지나쳤다고 하는 것, 그것도 종교지도자인 제사장과 레위인들은 다른 어떤 사람보다도 더 도덕적이고 윤리적이고 사랑을 베풀어야 할 사람인데 그냥 지나쳤다고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반면에 유대인이 멸시하는 사마리아인은 강도 맞은 자를 자신의 자비를 들여서 잘 돌보아주고 상처에 기름을 바르고 포도주를 부어서 소독을 해주어서 보살펴 주었던 것이다. 이 사마리아 사람은 단순히 자신의 의무를 넘어서서 비용이 더 들면 그것 까지 내가 다 감당하겠노라고 한 것은 사람으로서 최선을 다해 수고하고 봉사함으로서 사랑을 실천한 것이다.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 만나 고통당한 이웃에 대하여 사랑의 손길을 내민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종교인인 제사장과 레위인, 그리고 유대인들이 그렇게 미워했던 사마리아 사람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예수의 사랑을 실천 한 사람입니까 오늘 21세기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우리 주변에 강도 만나서 고통하고 힘들어 하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요즘 신문이나 방송을 통해서 전해지는 소식들을 접하고 나면 너무나 우울한 소식들이 넘쳐 납니다. 의붓아버지에게 9살 때부터 성폭력 당해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 아들에게 매 맞아 죽어가는 아버지, 주차 문제로 시비 끝에 대도로 팔을 자르는 사건, 어릴 때 부모에게 버림받아 내 버려진 아이들, 학교에서 제자에게 매 맞는 스승, 학부모들에게 언어로 폭력을 당하는 교사들..
예수께서 이 선한 사마리아 비유를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치시고자 하는 내용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이웃의 개념을 자신의 혈육이나 자신의 친족으로 한정 시키지 말라는 것이다. 유대인은 사마리아 사람이나 이방인들은 이웃의 개념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이웃은 나에게 호감을 갖고 나를 잘 대해 주는 사람만이 아닌 나의 사랑을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이다. 나의 사랑을 필요로 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그에게 예수의 사랑을 베풀어야 하는 것이다.종교지도자인 제사장과 레위인에 비하여 평범한 사마리아 사람이야 말로 예수의 사랑을 실천 한 사람이다.
레위기25:35에 “네 동족이 빈한하게 되어 빈손으로 네 결 에 있거든 너는 그를 도와 객이나 우거하는 자처럼 너와 함께 생활하게 하되” 우리 주변에 가난하고 소외되고 외롭고 고통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강도를 만나서 고통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상처 속에 일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많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영적인 시각으로 강도 만나 고통 속에 살아가는 자들에게 예수의 사랑을 실천하는 선한 사마리아 인이 되어야 합니다. 가까이 다가가서 돌보아 주고 상처에 기름을 바르고 포도주를 발라서 싸매주고 치료해 주고 보살펴 주는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 시대에 선한 사마리아 사람은 누구입니까?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사랑을 실천하는 교회이다. 이 땅에 예수님의 사랑을 가진 선한 사마리안 인들이 많을 때 사회는 건강하고 행복한 사회가 될 것입니다. 자신의 가족이나 친족, 자신만이 속해 있는 공동체를 넘어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선한 그리스도인,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 많아져야 행복이 넘치는 사회가 될 것입니다. 지난 7월15일 청주 500미리 폭우가 내려 오송 궁평 제2지하차도에 제방뚝이 무너져 6만 톤의 물이 순식간에 13명이 사망하고 17대의 차량이 물에 잠겼다. 안타까운 것은 결혼 한지 2년 밖에 되지 않은 새신랑이 처남을 데려 주다가 빠져 나오지를 못했고 효자로 소문난 치과의사와 아까운 생명들이 이 세상을 떠났다. 갑작스런 물이 지하차도로 쏟아지는 순간 두려움과 공포에 있을 때 한 트럭 운전사가 트럭 위에 올라가 있을 때 지나가는 사람 세 명을 끌어 울려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구했다. 자신의 목숨이 위급한 상황에서 떠 내려 갈 번한 사람들에게 사랑의 손길을 내밀어 그들을 물속에서 끌어 올려 귀한 생명을 구한 것이다. 이러한 선행이 알려지자 현대차에서 14톤 신형 트럭을 선물로 준 아름다운 미담이 있다. 이 트럭 기사야 말로 이 시대의 영웅이요 선한 사마리아인이 아닌 가 싶다
우리나라는 이제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가 가장 부유한 나라 중에 하나가 되었습니다. 유럽의 나라들과 함께 어깨를 견줄 정도로 국가 산업은 발전하여 반도체 밧데리 철강, 조선 자동차 산업은 세계가 부러워하는 나라가 되었다. 자동차 산업은 세계에서 도요타, 폭소바겐에 이어 3번 째로 많이 파는 나라가 되었다. 하지만 얼마 전에 전 세계를 대상으로 한 설문 조사해서 우리나나는 세계 137개국 57위 라는 것이다. 우리나라 행복지수 점수는5.9점이다. 전쟁 중인 러시아는 5.6점, 우크라이나는 5.9이다. 전쟁하는 나라와 앞의 수가 똑같은 5이다. 이것은 우리나라 국민행복지수가 최하위라는 것이다.
우리나라 국민의 행복지수가 낮은 것은 빈부격차의 심화, 심한 경쟁적 사회. 남북분열, 계층 간, 부모세대간, 이념분열 등 여러 가지 요소가 있지 많은 내가 보기엔 나누어 주는 삶, 사랑을 실천하는 삶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얼마 전 우리나라에 유명한 신영균 원로영화배우께서 우리나라를 세운 건국의 아버지인 이승만 대통령의 기념관을 짓기 위해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서울의 한강 변 고덕 동 땅 4000평을 기증하여 대한민국 건국 대통령의 기념관을 짓도록 하였다. 이 분은 2010년도에도 재산 500억을 기부하여 문화계에 기부하였고 자신의 모교에 10억원 통일과 나눔의 재단에 10억원 등을 기부하였다. 1960-70대 ‘빨간 마후라’ ‘연산군’ ‘미워도 다시한번’ 등 300편의 영화에 출연하였다. 이 분은 자신이 죽을 때 자신의 관에다 자신이 보던 성경책을 넣어 달라고 하였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 이 시대에 사랑을 실천하는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교회가 이 땅에 선한 사마리아 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예수의 사랑을 실천, 강도 만나 고통 속에 상처 받고 마음 아파하는 사람들에게 여러분들이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어서 이 땅을 치유하고 생명을 살려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23년 7월30일 청주 새 믿음교회 정영진목사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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