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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을 부끄러워하지 맙시다. 롬1:16-17

gkffpffndi 2022. 9. 17. 09:57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맙시다. 1:16-17

 

지난 주 8()에 영국을 70년간 통치했던 영국 여왕, 엘리자베드 2세가 이 세상을 떠났다. 전 세계 수많은 언론들이 일제히 여왕의 죽음을 애도하는 뉴스를 전했습니다. 여왕의 장례식은 19일 오전11시 웨스트민스트 사원에 안장 됨으로써 고별을 고하게 되는데 이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서 전 세계 저명한 인사들이 참석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지난 510일 윤석렬 대통령의 취임식에 수많은 인사들이 참석하였는데 초청장을 받지 못한 유력한 여당 정치인이 섭섭해 하였습니다. 영국 여왕의 장례식은 그 자리가 세계 각국 지도자들의 자연스런 만남의 장소가 되어 최고의 정치력을 나타 낼 수 있는 장레식이 될 것이기에 영국 황실의 초청장을 받은 각국 정상들은 일생 일대 가장 큰 영광으로 생각 할 것이다. 초청장이 없으면 참석 할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 윤석렬 대통령과 부인 김건희 여사도 참석한다고 대통령실 에서 보도 하였습니다.

 

이런 장례식에 초청 받은 것은 개인적으로 대단한 영광이며 국가적으로도 나라의 위신이 올라가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은 영국 황실과의 인연을 과시 할 것이고 엄청난 인파와 세계적인 인물들과의 만남과 교류는 평생 잊지 못한 자신의 영광으로 생각할 것입니다. 평생 잊지 못할 것이고 참석한 사진들을 자랑스럽게 여기면서 자신의 가문의 영광으로 생각하고 집안에 걸어 둘 것입니다.

 

유명인하고 식사를 하거나 여행을 같이 하면서 사진을 찍어 놓았다면 앨범이나 액자에 끼워서 집안의 거실에 잘 보이는 곳에 걸아 둘 것입니다. 저희 큰 외삼촌 집에 갔더니 이회창 총재 시절에 같이 찍었던 사진 액자가 한 중앙에 걸려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랑 하고 싶어서입니다. 나는 이래봬도 이러한 사람들이 알아주는 사람이다. 이거죠.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당연 한 것입니다. 자신의 자녀가 좋은 대학을 나왔으면 자랑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좋은 집에 살아도 자랑하고 싶어 합니다. 인간은 다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사도바울은 자신의 학문이나 학위나 가말리엘 문하에서 공부한 것이나 유대인으로서 바리새인인 것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고 복음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로마서를 기록한 때가 AD57년경인데 이 때는 로마의 폭군인 네로가 지배하던 시대였습니다. 네로는 우리가 아는 대로 로마에 큰 화재가 났을 때 여론이 악화되자 자신의 책임을 피하기 위해 이것을 기독교인들이 불을 저질렀다고 뒤집어 씌워서 기독교인들을 박해하였습니다.

 

원형경기장에서 화형에 처해져 죽던지 아니면 기독교인이 아니라고 부인해야 살 수 있었습니다. 더욱 기독교인들이 어려움을 당 한 것은 기독교의 스승인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1세기의 로마는 대단하였습니다. 정치 철학이나 사상 문화나 문명 건축이나 예술에 있어서 세계 최고의 수준이었으며 로마 제국의 중심이었습니다. 세계의 중심이었습니다.

 

우리는 로마시대에 문명이나 문화를 보면 오늘날도 따라가기 어려운 그러한 문명이었습니다. 엄청난 크기의 신전이나 콜로세움 같은 건축물을 보면 오늘날도 어렵습니다. 로마에는 수 만 명의 노예들이 있었습니다. 가사를 돕는 노예로부터 시작해서 밭에서 일하는 노예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로마시민들은 긍지와 자랑이 대단했습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사도바울이 사도행전22:24절 이하에 보면 천부장이 백부장을 시켜 바울을 채찍으로 때리려 하자 바울이 말하기를 너희가 로마 시민 된 자를 죄를 정하지도 않고 채찍질 할 수 있느냐 하면서 대드니 천부장과 백부장이 때리지를 못하고 천부장이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로마시민권을 사기 위해서 많은 돈을 드렸는데 네가 어떻게 로마시민이 되었느냐 하니 바울은 나는 나면서부터 라고 하니 천부장이 로마시민이란 말을 듣고 두려워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로마시민은 특별한 특혜가 있었습니다. 특히 그 당시 아주 잔혹한 형 가운데 하나인 십자가 형틀에는 로마시민을 매달 수 없었습니다. 십자가형은 노예들이나 흉악범, 그리고 반란죄를 저지른 사람들에게 주어 졌습니다. 그러기에 십자가에서 죽었다고 하는 것은 그 당시 로마 사람들과 이방인들도 가장 치욕적인 죽음이었음을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의 제자들은 어떠했습니까? 자신들의 스승인 예수가 그 당시 다 아는 흉악범이나 매달려야 할 수치스런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사실은 부끄러운 일일 것입니다. 1세기의 로마의 문화나 문명, 건축이나 예술이나 문학이나 철학은 오늘날도 따라가기가 어렵습니다. 현대문명의 모든 것은 거의 로마문화로부터 가져 온 것입니다.

 

이러한 로마 문화 속에 있는 기독교인들은 로마인들에 비하면 자랑 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기독교인들 가운데는 노예들이나 하층민들이 많았습니다. 귀족이나 부자들은 그다지 많지 않았습니다. 성경에 예수님에게 자신의 무덤을 주었던 아리마데 요셉 정도입니다. 거대한 로마 건축물이나 왕이나 귀족, 부자들로부터 위축 당 할 수밖에 없었던 기독교인들에게 바울은 16절에서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한다이 말인 즉 그 당시 기독인이면서도 그리스도인으로서 정체성을 분명히 하지 못하고 로마사람들과 같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날도 기독교인이면서 교회의 목사 장로 권사 집사이면서 세상에서 자신이 기독교인임을 부끄러워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 어떤 권사님이 저에게 이렇게 말했던 적이 생각납니다. 이 분은 KT에 오래 동안 다녔습니다. 그런데 그 회사의 상당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었던 모양입니다. 회사도 오래 다녔습니다. 그런데 회식 장소에서 한 번도 식사 기도를 한 다거나 술을 거부한 적이 없었습니다. 또 다른 직원들에게 자신이 교회 장로라고 말한 적도 없고 교회 이야기를 한 번도 꺼낸 적이 없기에 교인이 아닌 줄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았는데 그가 교회 중직자였다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랐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직장에서 여러분이 교인 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면 여러분의 신앙은 가짜가 아닌 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회사에서나 나가서 사람들하고 식사 할 때 사람들이 기도하는 것을 보면 저 사람이 기독교인 이었어?라고 손가락 질 할까봐 기도를 하자마자 끝내는 기도를 하는지 마는지 모르는 그런 식사 기도를 하고 있다면 아직 나의 신앙이 약하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고 예수님을 부끄러워하고 있다는 사실일 것입니다. 반면에 이런 사람들도 있습니다. 지난 추석 명절에 저희 장모님 뵙고 내려오다가 기흥 휴게실에 들려서 식사를 하고 화장실에 가려는데 한 무리의 사람들이 눈에 띄었습니다. 그들은 똑 같은 유니 품을 입었는데 사람들이 다 알아 볼 수 있을 만큼 큰 십자가를 목에 걸었습니다. 그 표시는 자신들이 그리스도인인 것을 분명히 밝히는 것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인이다요즈음 방송에 나오는 패널 들 가운데 십자가를 눈에 보이게 하면 제재를 가한다고 합니다. 미국에서는 직장에서 십자가를 목에 걸 수 없다고 합니다. 마약 그렇게 하면 직장에서 쫓겨납니다.

 

지난 3년 동안 전 세계가 코로나로 인해서 통제 사회로 갈 때 미국에서도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어느 한 주에서는 교회에서 일요일에 예배를 드리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러자 교인들이 야외에 나와서 질서 정연하게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그곳에도 경찰들이 나와 있어서 예배드리는 사람들 한 사람씩 수갑을 채워 갔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교인들이 하나도 동요함이 없이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이런 장면이 유트브를 통해서 전 세계에 방송이 된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나님 앞에서 그를 시인 할 것이고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나님앞에서 그를 부인하겠다고 하셨습니다. 내가 사람들 앞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부끄러워하지 않고 사람들에게 자신의 정체성을 나타날 때 주님이 나를 인정해주시고 축복해 주실 것입니다.

 

바울이 거대한 로마 사회에서 복음의 증인이 되어야 한다는 당위성은 어디에 있었을까요! 그것은 14절에 나옵니다.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바울은 빚진 자의 심정으로 복음을 전했고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복음의 빚진 자라고 하였을 때 복음을 부끄러워하지도 안할 것이고 이 빚을 갚기 위해서 열심히 복음을 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바울은 딤후1:8에서 믿음의아들 디모데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우리 주의 증거와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된 나를 부끄러워 말라

 

오늘 날 교회 다니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 믿는 것을 숨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 인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예수 믿는 것에 대하여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예수가 나를 구원하기 위하여 어떤 대가를 치렀는지를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매달려 죽어 우리 죄를 속죄하지 안했다면 우리는 소망 없는 자들입니다. 영원한 멸망에 들어 갈 자 인 것입니다. 영원한 고통 속에서 빠져 나올 수 없는 자들입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알기에 예수를 귀하게 여겼고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안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마시고 복음을 자랑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를 자랑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를 전하시기 바랍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말입니다.

 

이번 명절에 장모님이 계신 일산에 지난 월요일에 다녀왔습니다. 매년 해마다 장모님에게 다녀왔습니다. 그런데 언제 부터인가 장모님께서 허리 통증으로 인해 거동이 불편해 하십니다. 둘째 처형도 같은 시간에 만나기로 하였습니다. 그런데 가다가 저희 딸 지혜가 있는 성남에 둘렸다가 일산에 가니 점심시간이 훨씬 지난 140분경에 도착하여 설렁탕으로 식사를 하고 장모님 집에 들어갔습니다. 장모님은 올해 93세이십니다. 이제 연로하셔서 거동이 불편하시는데 옆에 처형은 어머니를 위로해 드리기 위해서 연세가 많다고 생각하지 말고 긍정적으로 살아야 한다. 운동도 좀 하셔야 한다. 아직 다른 사람들에게 비하면 어머니는 건강 하신 편이다. 라고 하시지만 당신은 하시는 말씀이 힘들다는 것이다. 처형은 청년 때는 교회 나갔지만 무슨일인지 몰라도 상처를 받고 그 때부터 교회를 안 나가기 시작해서 지금까지 교회를 나가지 않은 무신론자에 가깝다. 저희 안사람도 둘쩨 처형을 좋아한다. 왜냐하면 잘해 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기 언니한테 복음을 전하는 것을 내가 보지 못했다. 천주교를 최근에 다닌다고 하는데 그것으로 위로를 받은 것 같다. 하지만 내 마음 한 구석에는 자신의 여동생 남편이 목사이고 여동생이 사모인데 어케 교회를 나가지 않는 다는 말인가? 이해 할 수 없다. 평상시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던 나는 장모님에게 그렇게 말씀하시는 처형을 보면서 또한 장모님이 거동이 불편하셔서 교회 안 나가신지 오래 되셨기에 두 분에게 복음을 전할 기회가 온 것 같아서 그 날 1시간 이상 복음에 대하여 증거 하였더니 눈을 감고 있던 처형이 다 들었는지 나오는데 어머님이 잘 들으시던데요. 하는 것이었다. 그 날 목사인 나는 오랜 만에 처형과 장모님에게 천국과 지옥, 그리고 이 세상이 전부 인 것처럼 사랑가는 처형에게 분명하게 복음을 전하고 천국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이제는 살아야 한다고 장모님에게 분명하게 복음을 전하고 청주에 내려오니 오랜 만에 내 할 일을 한 것 같았고 성령님께서 기뻐하셨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뒤에 있는 말씀입니다. 이 복음은 모든 믿은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모든 인간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죄인된 인간은 죄로 인하여 눈이 가리워졌습니다. 마치 사도바울이 다메섹에 가다가 눈이 멀어 졌다가 아나니아가 안수 함으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서 눈이 정상적으로 보이는 것처럼 말입니다. 복음이 들어가기 전에는 영적으로 눈이 어두워져서 하나님의 계시를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 마치 도마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지 못하고 있을 때 그에게 주님께서 나의 옆구리에다가 손을 내어보라고 하여 옆구리의 상처를 만지고서야 나의 주님이시오,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한 것과 같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체험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이 있어야 하는데 이것은 복음의 능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1세기 로마시대 사람들에게 헬라의 문화와 헬라의 철학과 사상, 건축과 예술들이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미국이나 유럽에 가면 그 웅장한 성당이나 교회 건축물이나 예술품, 박물관을 보면 아시아 사람들은 기가 죽습니다. 그들이 이룩한 로마문명은 지금도 찬란하게 빛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 위대한 문명을 이룬 사람들에게 바울은 구원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아무리 위대한 문명과 문화를 자랑하지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아니하면 부활하신 예수를 구주로 믿지 아니하면 너희들이 이룬 이 휘황찬란한 문명과 문화는 쓰레기 더미에 불과 하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구원받지 못하면 로마의 사상이나 헬라철학이나 위대한 문명이나 문화유산이라고 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치 안습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온 천하를 얻고도 생명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 하겠는가 입니다.

 

그런데 이 구원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신앙, 즉 복음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는 것입니다. 복음만이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복음은 모든 사람들이 다 들어야 하고 믿어야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 에게로다. 다시 말하면 이 세상을 유대인과 헬라인으로 구분하였습니다. 유대인이 아니면 나머지는 헬라인 인 것입니다. 이방인 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복음은 모든 인류가 들어야할 기쁜 소식입니다. 왜냐하면 모두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복음을 전할 때 자신의 민족인 유대교 회당에 들어가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리고 지중해 변의 3차 전도여행을 통해서 복음을 전하다가 마지막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 순교 하였던 것입니다. 바울은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본인 자신이 복음을 듣고 나서 그의 삶이 변화 되었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사람을 변화 시킵니다. 복음이 들어가면 새 사람이 됩니다. 바울처럼 핍박 자가 복음을 증거 하게 됩니다. 김익두 목사님처럼 깡패가 목사가 됩니다. 얼마 전 국민 MC 송해 선생님께서 95세의 나이로 별세 하셨는데 그 분과 함께 가까이 지내신 분이 계셨는데 배역을 항상 깡패로 맡아서 나오는 연예인이 계신데 이 분에 대한 방송을 우연히 본적이 있었습니다. 항상 머리를 밀어 대머리로 나오시는 분 말입니다. 이름이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만, 그 분이 깡패 역할 배우를 한 동기를 말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분이 김두환, 이정재 이런 사람들 밑에서 똘만이 노릇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젊었을 때도 그렇게 깡패 노릇을 하고 살았는데 하루는 그러니까 군사정부 5공화국 때죠. 광주사태가 일어나고 서울이 비상이 걸렸을 때 광화문에 군인들이 나와 있을 때 걸어가다가 군인이 큰 소리로 이렇게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 임마, 너 걸음걸이가 왜 그래. 게머리판으로 뒤지게 맞고는 너 한 번만 네 눈에 보이면 그 때는 죽은 줄 알아! 이 한마디가 얼마나 무섭던지 그 뒤로는 광화문에 나타나지를 않았는데.. 이 사건이 계기가 되어서. 내가 이렇게 살면 안 되겠구나 생각하고 배우로 전향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분이 그 뒤로 교회에 나가서 열심히 신앙생활하면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장기를 가지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 봉사하면서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복음이 들어가면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17절에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하였습니다. 여기서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다고 하였는데 바로 하나님의 의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의 의를 충족시킬 수가 있습니다. 인간의 어떤 종교적 행위나 도덕적 수양이나 선행을 통해서는 하나님의 의에 이를 수 없고 만족 시킬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높이 달리심으로써만이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킨 것입니다. 그 당시 십자가는 로마 사람들이나 헬라 사람들에게 부끄러운 것이고 수치스런 것이었습니다. 치욕적인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는 이 모든 것을 담당 하시어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 분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게 하기 위해서 자신이 희생제물이 되셔서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키신 것입니다. 히브리서 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오늘 우리도 예수 믿은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천국에 갈 수 있고 영생을 얻을 수 있고 하나님 나라의 기업을 상속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믿는 것을 부끄러워하거나 숨기거나 나타내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의 영광의 자리에 오를 수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이 말은 앞에 있는 믿음과 뒤에 있는 믿음은 다릅니다. 헬라어로 (에크 피스테오스 에이스 피스틴) 앞에 있는 믿음으로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기본적인 믿음을 가리킨다고 하면 뒤에 있는 믿음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성격을 결정짓는 성숙한 믿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분명하고도 확실한 믿음을 가리킵니다. 그리스도를 부끄러워하거나 감추거나 나타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나타내는 믿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사는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기본적인 믿음에서 더 나아가 그리스도인 임을 결정 짓은 자신의 정체성을 그리스도인 임을 나타내는 삶의 방식이나 태도, 모습에서 그리스도인 됨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증거하는 삶을 살아가는 이 믿음을 부끄러워 하지 않는 자에게 죄책으로부터 자유를 얻고 영원한 영광의 자리, 하늘나라의 보좌에 앉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이후로 예수를 부끄러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를 증거하십시오. 예수를 나타내십시오. 예수를 자랑함으로 이 복음의 능력이 삶속에 나타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합니다.2022918일 새믿음교회 정영진 목사 주일 설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