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니 두려워 말라 막6:45-52
마가복음의 주제는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앞 절에 나와 있는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고도 12광주리가 남은 초자연적인 기적을 행하신 이적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파도와 풍랑을 잔잔케 하시는. 즉 자연을 다스리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이 바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예수가 ‘하나님의아들’이라고 것은 그 당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가 신적인 존재, 즉 ‘야웨’ 하나님과 동일시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가는 바로 갈릴리 바다에서 제자들이 풍랑을 만나 큰 어려움을 겪을 때 마다 예수님께서 파도와 바람을 꾸짖으시고 잔잔케 하시고 파도로 인하여 두려움과 공포에 질려 있는 제자들에게 찾아와서 그들을 두려움에서 구원해 주시는 이적을 통해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나타내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나타 냈을 때 수많은 군중들이 따라 다녔습니다. 2000천 년 전을 우리가 상상 할 수 없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 즉 왕이나 귀족 장군들을 뺀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주 가난하고 비천한 환경에 놓여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라 다녔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늘 날 눈으로 보면 거의 노숙자 내지는 동냥을 구하는 거지 수준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풀기 위하여 벳새다 광야에 앉아 있으라 했을 때 예수님께서 그들을 불쌍히 여겼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기적은 바로 여기에서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사역은 남을 불쌍히 여기는 ‘긍휼의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시작 할 수 없습니다. 선교사들이 북한의 탈북자들을 사선을 무릅쓰고 수만 키로를 지나서 우리 대한민국에 정착 할 수 있도록 하는 것도 그들을 향한 예수님의 긍휼의 마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대한민국에서 얼마든지 안락한 삶을 살 수 있는 데도 오지에 가서 선교활동을 하시는 의사들이 있습니다. 또한 지금도 선교지에서 젊음을 바쳐서 선교하시는 주의 종들 모두가 영혼에 대한 긍휼의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마음으로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 이후에 주님은 제자들을 바다 건너편에 가도록 명령 하십니다. 그렇게 하신 이유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의 임금이 되시려고 오신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고 한 것은 로마의지배하에서 피지배민족으로서 고통과 멸시 그리고 가난한 삶을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성경에 약속 되어진 ‘메시야’가 바로 예수님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생각과 예수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로마지배로부터 벗어 날 수 있도록 즉 자기 민족을 해방시켜줄 정치적 메시야를 원한 것입니다. 로마에 대항할 메시야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래야 그들은 자유를 누릴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은 달랐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예수가 전 인류가 죄에서 구원할 희생으로서 예수님을 보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백성들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은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이사야55:8-9에서 “여호와의 말씀은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이천년 전의 이스라엘 백성들이나 오늘날 그리스도인들도 하나님의 뜻을 잘 알지 못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를 향한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찾고 구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본문 46-47절에 보면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타고 앞서 건너편 뱃세다로 가게 하시고 무리를 작별하신 후에 기도하러 산으로 가시니라”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신 이후에 예수님은 제자들을 바다 건너편 뱃새다로 가게 하시고 자신은 산으로 기도하러 가셨습니다. 예수님의 삶은 무척이나 바쁜 삶이었습니다. 너무나 바뻐서 밥 먹을 시간도 없고 잠 잘 시간도 많지 않으셨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수많은 백성들이 먹을 것을 예수님께 구하기 위해서 쫒아왔고 각색 병든 자 귀신들린 자 간질 하는 자 중풍병자 손 마른 자 눈먼 자 귀머거리들이 수 없이 따라 다녀서 그들을 치료하시다 보면 주무 실 시간도 많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 바쁜 일을 하시면서도 예수님에게 중요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시간을 내어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46절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따라오는 무리들을 물리치고 하나님과 영적인 교통을 갖기 위해서 기도하러 산에 올라 가셨습니다. 거기서 하나님과 깊은 기도를 하신 것입니다. 요즈음 여름 휴가철이 되어서 많은 사람들이 무더위를 피하기 위하여 바다나 산을 찾습니다. 육체적 정신적 안식과 휴식을 찾기 위해서 일 것입니다. 일만 계속한다고 해서 일의 능률이 높아지지는 않습니다. 휴식을 통해서 깊이 있는 사색을 하고 책을 읽으면서 정신적인 영양분을 축적함으로서 능률을 높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간에 윤석렬 대통령도 김건희 여사와 함께 연극을 관람했다고 하는 기사가 떴습니다. 취임 3개월 만에 지지율이 20% 대로 떨어졌는데 휴식하는 동안 좋은 책을 읽고 국가경영에 대한 지혜를 발휘해서 어려운 경제위기를 극복하고 국민을 하나로 모았으면 합니다.
무엇보다도 대통령께서 어린 시절에 교회를 다니셨고 어린 시절 꿈이 목사님이셨다고 하니 하나님과 교통하는 시간을 갖고 기독교적인 서적을 읽고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화 지식과 능력을 얻었으면 합니다. 우리가 육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육체적인 쉼이 필요합니다. 이 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휴가 시간에 하나님과 기도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힘들고 어려울수록 하나님께 기도할 때 하나님이 새 힘을 주십니다. 능력을 주십니다. 기도할 때 하나님이 도와주시고 하나님이 역사하시고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바울은 골로새서4:2절에서 “기도를 항상 힘쓰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삼상12:23절에 사무엘 선지자는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죄 하지 아니하고” 빌립보서4:6-7절에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기도하면 하나님이 도우십니다. 사무엘상 7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레셋과의 전쟁에서 하나님과의 법궤를 빼앗기고 난 이후에 법궤를 기럇여아림 아비나답의 집에 그의 아들 엘리아살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이십년 동안 하나님의 궤를 지켰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사무엘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들이 불레셋 군대에 패하지 않으려면 먼저는 바알과 아스다롯 우상을 제거하고 오직 하나님만 섬기면 내가 불레셋으로부터 구원해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난 이후에 사무엘 선지자는 온 이스라엘은 미스바에 모이게 하였습니다. 거기서 요즘 말로 하면 부흥회를 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회개 기도를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6절에 보면 물을 붓고 하루 종일 금식하면서 이렇게 회개하였습니다.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습니다”라고 말입니다. 이렇게 회개 기도를 하고 있을 때 불레셋 군대가 이스라엘이 미스바에 모여서 기도한다고 하는 소식을 듣고 기회는 이 때다 하고 쳐들어 왔습니다. 기도하러 온 사람들이 성경책과 찬송가만 가지고 있지 무슨 무기를 가지고 왔겠습니까? 이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무엘에 이렇게 부탁했습니다. 8절에 “당신은 우리 하나님께 쉬지 말고 기도하여 우리를 불레셋 군대로부터 구원해 주십시오”
사무엘이 젖 먹는 어린 양 하나를 가져다가 온전한 번제를 드리고 여호와께 부르짖어 기도하였더니 여호와께서 응답하셨더라. 블레셋 사람들이 사무엘이 제사드릴 때에 치러 올라 올 때에 하나님이 큰 우레를 발하시어 그들을 어지럽게 하시어 이스라엘 앞에서 크게 패하여 달아났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추격하여 쳤습니다. 사무엘 선지자는 이 전쟁을 기념하여 미스바와 센 사이에 돌을 세우고 이름을 붙였는데 “에벤에셀”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뜻은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라는 뜻입니다. 사무엘과 백성들이 회개하고 부르짖어 기도하니 하나님이 개입하여 주시고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어려움이 있을 때 주저 앉지 말고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십시다. 우리 믿음의 조상들은 세상 사람들이 여름에 산으로 바다로 휴가를 떠날 때 짐 보따리 싸들고 수백 몀이 모여서 땀내가 가득한 기도원으로 올라가서 하나님께 무더위와 싸우면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기에 인생에서 승리하게 된 것입니다. 지금은 너무 편해서 모든 것이 풍족해서 기도하지 않습니다. 기도할 제목을 가지고 하나남의 산에 올라서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고 대화 하는 시간을 갖는 여름이 되기를 바랍니다.
본문 47절에 돌아와서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보내고 예수님은 산에서 기도하고 계시고 제자들은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를 항해하고 있었습니다. 갈릴리 바다라고 하고 호수라고 하는 이곳은 돌풍이 심해서 위험 한 곳입니다. 제가 20여 년 전에 갈릴리 바다 근처에서 숙소를 정하고 있었는데 이런 경험을 직접 체험했습니다. 한 밤 12이후가 지나 1시 쯤 되었는데 갑자기 창문에 있는 커다란 나무들이 바람에 크게 흔들리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바다에 태픙이 크게 일어 난 것입니다. 그 때 바로 오늘 이 말씀이 생각이 났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거짓이 아니구나! 그 때 어찌 바람이 크게 불고 나무가 휘청거리는 소리가 들려서 겁이 났던 경험이 아직도 기억이 남습니다. 오늘 제자들이 바다를 항해하다가 풍랑을 만난 시간이 ‘사경’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경’은 오늘날 시간으로 환산하면 새벽3-5시경입니다. 칠흑이 온 바다 위를 휘감고 있을 때 조그만 고기 배에 의지하다가 갑자가 갈릴리 한 가운데서 태풍이 불고 풍랑이 넘쳐서 물이 배안으로 들어와서 배가 침몰할 위기에 처해 있다고 생각해보면 제자들이 엄청난 두려움에 빠졌으리라고 상상이 가지 않습니끼? 인간은 강한 것 같지만 대자연의 위력에 무기력합니다. 지난 8월1일 저녁 캐나다 중서부 엘버타주 레드디어 고속도로 위헤 갑자기 우박이 쏱아졌는데 우박크기가 아구공 만한 것이 차 유리에 떨어져서 차안에 있언 사람들이 공포에 떠는 영상이 올려졌습니다. 얼마나 무섭겠습니까?
저는 30년 전에 안성에서 목회하고 있었는데 지금도 그 때가 얼마나 무섭고 두려웠던지 생생한데 그 날이 수요일 이었습니다. 교회하고 사택하고는 10분 이상 걸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 날 엄청나게 비가 많이 내리면서 천둥과 번개가 치는데 도저히 겁이 나서 10분 거리를 갈 용기가 없어서 그 날 수요 예배를 못 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 날 가다가는 벼락 맞을 것 같았습니다. 천둥과 번개만 크게 쳐도 인간은 두려움에 빠집니다. 최근 3년 가까이 코로나 전염병 변이로 인해서 전 세계적으로 수십만의 사람들이 죽어 나갔습니다. 코로나 한참 일 때는 미국에서는 시신을 묻을 수 있는 곳이 없어서 사람들은 죽어나가는 시신을 보면서 죽음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에 빠졌습니다. 얼마나 무서우면 중국에서는 우환을 시작하여 상하이, 베이징 까지 봉쇄하지 않았습니까. 유럽에서는 거리에 나온 시민들을 강제로 잡아가기도 했습니다. 코로나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불안에 떨었습니까 아직도 끝나지 않아 백신 접종 4차 맞으라고 국가에서 독려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올해 2월에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여 건물이 파괴되고 수천 명의 사람들 무더기로 구덩이에 파 묻혔습니다. 아직도 전쟁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뉴스 보도에 나오는 우크라이나의 국민들의 공포에 질려서 두려움에 떠는 모습을 보았을 것입니다.
전쟁 중에 잡힌 우크나이나 군인들의 시신의 장례식을 치르면서 오열하는 모습을 보았을 것입니다. 포로로 잡힌 우크라이나 군인들을 거세해서 죽였다는 보도도 나왔습니다. 인간은 병으로 죽던 전쟁으로 죽던 전염병으로 죽던 죽음 앞에서 두려워 떨 수 없습니다. 본문에 나와 있는 제자들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바람과 파도로 인하여 자신들의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음을 깨달은 제자들은 죽음 앞에서 두려움과 공포에 떨고 있었습니다. 잘못하면 시퍼런 바다 강물에 시체로 전락할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의 이러한 상황을 보고 계신 분이 계셨습니다.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아들 예수이십니다. 48a에 “바람이 거스리므로 제자들이 힘겹게 노 젖는 것을 보시고 ” 제자들이 파도와 바람으로 인하여 위험에 처해 있는 것을 보고 계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성도들의 고통과 아픔과 위험에 방관하시는 분이 아십니다. 주님은 모든 상황을 보고 계십니다. 우리가 위험에 처해 있는 것을 아십니다. 우리가 아픈 것을 아십니다. 우리가 고통당하는 것을 아십니다. 우리의 환경을 아십니다. 마태복음6:28-30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 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리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 하였느니라.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 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시편기자는 139:1-2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나이다.” 시편103:14절에 “이는 그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기억하심이로다
주님은 당신의 백성들의 고통을 아시고 이해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멀리서 방관하시는 분이 아닌 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이 밤 사경에 죽음의 공포와 두려움에 빠져 있을 때 물위를 걸으시고 찾아 오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제자들은 바다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보고 유령으로 알았습니다. 예수님을 직시하지를 못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영적으로 무디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내니 두려워 말라”에서 ‘내니’라는 말의 뜻은 예수님에게만 사용하는 언어입니다. 이 말은 모세가 호렙산 가시떨기 나무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을 만난 사건입니다. 꺼지지 않는 가시 떨기나무에 가까이 간 모세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이 때 그는 하나님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나는 나다. “I am that I am”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 이 말은 피조물이 아닌 창조주라는 말입니다. 전능하신 존재라는 뜻입니다. 창조주이시며 우주의 주인이시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피조물인 인간에게 사용할 수 있는 말입니다. “에고 에이미” 나는 ~이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피조물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주님은 바리새인들에게 나는 아브라함이 나기 전에 있었느니라고 말할 때 신성모독으로 돌로 쳐 죽이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의신성에 대해서는 요한복음에서 알 수 있습니다. 너희들은 땅에서 났고 나는 하늘에서 왔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니라. 땅의 일을 말하여도 모르는데 하늘의 이야기를 하면 알겠느냐. 마가는 물위를 걸어오시는 초자연적인 사건을 통해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나타내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 함께 하였습니다. 요한복음1:1-3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리라” 예수님은 피조물이 아닌 세상창조 사역에 함께 하셨던 태초부터 계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 분은 알파와 오메가요 장차 구름을 타고 땅에 있는 모든 자를 심판하실 분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계2:1절에는 “오른 손에 있는 일곱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주님께서 물위를 걸어 오셔서 공포와 두려움에 질린 제자들에게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를 방관하지 아니하시고 이스라엘 백성의 고통의 소리를 들으셨던 것처럼 오늘 우리의 고통과 아픔을 알고 계십니다. 고통의 한 복판에, 두려움에 떨고 있는 인생들에게 찾아 와 주십니다.
그리고 주님이 제자들의 배에 올랐습니다. 51절에 “배에 올라 그들에게 가시니 바람이 그치는 지라” 주님이 우리의 인생에 배에 오르기만 하면 풍랑도 바람도 질병도 고통도 전쟁도 전영병도 슬픔도 가난도 실패도 낙심도 그치고 슬픔이 기쁨으로 바뀌어 지고 실패가 성공으로 바꾸어지고 낙심도 소망으로 바꾸어지고 쓴물이 단물로 바꾸어지고 슬픔이 웃음으로 바꾸어 지 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두려워 해야 할 분은 오직 한 분 하나님이십니다. 강하고 담대해야 합니다. 이사야41:10절에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너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나의 의로운 오른 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이사야43:1-3에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요 네 구원자임이라”
우리가 고난과 고통과 절망 가운데 있을 때 낙심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주님이 우리를 지켜보고만 있지 아니하시고 우리의 삶에 찾아오셔서 우리를 고통과 좌절과 절망과 질병과 원수, 두려움과 공포에서 우리를 구원하여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통과 질병, 자연재해, 전염병과 전쟁의 위험 속에서도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주님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모든 환난과 어려움 고통, 삶의 모든 풍랑과 두려움에서 구원받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22년 8월7일 새 믿음교회 정영진 목사 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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