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상22:1-2 새해소망 다윗이 불레셋 장수 골리앗을 때려죽이고 돌아올 때에 이스라엘 여인들이 모든 성읍에서 나와서 노래하며 춤추며 소고 치면서 말하기를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라는 백성의 소리를 듣고 그 때부터 사울의 마음에 시기심과 미움이 싹트기 시작하여 결국 사울은 다윗을 계속해서 죽이려고 시도하자 다윗은 사울의 칼날을 피해서 무려 10년 동안 망명 생활을 계속하다가 마침내 예루살렘에서 남서쪽으로 약20마일, 가드에서 북동쪽으로 10마일 지점인 아둘람 굴속에 피신해 있었습니다. 아둘람 굴은 다윗 왕조를 세우는데 있어서 토대가 되었던 장소입니다. 그는 이곳에서 하나님을 간절히 찾았습니다. 그 동굴에서의 체험을 노래한 시가 시편 142편입니다. “내가 소리 내어 여호와께 부르짖으며 소리 내어 여호와께 간구하는도다 내가 내 원통함을 그 앞에 토하며 내 우환을 그 앞에 진술하는도다 내 심령이 속에서 상할 때에도 주께서 내 길을 아셨나이다 나의 행하는 길에 저희가 나를 잡으려고 올무를 숨겼나이다 내 우편을 살펴보소서 나를 아는 자도 없고 피난처도 없고 내 영혼을 돌아보는 자도 없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어 말하기를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생존 세계에서 나의 분깃이시라 하였나이다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소서 나는 심히 비천하니이다 나를 핍박하는 자에게서 건지소서 저희는 나보다 강하니이다 내 영혼을 옥에서 이끌어 내사 주의 이름을 감사케 하소서 주께서 나를 후대하시리니 의인이 나를 두르리이다” 다윗이 자신의 장인인 사울왕의 칼날을 피해 있을 때 그는 힘없는 한 낱 도망자요, 약자였습니다. 이곳에 다윗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다윗 가족을 비롯한 여러 부류의 사람들, 즉 사울정권으로부터 소외되고 핍박당한 사람들이 한 사람 두 사람 모여든 사람이 400명 정도였습니다. 오늘 말씀에 보니까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 그리고 마음이 원통한 자들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현대어 성경에는 사울의 학정밑에서 압제받는 사람과 빚에 시달리는 사람들과 원통하고 억울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다윗에게 몰렸는데 400명쯤 되었다고 합니다. 최근 성서 고고학자들이 아둘람 성의 한 산 중턱에서 약 400명 정도가 살기에 충분한 동굴 하나를 발견했는데 이 굴이 다윗이 숨은 아둘람 굴 일거라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아둘람’이라는 이름의 뜻은 피난처, 보호처란 뜻입니다. 아마도 다윗이 사울의 칼을 피해 이 아둘람 굴에 있었기에 붙여진 이름 이라고 생각되어집니다. 다윗에게 찾아온 이들은 사울의 폭정과 억압을 견디지 못하고 사울이 지배하는 곳에는 도저히 숨쉬고 살 수 없다고 생각했기에 다윗이 숨어있는 아둘람 굴까지 온 것입니다. 이들은 그 당시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으로 핍박받던 약자들입니다. 변방인생이요 짜뚜리 인생입니다. 토인비의 말을 빌리면 marginal groups입니다. 하지만 역사는 이 변변치 못한 존재들에 의해서 역사가 발전해 왔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예수도 변방나사렛 출신이었고 그의 제자들 역시 세상에서 별 볼일 없는 인생들이었습니다. 이런 마지널 그룹이 아둘람 굴에 있는 다윗에게 모여 든 것입니다. 사회적 약자들이 더 이상 사울의 정권 아래에서 자신들은 희망이라고는 기대할 수 없기에 따뜻하고 남을 배려하고 자신들과 같은 처지에 있는 다윗이 자신들을 존중해 줄 것을 믿고 마음이 넓고, 관용의 리더쉽을 가진 다윗에게로 몰려 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다윗은 그 당시 도망자의 신세였습니다. 다윗도 환난 당한 자 빚진 자, 원통한 자와 별반 다름이 없었습니다. 사울에 의해서 죽임을 당할지 모르는 약자 임에도 불구하고 다윗과 함께 뜻을 같이하고 따르는 자가 무려 400명이 되었다고 하는 것은 다윗의 인간됨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요즈음 시대에는 사람이 아무리 좋아도 사람들이 모이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유명한 정치인이나 장관, 스타들이 가는 곳에 사람들이 모이는 것은 그들이 힘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이는 것입니다. 그렇치않습니까? 힘이 없는 사람들에게 사람들이 모이지 않습니다. 뭔가 자신에게 이익이 되고 입신양명의 길을 터 줄 사람이라고 생각되는 곳에 얼굴을 내 밀고 관계를 트는 것이 현대인들의 처세술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도망자 다윗에게 모인 400명의 사람들은 우리의 이러한 상식을 넘어서 사울에게 쫓겨 아둘람 굴에 숨어 있는 다윗에게 모인 것입니다. 다윗은 아둘람 굴에서 이 마지널 그룹과 함께 후일을 도모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다윗의 됨됨이를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이 왕이 되고 나서 저지른 죄가 있지만, 하나님은 다윗의 실수에도 불구하고 다윗을 사랑하신 이유는 다윗은 남을 존중하고 용서해 주는 도량이 넓은 사람이었다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아둘람 굴에 모인 사람들의 면면이 무슨 대단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사울의 정권하에 억울하게 재산을 몰 수 당한 사람이라든지 고통을 당 한자, 그리고 고리 대금 업자들에게 재산을 약탈당하고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빚에 쫓겨서 도저히 살아 갈 수 없는 자, 마음이 원통한 자들이 다윗에게로 몰려왔습니다. 다윗은 이들을 박대하지 않았습니다. 매몰차게 하지도 않았습니다. 어떻게 보면 자신과 같은 처지인 이들과 동지애를 가지고 저들을 잘 보살피고 따뜻하게 해주고 먹을 것을 주고, 옷을 입혀주면서 저들을 존중하고 사랑해 주었기에 이들은 다윗으로부터 위로와 쉼을 얻고 평안을 얻으면서 사람들이 하나 둘씩 모여든 것이 400명이 된 것입니다. 이들이 나중에 다윗 왕조를 세운 개국공신이 되었습니다. 이들과 함께 다윗은 왕조의 기초를 놓았고 나라를 세웠습니다. 그 아둘람 굴 출신 가운데 대표적인 사람이 요압 장군과 아비새 장군입니다. 이들이 다윗을 도와 위대한 다윗 왕국을 건설하는 일꾼들이 되었습니다. 오늘 날의 교회가 바로 아둘람 굴 과 같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교회란, 환난당한 자, 빚진 모든 자, 마음이 원통한 자 들이 찾아 와서 그들이 하나가 되고 동지애가 뜨겁고, 세상에서 상처받고 소외되고 가난하고 힘없고 고통 받는 사람들이 찾아와서 위로받고 인정받고, 세상에서 지친 영혼들을 보듬고 안아주고 위로와 힘, 평안함과 쉼을 제공 해줄 수 있는 피난처 아둘람 굴 같은 곳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피난처 있으니 환난을 당한 자 이리오라. 괴롬이 심하고 환난이 극하나 피넌처 되시는 주하나님. 교회가 세상에서 찢기고 상처받고 원통하고 억울한 자들이 와서 위로받고 사랑을 느끼고 예수의 용서를 경험하고 소망을 얻는 피난처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날 우리 사회는 아둘람 굴에 모인 사람들처럼 경제적 약자, 사회적 약자들이 너무나 고통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떤 분의 글을 읽어보니 지금 한국사회는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의 중한(많은 사람들의 원망)이 점점 하늘에 닿아간다. 라는 글을 읽어보았습니다. 이들을 어루만져주는 곳이 교회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교회를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교회는 오히려 사회적 약자보다 가진 자의 대변인으로 생각하는 듯합니다. 오늘날 교회는 성서적 말씀보다 근거 없는 긍정적인 마인드, 본회퍼의 말을 빌리면, 복음을 값싼 은혜로 변질시킨 성공내지는 성과주의 메시지 등이 이를 반증해 준다고 생각합니다. 복음의 대상인 사회적 약자인 오클로스에 대하여 관심을 더 가져야 합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성경적 기독교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는 생각입니다. 지난 한 해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대표적인 소위 가진 자의 횡포, 힘 있는 사람들의 소위 ‘갑질’ 사건이 두 건이나 있었지 않았습니까? 하나는 대리폭행기사의 김현미 의원의 폭행사건과 대한 항공의 부사장 조현아의 땅콩회항사건입니다. 우리사회가 조현아 땅콩사건에 공분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조현아로 표상되는 우리사회 ‘갑’들 때문이라면 두말 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 사건에서 여전히 우리사회는 구시대적인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힘있는 자는 당연한 것이고 권력을 가진 자는 당연히 누려야 된다고 하는 시대착오적인 발상입니다. 둘째는 이런 사건의 마지막 결말을 보면서 우리사회가 더 이상 이런 ‘갑’의 횡포를 용서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최근에 한국인 500명을 대상으로 20대에서 60대까지 새해소망을 뭐냐고 조사해 봤더니 20-30대에서 존중받는 사회, 수평적인 분위기에서 일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하는 의견이 28% 31% 였고 전 연령에 걸쳐서 존중받고 수평적이며 인간적인 직장생활을 원한다고 나타났습니다. 이러한 요구는 오늘 우리가 구시대적인 가부장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는 변화하는 세상에서 교회가 변화지 않으면 교회는 어려움에 직면 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이 시대에 다윗과 같은 리더쉽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교회는 약한 자 가난한 자 힘없는 자, 소외된자에 대하여 더 다가야하고 저들에게 그리스도의 용서와 사랑, 그리고 똘레랑스, 즉 관용의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여야 정치인들을 청와대에 초청을 해서 신년하례회를 했는데 새 정치 민주당의 문희상 고문이 대통령 앞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갑오년(갑)이 지나가고 을미년(을)이 오고 있습니다. 작년에 이런 우리 사회 분위기를 반영하는 최고 인기방송이 “미생”이었다고 합니다. 미생이라는 드라마는 완생이 미치지 못한다는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직도 국민소득 30000만 불 시대에 가난 속에서 나라에서 주는 수 십 만원으로 한 달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정규직이 아니 비정규직으로 한 달에 100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교회는 우리 사회 가장 힘없는 자, 사회적 약자, 가난하고 경제적으로 궁핍한 자, 이 사회의 가장 낮은 자, 작은 자에게 관심이 필요합니다. 즉 아둘람 굴에 다윗에게 모여든 환난 당한 자, 빚진 모든 자, 원통하고 억울한 자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 그들의 아픔과 고통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역할이요, 교회 본연의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기독교총연합회 대표회장 이영훈 목사는 새해 신년사에서“광복 70주년이 되는 새해에는 우리 민족에게 해방과 자유를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십자가 사랑으로 진정한 화해의 길을 열어가고자 한다”고 밝혔다. 한국교회연합 대표회장 양병희 목사는 “새해가 됐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은 부조화와 불평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며 “주님께서 이웃을 찾아오셔서 고통과 좌절을 희망과 환희로 바꿔주시기를 기도한다”고 말했다. 새해가 되면 저마다의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소망을 가지고 출발하십니까? 저는 기도 중에 본문을 선택하면서 청주 지방회에 속해 있는 모든 교회가 새해에는 아둘람 굴에 다윗에게 마지널 그룹이 모여 든 것처럼 교회마다 세상에서 상처받고 위로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교회로 교회로 몰려 부흥하는 한 해가 되었으면 합니다. 그리하여 다윗이 이 마지널 그룹을 위시하여 다윗왕가를 일으키는 센트럴 포스가 된 것처럼, 여기 모여 있는 목회자들 모두가 여러분 교회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고 용서하고 관용함으로 교회가 하나 되어 여러분의 교회가 마지널이 아닌 중심세력으로 부상할 수 있도록 ‘권토중래’ (흑 먼지를 날리면서 지난날의 실패를 거울삼아 실력을 쌓아 다시 도전해서 일으켜 세우는) 하는 한 해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15년 1월 5일 뉴월드 교회 청주지방회 교역자 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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