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자유, 고전8:1-13
2014년 현재 탈북자들의 공식숫자는 2만 7천여 명이라고 합니다. 탈북자들은 북한에 있을 때 고위층으로부터 하층민 까지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인 자신의 조국인 북한 지역을 이탈하여 남한에 정착하게 된 것은 북한에서는 정치적 박해와 아울러 사회적 불평등이 심화되어 최소한 인간으로서의 삶을 영유하기 위한 ‘자유’를 누릴 수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인간은 육체를 위해서 물이 반드시 필요하듯이 정치적 신체적 자유가 없이는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없습니다.
인류의 역사란 어찌 보면 이런 자유에 대한 투쟁의 역사입니다. 종교개혁이나 이탈리아의 르네상스운동도 자유에 대한 몸부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일제에 대한 독립운동 역시 자유에 대한 항거인 것입니다. 미국에 뉴욕 항에 들어서면 미국의 상징물로 자리 잡은 거대한 자유의 여신상 역시 영국의 식민지와에 대한 압제와 탄압에 대한 상징물로서 1886년 미국 독립 100주년을 기념하여 세웠다.
미국의 정치지도자인 페트릭 헨리( Patrick Henry ,1736-1799)는 그의 명연설 마지막에서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이렇듯 사람들은 ‘자유’를 갈망한다. 그것이 정치적 자유이든 신체적 자유든 출판과 결사의 자유, 집회의 자유이든 말이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자유’란 이런 정치적 박해나 인간적 불평등에 대한 자유에 대한 목마름과는 다르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란 오늘 본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자신의 권리와 특권을 누리려는 ‘자유’가 아닌 오히려 다른 사람을 위한 자신의 권리의 포기라고 해야 할 것이다. 바울은 그 자신의 사례를 바로 ‘우상의 제물’ 에 대한 문제로부터 시작한다, 바울은 우상제물을 먹는 문제와 이방의 제사에 참여하는 것에 대한 일로 교회가 분열되어지자 이 문제를 명백히 하여 교회의 혼돈과 무질서를 바로 잡으려 하였다. 고린도는 그리스 중부와 펠레폰네소스를 연결하는 지협에 위치하여 고린도 운하가 개통되기 까지 상업과 무역의 중심지였다. 그리하여 부유한 도시였다. 따라서 다양한 계층과 인종의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그러므로 자연스럽게 여러 종교들이 있었고 그 중에서도 그리스의 아프로디테 신전의 우상이 있었다. 종교혼합주의 적인 형태를 가졌다. 바울은 이곳에 50년경에 도착하여 약 1년 6개월 동안 복음전파와 선교활동을 하였다. 이곳에서 바울은 동역자인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를 만났다. 그리고 유스도라고 하는 개인집에서 예배를 드림으로써 고린도에 유대인들과 이방인들로 구성된 고린도교회가 세워졌다. 바울이 떠난 이후에 고린도 교회는 급속하게 발전되었다. 하지만 고린도 교회는 성숙하지 못한 교회였기에 지도자 문제로 분쟁이 발생하여 파당이 생기게 되었다. 이 뿐 아니라, 고린도 교회 안에는 이원론 사상이 들어와서 영과 육에 있어서 육은 중요하지 않고 영은 구원받았기에 영혼의 자유를 위해서 육신에 얽매이는 것을 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들은 영혼이 구원받았기에 육신은 무슨 일을 해도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 사람들은 우상의 신전제사에 참여하여 우상의 제물을 스스럼 없이 먹고 그곳에 사교모임에도 참여하여 이방인들과 스스로 없이 교제함으로 성적으로 문란한 생활을 하였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는 사이비 종교집단이 우리 주변에도 많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종교집단이 소위 요즘 기독교라는 이름을 쓰고 사회적 물의를 일으켜 하나님의 영광을 훼손하는 종교집단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이미 구원받았기에 회개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자신들은 죄 사함의 은혜를 받았기에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기존 정통교회는 구원받지 못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자신들의 영은 구원받았기에 육신은 아무렇지 않게 사용해도 좋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기에 양심이 무디워지고 악을 행하고도 반성하지 않습니다. 소위 도덕 폐기론 자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기존 교회 교인들을 만나면 이렇게 묻습니다. ‘당신 구원받았습니까? 갑작스런 질문을 받게 되면 자신감을 잃고 머뭇거리고 맙니다. 그러면 그 때 이단들이 이렇게 공격합니다. “당신은 구원받지 못했습니다.” 이런 공격을 받은 믿음 약한 신자는 마음이 불안해져서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구원받으려면 우리 교회에 나오셔야 합니다. 기존 교회에는 절대 구원이 없습니다. 하고 사람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내가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성하러 오셨다고 했습니다. 내가 예수 믿고 구원받았다고 해서 아무렇게나 살아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야고보 선생이 말한 것처럼 그 사람의 믿음이 참 믿음인지 아니면 거짓 믿음인지는 그 사람의 행함을 통해서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오늘 날 한국교회가 세상 사람들에게 비난 받는 것 중에 하나도 어쩌면 우리가 예수 믿음으로 구원받았고 하는 구원론에 있지 않은 가 조심스럽게 생각해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교회 안에서도 이러한 초대교회처럼 이원론적인 사상이 팽배하여 우리는 세상 사람들을 지옥에 갈 사람으로 여기고, 우리는 하나님이 선택한 사람이기에 저 사람들 보다 무슨 죄를 지어도 예수님의 보혈로 천국에 갈 수 있다고 하는 구원론으로 인해 오히려 구원을 교회 다니는 것만으로 생각하고 우리의 도덕적 생활이나 윤리적 삶이 세상 사람들의 기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세속적인 삶을 삶으로써 세상으로부터 지탄의 대상이 되지 않았나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교회와 사회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고린도 교회 안에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지식이 분명하기 때문에 자신들은 도덕적이고 윤리적이고 선한 삶을 살지 않습니다. 자신들의 생각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들은 우상이라고 하는 것이 아무것도 아니다. 비록 하늘에나 땅이나 많은 주와 많은 신이 있기는 하지만,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것은 우상, 헛것이라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실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상의 제물을 먹는 문제에 대하여 그리스도인은 자유로워야 한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우상의 제물 자체는 음식이기 때문에 우상의 제물을 먹었다고 해서 그 사람이 죄를 짓거나 더러워지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우상의 제물을 먹지 않았다고 해서 그 사람이 깨끗해지거나 거룩한 것은 아니다.
따라서 우상의 신전에 가서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을 가지고 너무 죄악시하거나 그것 때문에 양심에 가책을 받을 필요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대단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율법폐기론자나 도덕무용론을 주장하게 되면 결국 방종과 타락의 길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를 보면 이런 일들이 교회사 가운데 많이 나타났습니다. 자유를 남용내지는 오용하면 타락하게 되었습니다. 그게 중세의 천주교입니다. 종교개혁 이전의 천주교는 성적으로 극도로 타락하였습니다. 야코프부르크 하르트가 지은, <이탈리아의 르네상스의 문화>라는 책을 보면 그 당시 수녀들과 수사들의 음탕한 일로 인해서 수녀원의 하수구를 뒤져 보면 어린 아이들의 뼈가 가득 하다고 했습니다. 수녀들은 수사들과 결혼 계약서를 작성하고 나면 먹고 마시는 것이 걱정이 없었다고 합니다.
18세기에 요한 웨슬리가 부패된 영국사회를 개혁할 당시에도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 했습니다. 당시 왕궁의 사치, 연락, 음란, 방탕의 영향의 컸었다. 세기말 적인 향락주의 만연하였는데 18세기 말 까지 계속되었는데, 산업혁명으로 인해 유럽각국의 이주자들이 들어와 인구가 밀려오면서 사회의 부도덕한 생활은 가속도가 붙어 음주, 사치 방탕, 음란 등의 죄악이 성행하였다. 영국의 극장은 말할 수 없이 문란하여 극장 안에서 여성들은 매춘하였으며, 이로 인해 일반사회의 정조 관념이 약해져 이혼하는 가정들이 많아 졌다. 상류가정의 부인들은 진미에 배불리며 비켜 누워 아침부터 ‘소설읽기’를 품팔이를 고용하여 음탕한 소설을 듣고 즐기고 있었다. 이악한 풍조는 대학가에 까지 밀려와 대학생들이 요리점과 구락부에서 음주 방가하면서 세월을 보냈다. 종교 역시 그 당시 탁류에 휩쓸려 무기력한 상태에 있었다. 웨슬리는 그 당시 신도에 대하여 불경건과 불신앙이 특색이라 하였다. 종교지도자들은 더해서 열정도 없었고 영감도 없었으며 단지 직업적으로 할 뿐 이었다. 이 모든 사실 가운데서도 통탄스러운 것은 교회 자체가 그 시대의 풍조에 젖어, 교회가 세상에 빛이 되지 못하였다. 더욱 한심한 것은 목사의 자질이나 능력보다는 정치적으로 임명되었다는 것이다. 한 성직자가 여러 교회를 맡는 것도 가능하였다.
본문으로 돌아와서 고린도 교회 안에는 두 번 째 부류의 사람이 있었습니다. 10절에 보면 사도바울은 이 사람들에 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지식 있는 네가 우상의 집에 앉아 먹는 것을 보면, 그 믿음이 약한 자들의 양심이 담력을 얻어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되지 않겠느냐”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바울은 “믿음이 약한 자”라고 말합니다. 믿음이 약한 자들은 그것이 우상의 제물이라고 먹지 않는데 지식이 있는 너희들이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면서 우상의 제물을 거리낌 없이 먹는 다고 하면, 그 믿음 약한 사람들이 우상의 제물을 먹지 않겠느냐 그러므로 네 지식으로 다른 사람을 넘어지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본문 7절에서 고린도 교인 가운데 우상에 대한 지식을 모두가 다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고린도 교회 안에는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 꺼림칙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믿음이 약한 사람일 수 있습니다. 이 믿음이 약한 사람들이 우상의 제물을 먹으면서 분명히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는 사람이 있지만, 분명한 것은 우상의 제물은 분명하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런 약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 우상의 제물을 먹었을 경우에 그 음식으로 인하여 자신들의 양심이 약하고 더러워 졌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은
본문 8장 1절에 바울은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이러한 잘못된 지식으로 인해서 자신들은 이 모든 율법으로부터 자유롭다고 생각하고 율법아래 있는 사람들을 향해서 비웃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뭐 그렇게 힘들게 할 필요가 있느냐 하면서 자신들은 그런 신앙적인 부자유에서 자유롭다고 생각하고 율법을 지키려는 사람들에 대하여 지식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지식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덕을 세우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덕이라고 하는 것은 나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남의 유익을 구하는 것입니다. 나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는 마음입니다. 나의 자유를 위해서 남의 권리나 자유를 빼앗거나 가로채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9-10절에 “그런 즉 너희 자유가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주의하라. 지식 있는 네가 우상의 집에 앉아 먹는 것을 보면 그 믿음이 약한 자들의 양심이 담력을 얻어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되지 않겠느냐”
그러므로 바울은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신을 교만하게 하는 지식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 교회 공동체를 유익하게 하는 덕, 즉 사랑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그리스도인의 사회생활에 관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은 우상의 제물에 관한 것이지만, 이 문제를 다른 영역으로 확대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음주나 담배, 혹은 그리스도인들이 가서는 오해 받을 수 있는 룸 싸롱이나 노래방, 도박을 하는 장소에 가서 앉아 있을 수 있고 구경만 할 수 도 있지만, 이런 곳에 들러 있다고 나오다가 믿음 약한 신자가 보고 어떤 생각을 할 수 있습니까? 저 분은 교회 중직자인데도 술도 잘하고 노래방도 잘 가고 한다고 생각하면 그 일로 인해서 초신 자가 시험에 받거나 아니면 죄를 짓는데 더 담대해질 수 있지 않겠습니까? 죄에 대해서 더 담대할 수 있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바울은 12절에 “이같이 너희가 형제에게 죄를 지어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라.” 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 형제는 그리스도께서 그를 위해서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자유가 다른 사람에게 부자유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잘못된 신앙지식으로 인해 교회 공동체와 믿음이 약한 자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내 자유가 다른 사람의 신앙과 자유에 유익을 주어야 하지, 교회 공동체에 해를 끼치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 우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바울은 그러므로 자신은 만일 먹는 음식 문제로 인해서 신앙적으로 사람들을 실족하게 하고, 교회공동체에 유익이 되지 못한다면 자신은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선언합니다. 즉, 자신의 자유로 인해서 남을 실족하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해야 할 일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남에게 유익을 주고 이웃에게 사랑을 베풀고 교회 공동체에 유익을 주는 행동이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자신의 자유를 제한 할 지라도 남의 자유를 억압하거나 남을 실족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권리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한 자기 권리의 포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관하여’(1520)에서 “그리스도인은 모든 것에 자유로운 주인이고 아무에게도 예속되어 있지 않다. 동시에 그리스도인은 모든 것에 봉사하는 종이고 누구에게든지 예속 되어 있지 않다”
고린도서에 나타난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마지막에서 바울은 이렇게 결론을 맺고 있습니다. 고전10:31-33에서 “그런즉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그리스도인이 자유를 어떻게 이해하고 생각하느냐 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네게 주신 자유가 나만을 위한 자유가 될 때 그것은 방종과 타락의 길로 걸어갑니다. 그것은 남을 실족하게 하고 덕이 되지 못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란, 나의 자유보다 다른 사람의 유익과 교회공동체에 덕을 끼치는 자유, 내 자유를 제한함으로써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주고, 그 영혼을 죄로부터 자유케 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참된 자유를 누리게 하는 것입니다. 청주벧엘성결교회 정영진목사 2014년 9월 14일 주일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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