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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자유(2) 고전9:1-14

gkffpffndi 2014. 9. 18. 14:33

그리스도인의 자유(2) 고전9:1-14

 

우리는 지난 시간에 우상의 제물에 대한 말씀을 통해서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란 나만의 자유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자유가 나로 인해 침해되거나 방해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란 내 자유가 일부 제한 받을 지라도 나의 부자유가 다른 사람에게 자유 함을 줄 수 있는 덕을 줄 수 있을 때 참 자유를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 자유가 이웃이나 교회 공동체에 유익을 주지 못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자유가 아니라 방종이나 타락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내 자유 함이 이웃과 교회, 사회나 국가에 해를 끼쳐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자신이 다메섹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기 전 까지 그는 유대 율법에 사로 잡혀 있었습니다. 율법에 노예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유대 율법에 어긋난다고 하는 기독교인들을 맹목적으로 잡아 가두고 죽이려고 했던 것입니다. 율법에 노예가 된 사울은 예수 믿는 신자들이 모여 있는 곳이 어디든지 찾아가서 박멸하려고 했습니다. 심지어는 외국에 까지 쫒아가는 열심을 보였습니다. 사울이 이러한 종교적인 열심을 가지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남녀를 불문하고 옥에 가두고 죽이고, 박해하는데 앞장 선 것은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 대한 열심 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즉 잘못된 종교적 지식이 그를 교만하게 하였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죽이는 범죄를 저지르는데 열심을 내었습니다.

 

이러한 종교적인 지식이나 열심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 곳곳에서 이러한 사상과 이념의 대립이 심화되고 있는 양상입니다. 그리하여 우리사회는 극단을 달리고 있습니다. 마치 마주 달려오는 두 열차와 같은 것이 오늘의 한국사회입니다.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자신들의 주의나 주장만이 절대 진리라고 생각하고 상대방에 대해서 귀를 열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자신들의 자유나 권리만을 내세우지 전체 공동체의 이익이나 국가나 국민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 전서 8장에서 우상의 제물의 먹는 문제에 대해서 자신의 자유 함이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 걸림돌이 된다면 자신은 영원히 고기를 먹을 수 있는 자유를 포기하겠다고 말합니다. 이게 그리스도인의 자유요, 진정한 자유자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내 자유만을 내세워 나의 이익이나 유익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나의 자유 함이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고 불편함을 주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란 내가 부자유하고 불편하다 할지라도 이웃을 이웃과 사회, 그리고 교회와 국가를 위해서 자신을 희생할 줄 아는 십자가의 정신 일 것입니다. 오늘 날 우리 사회는 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정신이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부자유하고 내가 손해 보고 불편해도 그것이 소위 대의를 위한 것이라면 내가 감내해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위해서 나무 십자가 위해서 죽으시지 않으셨다면 오늘의 우리의 구원과 영생은 없었을 것입니다. 갈보리 언덕에서 주님의 외마디 외침과 고통과 보혈의 공로가 없었던 들 우리가 율법에서 자유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께서 갈보리 언덕에서 피 흘림이 없었다면 여전히 우리는 죄 가운데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로마서5:18-19에서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리라.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난 이후 그는 율법에서 자유 한 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를 만난 사람은 모두가 다 자유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본문 고전91절에서 고린도 교인들을 향하여 내가 자유인이 아니냐 하고 말합니다. 고린도 교회 안에는 그리스도안에 있으면서도 아직도 율법으로부터 자유하지 못하면서 사도바울의 사도권에 대하여 도전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사도바울의 사도권에 대하여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1절에, “내가 자유인이 아니냐 사도가 아니냐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 주 안에서 행한 나의 일이 너희가 아니냐이 말씀속에서 고린도 교인들 가운데 일부는 사도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것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 하고 나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사도바울이 사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당시 사도만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반대 의견에 대하여 내가 사도가 아니라는 말은 타당치 않다고 말합니다. 자신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고 직접 사명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소위 사도권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가르칠 이유가 없는 사람이 자신들을 가르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은 바울과 대치 상태에 있었던 유대교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유대교 그리스도인들은 여전히 그리스도인이면서도 고리도교인들에게 율법을 강조하였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구원을 얻는 데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만이 충분하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유대교 그리스도인들은 그것으로 충분치 않고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바울의 사도 권에 대한 도전은 사탄의 역사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세우신 권위에 대한 도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권위에 대한 도전에 대하여 사도바울은 어떻게 그들에게 대처했습니까?

 

사도바울은 자신의 사도권에 대한 심각한 도전에 대하여 먼저는 자신의 사도권의 정당성을 가지고 반대자들을 설득하고 변호하는 것을 봅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16개 월 동안 있으면서 고린도 교회를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와 함께 자비량으로 교회를 개척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지도자들처럼 자신이 고린도 교회로부터 재정적인 지원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합니다.

 

4-10절에 보면 바울과 일행도 먹고 마실 권한이 있다고 말하면서 우리도 주의 사도 베드로처럼 결혼하여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한이 없겠느냐 말합니다. 그러면서 누가 군대를 가는 병사가 자기 비용을 가지고 군 생활 하겠느냐, 또한 누가 포도를 심고 그 열매를 먹지 않겠느냐, 양떼를 기르고 우유를 마시지 않겠느냐 라고 말합니다. 바울이 이러한 말을 하는 것은 바울의 사도권에 대하여 도전하는 사람들에게, 그리고 사도로서 대접하지 않겠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은 사도로써 뿐만이 아니라, 내가 고린도 교회를 개척한 개척자로서 내가 이 교회에서 물질적인 도움이나 협조를 요청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신명기25:4절의 말씀을 인용합니다.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이 말씀은 소가 밭에서 일을 하게 될 때에 배고프면 그 주변의 풀이나 소가 먹을 수 있는 것을 먹을 수 있도록 망을 씌워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즉 소가 일은 안하고 풀을 먹는다고 망을 씌워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소는 당연힌 일하는 댓가로 주변의 풀이나 잡초를 먹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은 하신 것은 하나님이 소들을 위함이 아니고 사람들을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미천한 동물들에게도 이러한 자유와 권리와 자유가 필요한데 사람은 말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러한 말을 하는 이유는 사도바울의 사도권에 도전하여 바울에 대하여 고린도 교회를 거쳤던 베드로나 아볼로에 비하여 바울은 사도처럼 대우할 필요가 없다고 하는 것에 대하여 바울이 자신도 사도로써 응당한 대우를 받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밭을 가는 소가 곡식을 밟아 떨고 추수할 때 응당한 보수를 받는 것처럼 사도인 자신도 거기에 걸맞는 대우를 받는 것은 합당하고 당연한 일리고 이것은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하는 겁니다. 농사를 짓는 소가 자신의 먹을 것을 자유로이 먹을 수 있는 것처럼 복음을 위해서 수고하는 자신 역시 고린도 교회의 재정적 후원을 받아 선교활동을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11절에서 자신의 물질적인 후원의 정당성에 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의 육적인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

즉 교회가 복음을 전하는 주의 종을 부양한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교단 헌법에도 교역자가 교회에 부임하면 교회 대표가 서원하지 않습니까? 교회가 목회자가의 생활비를 전적으로 책임지겠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당연한 권리를 바울은 자신은 포기하였다고 했습니다. 자격이 없어서가 아니라, 복음에 장애가 된다고 생각하면 자신의 권리마저도 내려놓은 바울 사도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자유라고 생각합니다.

 

바울이 만약에 자신의 권리에 대하여 너무 주장하고 나섰다면 아마도 고린도 교인들에게 바울은 사도로써 권위를 가지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자신의 권위에 앞서 그 권위가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서 장애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자신의 권위를 내려놓고 자신의 권한을 다 사용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오늘 우리는 권위가 도전받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요즘 대통령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조롱하는 시대입니다. 지난 18일 에는 농민 단체들이 갑자기 새 누리당 회의장에 나타나 고추 가루와 계란을 던졌습니다. 이에 앞서 창원시의원이 창원시장에는 계란을 투척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요즈음 세월호 참사가 인한 농성이 계속되지 진보단체나 보수 단체들의 대립과갈등이 극에 달하여 지는 중에 세월 호 유가족과 새 정치연합 김현의원이 대리기사를 불러놓고 30분 이상 지체하자 대리기자가 그냥 가겠다고 하자, 김현 의원이 자신의 명함을 기사에게 보여주고 내가 누군지 아냐고 하면서 국회의원이라고 하는 권위를 내세워 난투극을 벌였습니다. 권위라고 하는 것은 자리가 아닙니다. 권위는 얻어지는 것입니다. 높은 자리에 있다고 생각해서 권위가 주어지는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권위를 내세운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사도바울은 자신의 사도로써 당연한 권리를 가졌으면서도 자신의 권리를 복음을 위해서 다 사용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12절에 다른 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리를 가졌거든 하물며 우리일까 보냐 그러나 우리가 이 권리를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라.”

 

그리스도인의 자유란? 자신이 가진 권한과 권리를 다 사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첫째, 우리는 죄에서 자유 함을 얻었습니다. 인간은 죄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죄 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죄로부터 유발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도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의 마음의 상태에 대해서 마태복음 15:18-19절에서 입에서 나오는 것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519-21에서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는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이런 죄로부터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에서 자유를 얻은 것입니다. 찬송가 268장에서 죄에서 자유를 얻게 함은 보혈의 능력, 주의 보혈, 시험을 이기는 승리되니 참 놀라운 능력이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모든 죄를 담당하시고 자신을 십자가위에서 희생하심으로써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셨습니다. 히브리서 9:28이와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바 되셨고

 

바울은 로마서6:22절에서 그러나 이제는 너희기 죄로부터 해방되어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

 

그리스도인이란 죄로부터 자유를 얻은 사람입니다. 두 번째는 죽음으로부터 자유를 얻은 사람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917절에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사람들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죽음으로부터 자유 한 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천국에 대한 소망이 분명이 있습니다. 부활에 대한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부활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살전5:16-17절에서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바울은 이러한 죽음으로부터 자유 함을 가지고 있었기에 감옥에 가이사랴와 로마의 감옥에 2년씩인 갇혀 있으면서도 또한 여러 가지 강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자지 못하고 먹지 못하고, 39번 씩 다섯 번이나 맞고 돌로 맞고 배가 파선하여 일주야를 깊은 바다 속에서 지내면서도 그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것은 부활에 소망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러한 죽음 가운데서도 자신의 안위보다도 그가 염려한 것은 교회에 대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자유자입니다. 그는 죄와 죽음으로부터 자유 한 자입니다. 뿐만 아니라, 율법으로부터 자유자입니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한 자유를 누리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자신이 누릴 수 있는 자유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포기했습니다. 자신의 권한과 자유를 다 내려놓고 복음을 위해서 그리스도의 종으로 살았습니다. 그는 복음을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아찌지 아니하고 자신의 자유를 복음을 위해서 사용하였습니다. 그리고 영원한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그리스도인의 자유라고 하는 것은 자신의 권한이나 자유를 내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당연한 권한이나 권리조차도 그것이 복음에 장애가 된다면 다 쓰지 않는 자유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란 죄와 죽음으로부터 자유일 것입니다.

2014년 9월 21일 벧엘성결교회 정영진 목사 주일 설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