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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 요9,1-12

gkffpffndi 2014. 3. 28. 16:09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 요9,1-12


지난 시간 까지 우리는 유대인인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나사렛 예수에 대하여 적개심을 가지고 예수를 돌을 들어 치려 하자 예수는 숨어 성전에서 나가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유대인이 갈등을 빚은 이유는 예수 자신이 메시야 라고 자신을 드러냄으로서 유대인과 충돌을 빚은 것입니다. 만약에 예수가 자신의 정체성 즉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구약에 예언된 메시야라고 말하지 않았어도 유대인들의 미움을 사지 않았을 것이다.

 

오늘 본문 9장에서는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의 이야기로 이 소경의 눈을 고치신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이 소경을 고치신 때가 바로 안식일이었다. 안식일에 38년된 병자를 안식일에 고쳤다 하여 유대인들과 예수가 충돌을 하였는데, 공교롭게도 소경의 눈을 떠게 하신 때 역시 안식일 이었던 것이다.

 

1절에 보면 예수께서 길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된 사람을 보신지라.

지금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길을 지나가시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았습니다. 날 때부터 맹인이라고 하는 말은 운명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떤 약이나 의사의 기술이 전혀 도움을 줄 수 없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의 마음 상태는 좌절과 절망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을 것입니다. 이런 마음의 상태인 소경에게 제자들은 그 당시 사회통념으로 아무런 생각 없이 이런 질문을 예수께 던졌습니다. 예수님, 이 사람이 이렇게 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 이니이까? 자신의 죄입니까? 부모의 죄입니까?

 

제자들이 이렇게 질문한 것은 그 당시 유대 율법에 의하면 우리가 고통을 당하는 이유가 있는데 첫째는, 출애굽기 20:5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즉 부모의 죄가 자식에게 전가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부모가 실수하고 하나님을 거역함으로 오는 죄 때문에 자녀들이 고통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양식 있는 부모들은 자식이 잘못되거나 고통을 당하면 자기 때문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꼭 부모의 죄가 여지없이 자식에게 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둘째는, 자신의죄로 인하여 고통을 당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5:16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 마태복음9,1-8에 보면, 예수님께서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보시고 고치실 때에 작은 자여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리라. 말씀하심으로서 인간의 고통과 질병이 자신의 죄와 분명히 연관되어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셋째는 또한 벧전2,19에 보면 억울하게 고난을 당하더라도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괴로움을 참으면 그것은 아름다운 일입니다이 세상에는 억울한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오랫동안 감옥에서 살다가 후에 진범이 잡혀서 인생을 낭비한 사람도 있습니다. 넷째는 벧전2.20 b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선을 행하다가 고난을 받고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기에는 선교사들이나 주의 종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누구 입니까? 사도바울입니다. 바울은 예수의 복음을 전하다가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아쓰러졌고 25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고후11,25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렇듯 고통과 질병에는 고대 유대사회에서는 보통은 죄와 연관을 지어 말하였습니다. 특히 부모나 본인의 죄로 인해서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거나 질병에 걸렸다고 생각하는 그 당시 보통사람들의 생각이었습니다. 우리나라도 그렇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이 있지 않습니까? 어느 가정에 어려운 일이나 우환이 겹쳐지면 쉬운 말로 사람들은 죄 받아서 그렇다고 말합니다.

 

물론 예수님도 이 세상의 고통이나 질병에 관해서 말하실 때 자신의 죄나 부모의 죄가 전혀 상관이 없다고 말하시지는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모든 질병과 고통의 문제를 죄로 돌리기에는 무리가 있지 않나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고통에 관한 문제를 다른 책이 욥기서입니다. 이 욥기서에 보면 욥은 동방의 의인이며 정직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로 나와 있습니다. 욥은 자신의 자녀들이 잔치 집에 참석해서 돌아오면 반드시 속죄제사를 드렸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자녀들이 세상의 문화에 젖어서 야훼 하나님에 대한 경건성을 잃어버려서 그들의 생각이나 사상이 하나님으로부터 잠시라도 오염이 되었을지 모르기 때문에 자신의 자녀들을 하나님의 자녀로서 경건함을 유지하도록 조치한 것입니다.

 

그러한 욥이 하루아침에 재산을 잃고 열 자녀를 잃고 자신은 욕창이 나서 몸을 질그릇으로 긁고 있을 때 그의 아내가 이르러 차라리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말합니다. 이 때 욥은 욥2,10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이르되 그대의 말이 한 어리석은 여자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하지 아니하니라.“ 욥의 세친구인 엘리바스 빌닷 소발은 욥의 고난이 우연이 아니고 죄의 결과 라고 말하면서 자신들이 알지 못하는 죄가 있지 않느냐 하면서 까닭없는 고난이 없다고 말하면서 욥의 고난이 인과 응보의 결과라고 말하지만 욥의 고난이 결코 세 친구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죄의 결과가 아니고 고난을 통해서 우리에게 학습시키고자 하는 분명한 교훈이 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주변 사람들의 고난과 고통을 너무 쉽게 생각하고 단죄하는 경우가 없지 않습니다. 우리 인생의 고난이나 고통이 단순히 인과 응보적인 죄의 형벌이 아니고 다른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이 바로 이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3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요,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예수님의 이 말씀은 그 당시의 사회적 통념을 벗어난 말씀입니다. 이것은 유대인이나 전에 선지자들이 하셨던 말씀과는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코페르니쿠스적인 발상의 대 전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전까지 사람들은 다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앉은뱅이나 소경, 중풍병자 손마른자 등 이런 사람들은 부모로부터 만이 아니라, 이것은 신의 형벌내지는 저주라고 생각한 것은 그 당시의 세계관이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전쳐 낯설지 않으며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지극히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생각입니다. 이런 세계관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주님은 천둥소리와 같은 울림으로 그들의 가슴을 흔들어 놓은 것입니다. 부모의 죄나 자신의 죄가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시고자 함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을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고통에는 하나님의 뜻, 섭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 하나님의 목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과 하나님의 선하신 의도가 숨어 있다는 것입니다. 욥이 동방의 의인이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적으로 엄청난 실패나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것처럼 보이지만 욥의 고난이나 고통이 욥의 죄값 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로 인하여 하나님의 크고 위대하신 하나님의 뜻이 있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욥의 결백을 그의 갑절의 축복으로 그의 무고함을 하나님이 증명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당하는 여러 가지 환난이나 실패나 질병을 대할 때 우리가 너무 자책하거나 절망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사업을 하다가 망할 수 있습니다.실패 할 수 있습니다. 알 수 없는 환난이나 고통을 당해도 거기에도 하나님의 깊으신 뜻이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대학에 가지 못했다 하더라도 거기에는 하나님의 숨은 뜻이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하여 인간은 완전한 해답을 얻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완전하시고 의로우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세상에서 당하는 일들에 대하여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하나님을 대적해서는 안 됩니다. 욥기35장에 보면 엘리후라고 하는 사람이 욥에 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욥이 자신의 고난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돌보아 주시지 않는다고 불평한 것에 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참고 기다리면 욥의 소송장이 하나님 앞에 놓여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또한 하나님은 벌을 내리지 아니하시고 죄에도 별로 관심이 없다 하시나 하나님은 그렇치 않으시다는 것입니다. 엘리후는 욥에게 더 참고 기다리면서 자신의 말을 들어보라고 하며, 자신은 자신이 가진 모든 지혜를 동원해서라도 하나님이 의로우시다는 것을 밝히겠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큰 힘을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의로운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그들을 보좌에 앉은 왕들과 함께 같이 하시고 존경받게 하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의로운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 복종하지 않으면 쇠사슬에 묶이게 하시고 고통의 줄에 얽매여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시며 결국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게 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그분을 잘 섬기면 그들은 나날이 행복하게 살게 되고 평생을 즐겁게 살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귀담아 듣지 않으면 결국 죽음의 세계로 내려가고 아무도 그들이 왜 죽었는지 모른다고 말하면서 고통에 왔을 때 하나님을 원망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고통은 하나님이 가르치는 기회이며 이 때 사람들은 귀를 열어서 하나님의 소리에 듣게 된다고 말합니다.

 

자 이제 본문으로 돌아와서 소경이 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순간 그의 가슴은 시원하였을 것입니다. 이제까지 자신은 소경이 된 것을 운명으로 받아드리고 체념하며 살아왔는데 이게 무슨 소리인가? 나를 통해서 하나님이 나타내시고자 하는 뜻이 있다니? 절망의 벼랑에 서 있던 날 때부터 소경인 이 사람에게 마치 무너진 초가집에 햇살이 마당 사이로 쏟아지듯 희망이 솟아 오른 것입니다. 아침에 떠오르는 일출의 장엄함과 함께 희망을 본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항상 성공하고 모든 일이 잘 풀리고 만사가 형통하는 것 만이 하나님의 뜻이요 선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가 의도하지 않았고 내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었다 할지라도 거기에는 하나님의 놀아운신 섭리와 하나님의 계획이 숨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언젠가 한동대학교 총장이신 김영길 총장님께서 이제 20년 동안의 총장직을 내려 놓고 간증하신 것을 시청 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 분은 경북 안동출신으로 엄격한 유교적인 분위기에서 그 지역에서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집안의 자녀 이었습니다. 미국에서 유학하던 시절에 얼굴한 번 보지 않고 자신의 형이 대신 맛선을 보고 일 주일 만에 결혼을 했는데 결혼하기 전에 부인이 예수를 믿어야 결혼할 수 있다는 조건으로 결혼했는데 미국 나사에서 근무하다가 카이스트 교수로 그리고 한동대학교의 총장으로 오게 ehlTsmsep 그 당시 학교 재정이 안좋아서 교수 월급을 몇 개월동안 주지 못해서 정부에서 주는 돈으로 우선 주었는데 그것이 고발되어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감옥에 있는 동안 감방장에게 신고식을 하기도 하고 꼭같이 생활했는데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런 고난을 주시나 생각했는데 나 중에는 무죄로 석방되었는데 자신이 감옥에 있는 동안 언론과 티브에서 한동대 총장이 돈 때문에 감옥에 가있더라는 소식이 전해져서 사람들이 모금을 했는데 자신이 감옥에 있는 수십일 동안에 수십억원의 돈이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감옥에 나오니 동료교수들이 말하기를 총장님, 죄송하지만 좀 더 오래 계셨으면 좋을 번 했습니다. 그러더라는 것입니다. 무슨 말이냐 했더니, 아 글쎄 총장님이 감옥에 계시는 동안 수십억이 들어왔는데 하루에 8000천만 정도 들어왔다고 하면서 더 계셨으면 좋을 번 했다고 우스개 말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이런 고난을 통하여 오히려 학교가 알려졌고 학교의 부족한 재정도 해결되어 졌다는 간증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그 분은 신트로피 운동을 이야기 했습니다. 신프로피란 엔트로피의 반대로서, 우리가 아는대로 엔트로피는 이 세상은 가만히 나두면 갈수록 무질서의 세계로 간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만드실 때 무질서에서 질서의 세계로 만드셨습니다. 하지만 인간이 타락한 이후로 계속 하나님의 만드신 자연세계가 파괴 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모든 방면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특히 윤리적이고 도덕적인면에서 더욱 그렇습니다.

 

그러기에 이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나서서 신트로피 운동, 즉 무질서한 세계를 질서의 세계 최초의 하나님이 만드신 세계 아름답고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세상을 만들어야 간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 그리스도인의 사명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소경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소경이 된 것은 부모의 죄나 너의 죄 때문이 아니라, 너를 통해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는 말씀은 바로 너에게 사명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즉 네가 소경이 된 것은 이제 너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이 돌려지게 될 것 이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4절에 때가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니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 할 수 없느니라. 예수는 지금 가 낮이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낮이란 아직 일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밤과는 대조적인 말로서 밤은 수난과 고통을 상징합니다. 그러니까 아직 밤이 오직 안했기 때문에 아직은 시간이 있다 이 말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시간이라는 것입니다. 인생의 밤이 오면 일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일도 항상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병들고 아프면 주님의 일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습니다. 건강해야 돈이 있어야 주님의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돈이 없으면 봉사하고 싶어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하시고자 하시는 일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막 1:38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

그런데 전도하는 일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하는 것을 보면 하나님의 사역은 개인적인 차원이 아니고 공동체적인 사역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사역은 예수 혼자만 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와 제자들, 예수와 요한 공동체가 같이 해야 할 사명이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사역인 복음 전파의 사명은 목사님이나 전도사님만 하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 공동체에 속한 모든 사람들이 힘써 해야 할 사명이라는 것입니다.

 

그러시면서 주님은 자신이 세상에 있는 동안은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세상을 구원할 빛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증명하시려는 듯이 주님은 곧 바로 소경을 고치셨습니다. 주님이 소경을 고치시는 방법은 오늘 날 과학이 발달한 시기에는 이해 할 수 없습니다만. 고대 근동지방에서는 전혀 낯설지 않은 방법이었다고 합니다. 어떤 분은 우리나라도 의학이 발달하지 않했던 시절에 농촌에서 흙을 상처에 발라서 치료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흙에 치료의 효과가 있다기 보다는 소경이 예수께서 실로암 못가에 가서 씻으라는 말씀에 순종함으로 밝은 눈으로 왔더라는 것입니다.

 

나아만 장군이 엘리사의 말씀에 순종하여 요단강에서 몸을 일곱 번 씻고 살이 어린아이 살처럼 희게 되었던 것처럼 땅에다 침을 뱉어 진흙을 눈에 발라 약효가 있었던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실로암 못가에 가서 씻었더니 밝은 세상을 보게 된 것입니다. 이 소경이 예수의 말씀에 순종하고 자신의 죄를 실로암 못에 씻듯이 예수에게 씻었을 때 그의 인생은 실패의 인생이 아니라 성공하는 인생, 저주받은 인생에서 축복받은 인생이 된 것입니다. 지옥으로 가는 인생이 천국행 열차를 탄 행복한 인생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실패하거나 낙심되고 좌절 할 때 의기소침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고나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리에 서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즉 내가 실패하고 넘어지고 상처 나고 손해보고 심지어는 죽음까지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섭리와 하나님의 선하신 의도 즉 나를 통해서 이루시고자 하시는 뜻, 즉 사명이 있음을 알고 원망이나 불평되신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면, 여러분 삶속에 소경이 눈이 떠지는 은혜를 체험하게 되는 놀라운 일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닥친 문제나 어려움들은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함임을 알고 문제의 해결 자 되시는 주님을 신뢰하고 끝까지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과 같이 내 마음 만지는 분은 없네 오랜 세월 찾아 난 알았네 내겐 주 밖에 없네 주 자비 강같이 흐르고 주 손길 치료하네 고통 받는 자녀 품으시니 주 밖에 없네 주님과 같이 내 마음 만지는 분은 없네 오랜 세월 찾아 난 알았네 내겐 주 밖에 없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에게 고통이나 질병이 있습니까고통에는 하나님의 뜻있습니다. 그 문제로 괴로워하지 마시고 우리를 만져 주시는 주님께로 나아오십시오. 그리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반드시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2014년 3월30일 청주벧엘성결교회 정영진 목사 주일설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