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재하신 예수 요8,47-59
오늘 본문 말씀은 계속해서 예수님과 바리새인과의 지루한 논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논쟁이 계속되는 이유는 논쟁의 관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 자신의 정체성을 계속해서 말하고 있지만 바리새인들은 여기에 관심이 없고 의문을 계속해서 가지고 있습니다. 아니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기 보다는 말의 꼬투리를 잡아서 그를 유대 율법에 따라서 고발하고 죽이려 하였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고발하고 죽이려 했던 이유를 주님께서는 그들이 마귀에게 속해 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47절에 보면 “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라 ”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이유는 유대인들에게 계속해서 자신은 하나님께 속해 있다고 말씀하셨고 자신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죽이려는데 앞장을 서 왔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들을 향하여 마귀의 자식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자신의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를 죽이려고 했던 것은 그들이 탐욕과 비진리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인 바리새인들에게 마귀의 자식으로서 하나님께 속하지 않고 마귀에 속하여 있다고 하자 그들은 예수님을 향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48절에 “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너를 사마리아 사람이라 또는 귀신이 들렸다 하는 말이 옳지 아니하냐 ”
이 말의 뜻은 예수님께서 유대인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마귀의 자식이라고 표현 한 것에 대한 감정적인 대응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먼저는 “사마리아 사람” 이라고 표현 한 것은 예수님이 유대인임에도 불구하고 사마리아 인 이라고 말한 것은 다분히 의도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우리가 아는 대로 북쪽 사마리아 사람들을 같은 민족임에도 불구하고 북쪽 앗수르나 페르시아 사람들의 피가 섞여 있다고 생각하여 멸시하고 경멸하였습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요한복음 4장에서 야곱의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님과의 대화에서 알 수 있듯이 그 당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상종치 아니했습니다. 마치 우리나라가 일제 식민지하에서 일본에 협조하고 우호적인 사람들을 친일파로 여겨 멸시하는 거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분명히 유대인임에도 불구하고 사마리아인이라고 말하는 것은 자신들을 마귀의 자식이라고 하는 것에 대한 반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 귀신이 들렸다’ 라고 하는 말은 예수님을 미친 사람 취급한 것입니다. 요즈음 말로 말하면 ‘또라이’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제 정신 아닌 것 같은데, 좀 더 덜 떨어진 것 같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자 예수님께서는 49-50 절에 “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는 귀신 들린 것이 아니라, 아버지를 공경함이거늘 너희가 나를 무시하는도다. 나는 내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노니 구하고 판단하시는 이가 계시니라”
예수는 자신이 정신 나간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은 온전히 전능하신 하나님을 공경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의 뜻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섬기는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이 예수님이 보실 때 하나님을 잘 섬기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자신의 영광을 구한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자신의 영광과 이익만을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날에도 서기관과 바리새인처럼 하나님을 섬기고 공경한다고 하면서도 그 섬김이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고 자신의 영광을 위한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교회의 영광,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익과 영광과 명예만을 생각한 채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사신 교회의 영광을 훼손하고 영광을 가리 우는 그리스도인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이러한 교인들이 교회 안에 많이 있기 때문에 오늘 날 교회는 세상의 빛이 되지 못하고 세상 사람들에게 비난과 조롱의 대상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 중에 하나가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분규와 분열입니다. 대부분의 교회안의 분열과 분규는 그 다지 큰 문제가 되지 못합니다. 얼마든지 교회 안에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사회법정으로 끌고 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최근 한국 교회의 사회적 신뢰도의 하락과 쇠퇴 현상은 이러한 일들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한 교회의 영광을 앞세우기보다 자신의 이익을 앞세워 교회의 권위를 실추시키고 회복 불능의 상태로 내 모는 것입니다.
제가 아는 목사님 가운데 따님이 판사로 있는 분이 계신데 그 목사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자신의 판사 딸이 아버지에게 말하기를 “ 아버지 제발 목사님들 교회문제를 법정까지 가져 오지 말라고 하세요. 세상 믿지 않는 판사들한테 욕먹고 자신은 목사의 딸이라 더욱 챙피하더라고 말하더랍니다.
오늘 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교회의 영광을 생각하기에 앞서 자신만을 생각하기에 이렇게 까지 세상 사람들에게 비난의 대상이 된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고전10,32-33 “유대인이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
오늘 날 개신교회는 교파가 다양하고 신학적인 차이가 조금씩 있습니다. 또한 천주교처럼 중앙집권적인 구조로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천주교는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고 한 목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천주교는 사회정의 차원에서 한 목소리를 냅니다. 최근 들어서 천주교는 민중 신학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사회참여와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지나쳐서 국가를 혼란스럽게 하는 우려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예를 들면 대통령 선거가 끝난 지가 오래 되었음에도 현직 대통령을 사퇴하라는 시국 미사를 보게 됩니다. 저는 이런 미사나 예배에 원칙적으로 반대합니다. 왜냐하면 종교는 정치와 약간의 긴장이 필요하지만 종교가 정치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것은 종교 본연의 임무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천주교처럼 하나님의 공의 차원에서 어느 정도의 사회참여는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반면에 개신교는 70-80년대는 우리사회 민주화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 하였지만 최근에는 거의 교회가 사회에 대한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것은 교회가 개인 구원에만 관심 있지 사회의 소수나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이 천주교보다 많이 약화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천주교는 교황청이라고 하는 거대한 조직이 있기 때문에 수녀나 신부들이 자유롭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가정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도 더 그렇습니다.
반면에 개신교 목사들은 가정을 가지고 있고 교단이 있기는 하나 개교회 목사들을 보호해 주지 못합니다. 그 보다는 개 교회 이다 보니 한국교회
는 한국교회 전체보다 개 교회나 개인의 명예나 영광을 위해서 교단이나 연합기관이 존재하는 경향으로 흘러가고 있어서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한 연합기구가 만들어지지 못하고 연합기구의 임원이나 사사로운 명예를 위해서 존재하는 사조직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주신 명예나 권력을 하나님을 영광을 위하여 사용하지 않고 개인의 영광과 이익을 위해서 사용함으로 한국교회는 거룩한 하나님의 권위를 실추시키고 명예를 떨어뜨리고 있다 이 말입니다.
즉 예수님 당시 종교지도자인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영광보다 자신을 더 중요시 하였지만 예수님은 자신보다 하나님의 영광을 더 우선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날 그리스도인들은 어떠하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당시 바리새인과 서기관처럼 교회의 영광보다 자신의 이익과 명예와 영광을 위해서 교회에 다니는 사람은 없는 것입니까?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산다고 할 때 그 영광은 교회여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기독교 2000년 동안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통해서 수많은 영혼들을 구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교회란? 헬라어로 ‘에클레시아’ 인데 이 말의 뜻은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사람들의 모임을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교회는 엄밀한 의미에 있어서 건물이 아닙니다. 요즈음 교회마다 큰 건물을 짓는 경쟁을 하는 것 같습니다. 수천억, 수백억의 건물을 짓다보지 엄청난 부채에 한 달에 이자가 수억에서 수십억이 나가게 되는데 이게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 이게 과연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인지 한번 생각해 볼일입니다.
인간의 탐욕과 자신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닌 가하는 것입니다. 오늘 날 한국교회 지도자들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다 보니 신자들도 그대로 배워 가지고 하나님과 교회의 영광보다 자신의 명예와 욕심으로 교회를 이용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저희 교회는 그런 성도가 없는 줄 믿습니다.
51절에 보면,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예수님께서 이제 드디어 자신을 드러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말을 지키면, 즉 순종하면, 따르면 영생을 얻는 다는 것입니다. 역사이래로 이 땅에 태어난 모든 사람은 영생을 얻은 사람은 없습니다. 죽지 않은 한 사람도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살다 보면 오래 살고 싶은 욕망이 생기게 됩니다. 창세기 5장에 보면 아담의 계보가 나오는데 최초의 아담은 930세를 살았고, 그 아들 셋은 912세를 살았으며, 에노스는 905세, 게난910세, 므드셀라969세를 살았지만 모두가 다 죽었습니다. 중국의 진시황도 불로초를 구하려 하였지만 결국 죽었습니다. 그런데 50세도 안된 젊은 청년 예수가 당돌하게 자신의 말을 지키면 죽지 않는다고 말하니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기가 막힐 노릇인 것입니다. 최근 우리나라 이단들이 발효하고 있는데 모 이단 하나님의 교회 교주가 있는데 오래 전에 죽었습니다. 그런데 자신은 영생불사 한다고 했는데 죽었습니다. tcwdml 이 agm eh 자신은 죽지 않는다고 했다고 합니다.
젊은 자신의 말을 들으면 죽지 않는다고 했을 때 유대인들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도 죽었거늘 네가 아브라함도 보다 큰 사람이냐? 유대인들이 이렇게 물은 것은 아마도 아브라함은 하나님 아버지께 자신의 독자 이삭을 모리아 산에 바침으로 하나님께 인정받은 사람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인정받은 이후에 하나님께로부터 이 세상에서의 부와 자손과 땅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로부터 엄청난 축복을 받았습니다. 모든 일에 복을 주셨습니다. 자손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의 자손들 가운데 왕과 선지자들과 제사장들과 장군들과 수많은 지혜자 들을 배출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그도 하나님께로부터 영생을 약속받지 못했습니다. 아브라함은 175세에 기운이 다하여 자신의 열조에게로 돌아갔습니다.
그런 아브라함도 죽음을 이기지 못하고 죽었는데 네가 아브라함 보다 큰 존재냐 이 말입니다. 그리고 이 땅에 태어난 수많은 선지자, 즉 주의 종들도 죽었는데 네 말을 지키면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하는 말이, 말이 되느냐 이 말입니다. 말도 안되는 소리를 지껄이고 있는 것을 보니 너는 확실히 제 정신이 아닌 것은 틀림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주장에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하여 물어 봅니다. 그러면 너는 너를 누구라 하느냐? 이러한 질문에 예수님은 자신의 신성을 드러내십니다.
54절에 “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내게 영광을 돌리면 내 영광이 아무것도 아니거니와 내게 영광을 돌리시는 이는 내 아버지시니 곧 너희가 너희 하나님이라 칭하는 그이시라.”
예수는 자신의 신성을 부정하는 유대인들에게 더욱 강력하게 자신의 신성을 드러내십니다. 내가 내 영광을 돌리면 아무것도 아니다. 자신에게 영광을 돌리는 분이 계시는데 곧 그 분은 너희가 아버지라 부르시는 하나님이시라고 말합니다.
원래 요한 사도는 예수님에 대하여 ‘예수는 하나님이시다’ 라고 하는 입장에서 이 요한복음을 기록하였습니다. 하지만 본 구절에서는 예수는 하나님과 동등하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예수에게 영광을 돌리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영광을 돌리려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의 영광입니다.
55절에,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되 나는 아노니 만일 내가 알지 못한다 하면 나도 너희 같이 거짓말쟁이가 되리라. 나는 그를 알고 또 그의 말씀을 지키노라.”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의 잘못된 신앙에 대하여 지적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신들은 스스로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아버지의 뜻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자인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뿐 아니라, 예수를 죽이려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했던 것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하나님을 섬기면서도 율법의 형식만을 중요시 한 나머지 율법의 내용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찌니라. 마태복음 23:23절
이것은 율법의 형식은 잘 지켰지만 율법의 정신인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버렸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날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처럼 우리의 신앙이 내용은 없고 형식, 껍데기만 있는 신앙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즉 신앙의 내용인 삶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배는 잘 참석하는데 예배 이후의 삶이 엉망이라는 것입니다. 신앙과 삶이 괴리되어 있는 삶입니다. 교회는 다니는데 전혀 예수가 없는 사람입니다. 신앙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정기적인 예배참석과 함께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즉 형식과 함께 내용도 중요한 것입니다. 하지만 바리새인들은 형식만을 중요시한 나머지 신앙의 내용을 잃어 버렸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는 하나님에 대하여 잘 알고 계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하나님에 대하여 모른다고 하다면 그것이야 말로 거짓말쟁이가 되는 것이다.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과의 갈등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그러시면서 너희 조상 아브람함은 예수 보기를 즐거워하고 원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BC 2000년 전 사람으로 예수님보다 적어도 2000년 먼저 태어난 사람이다. 그런데 그 아브라함이 즐거워한다고 하는 것은 유대인의 하가다 전승에 의하면 메시야가 오게 되면 사탄은 멸망하기 때문에 즐거워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아브라함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메시야임을 인정하였다고 하는 말입니다. 즉 예수는 자신이 메시야임을 아브라함도 인정하였고 자신이 구약에 예언된 메시야라고 나타내 보이고 아브라함이 자신을 증거 해 줄 증인으로 내 세우고 있는 것이다. 이런 예수의 말씀에 유대인들은 네가 나이가 오십도 안 되었는데, 네가 아브라함을 보았느냐? 이 말의 뜻은 오십도 안된 네가 감히 수천 년 전에 살았던 우리 조상 아브라함과 함께 있을 수 있느냐, 네가 우리 조상 아브라함을 보았느냐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유대인들의 질문에 예수는 58절에 ” 예수께서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하시니“
이 말씀은 예수가 자신의 신적 정체성을 완전히 드러내는 장면입니다. 즉 자신은 시간의 제한을 받지 않는 영원한 존재라고 하는 것입니다. 너희 인간하고는 완전히 다른 영원하신 분임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는 존재이기 때문에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고 즉 생노병사의 한계에서 벗어 날 수 없습니다. 마치 시지푸스의 신화처럼 제우스의 분노를 산 시지푸스가 언덕 위 정상에 끊임없이 돌을 올려놓지만 계속해서 떨어져서 그 고통에서 벗어 날 수 없는 것처럼 인간은 죽음에서 벗어 날 수 없는 희망이 없는 존재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만이 인간을 이 고통과 죽음에서 해방시키시고 자유케 하실 분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자신은 한계를 가진 인간과는 질적으로 다른 영원무궁한 존재요, 무한자 라고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신은 유대인들이 거룩하고 존귀하신 분으로 부르는 하나님과 동일시함으로 유대인의 분노를 사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유대인은 격분하여 돌을 들어 치려하였습니다. 그것은 유대인에게 있어서 예수가 자신을 하나님과 같은 존재로 동일시함으로 신성모독을 하고 있었기에 예수를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예수는 이러한 분노를 피해 사람들 사이에 숨어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사순절을 맞이하여 예수님의 십자가와 수난을 묵상하는 절기를 지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왜 십자가에 못 박혔는지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왜 오셨는지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아야 합니다. 그 분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분으로 아브라함보다 먼저 계셨던 하나님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014년 3월 23일 청주벧엘성결교회 정영진목사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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