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자” /요7:1-24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게 하고 38년 된 병자를 고치시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서 오천 명을 먹이고도 12광주리가 남는 기적을 베푼 이후에 사람들은 예수를 구름 때처럼 따라 다녔지만, 예수가 자신들의 기대와는 다른 모습으로, 땅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하늘에 속한 생명의 떡에 관한 문제를 자신과 연결시키자 사람들은 하나 둘씩 그의 주변을 떠나가고 12제자만 남게 되었습니다.
뱃세다 광야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풀었을 때는 그렇게 많은 무리들이 따르고 자신을 임금 삼으려고 억지로 끌고 가려 했던 사람들이 어느 순간 돌변하여 자신을 떠나고 심지어는 자신이 신망하던 제자가 자신을 배반 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그의 마음은 상실감과 마음의 상처로 힘들었을 것입니다.
사탄은 이렇게 예수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그의 곁을 떠나자, 예수가 예전 같지 않음을 알고 이제 자신의 본성을 드러내기 시작하기 했습니다.
저는 본문 말씀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자” 이런 제목으로 하나님 말을 전하고자 합니다.
1) 유대인들이 죽이려 함
예수님께서 갈릴리 주변에서 38년 된 병자를 고치시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자 사람들이 예수의 주변에 많이 몰려들었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이 유대를 로마정부로부터 해방시킬 정치적 메시야로 생각했기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들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점점 예수의 주변으로부터 떠나가게 되자, 드디어 유대인들은 자신의 율법을 어기고 자신이 스스로 하나님이라고 말한 예수를 죽이기로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모르는 예수의 형제들은 예수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갈릴리 시골 촌구석에서 머무르지 말고 초막절이 다가 오자 예수가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고 정치 기사가 빠르게 확산 되는 유대에 올라가서 자신의 정치적 메시야 됨을 기적을 통해서 나타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습니다.
3절에, 그 형제들이 예수께 이르되 당신이 행하는 일을 제자들도 보게 여기를 떠나서 유대로 가소서
예수의 형제들이 있다고 하는 것은 성경의 증언이 있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를 성령으로 잉태하고 난 이후에 예수의 동생들이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13장 55-56절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모친은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 그 누이들은 다 우리와 함께 있지 아니하냐 그런즉 이 사람의 이 모든 것이 어디서 났느뇨 하고”
하지만 천주교에서는 마리아가 결혼하지 아니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예수의 형제들은 제일 처음에 예수를 정치적 메시야로서 등극하기를 바랬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갈릴리 시골에 있지 말고 사람들이 붐비는 유대 예루살렘에서 자신을 알리라고 말합니다. 그래야 자신들도 빨리 출세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4절에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나니 이 일을 행하려 하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 하니”
그러니까 당신이 정치적 메시야로 나타나기를 원한다면, 아니 큰 뜻을 가지고 있다면 그 당시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자신을 가장 잘 알릴 수 있는 중앙무대인 유대에 가라는 것입니다. 그곳도 초막절인 명절이 가장 적합한 때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지방에 있지 말고 중앙에 진출하는 것이 당신이 정치적 메시야로 나타날 수 있는 빠른 길이라고 말해 주는 것입니다. 요즈음 같으면 언론에 집중 스폿 라이트를 받을 수 있는 길이며 탑 기사로 일면을 장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정치적인 스타가 되는 길이라고 생각하고 예수를 초막절에 맞추어 올라가기를 원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는 자신의 때가 이때가 아니라고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예수가 자신의 정체성을 나타낼 때는 이 사건이 지난 후 6개월이 지나야 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은 아직 자신의 때가 아니라고 말씀하시고 먼저 형제들에게 올라 갈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는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은 당연하다. 왜냐하면 내가 세상에 대하여 악하다고 말했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오늘의 시점에서 이 말씀을 한국교회에 적용시켜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우리는 세상과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칭찬받고 그러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주님의 말씀을 되 집어보면 결코 교회는 세상과 양립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물론 우리가 도덕적이고 윤리적이고 양심적으로 행동한다면 세상이 교회에 돌을 던질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와 세상은 결코 같이 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하나님을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선과 악이 함께 할 수 없습니다.
교회는 세상에 대하여 항상 진리를 말해야 합니다. 이것은 잘못되었다고 말합니다. 저런 것은 성경에 위배된다고 말하고, 악이라고 규정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교회에 와서 자신들이 매 맞는 다고 생각하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습니다.
여기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왜 죽이려고 한 것입니까? 우리가 살펴보았지만 그 당시 기득권자인 제사장, 바리새인들에 대하여 호되게 꾸짖고 그들의 율법을 거스리는 행위, 즉 안식일에 병 고치신 사건에 대하여 그들은 자신들의 종교를 말살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예수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들에게 좋은 말만 했다면 예수는 절대로 유대인에게 죽임을 당하지 않았습니다. 예수가 유대인들에 의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 날도 세상은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을 향해서 미워하고 핍박을 가하면서 우리의 믿음을 주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고 있습니까? 그것은 내가 예수로 충만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려고 할 때 세상을 나를 더욱 핍박하고 미워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고 잘 견디어 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
여기서 예수님의 형제들과 예수님의 생각이 전혀 다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의 형제들은 지금 이야 말로 예수가 자신이 정치적 메시야로 등극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렇치 않습니까? 이천년 전에 무슨 언론이나 방송이 있었던 것이 아니고 사람들이 가장 붐비는 이 초막절 절기야 말로 절호의 기회 인 것입니다. 이 시기를 놓쳐서는 안된다고 생각했기에 예수의 형제들은 속히 예루살렘으로 초막절에 맞추어 올라가기를 원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예수님의 삶의 목적은 정치적 메시야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류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기 위한 가정 적합한 때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 때는 하나님께 속해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다. 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때”(kairos) 란 주님이 인류의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그 “때” (kairos) 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아직 자신의 때가 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8절에 “너희는 명절에 올라가라 내 때가 아직 차지 못하였으니 나는 이 명절에 아직 올라가지 아니하노라”
예수님의 생각과 그의 형제들의 시각이 완전히 달랐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의 형제들의 목적에서 보면, 지금이야 말로 예수가 자신을 수많은 대중 앞에서 드러낼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이지만, 주님은 아직 자신의 때가 충만하게 다가오지 않았다고 말씀합니다. 시간이 아직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는 온전히 하나님아버지의 뜻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지 못하고 성급한 나머지 내 때만을 고집하는 경우가 없지 않습니다. 내가 생각할 때는 충분한 시간이 되었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의 시각에서 보면 아직 충분한 시간이 되지 않은 것입니다. 물은 백도에서 끓고, 아이는 열 달이 지나야 해산 할 수 있듯이 봄이 되어야 꽃이 피고 가을이 되어야 열매를 얻을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지 못하고 성급하다가 일을 망치는 경우가 간혹 있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하나님이 약속하신 아들을 기다리지 못하고 참지 못하고 자신의 종 하갈을 취하여 난 이스마엘로 인해서 가정에 불화가 싹트고 오늘 날 까지 아랍국가와 유대나라가 자손대대로 원수로 살고 있지 않습니까?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지 못하고 인간이 참지 못한 결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급하게 내 생각대로 판단하지 말고 잠시 유보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기다릴 줄 아는 성숙한 신앙이 필요합니다.
본문으로 돌아와서 8,9절에 “나는 이 명절에 아직 올라가지 아니하노라. 이 말씀을 하시고 갈릴리에 머물러 계시니라” 예수님은 자신의 형제들을 먼저 보내고 자신은 함께 올라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10절에 보면, “그 형제들이 명절에 올라간 후에 자기도 올라가시되 나타내지 않고 은밀히 가시니라”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않으신 것이 아니고 그 뒤에 은밀히 올라가셨습니다. 왜 그랬을 까요? 당신은 자기의 때가 아니라고 하고 먼저 올라가라고 하면서 자신은 조금 후에 은밀하게 초막절에 올라가셨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유대인들이 자신을 죽이려고 했기 때문에 자신이 그의 형제들과 함께 올라가 그의 형제들이 의도대로 예루살렘의 많은 사람들 앞에서 슈퍼스타가 되었다면 하나님의 계획대로 진행되지 못하고 유대 지도자들인 제사장, 바리새인들에 의해서 죽임을 당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은 아직은 자신을 공개적으로 나타내어 하나님의 일을 망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아직은 자신을 커밍아웃 할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은밀하게 예루살렘에 올라갔습니다. 그 이유가 11절a 보면 “명절 중에 유대인들이 예수를 찾으면서 그가 어디 있느냐 하고” 유대인들이 왜 예수를 찾았나요? 그것은 바로 유대의 지도자들인 바리새인과 사 두개인 제사장들이 예수의 갈릴리에서의 예수의 인기와 동태를 아주 상세히 관찰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예수가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초막절에 나타나서 정치적인 선동을 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나타나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율법에 어긋나는 말이나 행동을 하면 예수를 잡아 죽이려고 했습니다.
19절에 “모세가 너희에게 율법을 주지 아니하였느냐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죽이려하느냐”
예수는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자들이 기다리고 있었기에 그들에게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서 은밀하게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습니다. 예수님의 지혜로은 행동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신자들도 예수님의 말씀처럼 이악한 세상에서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순결해야 합니다. 그래야 악을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공개적으로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않고 자신의 때를 알고 지혜롭게 행동하신 것입니다.
3) 나는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자이다.
예수의 소문이 이미 예루살렘에 많은 사람들에게 퍼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2-13절에. “예수에 대하여 무리 중에서 수군거림이 많아 어떤 사람은 좋은 사람 이라하며 어떤 사람은 아니라 무리를 미혹한다 하나, 그러나 유대인들을 두려워하므로 드러나게 그에 대하여 말하는 자가 없더라”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이 예수의 소문에 대하여 익히 들었던 것 같다. 하지만 반응은 극과 극이다. 한 부류는 좋은 사람이다. 라고 하고 다른 한 부류는 사람을 미혹한다고 하는 소문이 무성한 것처럼 보인다. 첫 번 째 반응은 아마도 일반 대중에서 나온 말인 듯하다. 왜냐하면 대중은 순진하기 때문이다. 정치적이 아니다. 그러니 자신들이 본대로 들은 대로 말하는 것이다. 거기다 더 붙이지도 빼지도 아니한다. 하지만 “미혹한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마도 유대교 지도자들, 즉 바리새인 사두개인 제사장이나 그들의 영향아래 있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한 사람을 두고 정 반대의 평가가 나온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예수님은 은밀하게 성전에 올라가셔서 성전 뜰에 모인 사람들에게 얼마나 능력 있는 말씀을 선포하셨는지 사람들의 반응은 충격적이었습니다. 15절b에 “이 사람은 글을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
예수님 당시 배움은 반드시 유명한 스승 아래서 배웠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가르쳤다는 스승은 없었습니다. 어떤 유명한 랍비나, 선생이 있어서 그들에게 배움이 있어야 했습니다. 이들의 반응을 아신 주님은 자신의 교훈은 내 것이 아니고 자신에게 가르쳐 주신 한 분이 계신데 그 분은 나를 보내신 분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종교지도자들인 너희 바리새인과 사두 개, 제사장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하는 사람이 아니냐 그렇다면 내가 하는 이 교훈이 내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임을 알지 못하느냐 말합니다.
그러니까, 언제나 종교적인 삶에 익숙해진 당신들이 하나님 가까이 있다 하면서도 내가 하는 이 교훈의 의미를 알지 못하느냐? 나는 내 자신의 영광을 구하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기 때문에 내 속에는 불의가 없고 내 교훈은 참되도다. 너희들이 율법을 지킨다고 하는데 그러면 율법을 지켜야 하는데 왜 지키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나를 죽이려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많은 종교지도자들인 바리새인과 제사장 사두개인들은 그 당시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기 보다 자신들의 기득권과 종교로부터 오는 이득을 보기 위하여 하나님의 율법을 이용하여 사람들을 억압하고 굴레 씌워 자유를 억압하였습니다.
그런 사람을 가리켜서 주님은 18a에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 영광만 구하는 자” 라고 말합니다. 예수님 당시에 종교지도자들은 하나님을 말하면서도 자기의 영광만을 구했습니다. 오늘 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종교의 이름으로 말하지만, 자신의 이익이나 자기편에서 말하지 하나님의 편에서 말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기득권 유지나 자기체면을 생각하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은 22-24절에 “모세가 너희에게 할례를 행했으니(그러나 할례는 모세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조상들에게서 난 것이라)그러므로 너희가 안식일에도 사람에게 할례를 행하느니라. 모세의 율법을 범하지 아니하려고 사람이 안식일에도 할례를 받는 일이 있거든 내가 안식일에 사람의 전신을 건전하게 한 것으로 너희가 내게 노여워하느냐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로 판단하라.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중요시 여기는 할례문제를 지적하십니다. 안식일에 아기가 태어나면 그 아이는 그 다음 안식일에 할례를 받아야 하는데 그러면 안식일을 범하는 것인데 할례의 경우는 안식일보다 더 우월하다 하여 ‘선한 일’로 규정하여 예외로 두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38년 된 환자를 고치신 사건을 가지고 자신들의 율법인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했다고 하여 예수님을 죽이려고 한 것입니다. 이 사건은 할례보다 훨씬 더 선한 일이고 그의 전신을 온전케 한 일이 아니야. 이러한 결과를 가져 온 것은 결국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뜻보다 자신의 뜻을 구했기 때문이며 하나님의 영광보다 자신의 영광을 구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예수님의 생각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내 생각, 의견, 내 뜻보다 중요한 것은 그 일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지혜롭게 처신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저와 여러분의 삶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2013년 12월1일 청주벧엘성결교회 정영진목사 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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