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은 부활하셨습니다. /마28:1-10
영국 옥스퍼드대학의 역사학 교수였던 [토머스 아널드] 박사는, 평생 과거의 역사를 연구하고 이에 대하여 기록한 문헌과 유물을 고증하여 사실 여부를 조사하였습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베푸신 역사 중에서 가장 분명한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가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사건이다. 인류역사 가운데 이것만큼 분명하고 완전한 사실은 보지 못했다. 모든 역사 가운데서 가장 확실한 표적은 바로 예수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신 사건이다.” 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기독교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은 기독교의 근간이요, 뿌리입니다. 기독교는 십자가와 부활신앙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부활이 없는 기독교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본문에 안식 후 첫날이 되는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에 찾아 갔을 때 돌문은 열려 있었고 무덤은 비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두려워서 떨고 있을 때 한 천사가 나타나서 말하기를 6절에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 나셨느니라 와서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이 시간 “주님은 부활하셨습니다” 이런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1. 부활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부활을 그리스어로 파스카(Pascha)라고 하는데 이 말은 히브리어의 유월절인 페샤(Pesā h)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영어로는 Easter 라고 하고 제 1회 니케아 회의에서 춘분이 지나고 최초의 만월 다음에 오는 첫째 일요일을 부활절로 지켜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보통 3월 22일부터 4월 26일까지 지켜집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부활하신 계절은 가지마다 나무마다 푸른 새싹이 돋아나는, 생명이 약동하는 봄철입니다. 이 부활절은 전 세계 곳곳에서 지구촌적인 축제로 보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영국에서는 우리와 똑 같이 달걀을 크게 만들어서 거리에다 전시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미국의 뉴욕에서는 부활절에 사람들이 화려한 옷을 입고 나와서 여러 종류의 모자를 쓰고 나와서 부활절 축제를 도시 곳곳에서 즐겁게 보내고 있습니다. 스페인에서는 부활절을 국가적 행사로서 성주간에 세비야 축제로 다양한 문화 행사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필리핀의 “마린두케섬 모리오네스” 축제에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을 그대로 재현하는 행사를 지금도 행해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이 부활절에 삶은 달걀을 먹고 나누어 줌으로써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고 교계에서는 부활절 연합예배로 예수 부활의 의미와 정신을 기리고 있습니다. 이러한 부활의 역사성을 증명하는 것이며 부활의 사건이 허구나 상상의 산물이 아닌 역사적 사실로 받아드리게 하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부활이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증거 하는 것 중에 빌라도의 보고서가 있습니다.
빌라도는 로마황제 [티베리우스 가이사] 치하에서 유대총독으로 임명된 로마기사 출신의 군인이었습니다. 그가 부임하여 거룩한 성에 예루살렘에 로마군을 주둔 시키면서 로마황제의 초상을 걸어놓고 경배하게 하고 이교도의 상징인 주화를 찍어내다가 유대인들의 반감을 사게 되어 민중봉기가 일어나던 때였습니다.
그런 때에 예수님을 재판하게 되었고 군중들이 들고 일어나 예수를 못 박으라고 소리칠 때 예수님에게 사형 받을 만한 죄가 없음을 알면서도 민란이 날것을 두려워하여 형 집행을 허가하고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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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라도는 예수님의 재판 사건에 대하여 자세한 보고서를 작성하여 로마의 황제에게 보냈는데 이 보고서가 현재 터키의 성 소피아 박물관에 소장되어있습니다.
“예수의 체포와 심문 및 처형에 관하여 가이사에게 보낸 빌라도의 보고서” 라고 제목이 붙어있는 이 문건은 예수님의 활동과 그의 죽음과 부활에 관한 대단히 중요한 증거를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 보고서는 이렇게 시작이 됩니다.
“각하께 문안드립니다. 제가 다스리는 지역에서 최근 수년 동안에 일어난 사건은 나라의 운명까지도 변하게 할지도 모르는 일이기에 각하께 소상히 알려드리고자 합니다” 라고 시작이 됩니다. 그중에 일부를 소개합니다
.
“원치 않았지만 폭동이 두려워서 희생양으로 예수라는 청년을 십자가에 처형했습니다. 그리고 다 끝난 줄 알았는데 더 큰 혼란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가 부활했기 때문입니다. 무덤은 비었고 그의 제자들은 용기를 내서 예수가 부활했다고 전파하였습니다. 예수의 생애는, 마치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듯이 모든 것이 그의 손에 있음을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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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물을 포도주로 만들 수 있었습니다. 그는 바다를 잠들게 하고 폭풍을 멈추게 하고, 고기를 잡아 그 입에서 은전을 얻어낼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의 (자신이 메시아라는) 주장이 사실일 수밖에 없다고 감히 말씀을 드립니다. 십자가 옆에서 말커스가 말한 것처럼 이 사람은 하나님에 아들이었다고 나는 말하고 싶습니다. 각하, 이것은 제가 할 수 있는 한 사실대로 기록한 것입니다. 저는 각하의 가장 충실한 신하입니다. 본디오 빌라도"
더 나아가 예수의 부활이 역사적 사실이었다고 하는 결정적 근거는 예수의 무덤이 빈 무덤이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 당시에 무덤이 빈 무덤이 아니었다면 오늘의 부활이라고 하는 단어는 찾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분명 부활이라고 하는 단어는 예수님의 부활사건에서 파생된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의 소식은 급속하게 펴져 나갔으며 바울은 고린도전서 15:5-9절에서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 나사 게바 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 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그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무엇보다도 성경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입니다. 예수 십자가의 죽음으로 공중분해 될 위기에 처해 있었던 초기 기독교는 이 부활의 사건에 힙 입어 예수부활을 증거 하는 선교공동체가 된 것입니다.
예수 부활사건은 우리가 먹고 살고 태어난 이 땅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실 (Fact) 이라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예수 부활의 기초위에 세워져 있음을 확실히 믿으시기 바랍니다.
2) 부활은 죽음이 절대로, 생명을 이길 수 없음을 증명한다.
20초반에 미국의 뉴욕의 가난한 화가촌인 그리니치 빌리지를 배경으로 한 세계적인 단편소설인 오 헨리(O Henry 1862-1910) 의 <마지막 잎새>를 아실 것입니다. 그곳에 화가 지망생인 수와 잔시가 살고 있다. 그러던 어느 겨울, 잔시는 당시 유행하던 폐렴에 걸린다 의사는 잔시가 살아날 가망성은 10퍼센트도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잔시는 창밖 담쟁이 넝쿨을 보면서 절망에 빠지게 된다. 잔시는 그 때부터 삶의 의욕을 상실한 채 창밖만 바라보며 지낸다. 창밖에는 담쟁이 넝쿨이 뻗어 있다. 잔시는 담쟁이 잎이 모두 떨어지면 자신도 죽고 말거라고 생각한다. 수는 아래층에 사는 베어만 노인을 찾아간다. 화가인 베어만은 40년 동안 그림을 그렸지만 광고용 그림 몇 점 말고 변변하게 그린 것이 없다. 밤사이 세찬 바람이 불어 담쟁이 넝쿨을 뒤흔든다. 그러나 웬일인지 담쟁이 잎 마지막 하나는 끝끝내 담쟁이 넝쿨에 붙어 있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도 잎은 떨어지지 않는다. 그 모습을 보면서 잔시는 희망을 찾는다. 그리하여 잔시는 점점 병세가 호전되지만 베어만 노인은 폐렴에 걸려 결국 숨을 거두게 된다. 수는 잔시에게 부음을 전하고, 그가 담장에 잎새를 그렸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 소설의 주제는 따뜻한 마음씨를 가진 가난한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생명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는 따뜻한 인간애를 그린 것으로써 희망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작품에서 잔시가 죽음이라는 절망 속에 빠졌을 때 그는 극도로 나약해지고 점점 생명이 시들어 갔지만 그가 자신도 저 마지막 잎새처럼 살 수 있다고 희망이 솟자 그의 꺼져가던 생명이 살아났다는 것입니다.
절망 속에서 죽어가던 잔시에게 새 희망을 주었던 마지막 잎새였습니다. 죽음앞에 두려워 떠는 인생들에게 마지막 잎새처럼 새 희망을 주신 분이 계십니다. 사망권세를 깨드리시고 부활 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그 분은 사망무덤 권세를 이기시고 3일 만에 부활하시어 우리에게 부활의 소망이 있음을 보여 주셨습니다. 성도여러분! 인류에게 최대의 적은 무엇이겠습니까? 가난입니까? 질병입니까? 전쟁입니까? 아닙니다. 죽음입니다. 죽음은 우리의 모든 희망을 다 빼앗아 가는 것입니다. 죽음은 인간의 모든 즐거움을 한꺼번에 앗아 갑니다. 그러니 장례식장에 가 보세요. 사람들이 슬픔과 절망에 빠져서 통곡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는 영원히 자신의 사랑하는 부모나 가족이나 형제나 친족이나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을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영웅호걸이나 위대한 사상가나 종교가나 예술가, 위대한 과학자도 예외 없이 이 죽음 앞에 무릎을 꿇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이집트의 파라오나 헬라문명을 만들었던 알렉산더 대왕이나, 로마의 황제 가이사, 몽골의 징키스칸이나. 소크라테스나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존 밀턴이나 루소, 베토벤이나 모차르트 석가모니나 마호멧이나 공자나 20C 위대한 과학자인 아인슈타인도 죽음 앞에 굴복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은 죄인이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로마서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다시 말하면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함으로 하나님의 법에 저촉되어 그들에게 죽음이 왔습니다. 인간은 왜 죽는가? 죄 값으로 죽는 것입니다. 이 땅에 태어난 모든 사람은 죽음을 피할 길이 없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죄의 짐을 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한 분 예수 그리스도 만은 죄가 없으십니다.
히4:14-15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인류 역사상 이 땅에 왔다가 가신 분들 가운데서 오직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만이 죄가 없으시기 때문에 사망권세를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요한복음11: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고전15:25-26 그가 모든 원수를 그 발아래에 둘 때까지 반드시 왕 노릇 하시리니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은 죽음이 절대로 생명을 이길 수 없음을 증명한 것입니다. 불의가 정의를 이길 수 없으며 악이 선을 이길 수 없음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예수 부활 사건은 생명의 주인이신 주님께서 사망권세를 이기신 사건입니다.
3) 그러므로 부활은 성도의 소망이다.
영국의 위대한 작가, 윌리엄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 ; 1564∼1616)는 “불행을 고치는 약이 있다면, 그것은 소망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오늘 인류에게 죽음의 불행을 고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은 예수 부활의 소망 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머리가 뛰어나고 최고의 학위와 엄청난 부를 가지고 있는 사람도 죽음 앞에서는 그 모든 것이 무용지물이 되는 것입니다.
오 헨리의 마지막 잎새의 주인공처럼 자신의 생명이 가물가물 해지는 순간 아무런 살 소망이 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말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고생하더니 살만 하니까 병들어 죽어간다고 말입니다. 그게 인생입니다. 예수 부활의 소망이 없으면 이 세상에서 수고하고 노력한 것이 헛수고에 불과 합니다. 그러기에 솔로몬은 그가 인생을 다 누리고 마지막에 뭐라고 말했습니까? 전도서11:7-8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영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전에 기억하라.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
부활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우리의 삶은 쉽게 무너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생에 바다에서 우리가 예측할 수 없는 크고 작은 암초를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죽음의 권세 앞에 섰을 때 엄청난 절망을 겪게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사람은 다릅니다. 예수님이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듯이 우리 역시 부활 할 것을 믿는 부활신앙을 가진 사람은 다릅니다. 부활신앙을 가진 사람은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어떤 육체적 질병이나 고통이 와도 이겨 낼 수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부활신앙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 3월 15일자 국민일보에 새물호스피스 선교회 회장인 원주희 목사님의 기사가 실렸습니다. 이 분은 중앙대 약대를 졸업하고 학군사관(ROTC)군대에 가서 생활하다가 운동하다 다리 고관절을 크게 다쳤다. 진통제를 먹어도 낫지 않았던 것이 부대에 찬양 선교하러 온 사람들의 찬양과 기도를 해주었는데 통증이 깨끗하게 사라지고 고침을 받은 체험을 하게 됩니다. 이때부터 신의 존재에 대해서 믿기 시작하였다. 전역 2년 만에 영등포에서 약국을 개업했는데 결혼 초기에 폐결핵에 걸려서 힘들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분이 교회를 다녀도 어려움이 끊이지 않으니까 반발심이 생겼어요. 그래 가지고 그 때부터 성경을 읽기 시작 했답니다. 순전히 반발심으로 말입니다. 성경을 읽고 신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을수록 성경의 매력에 빠졌습니다. 그리고 성경에서 죽음의 문제를 해결 받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죄 때문에 십자가에 죽으시고 우리에게 영생을 주셨다고 하는 해답을 얻은 것입니다. 이때부터 이 분이 자신의 약국에 오는 손님에게 복음을 전하고 급기야는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되어 현재는 말기 암 환자와 에이스 환자 등 샘물호스피스 선교회를 20년간 섬기고 있으면서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분이 매일 아침마다 11시에 예배를 드린다고 합니다. 이곳에 있다 가시는 분은 길어야 2달, 아니면 1달 안에 이 세상을 떠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분들의 상당한 사람들은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는데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죽음이 가까운 사람들이 자신의 식구들에게 “우리 천국에서 봅시다! 먼저 가서 기다릴 테니까” 많은 사람들이 부활의 신앙으로 죽음의 두려움을 극복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G. W. M'cree “꽃이 봄을 기다리듯, 별이 아침을 기다리듯, 노란 옥수수가 여름을 기다리듯, 나사로가 감미롭고 깊은 꿈에서 그를 깨울 예수님의 목소리를 기다리듯, 성스러운 성도의 죽음은 부활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라는 시를 남겼다.
고린도 후서 6:10절에서 바울은 부활을 믿는 성도들의 삶에 대하여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고전 15:5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예수님의 부활사건은 역사적 사실위에 서있습니다. 꾸며낸 이야기나 상상의 산물이 아닙니다. 그리고 결코 죽음이 생명이신 예수님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였습니다. 우리 성도들 역시 예수께 붙어 있는 한 부활이 있음을 확신하고 부활의 신앙과 소망 가운데서 죽어도 부활 할 것을 믿은 부활 신앙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013년 3월31일 청주벧엘성결교회 정영진목사 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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