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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포도주는 새부대에 /막2:18-22

gkffpffndi 2013. 3. 2. 10:13

새 포도주는 새부대에 /막2:18-22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사역을 시작하기 위하여 제일 먼저 하신 일은 제자 삼는 일이었습니다.그래서 시몬 베드로 그의 형제 안드레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을 부르시고 그들을 사람 낚는 어부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세관에 앉아 있는 세리 레위를 부르시고 그의 집에 들어가서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말하기를 어찌하여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라고 비난하자 주님은 건강한 자에는 의사가 쓸데 없는 것처럼 자신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그 당시 유대교의 종교적인 율법에 충실한 세례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금식하는 습관을 가지고 종교적인 의무를 다하는 반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는 것에 대한 지적에 대하여 주님은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였음을 말씀하시면서 새로운 시대에는 낡은 가치를 버려야 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이 시간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라는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1) 과거의 유대주의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율법주의, 형식주의)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은 과거의 종교인 ‘유대교’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유대교에 의하면 경건한 사람은 한 주에 두 번씩 금식하게 되어 있습니다. 보통은 월요일과 목요일에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아무리 안 해도 1년에 한 번, 대 속죄일에는 반드시 금식하라고 정해져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안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안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구약의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러한 질문에 대하여 예수님은 분명히 대답하셨습니다. 마가복음2:19절에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느니라”

 

이 말씀은 유대나라 혼인식은 일주일 간 계속된다고 합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혼인 하는 날은 즐거운 날입니다. 그러기에 일주일 동안을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성경 주석학자인 윌리엄 바클레이(William Barclay)는 “전반적으로 생활이 어려웠던 때인 만큼 결혼 잔치를 하는 주간은 한 사람에게 있어서 인생의 가장 기쁜 시간이었다.

 

…이러한 랍비들의 규정이 있다.

 

‘신랑을 수종 드는 모든 사람들에게 기쁨을 감소시킬 수 있을 만한 종교적 의무가 있을 경우에는 그것들을 준수할 필요가 없다’”라고 설명합니다. 즉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는 금식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즉 이 말의 의미는 예수님이 오심으로써 이 땅에 구원의 잔치가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이 땅에 계시는 동안에는 슬퍼하거나 금식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금식을 멀리하거나 금식의 무용론을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도 하나님의 사역을 시작하기 전에 40일 동안 금식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사무엘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미스바에 모여 불레 셋의 공격에 대하여 온 종일 금식하고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윗도 하나님께 금식하면서 기도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에스더 서 4장에 보면 유대민족이 하만의 간 궤에 의해서 멸살 당할 위기에 처해 있을 때 왕궁에 있던 에스더에 이 위기의 소식을 모르드개가 전합니다. 너는 지금 왕궁에 있다고 하여 네 생명이 보존 될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네가 왕후의 자리에 있는 것이 이때를 위함인 줄 누가 아느냐 하면서 왕후 에스더에게 이 소식을 전하자 에스더가 자신도 3일을 금식하고 기도할 터이니 유다 인들도 같이 금식하도록 하고 왕 앞에 죽으면 죽으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왕에게 나아가서 자신의 민족이 위태한 자리에 있음은 하만의 간 궤에 의한 것임을 알려 유다 민족을 위기에서 구원 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금식의 결과로 하나님께서 에스더와 유다백성들의 금식기도를 들으시고 하만의 간 궤로부터 구원하셨습니다.

 

이렇듯 금식기도는 위급할 때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하지만 이토록 좋은 금식도 바리새인이나 유대인들은 금식하는 것을 경건의 모양으로 삼았을 뿐 아니라 더 나아가 그것을 자랑하는 데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금식은 하나님께 하는 것인데 바리새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종교적인 외식 행위를 가지고 남을 비난하고 비판하는 자리에 서 있던 사람들이 바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마태복음 23장에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무섭게 책망하십니다. 무리들과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보니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구나 하시면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그들의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리고 그들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을 좋아하고 사람들에게는 랍비라 칭함 받기를 좋아하고 잔치의 윗자리나 회당의 높은 자리만을 탐하는 자라고 질책하셨습니다.

 

23에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찌니라.” 책망하셨습니다.

 

주님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신 이유는 그들이 새 시대가 왔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옛 것인 율법주의와 신앙의 형식주의인 낡은 가치에 사로 잡혀 남을 심판하고 정죄하는데 율법을 이용하여 새 시대, 즉 복음의 시대를 여는데 장애물이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율법주의와 형식주의만을 고집하므로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 걸림돌이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과거 유대교인 서기관과 바리새인처럼 남을 정죄하는 율법주의나 하나님 보다 사람을 더 의식하는 신앙의 형식에서 벗어나 자신의 마음을 찢는 진정한 금식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2)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20 절에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 이니라”

 

왜 금식하지 않느냐고 반문하는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주님은 지금은 금식할 때가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지금은 신랑과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슬픈 일이 있어도 혼인집에 와서 자신의 슬픔을 나타낼 수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주님은 금식 할 때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언제일 까? 신랑을 빼앗길 날이 있다는 것입니다. 신랑을 빼앗긴 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여기서 우리는 신랑이란 일반적인 의미의 신랑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은 자신을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의 신랑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이신랑이니까 당연히 우리 그리스도인들. 그리고 교회가 신부인 것입니다.

 

마태복음 25장1-13에 보면 열 처녀 비유가 나와 있습니다.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마중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롭다고 하셨는데 그 차이는 등만 준비한 사람은 미련한 사람이고 기름을 같이 준비한 사람은 슬기로운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생각보다 신랑이 더디 왔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소리가 났습니다. 보라 신랑이로다 마중 나오라 하였습니다. 그야말로 청천벽력과 같은 상황인 것입니다. 미련한 처녀들은 자신의 등을 보니 기름이 다 해 갑니다. 그래서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여분의 기름을 달라고 합니다. 하지만 슬기로운 처녀들이 그 중요한 시간에 자신의 기름을 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차라리 파는 사람들에게 가서 사오라고 말합니다. 미련한 처녀들이 기름을 사러 간 사이 신랑이 돌아 온 것입니다. 그리하여 준비한 자들은 혼인 잔치에 들어갔지만 미련한 처녀들은 준비하지 못하여 문이 닫힌 후에 돌아와서 문을 열어달라고 사정합니다.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주여 우리에게 열어주소서” 그런데 안에서 소리가 납니다. 12-13절에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는 알지 못하느니라.”

 

바로 이 비유에서 알 수 있듯이 신랑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신랑이라는 찬송가와 복음성가가 있지 않습니까?

 

찬송가 175장 1절에 “신랑 되신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 밝은 등불 들고 나갈 준비 됐느냐” 복음성가에 “주 나의 신랑 나주의 신부 그 사랑은 내 기쁨 주의 신랑 나의 주의 신부 그 사랑은 내 기쁨 그 사랑은 내 기쁨.”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신랑 이십니다 그런데 이 신랑이 빼앗길 날이 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그것은 예수님이 갈보리 산에 인류의 모든 죄 짐을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못 박힌 수난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죽음에 있을 때 그 때는 금식해야 되지 않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금식할 때가 되면 금식해야 한다는 것이지 시도 때도 없이 율법에 따라서 사람을 의식하며 하는 금식은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타 종교인들처럼 항상 금식하거나 고행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주님이 고난당하신 수난 주간에는 우리가 금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 주간 금식하는 사람도 있지만 한 주간 한 끼 식 하는 사람도 있고 성 금요일 하루만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아니 신앙심이 깊은 사람은 사순절 기간 동안 주님의 수난을 묵상하면서 지나다가 수난 주간에 금식하는 것을 봅니다.

 

사실 금식은 성숙한 신앙인의 종교행위입니다. 금식한다고 하는 것은 그만큼 절박한 문제가 있다는 것이고 먹는 것을 억제하고 기도하는 것은 그 만큼 주님을 사랑한다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바리새인처럼 일주일에 두 번 씩을 할 수 없어도 주님이 수난 당한 고난 주간에 금식하는 것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신학대학에 다닐 때는 신학생들은 수난 주간에 한 끼 금식한 식권을 드려서 식사를 굶는 신학생을 위하여 식권을 드리는 시간이기도 하였습니다. 요즈음 많은 교회에서는 사순절 기간 동안에 한 끼 식사 대금을 하나님께 드려 어려운 이웃이나 단체에 기증하여 그들의 고난에 동참하는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지금 우리는 주님이 수난 당하신 죽음을 묵상하는 수난 주간에 살고 있습니다. 나를 위하여 살과 피를 다 주신 주님의 고통과 수난을 묵상하면서 금식하면서 이번 고난 주간을 보낸다면 여러분에게는 잊을 수 없는 고난 주간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한 층 영적으로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될 것입니다.

 

3) 새 포도주가 새 부대가 필요하듯 새 시대는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이 필요합니다.

 

지금부터 2000여 년 전에 유대 나라에서 포도주나 물을 저장하는 용기로 가죽 부대를 사용하였습니다 대개는 염소 가죽으로 만든 가죽입니다. 그곳에 물이나 포도주를 저장하여 사용합니다. 예수님의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라고 하는 말씀은 이러한 문화적 배경으로 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새 포도주에는 반드시 새 부대를 사용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새 포도주에 헌 가죽부대를 사용하면 가죽 부대가 터지지 때문입니다. 그것은 헌 가죽부대는 오래 되어서 가죽 자체가 신축성이 떨어지는 것입니다. 새 포도주가 헌 가죽부대에 들어가면 발효가 되고 이 때 신축성이 떨어지는 헌 가죽부대는 견디지 못하고 터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새 포도주를 헌 가죽부대에 담는 것은 어리석은 행위인 것입니다. 이럴 경우에 새 포도주와 부대만 버리는 경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사람은 반드시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는 것입니다

 

그럼 여기서 예수님께서 왜 이런 말씀을 하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직도 유대인들, 즉 서기관들이나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한 채 율법주의와 형식주의인 유대주의에 빠져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새 시대가 오는 것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주님의 말씀은 지금은 이제 과거의 율법시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대가 열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새 포도주는 무엇이겠습니까? 예수의 정신, 복음입니다. 복음의 시대는 율법이 아닌, 남을 용서하는 것이요 사랑하는 것입니다. 온유와 겸손의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새 포도주가 가죽부대에 들어가면 발효되면서 가죽부대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헌 가죽 부대는 미처 새로운 환경에 적응할 준비가 되어 있지 못하여 부대가 터져 버리지만 새 가죽 부대는 부드러워서 새로운 환경에 잘 적응함으로써 자신의 본래 고유기능인 가죽 부대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복음이 들어가는 곳에는 개인이나 국가 할 것 없이 점진적인 개혁이나 변화가 반드시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의 복음이 개인에게 들어가면 그 사람은 부드러운 사람이 됩니다. 이해와 용서의 사람이 됩니다. 그리고 사랑과 겸손과 온유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으로 발효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밀가루가 발효가 되면 부드럽습니다. 그러니까 예수 제대로 믿는 사람이 가정에 있으면 가정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직장에 있으면 직장에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발효가 잘되어 남을 이롭게 하는 것입니다.

 

이 예수의 정신을 가진 사람들이 국가를 경영하고 정치를 해 보세요? 그 국가는 분명한 변화를 가져 오게 될 것입니다. 이번에 들어서는 박근혜 새 정부에 대한 기대가 많습니다. 이번에 박근혜 정부는 제 2의 한강의 경제부흥과 경제민주화와 문화융성을 이야기 새 정부가 출발한 지 며칠 되었습니다만 아직도 여야가 정부 조직법 개정안과 인사청문회도 아직 통과하지 못한 채 정부가 표류하고 있다는 기사가 보도되었습니다. 친 박 인사 중 측근 비서관 몇 사람이 비서실장과 수석 비서관이 하던 일을 처리한다는 기사가 보도 되어 국민의 한 사람으로 심히 우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행하게도 이번에 국무총리로 임명된 정홍원씨는 신실한 그리스도인으로 안수집사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저는 박근혜 정부가 신축성 있고 부드러운 정부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하여 국민에게 낮은 자세로 봉사정신으로 다가가야 국민의 신망을 얻고 성공하는 정부가 될 수 있습니다. 과거에 유신의 권위적이고 관료적인 지도력을 가지고는 국민적 요구가 봇물처럼 터지는 이 시대에 국민통합과 화합을 이룰 수 없습니다. 국가발전과 나라융성이라는 대 명제를 이루기 위해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겸손으로 나라를 봉사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누가 이 나라를 변화시킬 수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누가 나라를 부강하게 할 수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누가 병든 사회를 고칠 수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누가 우리 가정을 행복하게 할 수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누가 우리를 축복합니까? 예수 그리스도! 누가 우리를 구원할 수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누가 우리나라를 지켜 줄 수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에게는 새로운 시대가 열려 있습니다. 과거의 율법주의나 신앙의 형식주의에서 벗어나기를 바랍니다. 사람을 의식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신앙생활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수난을 묵상하는 사순절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새 포도주인 복음의 정신인 온유와 겸손과 사랑과 봉사의 정신으로 가정과 사회를 변화시키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13년 3월 3일 청주벧엘성결교회 정영진 목사 주일 설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