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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귀를 타신 예수 마 21:1-11

gkffpffndi 2012. 3. 31. 11:56

 

나귀를 타신 예수 마 21:1-11

 

오늘부터 한 주간 동안은 기독교 2000년 동안 지켜져 내려 왔던 예수님의 마지막 한 주간 수난주간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이 한 주간 동안 금식하고 기도하면서 경건하게 주님의 수난을 묵상하면서 보내게 됩니다. 이 수난 주간을 시작하는 주일을 종려주일이라고 합니다. 이 날은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날입니다.

 

주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수많은 군중들이 길거리 나와서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하고 환영 하였습니다.

 

주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사건은 주님께서 이 세상의 왕이심을 온 천하에 알리신 사건입니다. 종려주일은 "예수님! 당신은 나의 왕이십니다."하고 고백하는 시간입니다.

 

종려주일을 맞아 왜 예수님은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나타나셨는지 어떤 의미가 있는 지 이 시간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만왕의 왕이요, 만물의 주인이십니다.

 

유대인들은 자신의 민족을 로마정권에서 자유와 해방을 가져다 줄 정치적 메시야를 오래전부터 기다려 왔습니다. 수많은 예언자나 선지자가 나타났지만 그들의 기대와는 멀었습니다. 하지만 나사렛 출신인 예수가 나타나더니 갈릴리 지역을 중심으로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하고 고아와 과부 어린아이들을 가까이 할 뿐 아니라 각색 병든 자 중풍병자 앉은뱅이를 고치는 것은 물론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000명을 먹이고도 12광주리가 남는 기적을 행하자 그의 주변에는 항상 사람들이 몰려 떼를 이루었습니다. 이 정도 되면 요즈음 같으면 매스컴에 집중 보도가 되고 연일 탑뉴스로 올라와 있는 것입니다.

 

이제 사람들은 서서히 예수님을 구약에 예언된 메시야로 인식하기를 시작한 것입니다. 20장 29절 이하에 보면 예수님이 여리고에서 떠나 갈 때에 큰 무리가 따랐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맹인 두 사람이 길 가에 앉았다가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 함을 듣고 큰 소리고 예수님을 부릅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여기서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른 것은

 

예레미야 23장 5-6에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행사하며 세상에서 공평과 정의를 행할 것이며 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을 얻겠고 이스라엘은 평안히 거할 것이며 그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이 말씀을 기억한 것입니다.

 

즉 다윗의 후손을 통해서 이스라엘에게 다윗의 왕 시대에 가져왔던 풍요와 번영과 행복, 그리고 평안을 가져다 줄 메시야가 도래 할 것임을 그들은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대중적 지지를 받으면서 지금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그냥 걸어서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예루살렘 가까이 감람산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 두 제자를 한 마을에 보내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맞으편 마을에 가면 나귀와 나귀 새끼가 있을 것인데 풀어 가지고 오라 만약에 나귀주인이 왜 가지고 가느냐고 물으면 “ 주가 쓰시겠다” 하라고 말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십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이 명한대로 했더니 나귀 주인이 허락을 하였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주가 쓰시겠다” 이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 이 길래 남의 물건을 자기 물건 쓰듯이 쓸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나귀를 쓰시는 분은 “주”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자신을 “주”(큐리오스) 라는 칭호를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이 명칭은 당시 왕에게 사용할 수있는 용어입니다. 나귀의 주인은 나귀의 주인이 아니라 나귀를 만드신 만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 로마의 왕 가이사는 자신의 마음대로 하였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내 삶의 주인으로 인정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따라 자신의 신앙관이나 가치관에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왕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이 주인이 아니고 자신의 주인은 예수님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왕에 대한 충성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가지고 있는 귀한 것을 주님께 아낌없이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마리아는 값비싼 순전한 나드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통째로 부어드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적어도 예루살렘에 수많은 군중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리로다. 하면서 자신의 겉옷을 길바닥에 펴면서 주님이 타신 나귀가 그 위를 지나가시도록 퍼레이드를 펼친 것은 적어도 그들이 나사렛 예수를 다윗의 후손을 오실 메시야로 보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러한 고백이 중요합니다. “당신은 나의 왕이십니다.” “당신은 만왕의 왕이십니다.”

 

사도행전 17장 16절 이하에 보면 바울이 아테네에 가서 전도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그 도시가 우상이 가득 찬 것을 알고 격분하여 광장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토론을 벌이게 됩니다. 게 중에는 에피쿠로스학파와 스토아 철학자들도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바울은 그들에게 이렇게 복음을 전파합니다. 내가 보니 너희는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 내가 두루 다녀 보니 너희가 섬기는 제단에 알지 못하는 신에게 라는 글귀고 보았는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신에 대하여 너희에게 알려 주겠다. 라고 말하면서24- 25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우주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하늘과 땅의 주님이시므로 사람의 손으로 지은 신전에 거하지 않으십니다.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단순한 왕이 아니십니다. 그 분은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통치자 이십니다. 이 세상의 주권자 이십니다. 만왕의 왕이시며 이 우주를 다스리시는 분이십니다.

 

2) 겸손과 평화의 왕이십니다.

 

예수님 당시 예루살렘에는 사람들이 유월절 명절을 보내기 위해서 적어도 수많은 사람들이 모였을 것입니다. 예루살렘에는 적어도 20만이상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고 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었을 것입니다.

 

옛날에 전쟁에서 이겨서 귀환 하는 장군이나 왕은 백마를 타고 사람들의 열렬한 환호 속에서 들어오는 것을 압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유대인의 열렬한 환호와 기대와는 달리 조그만 나귀를 타고 들어오십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면서 진정한 왕이시라면 나귀가 아니라 백마를 타고 입성하셔야 했을 것입니다. 저들의 기대와는 달리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들어오신 것은 주님의 나라는 창과 검으로 오는 것이 아님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많은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로마 정권 아래서 고통 받는 자신의 나라와 민족을 정치적인 혁명이나 군사적인 무력을 통해서 구원과 해방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관심과 주님의 관심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이 세상 나라에 대한 자유와 해방인 반면, 주님은 이 세상이 아니라 그의 나라 즉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오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관심은 이 세상 국가가 아니라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전쟁의 상징인 말을 사용하지 않으시고 평화의 상징인 나귀를 타신 것입니다. 나귀가 왜 평화의 상징입니까? 언젠가 TV에 남아메리카인 고산지역에서 촬영 한 것을 다큐로 내 보내었는데 지금도 그 지역은 사람들의 교통수단으로 나귀를 타고 이동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약간 비스듬이 올라타고 먼 길을 이동하고 있었습니다. 사람만 타는 것이 아니고 작은 나귀에 짐도 실고 가는 것 이었습니다. 나귀는 보잘 것 없고 나약하지만 전쟁이 없는 평화 시에 사람들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이동수단이요 자산입니다.

 

이 날 예수님께서는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주전 520년경에, 스가랴는 9장 9절에 메시야의 예루살렘 입성에 대하여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주님이 만왕의 왕이시면서 약하고 보잘 것 없는 나귀를 타신 것은 예수님은 겸손하신 분이심을 보여 주십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그들의 구호가 무엇이었습니까? 호산나였습니다. 이 뜻은 “우리를 구원 하소서” 그들은 예수님을 자신의 민족과 국가를 로마의 정권으로부터 구원해 줄 정치적 메시야나 혁명가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들 에게 전쟁의 상징인 말을 타지 않으시고 겸손과 평화의 상징인 나귀를 타시므로서 자신을 드러내셨습니다. 장군이나 왕이 타는 말에 비하면 나귀는 보잘 것 없습니다. 키도 작습니다.

 

주님이 말을 타지 않으시고 나귀를 타신 것은 하늘나라가 무력으로 오는 것이 아니고 낮아짐과 겸손의 섬김을 통해서 오는 것임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주님이 인간의 고통과 저주와 죄 짐을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신대로 로마 병사들이 주님을 겟세마네 동산에 잡으로 왔을 때 베드로가 대 제사장 말고의 귀를 쳐 떨어뜨리니 마 26장 52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53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주님은 평화를 사랑하십니다. 주님은 하늘 권세를 가지시고 무력을 사용하실 수 있지만 사용하지 않으시고 이 땅에 평화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주님의 나라는 로마처럼 힘으로 지배하는 Pax 로마가 아니라 자신을 십자가에 희생함으로서 이 땅에 진정한 평화를 가져오셨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도 9장 6 절에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하였습니다.

 

주님은 종려주일에 사람들에게 당신께서 왕이심을 입증하셨습니다. 만왕의 왕이신 예수께서 겸손하게 나귀를 타고 나타나셨습니다. 주님이 다스리는 나라는 이사야 선지자가 말한 것처럼 사자들이 어린양과 뛰놀고 독사 굴에 어린아이 손을 넣고 장난치는 평화의 나라입니다. 나귀에 타신 예수님은 겸손과 평화의 왕입니다.

 

3) 성경을 이루기 위함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에 대하여 출생에 대하여 약 700년 전에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그는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것이며 7장 14절에는 동정녀에게서 태어나 실 것을 말씀하셨으며 그가 태어난 장소는 베들레헴이며 나사렛에서 유년시절을 보낼 것을 예언하였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이사야 53장에 보면 그는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고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무 것도 없다고 말씀합니다. 그는 우리의 인생들의 죄과 질고를 대신 지시고 하나님께 징벌을 당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는 신포도주를 마실 것이며 로마 병사들이 그 분의 옷을 제비 뽑을 것을 말씀하고 있으며 뼈가 꺾이지 아니 하고 보호 될 것이라고 시편 34:20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신 이유에 대하여도 마태는 4절에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5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탓도다 라는 스가랴서 9장 9절에 말씀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벳바게 건너편 마을에 가셔서 매인 나귀 새끼를 풀어 오라고 하신 이유에 대하여 바로 성경을 이루기 위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신 것은 인간을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나아가는 하나의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인간의 구원을 이루기 위하여 영원하신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 속에 이 땅에 오셨고 그것을 위해서 사셨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며 부활하셨고 승천하셨으며 다시 오실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3-4 3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 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4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 나사

 

성경이 말하고 자 하는 내용은 구약에 예언된 “고난의 종” 혹은 “하나님의 종” 이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 분은 “메시야“ 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사야 53장 4-6에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이 말씀은 인간을 죄와 사망과 저주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우리의 죄악을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 고난을 겪으시는 "고난의 종" 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 줍니다.

 

이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이후에 마지막 수난 주간의 행적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수난 주간은 사순절 기간의 마지막 주간으로써 종려주일로부터 금요일 까지를 이르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일요일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으며 월요일에는 소위 권위의 날로서 주님께서 잎만 무성한 나무를 저주하셨으며 성전에 들어가셔서 성전 안에서 매매 하는 자들을 내 쫓으셨으며 화요일에는 변론의 날로 유대 지도자들과 논쟁을 하시고 예루살렘 멸망에 대한 경고를 하셨으며, 수요일에는 예수를 죽이기 위해서 유대 지도자들이 음모를 꾸몄으며, 목요일에는 유월절 식사와 함께 최후의 만찬과 함께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셨으며 금요일에 배반당하시고 잡히시고 공회앞에서 빌라도의 심문을 받으시고 마지막 인류의 구속의 완성을 위해서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 희생제물이 되셔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금요일, 주님은 오전 9시부터 오후 3시 까지 무려 6시간 동안 자신의 모든 피와 땀과 물을 다 쏟으시고 엄청난 고통 속에서 마지막 하신 말씀 “다 이루었다” 하시고 운명하셨습니다. 주님의 십자가 고난은 더 이상 인간 구원을 위해서 다른 어떤 수양이나 명상, 고통이나 공로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성경에 기록되어진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구원을 받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 분이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그 분은 만왕의 왕이십니다. 만물의 주인이십니다. 겸손과 평화의 왕이십니다. 그리고 성경대로 오셨고 죽으셨으며 다시 사셨습니다. 또한 성경대로 이 땅에 심판주로 다시 오실 것입니다.

 

요한일서 5장 13절에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을 환호한 무리들처럼 이아침에 고백 하십시다 “예수님은 나의 왕이십니다.” “당신은 나의 모든 것 되십니다.” “당신은 이 세상을 구원할 만왕의 왕이시며 메시야 이십니다.”고백하므로 수난 주간에 예수님을 높이고 찬양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012년 4월 1일 청주벧엘성결교회 정영진목사설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