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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가모 교회 ( 계시록 2:12-17)

gkffpffndi 2011. 7. 9. 15:42

버가모 교회 ( 계시록 2:12-17)

 

요한 계시록은 사도요한이 밧모 섬에 유배되어 하나님께 기도하고 묵상하던 중 어느 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나타내시어 말씀하시기를 자신은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면서 큰 나팔소리와 함께 소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등 일곱 교회에 주님의 말씀을 전하도록 하였습니다. .

 

 알렉산더 대왕이 죽은 후 4개나라로 분할되었는데 후에 시리아를 중심한 셀루쿠스왕조와 이집트를 중심한 프톨레미왕조로 나뉘어졌습니다. 이때 시리아의 셀루쿠스 왕조는 수도를 버가모로 정하였습니다. 버가모 지역은 역사와 문화의 중심지로 버가모에는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다음으로 세계 2위의 도서관이 20만권의 책을 소장하고 있었습니다. 이 책은 모두가 양피지로 보관되었는데 이곳은 세계최초 양피지를 발명 한 곳이기도 합니다.

 

이 버가모 교회에 대해서 주님은 칭찬과 함께 책망을 하셨습니다. 오늘은 소아시아 일곱 교회 중 세 번 째 교회인 버가모 교회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1. 버가모 교회를 향한 칭찬

 

버가모 교회를 향한 주님의 칭찬은 13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본문 13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네가 어디에 사는지를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탄의 권좌가 있는 데라.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탄이 사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여기서 특별히 주목할 것은 사탄에 대한 언급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버가모라는 도시와 관련하여 사탄의 권좌가 있는 곳, 사탄이 사는 곳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 버가모라는 도시는 주전 197년부터 138년까지는 버가모 왕국 시대를 자랑했습니다. 로마의 신전을 세우고 로마의 신들인 이교의 신들을 그들이 동시에 숭배했으며 로마 황제 가이사를 신으로 숭배 했습니다.

 

이 도시는 지금의 터키에 있는 베르가마로 불리고 있습니다. 이 도시에 가면 도시의 어디에서든지 당시 로마 시대에 만들어진 350m 높이의 산 정상에 소위 아크로폴리스가 형성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산꼭대기에 소위 제우스의 신전을 비롯하여 디오니소스 신전, 아테나 신전 터가 유적으로 남아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특별히 아테나 신전 터는 동시에 로마 황제 숭배를 위한 아우구스투스 신전 터로 사용된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고 합니다.

 

거기에다가 BC 4세기 초부터 이 도시에는 의학의 신인 아스클레피우스를 숭배하는 신전과 병원이 세워지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질병의 치유를 위해 이 도시를 찾고 있었습니다. AD 129년에 유명한 의사인 갈렌(Gallen) 이라는 사람이 태어납니다. 그의 명성과 공헌으로 이곳에서는 현대적인 병원 도시가 형성됩니다. 그 당시에 심리치료, 음악치료, 목욕치료, 식이요법을 병행하는 치료들이 이 도시에서 이루어졌던 흔적들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런 의학적인 시술과 함께 이 도시에서는 치료의 신들의 도움을 받기 위해서 뱀의 형상을 가진 신을 숭배하는 사탄 숭배가 성행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뱀은 사탄의 상징입니다. 사탄은 뱀의 형상으로 인간을 타락케 했습니다. 뱀을 신으로 섬기는 문화는 고대 이집트에서부터 시작해서 인도 중국 한국 일본 등 용문화가 발달했습니다. 캄보디아에 가면 앙코르 와트라고 하는 관광지에 가면 뱀의 형상으로 건축되어 있습니다. 앙코르 와트에 가면 다리를 건너게 되는데 다리의 난간에 뱀의 등을 새겨 놓았습니다. 그러니까 뱀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보좌가 있는 곳이 에스쿨라피우스 신전인데 버가모에 뱀의 형상의 원조가 있습니다. 이곳에서부터 뱀의 문화 사탄의 문화가 전파된 것입니다. 이 지역에 대한 주님의 평가가 13절입니다. “네가 어디에 사는지를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탄의 권좌가 있는 데라.”

 

이러한 이교도적이고 사탄의 문화가 창궐한 곳에서 안디바는 예수 믿음을 지키다가 순교를 당했습니다. 교회사에 보면 야외에다 청동 가마솥을 걸어놓고 거기에 물을 가득 채우고 벌거벗겨 그 안에 집어넣고 밑에다 장작불을 때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삶아 죽였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끝까지 믿겠다고 하면 이렇게 죽을 것이니까 이것을 보고 너희 마음을 결정하라.” 그는 끝까지 믿음을 지켜내었기 때문에 주님께서 그의 이름을 기억하시고 칭찬하신 것입니다.

 

13절에서 "너희들은 내 이름을 굳게 잡았다. 그리고 이런 도시의 세속화된 우상숭배의 풍조에도 불구하고 너희들은 나를 믿는 믿음을 져버리지 않았다."

 

중국 가정교회의 산증인인 셰모산(謝模善·사진) 목사가 지난6월 30일 고향인 장쑤(江蘇)성 양저우(揚州)에서 93세의 나이로 하나님의 품에 안겼다. 1918년에 태어난 그는 14살 때 그가 취조 당하던 중 복음을 전한 이야기는 유명하다. "마오쩌둥(毛澤東) 주석이 천국에 갈 수 있느냐?"라는 난감한 질문에 그는 "천국문은 열려있습니다. 누구든지 들어가기 원하면 들어갈 수 있습니다… 지금은 은혜의 문이 열린 시대요, 구원받을 때라 모두 회개하고…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으면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라고 답했다. 이에 취조하던 요원이 그를 내동댕이쳤다. "네가 이 기회에 전도하느냐"며 윽박질렀다. 그는 침착하게 "내가 말하려고 했던 게 아니라 당신들이 말하라고 시킨 게 아닙니까. 그럼 내가 대답 안 해도 좋습니까"라고 맞받아쳤다. "내 몸은 이미 주께 바쳤으며 내 생명은 주의 제단에 올려져 산 제물이 되었기에 사나 죽으나 나는 주님의 것이라"고 밝혔다. 그의 손목엔 쇠갈고리가 꽂혔다.

 

그는 133일간 손목에 수갑을 찼다. 수갑이 너무 꽉 조여져 살갗을 뚫기까지 했다. 고문과 고통 속에서 자살까지 생각했던 그에게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고후 12:9)라는 음성이 들려왔다. 이 음성은 3번이나 이어졌다.

 

또한 지난 3일에는 이슬람 대법원이 이슬람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목사 유세프 나다르카니에게 사형선고를 무효화 했습니다. 그 이유는 잘못을 뉘우치고 개종을 포기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사람을 변호한 변호사에게는 이슬람에 반하는 행동과 선전을 했다하여 9년형과 자격정지 10년을 선고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번에 강화도 해병대 총기사건에 연루된 정 이병은 신학대학 재학생으로 독실한 기독교인 이었지만 교회 다닌다는 이유로 선임병이 병장은 하나님과 동급이다, 나에게 기도하라. 종교적인 모멸감과 성경을 태우려고 하였다고 합니다. 이외에도 성매매계에 가입하지 않는다고 하여 구타와 가혹행위를 하고 왕따를 시켜 분노로 변하게 되었습니다. 원래 그는 자신의 홈페이지에 사람은 사랑을 위해 살고 ,죽어야 한다고 말할 정도로 따뜻한 인간미를 가졌지만 잘못된 병영문화로 인해 분노로 표출된 것입니다. 이렇듯 지금 우리가 사는 21C에도 신실한 믿음을 지키려고 하면 엄청난 박해와 고난과 위험이 놓여 있습니다.

 

주님은 고난과 박해 속에서, 사탄의 문화가 창궐한 이교도 문화 속에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저버리지 않았다고 칭찬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도 교회에 대해서 세상이 점점 노골적으로 반기를 들고 적대적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에 믿음을 지켜나간다고 하는 것은 자신을 포기하지 않고서는 지켜내기 어려운 시대임을 알아야 합니다.

 

2. 버가모 교회를 향한 책망

 

그렇다면 버가모 교회를 향한 주님의 책망은 무엇입니까?

 

본문 14절과 15절에 보면 버가모 교회를 향한 주님의 책망을 두 가지로 요약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는 니골라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발람의 교훈을 따라가는 교인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1) 니골라당은 성적인 방종에 빠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아무렇게나 살아도 좋다는 도덕적 방종에 빠져있었던 무리들이 바로 니골라당이었습니다. 니골라당의 교훈을 한마디로 말하면 쾌락주의였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구원파 쯤 되지 않나 싶습니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죄를 용서해 주셨기 때문에 다시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니 사람이 살다보면 알고 지은 죄 모르고 지은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우리가 아침에 출근 할 때 깨끗한 와이샤츠 를 입고 나가서 하루 종일 근무하다가 저녁에 보면 와이샤츠 카라에 때가 묻는 것처럼 오염된 세상문화 속에 생활 하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생각과 행동이 거칠어지고 남에게 상처를 줄 수 있지 않습니까? 다시 말하면 죄에 오염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 잘못과 허물에 대하여 우리는 하나님께 회개하여야 하겠지요. 하지만 구원파는 한 번 하나님이 용서해 주셨기에 자신의 입술로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자신의 잘못과 허물에 대하여 무시하고 지나가다 보면 마치 자신은 의인인 것처럼 행동하기 쉽습니다. 그리고 죄에 대하여 대수롭지 않게 여기다 보면 죄에 대하여 무감각 해 지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면 쉽게 죄를 짓게 되고 자신의 지은 죄에 대하여 양심이 마비되어 쾌락주의에 빠지게 됩니다. 도덕적 불감증에 빠지는 것입니다.

 

2000년 전 이나 오늘날이나 사람의 본성은 똑 같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누가 보아도 향락주의 쾌락주의에 빠져있습니다. 얼마 전 스펀서 검사로 이름을 알렸던 모 검사가 재판 과정에서 무죄로 판명되었다고 하는 기사를 접했습니다. 국민의 일반적인 정서와 동떨어진 사법부의 판단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사회의 정의를 세우고 국민의 보편적 도덕기준에 맞쳐 판단해야 할 사법부가 그 정도의 향응이나 뇌물은 죄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면 이 대한민국의 앞날은 소망이 없습니다. 사법부뿐만 아니라, 얼마전에는 고위 공무원등의 룸싸롱 접대, 골프 접대, 명품접대 등 도덕적 해이가 도를 넘어 대한민국 전체에 뿌리 깊게 만연되어 있습니다. 고위 사회 지도층들의 도덕기준은 더 엄격히 다스려야 함에도 불구하고 솜방망이 처벌로 그치고 있으니 유전무죄라고 하는 말이 나오지 않습니까?

일반 서민이나 하위 공무원들은 식사 한끼 대접받았다고 엄청난 불이익을 주면서 정작 자신들은 법위에서 군림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경제 성장이 급속하게 발전하면서 긍정적인 면도 있지만 부정적인 영향도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옛날에는 힘들고 어려워도 어머니들이 가정을 지켜냈는데 요즈음 젊은 엄마들은 가정보다 자신의 인생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지 이혼하는 가정이 갈수록 늘어나 최근 대법원이 발간한 ‘2010사법연감’에 따르면, 하루 평균 855쌍이 결혼하고 341쌍이 이혼했다. 또 20년 이상 혼인관계를 유지하다 늦은 나이에 이혼을 감행하는 이른바 ‘황혼이혼’도 꾸준히 늘어나는 추세에 있습니다. 최근 고위 공무원의 상하이 일탈에서 보듯이 우리나라 전체가 향락주의와 쾌락주의에 빠져 있습니다. 소위 한류 바람이 일본 중국에 이어 최근에는 유럽과 미국에 까지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이러한 한류 바람이 경제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지만 신앙적으로 보면 결코 좋은 영향은 아닌 것입니다. 왜냐 하면 그들의 옷차림이나 춤, 가사 내용 등이 잘못된 문화를 양산하고 건전한 정신을 황 페화 시키기 때문입니다.

 

영국의 한 잡지기사를 보니 우리나라가 음란물에 가장 많은 돈을 쓰는 나라라고 한다. 또한 상담이나 치료가 필요한 도박 중독자의 비율이 2010년 기준으로 6.1%로 나타났다. 영국의 1.9%(2007년 기준), 캐나다의 1.7%(2005년 기준)에 비해 매우 높은 수준이다. 각종 사행산업이 국내 총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중(0.61%)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0.45%)에 비해 높다.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한다고 하신 말씀은 이러한 세속문화 속에 버가모 교회가 물들었다고 지적한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도 이러한 쾌락주의가 교회 안에 들어와 교회의 거룩성 을 훼손하고 세속화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2) 그러면 발람의 교훈은 무엇입니까? 구약성경 민수기에 보면 거짓 선지자 발람이 나옵니다. 그런데 발람은 당시의 모압왕 발락에게 돈으로 매수를 당해 자기 민족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주하는 역할을 감당하게 됩니다. 결국에 재물에 눈이 멀어 이스라엘 백성들을 우상숭배의 자리로, 그리고 음행의 자리로 잘못 인도합니다. 다시 말하면, 이 사람은 돈 때문에 선지자의 사명을 망각했습니다. 뇌물 때문에 눈이 어두워 백성을 잘못 인도했던 사람입니다.

 

발람의 교훈은 오늘날의 배금주의, 물질주의와 같은 것입니다. 혹은 오늘날의 맘몬주의를 대표하는 사상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지금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심지어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이 돈 때문에 예수님을 배신하고, 돈 때문에 신앙을 배신하고, 돈 때문에 양심을 배신하고, 돈 때문에 스스로의 자존심을 팽개치고, 돈 때문에 명예도 버리고, 돈 때문에 돈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런 지도자들 때문에, 이런 교회들 때문에, 이런 교인들 때문에 얼마나 교회의 권위가 흔들리고 있습니까?

 

최근에 대형교회에서 터지는 문제 가운데 하나가 재정 문제입니다. 목사가 너무 지나치게 자신을 높게 평가 한 나머지 세속주의 잣대로 자신은 이렇게 큰 교회를 목회하고 있으니 그만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지나치게 많은 사례비를 받아서 문제가 된 곳이 한 두 곳이 아닙니다. 또한 교회를 사유화 하여 자신이 은퇴하면서 자신의 아들을 세습하여 대를 물려주고 그것이 잘 안되면 돌려치기로 하여 자신의 아들의 자리를 위해서 소위 딜 (거래 )을 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저희 교단에서 일어난 일이 최근에 기사화 되었습니다. 저는 이 기사를 어제 읽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우리교단의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대교회의 장로께서 교단의 중진 목사님들로부터 선거 때만 되면 정기적으로 상상할 수 없는 정도의 돈을 받아 챙기고 교단의 중직을 마련해 주었다고 하는 기사를 읽고 이거 한국교회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목사 장로들이 교단을 좌지우지 한다고 생각하니 보통 심각한 사안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버가모 교회처럼 주님으로부터 칭찬과 함께 책망을 받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교회가 이렇게 급속하게 성장한 이유는 수많은 성도들의 순교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일제말기 순수 신앙적인 동기에서 신사참배를 거부했던 종교인들을 반체제 정치범으로 몰았으며 특히 한국전쟁 시기에 가장 많은 순교자가 나왔는데 그 이유는 “그 때 희생된 많은 목회자들은 ‘선한 목자는 자기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린다’는 성경 말씀에 충실하여 자기 자리를 지킨 ‘선한 목자’들이었다”고 평가했다. 목회자들이 교인들을 버려두고 자신의 안위를 위해 피난 가는 것을 거부했기에 희생이 컸다는 것이다. 우리교단의 순교자 전라남도 신안군 문준경 전도사님 같은 경우에 해당이 됩니다. 이러한 순교자들의 희생에 의해 한국교회는 세계사에 유례없는 성장을 거듭해 왔습니다. 하지만 최근에 대형교회를 중심으로 일어난 좋지 못한 소식들은 한국교회와 성도가 니골라당의 행위인 쾌락주의와 발람의 교훈인 황금만능주의와 물질주의인 세속화의 덫에 빠져 있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버가모 교회를 향하여 말씀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살펴보겠습니다. 본문 12절의 말씀을 다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버가모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여기서, 버가모 교회를 향하여 말씀하시는 분은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신 분"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좌우에 날선 검은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하거나, 아니면 하나님의 심판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순종하는 사람들에게는 구원이고 축복입니다. 그렇지만 이 말씀을 거절하는 사람들에게는 심판으로 다가온다는 의미입니다. 12절에 나타난 좌우에 날선 검이 16절에 다시 나타납니다. 본문 16절에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가서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만일 여러분과 제가 이런 세속적인 쾌락주의와 물질주의적인 맘몬주의를 극복할 수만 있다면 주님은 이런 약속을 하십니다. 본문 17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여기에 보면 주님께서는 두 가지를 약속하십니다. 하나는 감추어진 만나를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인생은 배고픔에 대해서 애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인가에 끊임없이 목말라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그것이 물질로 채워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니다. 내가 너희를 위해서 감추었던 하늘의 만나를 준비했다."

 

이 만나가 무엇입니까? 영생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약속은 흰 돌에 새로운 이름을 새겨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당시에는 연회석에 초대되었을 때, 그 초대권으로 '테세라'라고 불리는 흰 돌을 주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흰 돌을 가진 사람만이 연회에 참석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본문에서 흰 돌을 주시겠다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였을 때 천국의 잔치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를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그런데 본문에 보면, 이 흰 돌 위에는 새 이름이 새겨져 있고 그것은 받는 사람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다고 말씀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신앙의 참된 기쁨은 그것을 체험한 사람만이 그 맛을 깨닫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버가모 교회에게 주님은 칭찬과 함께 책망도 주셨습니다. 이교도의 풍습과 사탄의 문화 속에서도 믿음을 지킨 신실한 안디바와 같은 신자도 있었던 반면 쾌락주의와 물질주의에 매몰되 신앙을 저버린 신자도 있었음을 경고 합니다. 이러한 세속주의에 맞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지킨 자들에게 주님은 영생의 만나와 영원한 천국을 주실 것입니다. 2011년 7월 10일 벧엘성결교회 주일설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