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셉의 환난 (창40:1-15)
우리는 지난 시간 동안 요셉이 형들의 미움을 받아 미디안 상인에게 은20에 팔려 애굽의 바로왕의 경호실장의 보디발의 집에 팔려가 거기서 성실하고 정직하게 행하고 하나님 앞에서 그가 살아 요셉으로 말미암아 그 집이 복을 받고 그의 재산이 늘어나게 되자, 보디발은 요셉을 신임하여 자기 집의 가정총무로 세워 재산까지 관리하는데 이르게 되었습니다. 요셉은 노예에서 최고의 자리까지 오르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자리에 올라 잘나가는 청년이 되었는데 그 때 요셉에게 유혹이 온 것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보디발의 아내가 젊은 청년 요셉을 유혹하여 그를 자신의 침상에 끌어들여 간통을 하기 직전 요셉은 자기의 옷을 내 던지고 그 자리를 피해 왔습니다만, 보디발의 아내는 요셉을 모함하여 감옥에 쳐 넣고 말았습니다.
참으로 요셉에게는 억울하고 답답하고 낙심이 될 만한 일이었습니다. 이제 감옥에 갇힌 요셉에게 있어서 앞길이 보이지가 않습니다. 캄캄합니다. 그 당시 요셉이 갇힌 감옥은 보통의 감옥이 아니라 왕의 죄수들이 갇히는 정치 수용수 입니다. 그러니까 왕에게 반역하는 자들이나 정치적으로 반대에 있는 사람들을 가두는 곳이기 때문에 그 감옥에서 나온다고 하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며, 죽어서나 나오는 곳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았기에 조금도 두려워하거나 무서워하지 않고 다니엘처럼 전에 자신이 행하던 것처럼 그곳에서도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 이후에 애굽 왕에게 범죄 한 술 맡은 자와 떡 굽은 자가 요셉의 감옥에 들어왔습니다. 고대에 왕의 음식을 시중드는 이 사람들은 대단한 고위직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옛날에는 왕에게 반역하는 무리들이 왕이 먹는 음식에 독을 넣어 죽일 수 있기에 왕의 지근거리에서 보좌하는 술 맡은 자와 떡 맡은 자는 대단한 권력을 가진 자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무슨 일인지 모르나 왕에게 범죄하여 요셉이 있는 감옥에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이 또한 하나님의 섭리인 것입니다. 이 감옥에 들어 온 자는 살아서는 나가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니 이들이 얼마나 두렵고 무서웠겠습니까?
보디발은 요셉에게 이들을 시중들도록 하였습니다. 아마도 보디발은 이 사람들과 가까이 지낸 사람이었기에 그들을 동정하여 요셉에게 시중들도록 하였던 것입니다. 요셉은 감옥에서도 그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였기에 아무소리도 하지 않고 불평하지도 않고 그들을 잘 섬겼습니다. 4절에 “친위대장이 요셉에게 그들을 수종들게 하매 요셉이 그들을 섬겼더라. 그들이 갇힌지 여러 날이라”
요셉은 감옥에서도 같은 죄수인데도 불평하지 않고 그들을 잘 섬겼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내가 이 땅에 온 것은 섬기려 하고 내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옛날에는 지도자의 리더쉽 가운데서 ‘카리스마 리더쉽’을 중요하게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이런 리더쉽은 독재자의 리더쉽하고 잘 맞아 떨어집니다. 하지만 최근에 와서는 ‘서번트리더쉽’ , 즉 ‘종의 리더쉽’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내가 어떤 자리에 있다고 하는 것은 그 자리에서 구성원들의 불편과 아픔을 이해하고 잘 섬기라는 것으로 이해 할 때 구성원으로부터 존경받고 사랑받고 본인도
자신의 사명을 잘 수행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치않고 대통령이든 대학총장이든 회사 CEO든 국회의원이든 재판을 하는 판사든 수사를 하는 검찰총장이라 할지라도 이 사실을 망각하고 다스리려는 순간 그 때부터 나락의 길로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처럼 ‘섬기는 리더쉽’을 가지고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섬기는데 내가 가지고 있는 지식과 역량을 동원하여 내가 속한 직장이나 가정, 교회나 국가에서 최대한 섬기고 봉사하는 삶을 살아갈 때 그 사람은 보람 있고 위대한 삶을 살아 갈 수가 있습니다. 요셉은 바로 이러한 삶이 몸에 배여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요셉은 감옥 에서도 예수님처럼 섬기는 삶을 살았기에 거기서도 인정을 받아 간수장이 요셉에게 옥중 죄수를 다 맡기고 그 제반 사무를 요셉이 처리하게 하였습니다. 감옥에서도 요셉의 성실함이 빛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감옥에서도 요셉과 함께 하셨습니다. 39장23절에 “간수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살펴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 요셉은 감옥에서도 이방인 간수장에게 인정받았습니다. 그것은 요셉이 성실하고 정직하였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불신자들 가운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많은 불신자들이 우리들의 행함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 붓물처럼 어느 한 사건이 터지면 그것을 꼬투리로 해서 비난의 화살을 쏘아 댑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서 비난의 대상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처럼 똑 같은 이기적인 사고방식과 행동양식을 가지고는 사람들의 비난을 피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성경의 말씀처럼 ‘세상의 빛’, ‘세상의 소금’이 되기 위해서 자신을 자신이 속한 회사나 공동체를 위해서 희생하고 섬기는 정신을 가지고 이웃을 섬길 때 칭찬 받게 되고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요셉으로 돌아와서 보면 요셉은 감옥에 들어온 술 맡은 자와 떡 맡은 자를 잘 섬겼습니다. 여러분도 여러분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잘 섬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들이 갇힌 지 여러 날이 지나서 요셉이 술 맡은 자와 떡 맡은 자의 얼굴빛이 수심이 가득한 것을 보았습니다. 6절에 “아침에 요셉이 들어가 보니 그들에게 근심의 빛이 있는지라” 요셉은 이웃에 대하여 무관심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요셉은 단번에 그들이 어떤 근심을 가지고 있는 것을 그들이 말하지 아니 하였어도 얼굴빛을 보고 알았습니다. 요셉은 이웃의 고통이나 아픔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 감옥에는 여러 사람들이 더 있었을 것입니다. 모두가 다 자신들이 감옥에 들어와 있는 처지여서 자신의 문제도 벅차고 힘들기 때문에 남의 일에 관심을 가지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셉은 술 맡은 자와 떡 맡은 자가 근심어린 얼굴을 보고 이렇게 말합니다. 7절에 “요셉이 그 주인의 집에 자기와 함께 갇힌 바로의 신하들에게 묻되 어찌하여 오늘 당신들의 얼굴에 근심의 빛이 있나이까”
요셉은 이웃에 대하여 무관심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이웃의 고통과 슬픔을 느낄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긍휼’이 있는 마음을 가진 자였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긍휼’의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뱃세다 광야에서 길 잃은 양처럼 배고파하고 흩어져 있는 사람들을 향해서 긍휼이 여기셨다고 하셨습니다. 누가복음10장25-37이하에 보면 예수님의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나와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어떤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기 위하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라고 물을 때 예수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하면서 선한 사마리아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거기서 보면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 가다가 강도를 만나 거반 죽게 되어 내 팽개쳤는데 그 때 제사장이 지나갔습니다. 그 제사장은 피하여 가고, 레위인도 마침 그 길로 지나갔는데 마찬가지로 피하여 갔습니다. 그런데 사마리아인은 여행 중 바쁜 중인데도 불구하고 자신의 처지 입장만을 생각하지 않고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습니다. 그 이튿날 그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주며 치료비가 더 들면 자신이 돌아오는 길에 대신 갚겠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말씀하시면서 너도 이와 같이 행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긍휼’은 요셉의 성품이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와 같은 남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 남의 고통이나 아픔을 공감하고 도와주려는 선한 사마리아 같은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남의 고통이나 아픔을 듣고도 무관심하고 지나치는 사람이 되어서는 하나님을 감동시킬 수가 없습니다.
본문으로 돌아와서 요셉이 근심어린 얼굴을 가진 두 사람에게 말하자 그들이 자신들이 지난밤에 있었던 일을 소상히 밝혔습니다. 그것은 두 사람 지난밤에 꿈을 동시에 꾸었습니다. 먼저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에게 이야기 합니다. “내가 꿈에 보니 내 앞에 포도나무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포도나무에 세 가지가 있었는데 싹이 나고 꽃이 피더니 포도송이가 익어서 그것을 따서 내 손에 있는 포도주 잔에 그 즙을 따서 바로에게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요셉이 꿈 해석을 이렇게 했습니다. 세 가지는 사흘입니다. 당신은 사흘 후에 복직이 되어 예전처럼 바로의 술 맡은 자가 되어 바로의 잔에 술을 드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후에 복직이 되면 나를 기억하여 내게 은혜를 베풀어 나를 바로에게 말해서 이 감옥에서 나를 나가게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나는 히브리 청년으로 여기서도 옥에 갇힐 일은 행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이 말을 듣고 있던 떡 맡은 관원장이 자기의 꿈이야기를 하면서 해석을 요구하였습니다. 떡 맡은 관원장이 말합니다. 나도 꿈에 흰떡 세 광주리가 내 머리에 있었습니다. 맨 윗 광주리에는 바로를 위하여 만든 각종 구운 음식이 있었는데 새들이 와서 그 광주리에 있는 것을 먹었습니다. 요셉이 대답하기를 세 광주리는 앞으로 사흘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사흘안에 바로가 당신의 머리를 나무에 달아 새들이 당신의 고기를 뜯어 먹게 될 것입니다. 사흘 후에 요셉의 말대로 술 맡은 관원장은 복직이 되고 떡 맡은 관원장은 매달려 죽게 되었으니 요셉의 해석대로 되어 진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어떻게 해서 요셉이 이 두 사람, 술 맡은 관원장과 떡 맡은 관원장의 꿈의 해석을 정확히 하였는 가입니다. 그것은 본문에서 자세히 나와 있지는 않지만 우리는 다니엘에서 다니엘이 느부갓네살왕의 꿈의 해석을 하는데서 알 수가 있습니다. 다니엘은 왕의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줄을 알고도 하루에 세 번씩 전에 행하던 대로 예루살렘을 향하여 하루에 세 번 씩 기도하였습니다. 다니엘과 마찬 가지로 요셉도 하나님과 교통하는 자였습니다. 경건한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정한 시간에 하나님께 감옥에서도 술맡은 자와 떡 맡은 자를 위해서 기도하였기에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꿈을 해석 할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8절에 보면 요셉은 근심어린 얼굴을 가진 두 사람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꿈을 꾸었으나 이를 해석할 자가 없도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아니하나이까 청하건대 내게 이르소서”
근심과 걱정에 쌓인 두 사람에게 요셉은 해석은 하나님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요셉이 야웨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섭리, 신뢰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요셉은 감옥에서 자신이 이렇게 고난을 받는 것도 하나님의 섭리라고 생각했음이 틀림이 없습니다. 자신이 형들의 미움을 받아서 구덩이에 던져지고 그리고 거기서 나와 미디안 상인에 은 20에 팔려 보디발의 가정 총무에 오르기 까지 그리고 보디발의 아내의 모함을 받아 지금 이 순간 왕의 감옥에 있는 것 모두가 하나님의 섭리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요셉은 자신에게 꿈으로 말씀하신대로 반드시 자신의 꿈이 이루어질 것을 확신하였고 절대로 낙심하지 않고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요셉에게 있어서 이 모든 과정은 연단과 훈련의 과정이요,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한 하나의 과정임을 알았습니다. 무엇보다도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은 애굽의 바로가 아니라, 이 세상을 만드시고 당신의 섭리대로 이 세상을 이끄시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있음을 분명히 알았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하나님이 이 세상을 지배하는 절대 주권자임을 분명히 알았기에 술 맡은 자와 떡 맡은 자의 꿈 해석에 있어서 꿈의 해석은 ‘하나님’께 있다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이 세상의 주인은 어떤 권력자가 아닙니다. 이 세상의 주인은 절대자 하나님이십니다. 이 세상은 사탄이 지배하는 것 같아도 하나님의 주권아래 있음을 믿고 믿음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요셉과 관련하여 일어난 사건들은 결코 우연히 아니라 야곱의 가족을 기근으로부터 구원하고 그들로 하여금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시고 요셉을 애굽의 총리로 삼아 이스라엘을 기근에서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결국 이는 하나님의 백성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나 세상의 모든 나라와 역사까지도 하나님의 섭리 아래 있음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자신이 인생의 주인이 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세상의 통치자들도 자신의 권력으로 나라와 역사를 이루어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는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데서 무지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자신이 역사의 주관자로 생각하는 교만한 마음을 가진 느브갓네살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여 자기 아들에게 살해당했습니다. 다윗도 교만하여 인구조사 하다가 사흘 만에 7만 명이 전염병으로 죽어 나갔습니다. 지금 우환 폐렴으로 중국의 시진 핑이나 북한 김정은이나 아베나 문재인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자신들이 주권자이면 해결해야지요. 속수무책입니다. 자신들이 이 세상의 주권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진행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연의 재해 앞에 겸손하게 회개해야 합니다. 역사의 주관자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시며 인간은 단지 도구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대상은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10:28절 이하에 보면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데 그것도 하늘 아버지께서 허락하시지 않으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에게는 머리털 까지 다 세신 바 되었다고 말씀하시면서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다고 말씀하시고 몸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지만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 앞에서 예수님도 부인할 것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잠언16장9절에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진정한 역사의 주인은 하나님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분 앞에서 요셉처럼 겸손하게 이웃을 섬기는 삶을 살아가십시다. 이웃의 고통을 나의 아픔으로 알고 긍휼이 여기는 마음을 가집시다. 그리고 이세상의 절대 주권자이신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 분 말씀에 순종하여 복받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새믿음교회 정영진목사 3월 8일 주일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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