펠라기우스와 어거스틴의 죄관 은총 관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Augustine and Pelagius)
어거스틴의 죄론과 은혜론은 어느 정도 그의 영적 고통을 통해서 마침내 복음의 충분한 광명속에 들어가게 된 심각한 종교적 체험에 의하여 형성되었다. 그는 「참회론」에서 자기는 도덕과 종교의 길에서 멀리 떠나 방화하였고 마니교(Manicgaeism)에서 그 피난처를 찾으려 하다가 그 함정에 빠졌으나 결국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오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주후 387년 세례를 받고395년에 히포의 감독이 되었다. 펠라기우스는 어거스틴과 정반대의 형의 인물이었다. 펠라기우스는 신비주의적 경향도 열렬한 대망도 갖지 않은 아주 조용한 사람이었으며, 이런 점에서 그의 사상이나 행동양식도 어거스틴과는 전적으로 달랐다. 펠라기우스는 영국의 수도사로서 엄격한 생활을 하였으며, 흠없는 성격과 또 침착한 기질의 사람이었다.
2. 펠라기우스의 원죄
펠라기우스와 어거스틴의 논쟁중 가장 중요한 문제는 자유의지(Free Will)와 원죄(Original sin)에 관한 것이다. 펠라기우스에 의하면, 하나님이 창조하신 아담은 적극적인 성(聖)을 받지 못하였다. 아담의 원상태는 거룩하지도 않고 죄성을 갖지도 않았으며, 또한 선과 악을 행할 수 있는 중간상태였다. 그는 자유의지와 미(未)정적 의지를 가졌는데 이 양자중 어는 것이라도 편의한대로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었다. 그는 자기가 원하는 대로 죄를 범할 수도 있고 범치 않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죽음 문제만은 임의로 선택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이미 숙명적으로 죽음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도록 창조 되었기 때문이다. 그의 범죄 타락은 자기 자신만을 해하였을 뿐 선을 행할 수 있는 인간본성에는 아무런 상처를 입히지 않았다. 그러므로 죄악적 성질이나 죄책에 대한 유산 같은 것은 더욱 있을 수 없다. 인간은 지금도 아담의 타락 이전과 같은 상태로 출생한다. 사람에게는 죄책과 오염도 있을 수 없다. 죄는 나쁜 영향이나 잘못된 욕망을 갖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의지의 분리된 행위일 뿐이다. 죄는 어떤 경우든지 인간 스스로의 선택에서 이루어진다. 죄가 보편적이라고 하면(펠라기우스는 죄의 보편성을 인정했음) 그것은 다만 교육과 악한 전례, 또 죄에 젖어든 오랫 동안의 습관 때문이다. (149-152)
3.펠라기우스의 은혜론
인간이 악에서 선으로 돌아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것은 아니다. 물론 그 은혜의 사역이 인간 생활에 유익을 주며 악을 극복하는데 도움을 주는 것 만은 사실이다. 하지만 펠라기우스가 말하는 은혜는 성령의 역사로서 인간의 의지를 바꾸어 선을 행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이성적 성질이라든지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 또는 예수그리스도의 모범과 같은 외적 은사와 자연적 은혜로서 구성되어 있는 것을 의미한다.
4. 어거스틴의 죄관과 은혜론
1) 그의 원죄
어거스틴은 죄 때문에 인간의 영혼이 하나님에게서 떨어졌는데 이 죄는 필연적으로 악을 수반하고 있다고 믿었다. 죄가 세상에 들어옴으로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참 선을 행할 수도 없고 자신의 숙명을 깨달을 수 없으며, 더 무거운 죄의 명에 속으로 깊이 빠져 들어가게 되었다. 왜냐하면 사실상 인간은 계속하여 하나님을 찾아 탄식하기 때문이다. 어거스틴은 죄를 적극적인 어떤 것으로 보지 않고 소극적이며 뭔가 결핍(negration or privation)된 것으로 보았다. 죄는 인간에게 주어진 실질적인 악이 아니라, 선의 결핍이다. 어거스틴은 죄의 근본원리를 하나님을 사랑하는 대신에 자기를 사랑하는데 있다고 보았다. 인간 배반에서 오는 일반적 결과는 음(淫)욕과, 이성의 법칙에 반대되는 과도한 육적욕망이다. 죄와 그 죄가 가져오는 무절제가 인간을 죽음으로 몰아간다. 인간은 불멸로 창조되었는데 이것은 인간이 죽음에 대해 무감각하다는 의미가 아니고, 육체적인 불멸성의 가능성을 말하는 것이다. 만일 인간이 순종하였다면 그는 영원히 거룩함을 입었을 것이다. 그는 범죄하거나 사망하지도 않을 능력으로부터 완전히 범죄하지도 죽지도 않는 상태로 들어갔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범죄 하였고 따라서 범죄 하여 죽을 수 밖에 없는 상태로 들어갔다. 아담은 그의 후손과의 유기적 관계에서 죄와 부패성을 가진 타락한 그의 본성을 후손들에게 전달하였다. 어거스틴은 인류의 단일성을 언약논적으로 생각지 않고 실재론적으로 생각하였다. 온 인류는 최초인 안에서 배종되었다. 그러므로그 인간성의 죄는 그 인간성의 개체화한 전체의 죄였다. 죄의 결과로 인간은 전적으로 부패하여 어떤 영적 선도 행할 수 없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의지가 아직도 일정한 본래적 자유를 가지고 있음을 부인하지 않았다. 의지는 아직도 세속적인 선을 행할 수 있으며 심지어 이것은 저급한 표준에서는 칭찬받을 만하다. 또 어거스틴은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떠나서 죄책의 무거운 짐을 지고 악의 권세에 붙잡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바랄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가 아는 대로 하나님 보시기에 선이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동기에서 나온 것뿐이라고 하였다.
2)그의 은혜론
인간의 의지는 갱신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이것은 처음부처 마지막 까지 독립적으로 하나님의 사역 즉 신적 은혜의 사역에 의해서 된다. 어거스틴이 인간의 갱신을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만 이루어 진다고 하여, “불가항력적 은혜”라는 말을 썼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인간의 자유의지를 무시하고 강제성을 띠었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발적으로 선을 택할 수 있도록 그 의지를 변화시킨다는 의미이다. 인간의 의지는 갱신됨으로써 그 의지를 변화시킨다는 의미이다. 인간의 의지는 갱신됨으로써 참된 자유에로 회복되게 된다. 하나님은 자신의 자유선택의 의지를 가진 인간이 선으로 돌아와서 거룩하게 될 수 있도록 역사하실 수 있고 또 실제로 그렇게 하였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모든 선의 근원이 되신다. 이와같이 어거스틴의 중생교리는 전적으로 독력적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성령의 역사는 결함을 보충하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인간의 내면적 성향의 완전갱신을 위하여 필요하다. 그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율법에 대하여 영적으로 순응하게 하는 것이다.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은혜의 사역을 3가지로 구분하다. 첫 번 째, 준비적 은혜로 성령은 죄와 죄책의 의식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 율법을 사용하시고, 두 번 째, 공작적 은혜로 성령은 복음을 사용하여 신앙과 또 의롭게 하며 하나님과 화평케 하는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을 낳는다. 그리고 마지막 은혜인 협력적 은혜로 인간의 성화된 의지는 일생을 통하여 그와 협력한다. 은혜의 사역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전적으로 갱신시키며, 또 죄인을 성도로 영적으로 변화시킨다.
3)어거스틴의 예정론
어거스틴이 말하는 구원의 동인으로서의 하나님의 은혜는 예정교리로 이끌어 갔다. 하나님께서 적적한 때에 죄인의 은혜로운 갱신을 위하여 역사하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의 영원한 계획에 따라 하시기로 결정하신 것이었다. 어거스틴은 처음에는 예정을 예지에 의존하는 것으로 봄으로써, 하나님께서 앞으로 믿을 줄로 예지하신 자들을 선택하였다고 표현하는 경향을 보였다. 인간이 선행을 선택하는 것과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신적은혜의 효과가 아니면, 안된다는 것이 성경의 윤리적 일치요, 일관된 공정한 해석이라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는 예정을 죄인의 구원과 관련하여 생각하였으며, 심지어는 예정을 영원의 관점에서 본 구원이라고 불러도 좋다고 하였다. 그는 선택지 못한 자에 대한 하나님의 작정을 묵(默)과의 작정으로 생각하였다. 유기(棄)와 선택은 다르다. 유기에는 그 결과를 보증하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뜻이 없으시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엄격한 예정론자이면서도 그의 교리가운데는 그의 주요사상과 맞지 않은 요소가 있다. 즉 중생의 은사는 다시 상실할 수 있다는 관념이다. 그는 중생하고 인내하는 자들과 그것을 잃은 후에라도 중생의 은혜를 회복할 자만이 최종적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한다.
5. 반펠라기우스 주의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주의의 양 극단 사이에서 그 두 파 사이를 중재하는 운동이 일어났는데 이를 역사상 반펠라기우스주의 라고 부른다. 반 펠라기우스주의는 인간을 갱신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의지가 동등한 요소라고 하였고, 또 하나님께서 인간의 믿음과 순종을 미리 아시고 예정하신다고 주장하므로 양자간의 모든 어려움을 해결하려는 무익한 시도를 했다. 반펠라기우스주의는 인간의 부패를 부정하지는 않았으나 그 인간 본성은 타락으로 인해서 치명적인 상처를 받았다기 보다는 오히려 약화되었거나 병든 것으로 보았다. 타락한 인성은 아직도 자유의 요소를 지니고 있으며,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게 해주는 것이다. 중생은 그 두 요인이 연합하여 산출한 것이며, 그러나 그 일을 시작하는 것은 인간이요, 하나님이 아니다.
오렌지 대회는 온건한 어거스틴주의를 교회의 교리로서 채택하였다. 펠라기우스주의와 반펠라기우스주의는 모두 정통 신앙에 반대된다하여 정죄 받았다. 구원은 은혜에 의해서만 받는 것이라는 어거스틴의 구원 교리는 승리를 했으나 불가항력적 은혜의 교리는 세례의 성례적 은혜의 교리로 대치되었다. 이중예정의 교리는 529년에 폐기되었다. 로마교회는 반펠라기우스주의 방향으로 기울어졌다. (153-159)
종교개혁자들의 인간론
칼빈은 인간의 원죄는 결핍일 뿐만 아니라, 인성의 전적부패라고 하였다. 어거스틴은 이 부패를 육체적인 정욕에서 찾았으나 칼빈은 그것이 영혼의 낮은 능력과 함께 높은 능력에도 자리잡고 있다는 것과, 또 그것은 이것들을 통해서 적극적인 악으로 나타난다고 하였다. 개혁자들은 죄란 인간으로 하여금 죄있게 하고 정죄받게 하는 내재적 죄들이다. 일반적으로 칼빈과 개혁자들은 원죄란 인성의 유전적인 패괴(敗壞)요, 부패로서 그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하며, 육신의 일을 하게 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우리는 아담 안에서 본래 유죄하고 오염되었으므로 하나님 앞에서 정죄를 받아 마땅하다고 하였다. 타락의 결과로 인간은 전적으로 부패하여져서 어떠한 영적 선을 행할 수 없으며, 그러기 때문에 자신의 회복을 위해 최소한의 전진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전적 부패의 교리를 주장하면서도 한편 중생하지 못한자라도 사회적인 대인 관계에서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세속적인 의는 행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칼빈도 하나님의 보통은혜로 인간은 세속적인 선을 행할 수 있다는 사실에 어느 누구보다도 주의를 환기시키고 있다. 전적부패의 교리는 자연히 인간의 갱신을 위해서는 하나님의 은혜에 전적으로 의존하여야 한다는 사실에 귀결된다.(170-173)
루이스 뻘콥 저 『기독교교리사』 신복윤 역, (서울: 성광문화사, 1979), 149-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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