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선교의 대부 밀러에 대한 고찰
1. 서론
우리나라 개화기에 정치적인 혼란 그리고 일제 침략의 어수선한 격변기에 복음을 들고 이 땅에 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다 순직했지만 130여년이 지난 대한민국 땅에는 수백만의 성도들이 있고, 수 만개의 교회와 그리고 세계 10대 교회가 한국에 서게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고 이 땅에 젊음을 바쳐 헌신과 봉사의 삶을 살다가 간 수 많은 선교사들의 희생의 열매라고 생각할 수 있다.
본인은 수많은 선교사 가운데 특히 충북지역, 그중에서도 청주에서 44년 동안 사역하시면서 청주 지역에 서양문명을 들여오고 근대문화를 꽃 피우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신 충청 선교의 대부인 밀러 (Frederick S. Miller/ 민노아)에 대하여 고찰 하고자 한다.
2. 미국에서의 생애
1866년 12월 10일 미국 폔실바니아주 피츠버그에서 의사(醫師)인 아버지 W.M.Miller와 어머니 Susan Walker 사이에서 유복하게 출생했다. 모두7남매였는데(4남 3녀) 2명은 의사, 2명은 목사로 부유한 가정이었다. 그는 피츠버그 공립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YMCA 체육관에서 감독으로 근무하다가 피츠버그대학에 입학하여 1889년 동 대학을 졸업(문학사)하였다. 그 해에 뉴욕 연합신학교육원 신학과 입학하여 1892년에 졸업하여 신학석사 학위를 받았다. 그해 11월 15일 목사안수를 받고 미국 북 장로교회 선교부 외지선교사로 지명을 받아 부인 안나 리네이크와 함께 북장로교 한국 선교사로 부임하여 이후 45년간 봉직하였다.1)
3. 한국에서의 주요 선교활동
1885년 언더우드(Horace Gract Underwood;元杜尤)목사가 우리나라에 입국한지 7년 후인 1892년에 복음 선교사로 입국했다. 1892년 11월 15일, 부인 Anna Reeinecke와 함께 선교사로 한국에 입국하였다. 1893년 1월부터 예수교학당의 교장인 馬布三悅{S.A. Moffett} 목사가 평양으로 전임되자, 민노아 목사가 그 후임으로 제3대 예수교학당(현 경신 중․고등학교 전신)의 교장으로 취임하였다.(초대 교장은 언더우드).
그는 예수교학당을 교명을 민로아 학당으로 고치고 자신의 교육 방침대로 발전시켰다. 이때, 안창호와 같은 걸출한 인물을 길러내는 등 기독교 교육에 열정적으로 힘을 썼다. 1894년부터 학생이 15명에서 45명으로 증가 하였다. 청일전쟁의 영향이 컸다. 그리고 1895년, 연동교회가 탄생하게 될 때 그 기초를 놓는 역할도 하였다 .2)
그러나 교육등한정책(敎育等閒政策)에 따라 학당이 폐지되어 서울 연지동(蓮池洞) 에서 노방전도(路傍傳道)를 실시한 발걸음은 경기도 이남 지방으로 눈을 돌리게 되었다. 1902년 안성제일교회 설립하였고, 1903년 6월 13일 부인 안나 리네이크 사망, 양화진에 묻히고 1904년 정신여학교 교사 도티와 결혼 한 후 1905년 청주로 내려가 스테이션 개설하였다.3)
충청 북부지역 충북은 선교의 사각지대였다. 한반도의 중앙에 위치하고 바다가 없는 내륙도이기 때문에 복음이 전파될 당시에는 교통도 좋지 않고 외지와 교류도 별로 없었다. 서울을 중심으로 남도 땅으로 이어지는 길은 여러 갈래이지만 그중에 한강나루를 건너 광주, 용인 죽산, 진천, 청주로 이어지는 통로를 통해 복음이 전파되었다.
충북지역에 장로교회는 1900년 신대교회가 처음으로 시작되었다. 선교사들이 복음의 씨를 뿌렸지만 그것이 전파되는 과정에서 한국인 스스로가 전도하고 그것을 받아 설립된 교회다. 다음으로 1904년에 청주읍교회가 설립되었는데 민노아 선교사와 장로 김흥경이 이곳에 와서 전도함으로 이루어졌고 이 교회가 청주지역 선교의 보루가 되었다. 한편 청주에 선교부를 신설하기 위해 사전 답사팀을 모아 활동했다. 이때 아펜셀러 죤(Appenzeller Jones)과 맥길(Wm. B McGill)박사. 게일(J,S Gale)목사 데이비스 (J. H. Davis)목사, 배어드(W.M. Baird), 테이트(Tate)목사등이였다. 민노아목사는 선교본부에 청주에 선교부 개설을 청원하여 1904년 청주선교부 개설 승인을 얻은 후 1905년 청주로 이거(移居) 하여 청주선교부 창설에 주력하였다.(History Korea Mission Presbyterian Church, P. 310) 그 해가 1905년이다. 4)
청주에 선교부를 개설하고 조력자 김흥경 조사와 함께 선교사역을 펼쳤다. 선교부지 매입, 사택과 학교, 병원, 성경학교 등을 설립했다. 청주읍교회를 설립하고 그곳을 복음전파의 보루로 해서 많은 교회를 개척했다. 청남학교, 소민병원, 민노아 성경학원 등을 개설하여 활발한 선교사역을 하여 넓은 선교부지에 처음으로 양관(서양식 건물) 6개동을 건축했는데 충북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5)
청주지역에서 44년간 선교활동을 하였다. 1902년에는 장로회·감리회 연합의 찬송가 제정을 위한‘통합공의회 찬송가위원회’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1905년 찬송가 307장 "공중 나는 새를 보라"를 작곡하였다. 이밖에도 94, 294, 379 516장 등이 현재 찬송가에 실려있다. 1911년에는 조선예수교장로회 경기·충청 노회장으로 활동하였다. 거기에 더욱 의미 있는 일은 그가 한국 기독교 초창기에 찬송가 편집위원으로 활동하여 교회 음악에 공헌하였다는 것이다. 민노아 선교사는 문학과 음악에 재능이 있어 찬송가 편집위원으로 위촉되어 활동했는데, 편찬위원으로 활동하면서 많은 찬송가를 번역하고 작사했다. 그는 약 40여 편의 곡을 다듬어 번역했는데, 그 중 23편이 초기 찬송가에 수록될 정도로 맹활약을 하였다. 현재 사용되고 있는 21세기 찬송가 중에 “예수님은 누구신가”(96장), “주의 말씀 듣고서”(204장), “맘 가난한 사람”(427장), “예수 영광 버리사”(451) “공중 나는 새를 보라”(588장) 등 5개 곡은 청주에 있던 민노아 선교사가 작사한 것이다. 또한 그가 작사한 찬송이 어린이 찬송가에도 실려 있다.
1894년 밀러는 현재의 양화진 묘역 주변에 언더우드 선교사와 에비슨 선교사 등과 공동으로 별장용지를 구
입하여 각기 방갈로를 짓고 여름철에는 이곳에서 지낸 일이 있어 양화진과는 관계가 깊은 인물이다. 첫 부인 안나 밀러가 별세한 후 F. S. 밀러는 1904년 제3대 정동여학당장 도티(Doty, Susan A.)와 재혼하였다. 1931년 도티와 사별한 뒤 딘(Dean M. Lillian)과 다시 재혼하였다.
4 청주에서의 주요 활동
청주에 처음 기독교가 들어온 것은 19세기말, 신대리 마을주민 오천보 등 3명이 행상을 다니다가 우연히 경기도 죽산군 ‘둠벙리교회’에서 열린 부흥사경회에 참석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들이 부흥사경회에 참석하여 놀라운 은혜를 입고 마을로 돌아와 어설프지만 받은 은혜를 나누며 전도하면서부터 복음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이로써 외국 선교사가 아닌 주민들 스스로의 신앙심에 의해서 자생적으로 세워지는 최초의 예배공동체로서 신대교회가 탄생을 하였다.
마침내 충청북도에서 처음으로 조직교회가 시작하게 된 것은 청주에서 1904년 밀러(F. S. Miller1866-1937, 민노아閔老雅)선교사와 김흥경 등에 의해서 청주읍교회(현, 청주제일교회)가 세워지면서 부터이다.
1904년부터 충청북도 청주에서 최초교회를 세우고 선교활동 하던 중, 사랑하는 아내 안나 밀러를 잃게 된다. 교회를 세우고 기초를 닦으면서 밀러선교사는 1904년 제3대 정동 여학당장인 도티와 재혼을 하였다. 그러나 1931년 또다시 도티와 사별하는 아픔을 겪었다. 그는 한국에서 선교와 교육 사업에 매진하면서 세 번째 부인으로 다시 딘과 재혼을 하는 등 파란 많은 세월을 살았다.
충청북도지방 최초선교사였던 밀러선교사는 청주지역에서만 44년간 선교활동을 하였다. 신대마을에서 선교활동을 시작하여 청주시내로 들어와 제일교회를 기점으로 열성적인 선교활동과 사람을 길러내는 교육 사업에 기여했다. 그가 설립하였거나 시무한 교회로는 충북에서 가장 먼저 기독교를 전파한 청주신대교회, 청원북일의, 묵방리교회, 북일화죽리교회(1921), 송파교회(1922) 등이 있다.
청남학교, 청신여학교, 청서학교, 청북학교 등 6개 학교를 세워 근대교육을 실시하는 등, 선교와 근대 교육, 서양문화 보급 등에 매우 힘써 혁혁한 공을 세웠다. 일생을 충북 복음 선교에 헌신한 민노아 목사는 충북 지역의 선교에 착수한 지 36년만인 1936년 12월에 정년으로 은퇴하였다. 그리고 필리핀과 중국의 남부 여행을 마치고 돌아왔는데, 1937년 10월 6일 향년 71세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1937년 10월6일 71세로 생을 마칠 때 까지 한국에서 교육가로 크게 명성을 떨쳤다. 현재 일신여고 양관 옆에
는 한국인들에게 남긴 교육의 열정이 묘비에 새겨져 있다. 그의 유해는 현재 일신학원 구내에 안장되어 있으며, 그의 선교기념비 비문에 새겨진 “주 예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성구는 오늘날 그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우리 인생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임을 이야기해 주고 있다.
1904년, 청주에 도착하여 1937년에 생을 마칠 때까지 민노아 목사는 충북 선교의 아버지로 많은 업적을 남겼다. 청주 선교부를 개설하여 운영하고, 청주제일교회(기장)를 비롯하여 여러 교회를 개척하여 복음을 확산시켰으며, 학교를 세워 충북 근대교육의 선구적 역할을 하였다. 또한 많은 전도지와 소책자를 제작하여 배포하면서 문서선교에 힘썼다.
밀러는 처음 초가집을 얻어 기거하다가 1907년 청주에 온 계군(桂君)과 더불어 청주시 탑동(당시는 금천리)야산을 26원에 사들여 나무를 베고 건물을 지었는데 그곳이 바로 양관건물이라 한다. 당시 나무가 얼마나 크고 많았는지 150명의 장정이 2주 동안 도끼로 자르고 벌목한 나무를 옮기는데도 300명의 인력이 동원됐다는 기록이 있다. 건물은 5채를 붉은 벽돌을 쌓고 기와를 얹어 서양식과 한식이 복합된 건물로 준공됐는데 그 당시는 높은 위치에 들어서서 시내를 내려다 볼 수가 있었고 시내 어느 곳에서나 먼 거리서도 양관을 볼 수가 있어 일부러 구경을 오는 사람도 많았다고 한다. 본래 양관의 건축 목적은 선교사들의 거주와 사무실용도로 건축 한 것이 생활이 어려운 아이들과 문맹인 성인들을 가르치다 보니 배움터로 활용이 많아지게 됐다고 한다. 일제가 신사 참배 등 교육을 방해 했지만 교육은 꾸준히 이어졌고 1914년 노관 지도 의사부부가 건물 한곳에 병원을 차려 병고에 시달리는 주민들에게 의술을 펼쳐, 양관 에서 선교와 교육 병원까지 병행하며 주민 계몽과 보건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6)
당시 외국인 선교사들의 생활거주와 선교사역과 교육활동 및 의료 활동 등을 위해서 건물을 지었는데, 그것이 바로 청주시 탑동 일신여고 안에 있는 최초의 서양식건물인 청주탑동양관(洋館, 충북유형문화재 133호)이다.
1930년 무렵까지 25년간 무려 5만여 평의 땅에다가 붉은 벽돌을 쌓고 기와를 얹은 서양식과 한식이 복합적으로 이루어진 양관 건물을 차례차례 들어서게 하였다.
당시 주민들의 계몽과 보건에 많은 영향을 끼쳤던 양관은 마침 1906년 충북지역의 대홍수 가 닥쳤을 때 탑동 언덕으로 피신했던 이재민 200여명에게 관사와 부속건물 일부를 제공하면서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며 따뜻한 위로와 함께 복음을 전하기도 하였으며 이렇게 청주 사람들의 마음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다. 일본인들의 횡포가 심해지고 기독교인들에게 신사참배를 강요당하며 교육을 일시 중단시킨 적도 있었지만 청주 양관에서의 교육은 얼마 후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 한편 1950년도 6·25 전쟁 중에는 양관을 잔혹 무도한 인민군들이 쳐들어오면서 야전병원으로, 청주제일교회는 인민군 사무실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이 과정에서 적잖은 성도들이 공산당의 총칼 앞에서 무참하게 죽임을 당해 순교했다. 현재도 교회당 외벽에 남아있는 총탄자국은 당시의 동족상잔의 비극과 청주제일교회 순교자들을 떠오르게 하며 숙연하게 한다. 현재 남아있는 양관은 총6동 중 한 곳(1호)은 개인소유로 변했고, 일신여중, 고, 교정에 자리 잡은 4채의 탑동양관(충북유형문화재 133호)은 생활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초기 서양선교사들은 종교를 앞세운 ‘예수꾼’으로 비쳐져 서민들 정서를 혼란시킨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우리나라 근대화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특히 유교와 불교문화가 발달하여 기독교 복음전파에 어려움이 많았던 청주지방에 세워진 양관은 개화기의 독특한 서양식 건물의 모습을 보여주는 역사적 의의뿐 아니라, 충청북도 기독교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리고 해방 전까지 충북 기독교의 중심 역할을 담당하면서 많은 일화를 남겼다. 청주탑동양관은 어려운 시대에 수난을 겪으면서도 지금까지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충북기독교 선교100년, 근대문화유산의 역사적인 이야기 거리와 100여년의 상징물로서의 그 의미가 매우 깊다고 하겠다. 7)
청주 탑동에 세워진 양관(洋館)건물은 청주에 기독교가 전파되면서 상징적으로 남아있는 최초의 서양식 건물이다. 기록에는 1907년 착공하여 완공시킨 건물은 100년이 넘었으나 대부분 헐리고 지금은 일신여고 강당과 동산교회 등이 남아 보호 건물로 지정 보존 되고 있다. 8)
5. 가족과 저서
1) 가족 사항 : 민노아 목사는 가정생활에 어려움이 많았다. 부인을 2사람이나 먼저 보냈고 세 번째 부인과 결혼하여 살았다. 또한 자녀 5남매를 두었는데 2명을 먼저 잃었다. 1903년 부인 Anna여사를 잃고 1904년 정신여학교 3대 교장으로 있던 Susan A. Doty와 재혼했다. 그러나 1931년 안식년으로 미국에 귀국 해 있는 동안, 그곳에서 둘째 부인과 사별했다, 그후 1932년 한국으로 다시 건너와 선교지구의 일원인 M. L. Dean 선교사와 다시 결혼했다. 어떻게 보면 가정생활에 시련이 많았던 것 같다.
2) 저서 : 민노아목사는 한국선교사 가운데 가장 성실하고 꾸준하게 문학부문에서 일해 온 문학선교사로서 많은 글을 남겼다. 민노아 서적 목록에는 40여 제목들이 올려져 있다. 초기에는 한국교회에서 부르는 찬송가를 거의 번역했으며 지금도 5편의 찬송이 수록되어 있다. 그는 음악가라고 자처하지는 않았지만 음악의 리듬과 시인의 재능이 있었다. 그리고 민노아 목사는 어느 선교사보다 많은 복음서를 번역했고 금주․금연에 관한 소책자를 제작 배포하여 “소책자의 사도” 라 알려졌다.(경신사 p166, 1991년 11월 11일 발행)
3) 영문판 책자 발행 : 민노아 목사는 미국에서 한국에 관한 이야기를 가장 잘 쓰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다. 한국을 소개한 그의 저서 “Our Korean Friends"(우리의 한국 친구들) “Korean Young People”(한국의 젊은이들) 등이 뉴욕 레벨(Revell) 출판사에서 출판하였는데, 이러한 책들은 서양인이 한국을 이해하는데 크게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그밖에 30여 편의 비평서 성경연구논문이 있으며,. 일찍이 장로교에서 가장 정평 있는 신학 잡지인 “신학지남”(神學指南)에도 “이사야 강해” “가정교육 방책” “스스로 올타 함” “가장 참된 선함” 등 여러 편의 글에 게재되어 있다,
결론
민노아(閔老雅), 그의 본명은 밀러(Frederick Scheible Miller;1866-1937)이다. 그는 충청(忠淸)지역 초대 선교사이며 복음 전도의 개척자이다 그는 목사 안수를 받고 26세의 젊은 나이에 한국에 선교사로 자원하여 한국에서 일평생을 선교사로 활동했다. 특히 민노아목사는 여생을 충북에서 살다가 청주에서 순직하고 청주에 잠들어 있다. 민노아 목사는 청주지역의 선교에 착수한지 36년 만인 1936년 12월에 정년으로 은퇴하고 내외분이 필리핀과 중국의 남부지역을 여행하고 다시 청주로 돌아왔다. 그 후 1937년 10월 6일 향년 71세로 부인과 3자녀를 두고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그는 청주에 있으면서 근대교육에 앞장섰으며, 또한 음악과 문학에 재능이 있어서 찬송가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현재 번역한 찬송가가 여럿 올려져 있고 현재까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그리고 청주 지역 탑동의 땅 5만평을 그 당시 26원으로 매입하여 그곳에 양관 6채를 지어, 그곳에서 주민들의 계몽과 보건에 많은 영향을 끼쳤던 양관은 1906년 충북지역의 대홍수 가 닥쳤을 때 탑동 언덕으로 피신했던 이재민 200여명에게 관사와 부속건물 일부를 제공하면서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며 따뜻한 위로와 함께 복음을 전하기도 하였으며 이렇게 청주 사람들의 마음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다. 지금은 일신여고 강당과 동산교회가 지정문화재로 청주근대문화 유산으로 남아 있다.
선교사 기념비가 세워진 곳은 그가 살던 관사 앞뜰이다. 그는 자기가 살던 뜰에 묻히리라고 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민노아 목사의 비문을 보면 “주 예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란 성경구절이 새겨져 있는데 그의 생애와 사상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민노아 목사는 한국 사람을 위해 특히 충청도 청주사람을 위해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사도(使徒)라고 말할 수 있다.
참고문헌
1) 경신사. p165, 1991년 11월 11일 발행
2) 박경진, 감리교 뉴스, 한국교회사 29. “청주 탑동양관과 충북선교의 아버지 밀러선교사”
3) 송현강, “충청도의 선교사들” (펜윅, 밀러, 윌리암스.p4)
4) 경신고등학교 발행 “경신사”, 선교사들의 “년말보고서”, “神學指南”과 그의 자녀의 서신 을 참고함
5) 2013년 04월 21일 (일) 20:41:23 지면보기 10면 중부매일 jb@jbnews.com
6) 박경진, 감리교 뉴스, 한국교회사 29. “청주 탑동양관과 충북선교의 아버지 밀러선교사”
7) 경신고등학교 발행 “경신사”, 선교사들의 “년말보고서”, “神學指南”과 그의 자녀의 서신 을 참고함
8) 충청지역 선교역사 한국기독공보 정행업 목사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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