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영성과 개신교
1. 서론
최근 한국교회는 1960-80년대의 고속성장을 끝내고 정체 내지는 쇠퇴, 혹은 유럽처럼 쇠락의 길을 걷고 있다. 한국교회의 쇠퇴 원인은 출산율저하, 종교의 대체제내지는 보완제의 등장, 소득향상으로 인한 관심부족, 급격한 물신숭배, 무차별적인 전도로 인한 사회의 부정적 이미지 양산, 목회자들 신뢰도 추락 등을 말할 수 있으나 이웃 종교인 천주교나 불교 등은 반대로 성장하고 있는 것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 볼 시점에 와 있다. 본인은 기독교인의 감소는 기독교의 영성과 밀접과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대체로 교회는 교회의 영성을 말할 때 오순절의 성령운동을 중요시 하였고, 이러한 한국교회의 상당한 부흥을 하는데 기여하였음은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이제는 한국교회가 크게 추락하는 이 시점에 오순절 적인 성령운동이 과연 21세기에 바람직한 영성운동인가 하는 것이다. 이제 한국교회는 초대교회 수도원의 영성인 신비주의영성과 함께 수덕주의 영성을 일으켜 다시금 부흥의 시대가 오게 해야 할 것이다. 초대교회 영성가들의 영성의 삶은 보다 전체적이고 통전적인 영성을 추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통전적인 영성이야 말로 한국 개신교를 살리고 다시금 부흥의 불씨를 살릴 수 있다고 확신한다. 본 소고(小考)에서는 기독교의 영성이 무엇인지 살펴보고, 성프란치스코에 나타난 영성의 특징 가운데 자연영성을 개신교의 영성으로 확산, 발전시켜 쇠락하는 한국교회에 자연영성운동을 기반으로 한 생활영성으로 개신교회를 다시금 부흥의 궤도에 올려놓는 대안으로 제안하고자 한다.
2. 기독교 영성이해
우리는 흔히 “영성” 혹은 “기독교 영성” 이란 말을 흔히 듣는다. 영성이란 너무나 폭넓게 사용 되고 있기 때문에 기독교 영성에 관한 바른 이해가 필요하다. 기독교 영성은 하나님 말씀인 성서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즉 기독교 영성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기초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그의 깊은 영적 체험에 기초한다. 그런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야 말로 기독교 영성의 원천이며 궁극적 목표이다. 그의 철저한 자기부정과 겸손, 온유, 하나님께 대한 철저한 순종과 신뢰. 타인을 향한 봉사와 사랑의 실천은 기독교 영성의 뿌리이며, 최고의 모범이다. 다시 말하면 기독교 영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오늘 우리의 삶속에 재현해 내는 길이며, 따름이며, 그리스도의 삶을 ‘닮아감’ (imitation)이라고 말할 수 있다. 기독교 영성은 단순히 성령체험이나, 어떤 은사 체험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 신앙의 영성은 깊은 하나님 체험을 목표로 하고 있다.
현대의 과정 철학자 화이트헤드(A.N. Whitehead)는 “현대는 하나님을 잃어 버렸으며, 그래서 하나님을 다
시 찾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현대 영성신학자 케네스 리치(Kenneth Leech) 는 “현대 서양인들의 영적 고갈의 근본 원인은 그들의 하나님 상실에서 비롯되고 있다” 고 말하고 있다. 기독교 영성은 우리 인간으로 하여금 잃어버린 영적인 세계를 다시 찾고 다시 발견하게 한다. 지금까지 기독교는 자연을 인간을 위한 문명의 도구로 활용하고 그것만을 이용했다. 하지만 이제 자연을 인간을 위한 도구로만 생각하지 말고, 오히려 만물 하나하나에 하나님의 사랑이 깃 들여 있음을 알아야 한다. 자연은 창조주 하나님을 표현하고 드러내는 수단이며 자연을 통해서 오히려 창조주 하나님께 가까이 나갈 수 있는 하나님의 실재를 경험 할 수 있는 도구이다. 전통적으로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나타내는 용어 가운데 신앙 믿음 경건이란 말이 사용되었지만 최근에 이러한 용어 보다 영성이란 용어를 선호하는 것은 배타적이지 않고 통전적이고 에큐메니칼 적이고 표용적인 분위기를 담아 내고 있기 때문이다. 영성을 말할 때 개신교 입장에서는 오순절적인 운동을 중심한 성령운동을 연상하여 예를 들어 예배참석이나 철야기도나 새벽기도에 빠짐없이 참여하는 사람들은 영성이 깊다하고 그렇치 못한 사람은 그 반대의 경우로 생각한다. 하지만 천주교의 경우는 신비주의와 수덕주의로 나누는데 수도원을 중심으로 전개해온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다. 카톨릭의 영성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는데 윤리적 영성을 추구하는 수덕영성과 존재론적 영성이라고 할 수 있는 신비주의 영성으로 대별할 수 있다. 수덕영성은 덕행을 통해 완덕을 이루려고 힘쓰는 것이다. 수도원의 전통을 확립한 베네딕트(Benedict, 480-)에 제시된 수덕의 내용은 순명, 정결, 순졀 청빈이며 이를 통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이러한 수덕의 규칙이 체계화되어 카톨릭 영성 신학의 근간을 이루었다. 개신교는 초대교회의 이러한 수덕영성을 등한히 결과로 균형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한다. 이제 개신교도 영성이라는 용어에 대해서 좀더 포괄적으로 이해하고 초월적인 것만을 강조하지 말고 자연적이고 인간의 수행을 통한, 즉 금욕적이고 수도원적인 덕행을 통해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서 사회적인 차원에 까지 확산되어야 할 것이다.
3 .성 프란치스코의 생애
프란시스는 이탈리아의 작은 도시 스뽈레또 계곡 아씨시의 부호(포목상)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그에게 훌륭한 교육을 시켰다. ‘프란체스코’ 라는 이름은 프랑스 사람이라는 뜻으로 그의 아버지가 프랑스 여행으로부터 아씨시로 돌아오면서 그의 출생 후, 즉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그는 젊은 시절 부모의 천박한 생활과 행실을 오랫동안 모방하여 그의 허영심과 교만함은 한층 심했다. 하지만 17세 때 전쟁터에서 포로로 잡혀 1년간 감옥 생활을 하면서 많은 사색의 기회를 얻었으며 21세 때 중병에서 살아나 인생관이 변하게 되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점차로 하나님에게로 향하는 마음이 싹트게 된 것으로 보여진다.
그는 아씨시 근교에 한 동굴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그는 동료들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였는데, 동료들은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고 프란치스코는 성령이 충만하여 성부하나님께 기도하였다. 그곳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지만, 그는 영원하시고 참되신 하나님께서 자기의 갈 길을 가르쳐 주시고 당신의 뜻을 실행할 수 있도록 기도하였다. 그의 속사람은 거룩한 불로 활활 타올랐으며, 그는 무거운 죄를 지어 엄위하신 분의 눈을 지노케 하였음을 회개하였으며, 그는 기도에 애를 써 탈진한 나머지 들어간 사람과 나온 사람 전혀 딴 사람같이 보였다고 한다.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것들을 다 팔아버렸고 자신이 타고 다니던 말까지 팔아 버려 그 돈으로 무엇을 할까 궁리를 하던 차에 아씨시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성 다미아노 성당을 기념하여 세워졌지만 지금은 다 쓸어져 가는 성당을 발견하고 그 곳에 들어가 사제를 발견하고 그에게 가지고 있던 돈을 주며 성당을 수리하도록 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에 대한 이상한 이야기를 전해 듣고 마음이 극도로 분하여 성프란치스코가 있는 곳에 쫒아 갔을 때 그는 비밀 토굴로 자신의 몸을 숨겼다. 그는 자신을 박해하는 사람들로부터 주님께서 자신을 건져 주시기를 기도했다. 이후에도 그의 아버지는 프란치스코를 매질하고 감금하여 쇠고랑을 채웠으나 그의 어머니가 풀어주었다.
그는 한 때 좋은 옷만을 입었으나 이제는 허리만 매는 허수룩한 옷을 걸치고 다녔다. 그가 불란서 말로 찬미의 노래를 부르면서 어느 숲속을 지나갈 때였다. 느닷없이 강도들이 그에게 달려들었다. 네 놈이 누구냐고 사납게 물었을 때 “나는 위대하신 하나님의 사신이오, 무슨 일입니까?” 그러자 그를 두들겨 패고는 눈구덩이에 집어 던졌다. 또한 나환자들에게 가서 온갖 썩은 곳을 씻어주며, 상처와 고름도 깨끗이 닦아 주었다.
로마에 순례여행을 다녀 온 후에 한 환상을 통하여 “나의 교회를 재건하여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허물어져 가던 교회를 세웠다. 1269년, 어느 날 포르찌웅쿨라 성당에서 사도들의 파견(Missio Apostolorum)에 관한 설교(마태 10,7-13)를 듣는 순간 그는 여기서 전적으로 사도적인 청빈생활에 자기 자신을 내어 맡기기로 결심한다. 그는 이 말씀을 듣고 "이것이 바로 내가 찾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원하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 온 정성을 기울여 하고 싶어 하던 바이다"라고 외쳤다(1첼라노 22; 대전기 3,1; 세 동료 25). 누더기 옷을 걸치고 다니면서, 즉시 발에서 신발을 벗어버리고 손에서는 지팡이를 치워 버리며 한 벌의 옷에 만족하고 허리띠는 가느다란 새끼줄로 바꾸어 버렸다. 매우 초라한 넝마 옷을 입고 다닌 것은 아무도 그 옷을 탐내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결코 복음을 듣기만 하는 사람이 아니고, 자신이 들은 바를 경탄할 만큼 잘 기억해 두었다가 그것을 실천하는 사람이었다.
프란치스코를 따르는 사람들로 수도회가 구성 되었는데 후에 작은 형제 회라고 하는 수도원 공동체가 탄생하였다. 특히 순종, 청빈, 순결이 이들 수도회의 3대 서원이었고 사랑 평화 자유 청빈이 그들 영성운동의 4대 목표였다.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명상과 기도, 그리고 하나님의 위대하신 활동에 대한 찬양 등에 사용하였다. 이때 많은 찬송 시와 기도문을 만들었다. 그는 거의 잠을 자기 않고 밤새도록 기도하며, 하느님과 복되신 동정 성모를 찬미하는 것을 목격하였다고 한다. 한때 쉴새없이 활동하던 프란치스코도 그의 말년에는 많은 수도원 설립자들처럼 은둔의 단계를 맞이하였다. 그는 짧은 아르노 고지의 몬테 알베르노에서 보내면서 40일 금식을 하고 리에티에서 의사의 치료를 받았으며, 그가 사랑하는 아씨시의 포르티운쿨라에서 최후의 순간을 기다렸으며, 알몸으로 하나님 앞에 서기를 원했으며, 침대도 마다하면서 하나님 품으로 갔다. 그는 1226년 10월 3일에 임종하였으며, 2년 후에는 과거의 그의 수도회의 추기경 겸 보호자였던 교황 그레고리우스의 9세에 위해 시성되었다.
4 . 성 프란시스에 나타난 자연영성
프란치스코의 영성운동의 특징은 순수하게 크리스챤 생활을 하는 것이다. 즉 사랑의 부르심에 기쁜 마음으로 응하여 그리스도를 따르며, 하나님아버지의 사랑 안에서 다른 사람들과 더 나아가 모든 창조물과 형제적 관계를 맺는 신비로운 체험이다. 프란치스코의 생활중심은 그리스도이다. 그는 가장 높은 지향과 주된 관심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었다. 그는 끊임없는 묵상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말씀을 되새겼고, 예리한 사고력으로 그리스도의 행적을 되새겼다.<정해준, “성프판치스코의 영성과 그 현대적의의”, 목원대학교신학대학원,1996p21>
프란치스코는 마음에 가득한 것이 입으로 나왔고, 그의 온 존재를 채우고 있는 것이 사랑의 샘물이 밖으로 나왔다. 마음에 예수를 품고 있엇고, 입에도 예수, 귀에도 예수, 눈에도 예수, 손에도 예수, 나머지 다른 지체에도 늘 예수를 모시고 다녔다.<토마스첼라노, 아씨시 성프란치스코의 생애, 프란치스코회 한국관구, p361> 프란치스코의 영성은 그리스도와의 사랑을 체험하고, 이 사랑의 관계성이 모든 피조물에게 까지 확장되는 것이다. 프란치스코는 형식에 얽매어 있는 옛 수덕적 관습과 마찬가지로, ‘대 수도원적 체제’ 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프란치스칸이란 영성이라는 말이 있지만, 그의 특징은 자발성과 생활양식이다.
프란치스코의 영성은 하나님을 체험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신비를 묵상한 성 프란치스코의 마음은 깊은 흠승과 더불어 감사와 찬미, 신뢰와 기쁨, 감탄의 마음을 갖고 있다. 성인의 신심은 하나님의 사랑에 응답하는 것이다. 프란치스코는 세상에 전해야 할 가장 근본적인 메시지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라는 것이다. 동료들은 성인을 “하나님의 사랑에 도취한 사람” 이라고 부른다.
그는 기도의 은총이야 말로 수도사가 추구해야 할 가장 가치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프란 치스코는 시간과 장소에 얽매이지 않고 항상 깊은 하나님과 깊은 영적인 교제를 나누었다. 그는 무슨 일을 하든 어떤 장소에서든지, 사람이 있든지 없든지, 갑자기 길을 가다가 홀로 조용히 머물러 서서 하나님의 영감을 받고 기도하였다. 그의 기도의 특징은 특정한 것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형태로 대화하는 기도, 때로는 관상의 경지에서 무아지경에 도취되어, 숲이나 외딴 곳에서 기도할 때는 숲을 한숨으로 채웠고, 땅에는 눈물이 떨어졌으며 손으로는 가슴을 쳤다. 그는 그곳에서 주님과 대화하는 말로 나누곤 하였고, 아버지에게 탄원을 드리기도 하였고 친구와 말하는 듯하였고, 신랑과 대화 하 듯 하였다. 그는 입술을 움직이지 않고 마음속으로 자주 관상을 경험하였고, 외적인 사물들을 마음으로 그려봄으로써 자기의 영혼을 더 높은 경지로 끌어 올리곤 하였다.
프란치스코는 모든 자세에서 겸손하였으며, 오만한 말투가 그의 입에는 없었으며, 과시하는 듯한 자세도 없었으며, 행동에 겉치레라곤 보이지 않았다. 그는 많은 일을 함에 있어서 계시로 받았지만, 그럼에도 그는 다른 이들과 상의할 때 자기의 의견을 버리고 다른 형제들의 의견을 따랐다. 그는 그리스도의 학교에 온 것은 바로 겸손을 배우기 위함이라고 강조했다. 프라치스코의 겸손은 겉모양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형제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솟아난 종으로서의 섬김을 말하고 있다. 프란시스는 물질의 축복을 축복으로 보지 않았고 오히려 가난과 무소유를 실천하면서 그 속에서 영적인 자유함과 내적인 평화와 풍요함을 맛보며 사는 삶 을 진정한 축복으로 생각하였다.
하나님의 지배는 창조하신 만물에 대한 사랑으로 나타나며,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우리 인간도 피조물과 그리스도인의 자연에 대한 태도는 프란치스코에게서 특히 잘 나타난다. 프란치스코는 자연을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모습으로 생각하였다. 동물과 식물이 천상적인 아버지의 창조물이며, 또 그 안에서 종교적 사유의 연쇄작용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에 프란치스코는 동식물을 사랑했다. 프란치스코에 있어서 모든 자연은 형제, 자매가 되는 사랑의 관계이다. 모든 피조물은 다른 피조물과의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하나님은 바로 그것을 원하시며 바로 그렇게 창조하였다. 우리들은 이러한 피조물간의 연계성을 매우 오랫동안 등한시해 왔으며 망각해 왔다. 우리 인간은 신선한 공기 없이는 깨끗한 물, 풀과 동물 없이는 더 이상 살 수 없다는 인식이 점점 일고 있다. 인간과 자연은 “하나님의 몸”안에 있고 그러므로 공동운명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병들면 자연도 병들도, 마찬가지로 자연이 병들면 인간도 또한 병든 다는 것이다. 프란치스코는 동물들이나, 바람이나 바위나 모두 형제자매라는 이름으로 불러 마치 그들이 동격인양 은근하고 부드럽게 속삭이는 관계를 보이곤 하였다. 프란치스코가 피조물을 그의 형제자매라고 부를 때 모든 피조물의 일치와 동등을 표현하였다.<정해준, 성프란치스코의 영성과 그 현대적의의>
그는 자연을 깊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관조하고 자연의 아름다운 것들을 신적인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그들을 인격화하여 형제자매들로 불렀으며 또한 그들을 그렇게 대하였다. 그에게 있어서 산천초목, 즉 산과 돌 태양과 달과 별 물과 불 흙 등 모든 피조물은 그들의 창조주인 하나님을 반영하는 도구들로서 하나님의 ‘음성’이고 ‘말씀’ 들이었다. 우리는 여기서 프란시스의 ‘자연 신비주의’ 요소를 발견하게 된다.<류기종지음, “기독교영성, 서을:은성> 프란치스코는 자연을 통해서, 자연 속에서 하나님을 노래했다. 대 자연은 우리와 한 가족이었다.형제태양, 누님 달, 늑대 형제, 누님 귀뚜라미, 종달새 형제 등 만물이 그의 형제자매였다. 이것은 범신론이 아니다. 그는 하나님과 자연을 혼동하지 않았다.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말씀이었다. 만물 속에서 하나님의 입김과 빛을 보는 인물이었다. 그는 신비가였다. 그러나 신비주의를 믿었을 뿐이지, 신비화를 믿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자연을 범신론적으로 어머니라고 부르지는 않았다. 그의 신비주의는 천진난만한 어린아이의 상식과 매우 비슷한 점이 있다는 사실이다. 모든 동물, 산천초목, 금수곤충을 인격 있는 형제자매로 믿은 것은 아니다. 그는 특별한 나귀를 형제라 불렀고, 특별한 제비를 자매라고 불렀을 뿐이다. 그는 대 자연 속에서 영감을 받지 않은 것이 없었다.
프란치스코에 있어서 주 예수를 사랑한다는 것은 피조물 전체를 사랑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이야 말로 모든 피조물을 거룩하게 해 주신 분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들판과 새들을 바라보셨고, 당신 눈으로 축복하셨기 때문에 모든 들판과 새들은 프란치스코의 형제요, 자매가 되었다. 예수께서 그의 형제시며 그의 친구이자 그와 함께 모든 것을 나누시는 주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는 이 세상의 모든 것 새도 동물도 작은 벌레들까지도 그를 사랑했다. 그것을 아는 프란치스코도 그들을 사랑하였다. 그 중에서도 특별히 프란치스코가 사랑하는 것은 움부리아 들판의 종다리였다. 푸른 하늘 높이 날아오르는 종다리를 보며 프란치스코는 자신을 어디에서나 쉽사리 볼 수 있는 아주 흔한 참새라고 생각했다. 파랗게 하늘 높이 날아오르는 종다리를 보고 자가 자신도 자유로운 마음으로 종다리처럼 푸른 하늘 높이 날아 올 수 있었 수 있다면.... 봄날 아침, 움브리아 들판을 곱게 물들이는 빨간 양귀비 꽃이나 노란색의 미나리아재비꽂에 홀려 있던 눈을 들어 동쪽에 높이 솟아 있는 수바시오 산을 바라볼 때의 기쁨을 생각하면 종다리처럼 되는 것 외에 더 바랄 것 이 없었다. 성프란치스코의 여행과 꿈, 머레이보도 지음, 홍윤숙 엮, 성바오로, 2010, 93-96
그러므로 온갖 피조물들이 자신들의 사랑을 성인에게 되돌려 주려고 진력하였고 마땅한 감사의 응답을 하였다. 그가 그들을 달랠 때 그들은 이를 반기었고 그가 요구하는 일은 아무것이나 응하였으며, 그가 명하는 일은 무엇이나 복종하였다. 몇 가지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첫째, 손에 앉은 새이다. 프란치스코가 한 작은 배를 타고 리에띠 호수를 가로질러 그레치오 은둔소에 가고 있었다. 어느 어부 하나가 그에게 물새 한 마리를 바쳐 그를 주님 안에서 즐겁게 하려고 하였다. 복되신 사부님이 그것을 기쁘게 받았다. 그리고 그는 새를 쥐고 있던 손을 펴면서 새에게 이젠 자유롭게 날아가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새는 날아갈 꿈도 꾸지 않고 그의 손을 둥지 삼아 쉬고 싶었을 때에 성인은 시선을 들어 기도에 들어갔다. 오랜 시간이 흐른 다음에 성인이 딴 세계에서 돌아와 새에게 먼저 가지고 있던 자유로 돌아가라고 부드럽게 명하셨다. 강복과 함께 이 허락을 받아들여 새가 날아올랐다. 몸뚱이를 파닥거려 기쁨을 표하였다.
한번은 은둔소에 체류하고 있을 때 그 은둔소에 둥지를 튼 매가 프란치스코와 친밀한 우정으로 맺어진 사이가 되었다. 밤마다 그 매가 꾸룩거리고 프드덕거려 그것으로 기도시간을 알려 주는 때에 성인은 습관적으로 일어나 하느님께 예배 드렸다. 그새가 그를 대단히 염려해 준 덕분에 그는 기도를 미적미적하는 일이 없게 되었으므로, 하느님의 성인은 이 일이 매우 기뻤다. 그러나 성인이 평소의 병세보다 심한 병고에 시달릴 때는 매가 그를 아끼느라고 시간이 되었다는 시간이 되었다는 신호를 보내지 않았다. 참으로 하느님에게서 지령이나 받은 듯이 그 새는 아주 조용히 목소리의 종을 울려 여명을 알렸다. 모든 피조물들이 창조주를 사랑하는 데에 으뜸이신 그분을 공경한다 해서 놀라울 것이 없다.
하느님의 종이 사십 일 동안 아주 엄격하게 고행을 실천하려고 어떤 산에다 방을 하나 들였다. 사십일이 다 차서 그는 자리를 떴고 그 방은 아무 입주자도 없이 뒤에 남게 되어 외딴 장소가 되어 버렸다. 성인이 물을 마시는데 사용했던 질그릇이 함께 버려진 채였다. 그런데 몇 사람이 성인에 대한 공경 심에서 그곳에 갔다가 그 그릇에 벌들이 득실거리는 것을 발견하였다. 벌들이 그릇 속에다 틀림없이 그곳에서 성인이 체험했던 달콤한 관상을 뜻하는 작은 꿀집 들을 멋지게 지었다.
시에나의 어느 귀족 하나가 복되신 프란치스코에게 꿩 한 마리를 보냈는데 당시에 성인은 몸이 불편하였다. 그가 그것을 기꺼이 받고서 좋아하였지만, 그것을 잡아먹을 생각에서 좋아 한 것이 아니라, 통상대로 조물주를 위한 사랑에서 좋아하였다. 그리고 그가 꿩에게 말하였다. “꿩 형제여, 우리의 조물주께 찬미를 드립시다!” 그리고 그가 형제들에게 말했다.: “자, 꿩 형제가 우리와 같이 살 마음이 있는지 아니면 평소에 저희들이 잘 모이던 편한 곳으로 돌아가는 지 한 번 봅시다. ” 형제 중의 하나가 그 꿩을 들고 성인의 말씀에 따라 멀리 떨어져 있는 포도밭에 갖다 놓았다. 과연 그 꿩은 곧 바로 사부님 방으로 왔다. 프란치스코가 이번에는 더 멀리 갖다 놓으라고 다시 명하였다. 그래도 꿩은 무서운 속도로 그의 방문으로 돌아와서는 문에 서 있는 형제들의 수도복 밑으로 거의 강제로 비집고 들어왔다. 그러자 성인은 그 꿩에게 공들여 먹이도 주며, 안아도 주고, 또한 고운 말씨와 더불어 쓰다듬어 주기도 하라고 일렀다. 하느님의 성인을 무척 따르던 어느 의사 하나가 이 꿩을 보고 형제들에게 그 꿩을 달라고 하였다. 그것을 잡아먹으려는 것이 아니라, 성인에 대한 공경 심에서 그것을 키우려는 것이었다. 그 다음에 일어난 일은? 그가 꿩을 자기 집으로 데려갔다. 그러자 꿩이 성인과 헤어지는 석별의 고통 속에 있기나 한 듯이 프란치스코와 떨어져 있는 동안 내내 식음을 전폐하였다. 의사가 놀라 곧 바로 꿩을 성인에게 데려 다 주고는 그에게 있었던 일을 자세히 이야기 하였다. 그 꿩은 땅에 놓이자마자 자기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그제 서야 꿩은 온갖 슬픔을 떨쳐 버리고 즐겁게 모이를 먹기 시작했다.
뽀르찌웅꿀라에서 하느님의 성인의 방 가까이에 매미 한 마리가 있었는데 무화과나무에 앉아서 자주 구성진 가락을 뽑았다. 때때로 복되신 사부님이 매미를 향하여 한 손을 들고 다정하게 부르며 말하였다. “나의 매미 자매여! 이리 와 봐요!” 매미는 이성이 있어 알아듣기나 한 듯이 즉시 날아와 그의 손바닥에 앉았다. 그러자 프란치스코가 매미에게 말하였다. : “나의 매매 자매여! 노래하시오, 당신의 창조주를 즐거운 노래로 찬미하시오.” 이에 지체없이 순명하여 매미가 노래하기 시작하였다. 매미의 노래와 자기의 찬미를 한데 섞던 하느님의 사람이 매미에게 늘 놀던 곳으로 가라고 명할 때까지 매미는 쉬지 않고 목청을 뽑았다. 매미는 마치 그 자리에 박힌 듯 계속해서 8일 간을 무화과나무에 매달려 있었다. 성인은 자기 방에서 나오면, 항상 매미를 손으로 쓰다듬어 주셨고, 매미는 노래를 하라 하면 언제라도 그 의 명령에 순명할 태세가 되어 있었다. 그러자 성인이 동료들에게 말하였다. “이제 우리의 매미 자매를 떠나보내도록 합시다. 매미 자매는 지금까지 우리를 한껏 행복하게 해 주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몸이 이러한 것들에 대해 헛된 자라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 프란치스코의 허락을 받고 매미가 즉시 그곳을 떠났다. 그리고 다시는 그곳에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이러한 모든 일들을 보고 형제들이 크게 놀랐다.
프란치스코의 이러한 사랑의 강렬함이 그를 온갖 피조물의 형제가 되게 하였을진대, 그리스도인의 사랑이 그를 창조주의 모습이 찍힌 사람들과 더 친절한 형제가 되게 한 일은 그리 놀라운 일이 못된다. 그래서 그는 사람들에게 흔히 구령보다 더 중요한 일이 없다고 말하였고, 그 증거로 하느님의 외아들께서 영혼들을 위하여 십자가에 매달린 사실을 자주 제시하였다. 토마스 첼리노 지음, <아씨시 성프란치스코의 생애> 프란치스꼬회 한국교구 피조물 안에서의 하느님을 관상함, 제 124장, 370-377
또한 프란시스의 영성의 극치는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 사랑의 체험과 그 사랑의 실천에 있다. 그에 의하면 하나님 사랑의 체험은 우리 영혼의 하나님과의 합일의 경험을 통하여 이루어지는데 이러한 하나님과의 합일은 자기의 모두를 버리는 ‘몰아’ (沒我)의 기도를 통한 관상에 도달함으로 이루어진다. 순수한 기도는 우리의 영혼을 정화시키며, 관상과 합일로 인도하고 드디어 ‘완전’으로 인도한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관상이나 합일의 체험은 반드시 형제들에 대한 봉사, 즉 하나님과 세상을 위한 헌신의 외적 활동으로 그리고 설교와 전도의 삶으로 나타나야 한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수도회 개념보다는 형제 회 개념을 더 중시하였다. 우리 모두는 맏형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가 한 형제들이라는 것이다. 이 형제애는 어머니가 자식을 기르고 돌보는 이상으로 형제들 상호간에 기르고 돌보는 정신이다. 이러한 형제애는 가난 안에서도 기쁨이 넘치는 공동체를 가능케 한다. 형제 상호간의 사랑과 애정 어린 순종은 기쁨의 영성을 프란치스칸 영성의 특징적인 요소로 부각시켜 준다. 이렇게 공동체 안에서 체험되는 형제애는 신분계급 여하를 막론하고 모든 이에게로 확장된다. 선인이든 악인이든 그리스도인이든 이교도이든 원수이든 강도이든 성한 사람이든 병자이든 모든 이가 한 분이신 아버지 하느님의 자녀로 받아들이도록 해 준다.
정의, 평화, 환경보호, 보편적 형제애. 나아가 성인이 그랬듯이 이 형제애는 자연과 우주만물에 대한 사랑으로 더욱더 확장된다. 성인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자연, 동물과 식물, 세상 모든 것을 형제자매라고 부르며 사랑으로 충만한 삶을 보여 주었는데, 바로 우주적인 형제애로서 만인의 형제가 되는 것이 프란치스칸 형제애의 본질이다.
오늘 날 물질 만능주의와 심각한 종교의 타락과 부패, 그리고 자연 파괴와 환경오염 및 공해의 위기를 맞고 있는 이 시대에 있어서 프란시스의 철저한 ‘예수가난’의 실천과 소외된 형제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실천, 그리고 ‘자연경외’의 사상은 오늘의 우리에게 중요한 의미를 시사해 주고 있다.
5. 자연계시와 현대기독교
기독교 신학은 하나님이 자기존재와 뜻(=의지)을 나타내는 두 가지 길이 있다고 말한다. 하나는 자연을 통한 길이요, 다른 하나는 성서와 성서의 중심이 되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길이다. 전자를 가리켜서 자연계시라 하고 후자를 가리켜 특별계시라 한다. 먼저 자연계시에 대한 근거를 성서 많은 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구약성서의 가장 대표적인 근거는 시편19:1-4이다. “하늘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창공은 그이 솜씨를 알려 준다.···” 신약성서의 대표적 근거는 로마서1:20이다. “이 세상 창조 때로부터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속성, 곧 그 분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은 사람이 그 지으신 만물을 보고서 깨닫게 되어 있습니다.···” 중세기의 신비주의자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Meister Eckhart)에 의하면, “모든 창조물의 형상 속에는 하나님의 모습이 담겨 있으며, 따라서 모든 피조물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며, 하나님에 관한 기록이다.”
온 자연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며, 그의 본질과 표지를 지닌다.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을 만드셨으며, 또한 그 안에 머무십니다. 그분은 자신이 놀랍게 창조하신 것 안으로 흘러들어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피조물에서 그를 조망할 수 있습니다. 자연 속에 기록되어 있는 하나님의 책을 읽을 수 있기 위해 우리는 열린 마음과 자발적 침묵이 필요하다. 니카라구아(Nicaragua)의 혁명가 에르메스토 카데날( Emesto Cardenal)은 자연 속에 있는 하나님의 책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아침의 여명 속에서 소리를 내기 시작하는 모든 짐승들은 하나님을 노래한다. 화산과 구름과 나무는 우리에게 하나님에 관해 이야기 한다. 모든 창조는 큰 소리로 하나님의 존재와 아름다움과 사랑에 대해 우리에게 계속하여 이야기 한다. 음악은 그것을 우리의 귀에 들려주며, 자연 풍경은 그것을 우리의 눈에 보여준다. ····자연은 하나님의 그림자, 그의 아름다움의 반사요 광채와 같다. 고요하고 푸른 바다는 하나님의 바다이다. 모든 원자 속에는 삼위일체의 모습, 삼위일체의 하나님의 모양이 머물고 있다. 내 자신의 육체도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위해 창조되었다. 나의 모든 세포는 창조자를 향한 찬양이요 지속적인 사랑의 고백이다.”
칼뱅도 이와 동일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하늘과 땅에는 그의 놀라운 지혜를 증명하는 무수한 증언들이 있다.···교육을 받지 못한 자와 무지한 자도 볼 수 있는 눈을 가진자라면, 누구나, 너무도 조화롭게 자리 잡고 있는 하늘의 무수한 별들의 무한한 다양함 속에서 스스로 드러나는 신적 예술과 지혜의 위대함을 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동방교회의 신비주의자들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성령은 바위 속에서 잠자며, 꽃들 속에서 꿈을 꾸며, 짐승들 속에서 깨어 있다.” 하나님은 그의 사랑의 영을 통해 피조물 속에 거하신다. 따라서 피조물들은 하나님과 그의 나라의 광채요 약속이다. 그들은 신성의 신비를 그속에 가지고 있다. 인간의 탐욕으로 인해 이 신비가 파괴되고 어둡게 되었지만,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통해 그것은 아직도 남아 있다.
자연신학은 신의 존재 및 진리의 근거를 초자연적인 계시나 기적에서 구하지 않고 인간의 이성이 인식할 수 있는 자연적인 것에서 구하는 신학이다. 자연신학은 몇 가지 중요한 신념 위에 기초하고 있다. 객관적이고 보편 다양한 일반적인 계시가 있다는 것과 인간은 자연세계로부터 지각하고 배울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인간 정신과 하나님의 창조물 사이에는 일치점이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자신을 자연을 통해 알려지게 하며, 인간은 자연적인 제한과 죄와 타락의 결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창조물을 인식하고 해석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 인간 정신의 질서는 기본적으로 우주의 질서와 동일하다는 것이 자연신학의 전제이다.
우리는 여기서 바르트와 부루너의 견해를 잠시 살펴보자
브룬너는 바르트의 견해에 반대되는 여섯 개의 명제로 자신의 입장을 제시했다. 첫째, 인간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은 형식적(formal)형상과 실질적(material) 형상으로 구분된다. 실질적 형상은 죄로 인해 완전히 상실되었으나, 형식적 형상은 소멸되지 않았다. 형식적 형상은 인간이란 개념을 의미한다. 그것으로 인해 인간은 다른 피조물과 구별된다. 인간은 죄인이든 아니든 간에 하나의 주체자요, 합리성과 책임성을 지닌 존재이다. 형식적 형상은 죄를 범하거나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가능성의 전제(前提)이다. 그것은 또한 하나님의 계시를 인식할 수 있는 가능성을 의미한다. 둘째,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물인 자연 세계를 통해 하나님을 알 수 있다. 세계의 창조는 동시에 계시요, 하나님의 자기 전달이다. 인간이 그것을 인식할 수 있는 가능성은 죄에 의해 영향을 받지만 파괴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창조 안에 나타난 계시를 통해 구원의 하나님에 대한 충분한 지식을 얻을 수는 없다.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계시를 통해서만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을 가질 수 있다. 셋째, 하나님의 보존 은총(preserving grace)이 있다. 이것은 지켜주고 도와주는 하나님의 임재를 의미한다. 타락하여 그와 소원해진 피조물 안에도 하나님은 임재하신다. 넷째, 보존을 위한 제도가 존재한다. 그것은 역사적 생활과 사회적 생활의 기본적 요소이다. 그것이 없다면, 공동생활은 상상할 수도 없다. 결혼제도는 창조의 질서라면, 국가는 보존의 질서이다. 다섯째, 인간에게는 구속은총에 대한 접촉점이 있다. 그것은 계시를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 형식적인 하나님의 형상이 그것이다. 죄인도 그것을 상실하지 않았다. 여섯째, 새 창조는 옛 창조의 완성이다. 옛 아담의 죽음이 새 아담의 생명의 조건이다. 옛 아담의 죽음은 결코 인간본성의 형식적인 면이 아닌 실질적인 면을 항상 의미한다.13
브룬너는 은총과 자연을 불연속성의 관계가 아닌, 연속성의 관계에서 이해했다. 은총은 자연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완전하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브룬너의 주장은 하나님의 일반 계시가 있다는 것과 자연신학이 있어야 한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브룬너는 성서와 종교개혁자들, 특히 칼빈의 교리에 근거하여 이를 주장했다. 성서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것들이 하나님을 계시한다는 것과 그리스도 이전의 인간에게도 하나님의 진리가 있음을 증거하고 있다(시19, 롬1:18, 2:4∼5, 요1:4∼5, 행 14:17).14
중세 기독교는 자연신학에 대해 적극적이며 긍정적이었으며 그것을 신학의 중요한 분야로 취급했다. 인간은 이성적 추론을 통해 하나님의 존재를 알 수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자연신학의 대표적인 주제는 하나님의 존재 증명이었다. 안셀름은 순수 사유에 의해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려고 했다. 존재론적 증명이 그것이다. 존재론적 증명은 하나님에 대한 관념으로부터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한 것이다. 하나님은 더 이상 위대한 분을 상상할 수 없는 가장 위대한 존재이다. 그런 존재가 인간의 관념 속에서만 존재하고 실재하지 않는다면, 가장 위대한 존재가 될 수 없다. 따라서 가장 위대한 존재자는 인간의 관념에서 뿐만 아니라 실제로도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토마스 아퀴나스( Thomas Aquinas) 역시 순수 이성에 의해 하나님의 존재나 인간 영혼의 불멸에 대한 신념을 증명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가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제시한 논증 가운데 하나가 우주론적 논증이다. 이는 자연 세계에 대한 관찰로부터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다.
바르트는 「교의학」(Church Dogmatics)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유일하고 참된 말씀이며 생명의 빛이지만, 창조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는 수많은 작은 빛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 따라서 만년에 이르러 바르트가 브룬너의 입장에 보다 가까이 접근한 것으로 이해된다
바르트와 브룬너의 자연신학 논쟁은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 하나님의 지식에 이를 수 있는 길이 있는가 하는 것이 핵심 문제였다. 바르트는 하나님의 계시가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다는 것을 강조함으로써 일반 계시와 자연신학의 가능성을 부정했다. 바르트에게 있어 계시는 항상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를 의미했다. 반면, 브룬너는 바르트의 절대적인 그리스도 중심주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칼빈의 교리에 근거하여 자연 세계를 통해 나타나는 하나님의 일반 계시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렇지만 인간이 일반 계시를 통해 하나님의 지식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 독립적인 자연신학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었다.
브룬너의 견해는 바르트의 견해 보다 온건한 동시에, 종교 개혁적이며 성서적이라고 평가된다. 루터와 칼빈은 시편 19편 로마서 1∼2장 등에 근거하여 일반 계시를 인정했다. 자연을 통해서도 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일반 계시를 인정하는 브룬너의 견해가 그것을 부정하는 바르트의 견해보다 더 성서적이며 종교 개혁자들의 신학과 일치된다.20
자연, 역사 및 인간의 양심을 통해 하나님의 일반계시가 나타난다. 그러나 성경은 자연신학을 건설하기 위해 그것을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을 교훈해 준다. 일반 계시는 인정된다. 그것이 신자와 불신자 사이의 접촉점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일반 계시를 통해 하나님을 어느 정도 알 수 있으나 명확히 알지는 못한다. 일반 계시는 인간을 성경의 하나님에게로 인도하거나 구원에 이르게 할 수 없다. 따라서 인간의 이성에 의해 하나님에 대한 참 지식에 이르는 것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자연신학은 인정될 수 없다.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를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과 구원에 관한 진정한 지식에 접근할 길은 없기 때문이다. '태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바르트와 부르너의 논쟁 다섯 가지 중 두 번 째, 예수 외에 다른 계시가 있을 수 있을 수 있는 지에 대한 논쟁이다. 브르너는 세상은 하나님의 피조물이며, 모든 피조물 속에서 창조자의 영을 어떤 방법으로든지 느낄 수 있다고 믿는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 자신의 흔적을 남겼기 때문에 이세상의 창조주는 하나님의 계시이며, 자기현현이기도 하다. 따라서 피조물속에서 하나님을 깨달을 수 있는 가능성이 완전히 파괴된 것은 아니다. 브르너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계시와 일반계시라고 두 종류의 계시를 주장한다. 하지만, 브르너는 일반계시로는 구원에 이른 만큼 하나님을 충분히 알지는 못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따라서 브르너는 두 개의 계시가 존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이 두 개의 계시가 서로 어떻게 연관이 되는 지에 관심을 가진다. 이에 대해 바르트는 만약 피조물을 통한 계시도 하나님의 계시라고 규정할 수 있다면, 어떻게 이 계시로는 하나님을 알 수 없는지 반문한다. 어떤 계시는 희미해서 하나님을 부분적으로 알게 되고 어떤 계시는 하나님을 분명하게 알게 하는 곧 계시를 이렇게 주장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신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일반 계시에 대해 증거하고 있다. 피조된 자연 질서를 통해 알 수 있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있다. 또한 역사적 사건들 속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인지하는 것이 가능하다. 뿐만 아니라 일반 계시는 하나님이 자신의 형상을 따라 만든 인간 자신을 통해 나타난다. 그것은 인간의 육체적 구조나 정신적 능력 또는 종교적 본성에서 발견된다. 일반 계시에 대한 가장 고전적인 성서적 근거는 창세기 1장 26절, 욥기 12장 7∼15절, 시편 19편, 사도행전 17장27절, 로마서 1장19-20절 등이다. 이런 구절들은 하나님은 그가 창조한 자연 세계에 그 자신에 대한 증거들을 남겼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러나 일반 계시만으로는 하나님을 명확히 알 수 없다. 인간의 죄가 일반 계시의 증거를 파괴해버렸기 때문이다(창3:17∼19, 롬8:18∼25, 고후4:4). 따라서 일반 계시는 인간을 구원에로 인도할 수 있는 적극적이며 긍정적인 기능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고 변명할 수 없게 하는 소극적이며 부정적인 기능을 가지고 있다(롬 2:14∼16,3:9∼18).
6. 결론
기독교 영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삶을 철저하게 실천하고 따르려는 ‘예수따름’의 영성으로서, 어디까지나 성서에 기초를 둔 성서적 영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기독교영성은 이 세상으로부터 도피해서 개인의 영적 만족만을 추구하는 개인주의적이고 은둔 도피적인 영성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기독교 영성은 우리의 일상생활과 교회 생활과 자연 속에서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를 추구하며, 거기에서 하나님의 뜻을 올바로 식별하여 용기 있고 과감하게, 하나님의 뜻을 실행해 옮기는 강한 실천적 영성이며, 생활의 영성인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 영성은 결코 탈 세계적인 영성이 아니라, 이 세상 한 복판에서 하나님의 뜻을 구현하는 이 세상 속에서의 영성, 즉 이 세상의 소외된 자들을 돌보는 ‘섬김과 헌신의 영성’이 되어야 할 것이다. 참된 영성은 개인으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영적 관계를 심화하는 것이지만, 내면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차원에 국한되지 않는다. 이웃과의 관계, 세계와의 관계, 더 나아가 피조물과의 관계를 발전시키고 고양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즉 지금까지 개신교는 수직적인 영성(Vertical Spirituality) 만을 강조하였고 중요시 한 나머지 인간관 인간, 인간과 자연, 즉 수평적인(Horizontal Spirituality) 영성을 소홀히 해왔다.
이제, 성 프랜시스 처럼 모든 피조물에 대해 깊은 공명의 마음을 가지며, 모든 사물들이 형제자매의 관계로 발전시켰야 한다. 자연과 피조물과 우리 인간이 한 하나님에게서 나왔기에인간은 물론 자연의 피조물도 우리의 형제자매이다. 프란시스는 해와 달, 물과 불, 새들과 짐승들, 나무와 풀들을 자기의 형제와 자매라 부르며 그들과 더불어 살았다. 형제자매의 신비에 근거하여 프란시스는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을 경외하며 배려하였다. 겨울에 벌들이 배가 고파 윙윙거리며 날아다닐 때, 그는 벌들에게 먹을 꿀을 주었다. 짐승들이 다쳤을 때, 그는 상처를 치료하고 먹을 것을 주었다. 그는 자연의 모든 생명을 사랑하고 표용하였다. 한국교회 찬송가 새69장,(구33장)은 성 프란시스가 쓴 시이다. 이 노래를 작사할 때 그는 죽음에 가까웠으며, 시력을 완전히 상실하여 앞을 볼 수 없었다. 또 그는 무거운 병에 걸려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와 달과 바람과 물, 하늘과 땅 이 모든 것을 자기 형제로 느끼면서 “ 온 천하 만물 우러러, 다 주를 찬양하여라··· 저 금빛 나는 밝은 해, 저 은빛나는 밝은 달, 하나님을 찬양하라···” 현대 기독교의 위기 속에서 우리에게 무엇보다 먼저 필요한 것은 인간은 물론 자연의 모든 피조물을 우리의 형제자매로 생각하는 따뜻한 마음이다, 따뜻한 마음을 가질 때, 우리는 모든 피조물을 우리 자신의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보지 않고 그 자체로서 하나의 목적으로 하나의 주체로 인정하며 그들과 아름다운 친교를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한국교회는 영성운동을 대체로 금식기도 철야기도 등 기도원 운동이 전부인 것처럼 알고 있고 성령의 외적인 면만을 강조하였다. 하지만 한국교회의 이러한 영성추구는 극히 제한적이고 지엽적인 문제로 국한 시키는 우를 범하였다. 지금까지 논고에서 보듯이 기독교의 영성은 총체적이며, 초월적임과 동시에 자연적이고 통전적인 영성임을 알 수 있다. 기독교 영성은 하나님 체험이나 인간의 내면적인 승화만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가난과 겸손, 덕을 쌓고 형제애를 가지고 이웃에 대한 사랑실천 등 사회봉사로까지 나아가고 있다. 더 나아가 지금까지 자연을 정복의 대상으로 알고 지배했던 서구신학에서 벗어나 성프란시스처럼 자연을 사랑하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로서 자연을 인간을 위한 도구로 보지 아니하고 자연 자체로서 하나님의 사랑이 피조물 하나하나에 깃들여져 있음을 알고 친 자연적인 생각과 사상을 가져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모든 만물은 창조주 하나님을 표현하고 하나님께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피조물로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할 때 사람들은 창조주 하나님에게 나아올 수 있고, 피조 세계 속에서 창조주의 사랑과 은총과 자비를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나아오는 작은 불빛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21세기 자연환경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는 이 시기에 성프란시스 처럼 자연을 통한 하나님의 영성을 발견하고 자연 속에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자연신학으로 발전시켜야 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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