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의 이데아론과, 선의 이데아, 영혼불멸성에 나타난 신과 종교이해에 대한 고찰
한남대학교학제신학대학원목회신학과 1학기 정 영 진
1. 들어가는 말
그는 기원전 429년에 태어났다. 그의 탄생 2년 전인 431년에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발발했고, 이 전쟁은 그가 25살에 이르기 까지 계속되었으나, 결국 아테네의 굴욕적인 패배로 종료되었다. 이러한 전쟁의 상황에서 플라톤은 아테네 귀족 가문의 일원으로 태어났다. 자신의 스승인 소크라테스의 철학적 죽음을 계기로 정치에 환멸을 느끼고 이집트 소아시아 반도등지로 여행하면서 인간과 사회에 대한 관찰을 한다. 10년간의 철학적 여행을 마치고 아태네로 돌아온 플라톤은 근교 ‘아카데미아’라는 곳에 조그마한 일종의 대학을 설립한다. 이것이 최초의 대학이라 일컬어진다. 이곳에서 플라톤은 그리스 세계의 우수한 젊은이들을 모아 철학을 가르쳤다. 플라톤이 철학하는 방식은 대화라는 방법을 통해서 철학적 과제를 풀어나갔다. 플라톤은 대화의 형식을 빌려 자신의 철학적 항해의 출발점을 삼아 우리 삶과 사유를 위한 무풍의 정박지를 찾으려 했다. 본 ‘레포트’에서는 플라톤의 ‘이데아’와 ‘선의이데아’ ‘영혼불멸설’에 대하여 고찰하고자 한다.
2. 플라톤의 ‘이데아’
플라톤이 이데아론을 창안해 낸 이유를 살펴보려면, 플라톤 사상과 소크라테스 사상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소크라테스는 절대적인 것의 존재를 인정했으나 그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자신의 무지를 인정했다. 그러므로 그는 미지의 절대자를 인정하는 순례자의 입장이었다. 이런 점에서 소크라테스는 칸트(I. Kant)와 유사하다고 하겠다. 칸트 역시 절대자, 즉 물자체의 존재는 인정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른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플라톤은 절대적인 것을 향하여 나아가는 입장이 아니라, 절대적인 것에서부터 내려오는 입장을 취한다.
플라톤은 변하는 대상들에 대해 ‘참된 인식’은(episteme)은 성립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참된 인식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시간적 공간적으로 제약을 받지 않는 타당한 지식이어야 한다. 요컨대 보편적으로 타당한 지식이어야 한다. 예컨대 우리가 하나의 나무 책상을 보고‘이것은 책상이다’고 말한다면, 이 말은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 책상은 언젠가는 못쓰게 되어 땔감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본다면 ‘이것’이란 말로 현재 ‘책상’으로 지칭하는 그 대상은 시간. 공간적 제약을 넘어서서 ‘책상’으로 불려 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 것들은 감각적 지각의 대상이기에 그런 것들에 대해 참된 인식은 성립할 수 없다. 플라톤은 감각적 대상이 아닌 불변적인 책상이 있다고 생각했다. 지금 ‘책상’으로 불려지고 있는 ‘이것’은 언젠가는 책상의 기능을 못하게 되고, 결국 땔감이 되어버리지만, 결코 땔감으로 될 수 없는 어떤 책상, 시간 공간적 제약을 넘어서서 책상으로 불려지는 책상이 있는데 플라톤은 이를 책상의 이데아로 부른다. 플라톤은 대상에 대한 술어적 규정에서 기준이 되는 것을 ‘이데아’, ‘에이도스’ 라고 부른다. ‘idea' 또는 ’eidos'라 부른 것이다. ‘idea' 또는 'eidos' 라는 그리스어는 ’모습‘ ’형상‘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참된 인식은 이데아를 그 대상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데아란 감각적 지각의 대상이 되는 사물들의 초월적 본질이다. 이데아가 초월적임은 그것이 시간 공간적으로 제약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플라톤은 우리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변화의 세계는 참된 세계가 아니라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현상계와 대비되어 현상계의 근원이 되는 세계를 그는 ‘이데아계’라 부른다. 그는 현상계와 이데아의 관계를 <국가>에서 동굴에 비유하여 설명한다. 그것이 유명한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이다.
인간은 동굴 안에 묶여 있는 죄수와 같다. 어렸을 때부터 동굴의 입구를 등지고 족쇄에 묶여 있기 때문에 고개를 마음대로 돌릴 수 없고 동굴 밖에 있는 사물을 직접 보지 못한다. 동굴 밖 먼 곳에서는 불이 타고 있다. 동굴의 입구 쪽에는 조그만 언덕길이 있고 여러 가지 가 나타난다. 동굴에 갇혀 있는 사람들은 불빛에 비치는 이 그림자를 참된 세계로 착각하고 있다. 한 인간이 우연히 족쇄를 끊고 밖으로 나간다면 그는 처음에 진리의 빛 때문에 눈이 부시고 고통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차차 그곳에 익숙해져 진상을 확인하고 감옥으로 돌아와 물건을 들고 이곳을 지나가는 사람들의 그림자가 동굴의 창을 통하여 동굴의 안쪽 벽에 나 그 사실을 얘기한다면, 감옥의 죄수들은 그의 말을 믿지 않고 파렴치한 사람으로 생각하며 그를 살해할 것이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참된 이데아의 세계가 있는데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현상세계에 얽매여 그것을 참된 세계로 간주하고 있는 것이다.
플라톤에 따르면, 이데아는 현상 세계 밖의 세상이며 이데아는 모든 사물의 원인이자 본질이다. 예를 들면 인간의 이데아는 현실 세계의 인간에 대한 원인으로, 인간의 이데아가 있기 때문에 현상 세계에 인간이 실재하는 것을 들 수 있다. 또한, 중요한 것은 현상 세계에서 모든 것들은 낡고 사라지는 것에 반해, 이데아는 시간에도 그 모습을 변치 않으며 현상 세계의 사물들이 궁극적으로 되고자 하는 것이 이데아라는 점이다. 이데아론에서 이데아는 오로지 인간의 이성으로만 알 수 있으며, 원래 인간이 있던 곳이다. 그런데 플라톤은 인간이 현실세계로 오면서 레테(망각)의 강을 건너게 되어 이데아 세계에 대한 기억을 상실하여 이데아를 기억해 내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idea를 인식할 수 있는 근거가 생긴다. 영원 자와 통할 수 있는 그 무엇이 있는데 그것은 인간의 ‘영혼’ ‘정신’이다. 영혼이란 무엇인가? 영혼은 원래 신적인 것인데 육체의 감옥에 들어와서 현실세계에 속하게 되었다. 그래서 영원한 세계에 대한 인식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따라서 관(觀)조(照)를 통해서 영원의 세계에 대해 파악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를 플라톤은 anamnesis 상기(想 起) 회상(回想) 을 통해 idea를 인식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데아는 사유의 세계 속에 있는 관념으로 현실의 경험적인 세계에는 있지 않는 원형을 말한다. 예를 들어 삼각형을 보지 않고서도 인식할 수 있는 이유는 삼각형의 'idea'가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삼각형의 ‘idea를 원형, 혹은 실체 또는 ’보편자‘라고 하고 현상세계에 존재하는 삼각형은 특수자들(partculars) 이라고 한다. 이순신 정몽주 등 구체적으로 실재하는 개인들, 그리고 책상 위의 수첩, 볼펜 저기 구르는 돌들, 화병안의 꽃병, 우리 주위의 이런 것들이 특수자들이다. 그런데 이들은 서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의로운 사람이라는 동일한 술어로 기술될 수 있는 것은 사람으로서의 특성이나 의로움 이라는 도덕적 성질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존재론적으로 이런 성질을 ‘속성(屬性, property) 이라 하며 이는 의미론적으로는 ’사람‘이라는 보통명사나 ’의롭다‘는 형용사의 의미 기반이 된다. 이들의 특성은 항상 자기 동일성을
유지하고 있으면서 서로 다른 특수적 개별자들에 반복적으로 출현한다. 시공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동일성을 지니면서 반복적으로 등장하거나 사용될 수 있는 이런 속성이나 의미와 같은 존재를 보편자라 부른다. 그러면 보편자는 존재하는가? 플라톤은 우리의 일상 언어활동이나 학문적 인식, 그리고 윤리적 삶이 의미 있다고 보았으며, 이런 활동과 삶의 근거로서 형상과 같은 보편자가 존재한다고 논했다. 그런데 보편자가 존재한다면 그들은 어디에 존재하는가? 플라톤은 보편자의 주거지를 경험계 저편의 초월적 세계에 위치시키는 것이다. 보편자들의 거처를 특수자들의 다수성과 생성소멸에 영향 받지 않는 난공불락의 안전한 세계에 마련함으로써, 플라톤은 대화와 학문적 인식의 가능 근거, 의로움과 아름다움의 영원한 원천을 확보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감각적 지각의 대상이 아닌 개념적 사유의 대상이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 플라톤은 더 나아가서 감각적 지각의 대상은 참된 존재가 아니며, 오직 개념적 사유의 대상이 되는 것 즉 이데아만을 참된 존재로 생각했다.
3. 최상위 존재로서의 선(善)의 이데아
플라톤은 좋음의 이데아를 최상의 형용사들을 동원하여 기술하고 있다. 좋음의 이데아는 그 명칭이 드러내고 있듯이 윤리적인 존재자이나, 이는 윤리적 삶에서만이 아니라, 존재계의 위계질서에서 최 정점을 차지하고 있는 이데아이다. 좋음의 이데아란 무엇인가? 왜 그리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가? 그는 (국가) 6권에서 철인을 소피스트들과 차별지우며, 규정하길 철인이란, 형상들을 사랑하는 자로서 그의 가장 중요한 탐구대상이 좋음의 이데아라고 논하면서 이에 대해 다양한 기술을 한다. “좋음의 이데아는 철학적 연구대상 중 가장 중요한 주제이며, 정의로운 행위나 사태들이 이익이나 도움을 주게 되는 것은 이것과 관계해서이다...모든 사람의 영혼은 좋음의 이데아를 축구하고 우리의 모든 행동은 이를 위해 수행된다.” 누구도 좋음에 대한 인식 없이는 정의로운 것들과 아름다운 것들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플라톤은 좋음의 이데아를 태양에 비유한다.
좋음의 이데아는 비유컨대 가지계 (可知界)에서 태양과 비슷한 역할을 하는 수단이다. 영혼이 태양과 비슷한 역할을 하는 존재이다, 영혼이 태양빛을 받아 빛나는 진리와 존재자들이 거하는 지역을 바라볼 때 영혼은 이들을 사념하게 됨으로써 인식에 이르고 지성이나, 이성을 소유하게 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어둠이 뒤섞이고 생성했다. 사라져가는 세계로 고개를 돌릴 때, 그것은 단지 이리저리 흔들리는 믿음만 품을 수 있을 뿐, 이성이나 인식은 소유할 수 없다.
태양이 가시적인 것들에 가시성을 그리고 눈에 시력을 부여 하듯이 알려지는 것에 진리성을 아는 자들에게 인식 능력을 불어 넣는 것은 좋음의 이데아이다. 태양은 경험계의 사물들을 성장하게 만들지만 그 자체는 성장하지 않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좋음의 이데아는 인식 대상들을 알려지게 하며, 이들의 존재와 본질의 근원이지만, 좋음의 이데아 자체는 본질도 아니거니와 위(威儀)와 권능에 있어서도 본질을 넘어서 있다. 좋음의 이데아는 모든 존재와 인식과 가치와 아름다움의 원인이다. 나아가 그것은 모든 이데아의 존재 근거가 되기까지 한다. 플라톤은 좋음이 모든 것을 존재케 한다는 것이다. 사실과 가치는 연결되어 있을 뿐 아니라, 가치, 즉 좋음의 이데아가 존재의 근거로서 모든 것을 존재케 한다는 것이다, 좋음의 이데아는 사실상 창조주라는 말이다. 저기 구르는 돌, 단풍으로 물들어 가는 나뭇잎, 푸르른 하늘, 자연과학의 법칙들, 또는 수학적, 논리적 명제들이 과연 좋음의 이데아에 의해 존재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는가? 인간 행위와 삶은 물론 모든 존재자들이 좋음에 의해 근거 지워져 있다고 볼 수 있는가?
플라톤에 따르면, 세계 제작자인 신은 질서가 무질서보다 좋다고 판단하여 무질서한 생성계에 질서를 부여했다. 그런데 전 우주가 영혼을 지녀야 지성을 갖출 수 있으며, 지성이 있어야 질서가 생기고 좋은 세계가 될 수 있다는 판단 하에 신은 이 우주를 영혼과 지성을 소유한 생명체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플라톤에게 이성은 학적이고 논리적인 논증의 능력임을 넘어서 좋음을 추구하는 가치 지향적이고 윤리적인 능력이다. 또한 인간의 정신세계를 구성하는 욕망, 가치 관심 호기심 기억, 감정, 정서, 관념 이 모든 것은 인간이 좋음의 이데아를 지향하기 때문에 좋음으로 여겨지는 바의 것들을 추구하기 때문에 그리고 그 과정에서 형성되고 생성된 것이다. 좋음의 이데아가 모든 정신적인 요소들의 존재원인이다.
존재자란 본성상 존재함에 있어 자립적이고 자기 충족적이기는 하나, 그렇다고 인식행위와 무관하게 존재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 존재자란 인식됨에 의해 비로소 존재하게 된다고 까지 말할 수 없으나, 의미 있고 실질적인 존재자는 인식 대상으로서 존재한다. 그리고 인식 대상으로서 존재하기 위해서는 인식자와 어떤 관계를 지녀야 한다. 그것은 인식자에게 말하자면 빛을 보내어 자신에로 다가오게 해야 한다. 예를 들면 태양이 없으면 그것의 모습이 보여 질 수 없다는 사실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그것의 모습은 모습을 지닌 대상이 태양빛을 받아 반사해서 우리의 시각을 자극할 때 비로서 보여 질 수 있다. 태양은 존재자들을 가시적인 것이게도 하지만 우리의 시선을 잡아 이끌어 존재자를 보게 하기도 한다. 존재자의 인식 능력과의 이런 관계를 플라톤은 좋음의 이데아로 설명하려 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플라톤은 신을 데미우르고스(Demiurgos)라고 불렀다. 최고의 이데아인 선의 이데아라는 완전자라는 점에서 최고의 신 개념인 기독교의 하나님 개념과 유사하지만 비인격적이며 창조성이 없는 존재이다.
4. 영혼불멸성
희랍철학자들은 인간이 영혼과 육체의 결합체라는 견해를 갖고 있다. 그리고 이중에서 인간의 본질은 육체보다 영혼에 있다고 생각한 자가 대표적으로 소크라테스이다. 플라톤은 <파이돈>에서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마시는 날 새벽부터 저녁까지 그가 갇혀있는 감옥에서 그가 죽음에 이르기 직전까지의 과정을 통해서 죽음을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방법으로 해명하려고 하는데 여기에 참석한 사람은 피타고라스 학파의 철학자들이며, 플라톤이 참석했다.
여기서의 주제는 삶의 중심이자 주체라 할 수 있는 영혼이 불멸성을 통해 죽음을 넘어 설 수 있는지의 여부가 대화의 주제였다. 인간의 영혼은 인간이 살아 있는 동안 신체라는 감옥에 갇혀 있는 바, 영혼의 이상은 그런 감옥에서 벗어나는 것이며, 그런 점에서 영혼의 수양을 목표로 하는 철학활동은 죽음에의 연습이라고 소크라테스는 설파한다. 육체는 가시적이나 영혼은 비가시적이다 영혼은 그 자체로만 고찰할 때에는, 순수하고 불변적이며 항존적이다. 육체는 분해되지만, 영혼은 분해되지 않는다. 영혼은 불사적(不死的)이고 불멸적(不滅的)이다. 영혼은 생명에 반대되는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그것이 다가올 때 물러난다. 플라톤은 이러한 스승의 유산을 그대로 이어받아 인간에게 있어서 영혼의 중요성과 육체에 대한 우위성을 강조한다.
플라톤은 생명의 세계를 움직이는 힘을 푸쉬케(psuche-)라고 보았다. 이것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를 움직이는 생기의 원리로서 일종의 미세한 물질과 같은 것이라 믿어졌다, 호메로스 시대 그리스인들의 믿음에 따르면, 사람들을 포함한 생명체들이 탄생할 때애 자연 속에 있는 생기가 신체 속에 들어오며, 죽음이란 그 생기적 푸쉬케가 신체에서 빠져나와 자연으로 되돌아가는 현상이었다.
플라톤은 스승의 과업을 계승하여 인간 영역에서 뿐 아니라, 존재의 전 영역에서 비물질적이고, 비가시적인 영원한 세계가 있음을 입증하려고 하였다. 그의 이데아론은 유물론과 기계론 상대주의와 회의주의적 세계관을 모두 극복할 수 있는 최선의 방책이었다. 보이는 세계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보이지 않는 세계로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되며, 후자가 전자의 원인이 된다는 것이 플라톤의 중심 축(軸)을 이룬다. 그는 초기 대화편에서 국가편에 이르기 까지 그는 이데아의 존재와 그 속성을 확립하는데 심혈을 기울인다. 따라서 이데아의 초월성, 독립성, 영원성 들이 현상계의 의존성, 모방성, 가변성과 대립될 수밖에 없다. 그는 <파이돈>의 영혼 불멸 논증을 통해 이데아계와 현상계간의 대립을 영혼과 육체 간의 대립에 적용시키는 듯하다. 가시적인 현상계가 사멸적인데 반해, 비가시적 이데아계가 불멸적 이듯이, 마찬가지로 가시적 육체는 사멸적이지만, 비가시적 영혼은 불멸적 이라는 등식을 성립시킨다. 플라톤은 이데아와 영혼의 신성과 초월성을 강조하여 절대적 존재, 절대적 가치를 확보하였다.
플라톤은 <파이드로스> 편에서 영혼의 불멸성을 다룬다. <파이돈>에서 이미 영혼이 생명과 엮어짐으로써 <파이드로스>에서 생명과 운동의 개념으로 영혼불멸을 증명하기 위한 길을 열어놓은 것이다. <파이돈>이 영혼이 가시적이냐, 비가시적이냐, 복합적이냐, 단일적이냐 하는 식의 성분적 분석의 대상이 있다면, <피이드로스>의 영혼은 움직이느냐, 않느냐 하는 식의 활동적 측면에서 고찰된다. 전자는 정적(靜的) 영혼이라면 후자는 동적(動的)영혼이다.
<파이드로스>에 나타난 영혼불멸논증(245c~246c)을 살펴보기로 하자. “모든 영혼은 불멸적이네 왜냐하면 그것은 영원히 운동하기 때문이며, 영원히 운동하는 것은 불멸적이네. (245c) " 영원히 운동하는 것의 의미는 두 가지로 논증된다. 1) 영원히 운동하는 것은 스스로 운동하는 것이다. 2)왜냐하면 그것이 스스로 운동하지 않는다면 생명과 운동이 중지할 것이며 그것이 스스로 운동한다면 어떤 중지도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스스로 운동하는 것은 결코 자신과의 접촉을 끊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영원히 운동하는 것은 생성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운동의 근원(arche)이기 때문이다. 근원이기 때문에 그것은 파괴 될 수 없다.
플라톤은 영혼의 불멸을 ‘영원히 운동하는 것(aeikinton)이란 개념에서부터 증명하고자 한다. ’영원히‘ ’항상‘ 운동하는 것은 다른 것을 운동하게 하고 또 다른 것에 의해 움직여지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것은 운동을 멈출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운동하는 것도 스스로 운동하는 것이어야 한다. 나아가서 운동의 근원은 생성(genesis)되거나 소멸(phthora)될 수 없다. 왜냐하면, 이 시작이 생겨나는 어떤 것이라면 그것은 시작이 될 수 없고 또 시작이 소멸되어 버린다면 그것으로부터 생겨나는 모든 운동이 일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파이드로스>는 운동의 원인을 영혼<psyche>이라고 천명한다. 언제나 운동하고 스스로 자기를 움직이는 것은 영혼뿐이며, 스스로 운동하기 때문에 모든 운동의 원인 내지 시작이 된다.
플라톤은 영혼을 날개가 달린 두 마리의 말과 마부로 비유한다. 이것은 소위 플라톤의 영혼 삼분설을 비유적으로 묘사한 대목이다. 그는 <국가>편 4권에서 국가의 세계급과 영혼의 세 부분을 평행적으로 대비시킨다. 국가의 정의는 통치자, 전사, 생산자라는 세 계층이 조화를 이룰 때 실헌 되듯이 개인의 정의는 이성적 부분(to logistikon)과 욕구적 부분 (to epithymetikon), 그리고 격정적 부분 (to thymoeides)이 조화를 이룬 상태다. 이와 같이 플라톤이 영혼을 삼분하는 구체적 이유의 필요성은 어디에 있는가? <파이돈>에서 영혼은 단일성을 견지하며, 이 단일 성으로부터 불멸성의 증명이 시도 되었다. 오르페우스-피타고라스적인 전통에 따라 영혼은 신적 본성을 지니며, 비 복합적인 성질을 가지므로 분해되거나 소멸될 수 없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영혼은 오직 저 세계를 갈망하는 신적인 성질만 가지고 있다. 피타고라스의 영향을 받은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은 육체의 사멸 후에도 인격적인 자기동일성을 유지하는 영혼의 존재를 적극적으로 인정하게 된다.
<파이돈>의 영혼은 자신이 지상계로 추락하여 육체 안에 들어와 천상계만을 동경하고 죽음이 다가올 때 육체와 빨리 결별하여 천상으로 돌아가기만을 소원한다. 이에 반하여 <파이드로스>의 영혼은 보다 적극적인 성격을 나타낸다. 영혼은 본성상 영원히 움직이며, 또 스스로 움직이며, 다른 모든 움직이는 것의 시원이 된다. 고로 영혼이 없는 곳에 정지와 죽음이, 영혼이 있는 곳에 운동과 생명이 있다. 영혼은 만물의 왕이요, 만물의 아버지이다. 이게 인간 영혼은 육체를 적대시하거나 경멸하지 않고 돌봄과 다스림의 대상으로 여긴다. 육체에 대한 질서 부여자가 바로 영혼자신이기 때문이다.
5. 나가는 말
지금까지 서양철학의 기원과 토대를 이룬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의 방대한 ‘이데아론’과 ‘선의이데아, 그리고 ’영혼 불멸성‘에 대하여 책과 논문을 통하여 정리하여 보았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방대한 플라톤의 ‘이데아’ 사상을 살펴본 것은 플라톤의사상이 교부들의 신학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고. 이것이 서양철학의 중요한 명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플라톤의 현상의 세계와 이데아의 세계, 가시적 세계와 비가시적인 세계인 이원론적인 사상체계는 보이는 이 세상이 전부하고 생각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천상세계 즉 ‘이데아’ 아리스토레레스가 말한 에우다이모니아 (eudaimonia) 영원히 행복한 세계가 있음을 알려 주었다. 즉 이세상은 그림자이고 영원한 나라인 천국에 대한 기독교 교리의 토대를 마련하였다고 할 수 있다. 플라톤 철학은 바울신학과 교부신학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또한‘선의 이데아’를 플라톤은 그리스도를 알지 못한 사람이었지만 어쩌면 훨씬 현대 기독교인들보다 훨씬 더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 있었던 사람이 아니었나 생각이 됩니다. 플라톤의 '선의 이데아'는 만물의 근원(arche)이신 창조주 하나님을 생각나게 하며, 영혼 불멸성은 오늘 날 목회자들이 장례식 설교나 영혼과 육체에 대해서 교인들에게 설명하였는데 이것이 그리스 철학과 함께 플라톤이 교회에 교리를 세워 놓았다고 생각하면 이교도인 플라톤은 신적인 존재를 어렴풋이 알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됩니다. 교부인 오리겐 터툴리안, 그리고 어거스틴은 플라톤의 영혼 불멸설을 교리의 기호로 삼았고 단테는 그의 작품 신곡을 통해서 영혼 불멸사상인 천국과 지옥, 그리고 연옥을 소개하는데 공헌하였다. 그리고 교황그레고리는 528년에 이것을 교리로 만들었다. 그러므로 플라톤의 이데아 사상은 오늘날 고대 기독교사상과 교리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으며 이것이 오늘날도 여전히 현대인과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이데아’ 인 천국, ‘선의 이데아’ 인 창조주 하나님, 그리고 ‘영혼불멸성’이 이상 세계인 천국을 생각나게 한다는 점에서 오직 물질 세계만을 전부인양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신과 종교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킬 만한 종교적인 ‘거대 담론’ 으로 반드시 배워야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후기: 신학대학교 시절에 철학을 자세히 배우지 못한 아쉬움에 이번 학기에 교수님의 뜨거운 열정과 지식에 힘입어 그간 무지했던 지식을 조금이나마 깨닫게 되어 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 개괄적으로 배워서 조금은 아쉬움이 있지만. 잘 알지 못했던 철학자들을 알고 그들이 철저히 신 존재 증명을 위해서 힘쓴 것에 위대함이 느껴졌습니다. 교수님께서 수업시간에 말씀하신대로 중세천년은 암흑기가 아닌 하나님을 깊이 알고 만났던 보석 같은 시대였던 것 같습니다.여름에 건강 주의 하시고 주의 은총이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다음에 뵙겠습니다.
<참고 문헌>
김윤동,<파이드로스에 나타난 영혼의 문제>, <철학연구>103집, 대한철학연구논문집,2007.
문성학,<플라톤의 윤리사상과 이데아론>, <종교교육연구>,경북대사범대부속중등교육연구소2001-02
남경희, <플라톤>,아카넷, 2006
요한네스 쉴스베르거, <서양철학사, 상> 강성휘 옮김, 이문출판사
WD 로스, <플라톤의 이데아론 >김진성 옮김, 누멘출판사.
'.....새믿음교회 이야기 > ......목회자료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허호익 교수의 <길선주 목사의 목회와 신학사상>을 읽고 (0) | 2013.11.25 |
---|---|
레지노상을 읽고 (0) | 2013.11.12 |
시편에 나와 있는 지혜시 연구 (0) | 2013.11.12 |
목회자 윤리 강령 10가지(목회현장론) (0) | 2013.07.10 |
윌윌로클릭 교회를 중심한 바람직한 교회의 역할과, DISC성격유형에 대한 적용사례를 중심으로 (0) | 2013.07.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