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말씀/...새믿음의 강단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 행2:36-42)

gkffpffndi 2011. 10. 22. 11:49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 행2:36-42)

 

철학자 파스칼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인간은 두 종류밖에 없다. 자신을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의인(義人)과 자신을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죄인(罪人)이다." 이 말은 인간은 스스로가 자신이 어떤 상태에 있는 지를 인정하는 것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자신은 남보다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자는 자신을 속이는 자이며, 결코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이미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그 사실을 인정하기를 싫어하는 것입니다.누구든지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대면을 원하는 사람은 자신이 먼저 죄인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할 때 비로소 예수가 자신에게 절대 필요한 존재인 것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은 지난 시간에 이어서 두 번째, 성령을 선물로 받으려면 죄에서 돌아서야 함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2. 죄에서 돌아서야 합니다.

 

① 마음에 찔림, 즉 죄에 대한 자각이 있어야 합니다.

 

사도들은 유대인과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들에게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힌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하셨느니라.” 하고 강하게 말했습니다. 거기에 모여 있는 유대인들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가 자신들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를 죽인 것은 빌라도와 로마병정 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너희가 죽였다’고 강하게 말했습니다. 이 말씀이 그들의 마음을 찔렀습니다. 마음이 찔렸다고 하는 것은 양심의 가책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J. 루소’는 “양심은 인간의 육신 안에 있는 하나님의 법정이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마음에 양심의 법을 주셨습니다. 양심은 영혼의 소리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두 가지 법을 주셨습니다. 하나는 자연만물에 하나님을 알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로마서 1장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다른 하나는 인간의 양심입니다. 시 16:7 나를 훈계하신 여호와를 송축할지라. 밤마다 내 양심이 나를 교훈하도다. 롬 2:15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아메리칸 인디안들은 그들의 마음속에 있는 양심을 도형으로 나타냈습니다. 그들은 어린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양심의 모양을 삼각형으로 비유했습니다. 사람이 처음 태어나면 이처럼 삼각형 모양을 가지고 있어서 만약에 잘못을 범하면 삼각형의 양심이 움직여 뾰족한 모서리로 마음을 찌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음에 찔림을 받는 양심의 가책을 묘사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양심이 무디어 져 갑니다. 감각이 둔해져 양심이 동그란 원을 그리는데 이것을 어른의 양심으로 비유합니다. 우리 양심이 죄로 인해 무녀지면 양심의 역할을 할 수 없게 됩니다.

 

이러한 사람을 바울은 딤전 4장2절에 “자기 양심이 화인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라고 했으며, 로마서 1장 21절에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이 무뎌진 사람들이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양심의 찔림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마음의 찔림을 받는 순간이 구원의길로 접어드는 첫걸음입니다. 그렇게 되어야 은혜 받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8장 1-11절에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백성들을 가르치고 계실 때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음행 중에 잡힌 한 여인을 잡아 예수님 앞에 끌고 와서 이 여인에 대하여 율법대로 돌로 쳐 죽여도 되냐고 물었을 때, 주님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조용히 땅에다 글을 쓰시고 일어섰더니 이 말씀을 들은 사람들이 한 사람 한 사람씩 어른들로부터 청년까지 다 떠났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위급한 상황을 양심에 호소하여 그들의 마음을 찔러 발걸음을 돌이키게 하였습니다.

 

삼하 12장 1-13 절에 나단 선지자를 범죄한 다윗에게 보내어 죄를 지적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나단 선지자가 말합니다. 한 성읍에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부하고, 한 사람은 가난했습니다. 그 부한 사람은 양과 소가 심히 많으나 가난한 사람은 아무것도 없고 자기가 기른 작은 암양 새끼 한 마리 뿐 이었습니다. 그 암양은 그에게 있어서 가족 같고 딸처럼 길렀습니다. 그런데 어떤 행인이 그 부자에게 오매, 그 부자가 행인을 위해서 자기의 양과 소는 잡지 않고 가난한 사람의 양 새끼를 빼앗아다가 자기에게 온 사람을 대접했습니다. 다윗이 여기까지 듣자 대노 했습니다. 그래 그런 놈이 있단 말이냐, 그 사람이 누구냐 내가 그를 죽이리라. 나단이 이렇게 말합니다. 그 사람이 바로 당신입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다윗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나단이 하나님을 대신해서 말합니다. 내가 너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 붓기 위하여 너를 사울의 손에서 건지고 너에게 왕의 자리에 오르게 하였건만,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나 보기에 악을 행하였느냐 네가 헷 사람 우리아를 치고 우리아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은즉 칼이 네 집에서 떠나지 아니하리라. 그러므로 이제 내가 너와 네 집에 재앙을 일으키고 내가 네 가정에 수치를 당하게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윗이 이 말을 듣고 “내가 하나님께 죄를 지었나이다.” 다윗의 양심은 살아 있었던 것입니다. 다윗은 양심에 찔림을 받았을 때 자신을 위장하지 않고 겸손하게 주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러기에 다윗이 위대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이 찔림을 받습니까? 아직 양심이 살아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말씀에 찔림을 받고 주님 앞에 다가서기를 바랍니다.

 

② what shall we do?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양심에 찔림을 받은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거주한 사람들에게 양심의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메시야 이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살인자가 되었다라고 하는 죄책감이 저들을 괴롭혔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죄를 지으면 우리 안에 죄책감이 따라 다닙니다. 죄를 지은 사람은 누가 보지 안했어도 편안히 살 수 없습니다. 누가 자신을 따라 다니지 않아도 자신을 쫒아 다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불안하고 초조합니다. 인간 깊은 내면에 이런 죄책감이 있습니다. 이것을 기독교에서는 원죄라고 합니다. 이것은 인간의 조상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이 동산나무의 모든 열매는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 하셨고,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말씀하셨지만, 먹으면 하나님 같이 된다고 하는 사탄의 말을 따르므로 인간에게 죽음이 오고, 땅은 저주를 받고 여자는 해산의 수고를 하는 고통이 오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더라면 인간의 삶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행복한 삶을 살고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탄에게 속은 인간은 그 대가로 고통과 죽음가운데서 불안한 나날과 재난과 환난 속에서 시지 푸스의 신화처럼 끊임없이 헛수고를 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불안과 초조는 죄 값을 치를 때에야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께 나아가기 보다는 죄를 지으면 다른 방법을 찾습니다. 그래서 고행을 한다든지 금욕을 한다든지 금식을 한다든지, 아니면 자선을 한다든지 남을 위해서 봉사를 함으로써 자신 안에 죄책감을 떨쳐 버리려고 합니다.

 

오늘날에도 유대인은 “욤 키푸르” (속죄일) 때가 되면 금식일 전날에 목욕재개하고 유대인들은 물고기가 많은 강이나 바다를 찾아가서 마치 죄의 흔적들을 말끔히 털어버리듯이 각자 입고 있던 옷을 벗어 힘껏 흔들어 털면서 이 의식에 어울리는 <성서> 구절들을 암송한다. 그중 가장 애용되는 성구는 “주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 시리이다.”라는 구절이 들어 있는 <미가> 7장 18-20절이다. 이러한 행위는 자신에 죄에 대한 신의 노여움을 가라앉히는 한 방법으로 여겨졌다. 유대인들은 마음속으로 하는 고백은 인정하지 않는다. 참회에는 반드시 입으로 하는 신앙고백이 수반되어야 한다. 이날을 위해 유대인들은 꼬박 열흘 동안 준비를 한다. 피해자는 사과의 말과 함께 물질적인 보상을 요구한다. 욤 키푸르는 일몰과 동시에 시작되어 25시간동안 계속되는 동안 금욕을 뜻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자신들의 죄가 속죄되어 진다고 생각합니다.

 

영국의 정치인이요 국방장관이었던 존프로푸모 (John Propumo, 1915-2006) 는 자신이 저지른 죄에 대하여 진정으로 사죄의 길을 걸은 사람으로 기억됩니다. 20세기에 가장 유명했던 성 추문 중 하나의 주인공이 바로 그였다. 당시 영국의 국방장관이었던 그는 크리스친 킬러(Christine Keeler) 라는 콜걸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고 있었는데 그 사실을 하원에서 거짓 증언을 한 얼마 후에 사임했다. 더군다나 그 여성은 KGB(구소련의 국가안보위원회) 소속 장교의 애인으로 밝혀졌다. 하루아침에 나락으로 떨어진 직후인 1963년, 프로푸모는 런던 동부 지역에 위치한 자선 복지 시설인 토인비 홀 (Toynbee Hall) 에 지원서를 제출했다. 그리고 40년 동안 그는 그곳에서 묵묵히 자선 봉사에 매달렸다. 사람들은 자신의 죄책감을 떨치기 위해서 이런 방법들을 동원 하지만 그것만으로 진정한 속죄를 이룰 수 없습니다.

 

목사님 앞에서 세례문답을 받게 되는 시어머니에게 며느리가 교육을 시킵니다. “어머니~ 목사님께서 예수님은 누구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까? 라고 묻거든 “내 죄 때문에 죽으셨습니다..” 라고 대답하세요, 아셨죠?.” 토요일 저녁 세례문답시간이 되었습니다. 목사님이 그 시어머니에게 물어 봅니다. “예수님은 누구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서 못박혀죽으셨습니까?” 시어머니는 지체하지 아니하고 “그야~ 우리 며느리 죄 때문에 죽었지요.!.” 라고 대답하였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죄가 자신들과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을 만난 후 자신의 추악한 죄의 모습을 깨닫고 이사야 6장 5절에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과 대면할 때 비로소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습니다. 이사야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존재에 대해 “어찌할꼬” 애통해 했던 사람이었기에 하나님께 쓰임 받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몸이 병들어 몸이 죽어가고 있는데도 ‘어찌할꼬’ 할 줄을 모르고 밤새워 술을 마십니다. 우리의 인생이 내일 끝나는데도 ‘어찌할꼬’ 를 몰라 인생을 낭비하며 탕진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 우리가 고행이나 선행, 봉사를 통해서 우리가 우리의 죄를 속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③ 회개함으로 구원에 이르러야 합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청중들에게서 커다란 회개의 역사가 일어났다. 말씀을 잘 들으면 마음에 찔림을 받습니다. 그리고 내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 하는 물음이 생깁니다. 세례요한은 광야에서 회개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예수님도 마가복음 1장 15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막 6:12 “제자들이 나가서 회개하라 전파하고” 했습니다. 그런데 무엇을 회개해야 합니까?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2장 19절 네 악이 너를 징계하겠고 네 반역이 너를 책망할 것이라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를 버림과 네 속에 나를 경외함이 없는 것이 악이요 고통인 줄 알라 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회개하다란 “메타노에오”(μετανοεω) 잘못을 뉘우치고 고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떠나있는 자리에서 이제 하나님께로 돌아서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죄악의 길에서 돌아서야 합니다. 하나님을 등지고 세상을 향해 가던 발걸음을 돌이켜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삶은 행복이 아니라, 고통이요 그것이 악이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분은 우리를 만든 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생명과 호흡을 주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집나간 탕자가 자신을 부정하고, 자신의 집을 향하여, 발걸음을 옮겨 아버지께로 향하여 간 것처럼 돌아오라는 것 입니다.

 

40대 중반의 남성이 있습니다. 그는 오랜 기간 동안 아버지와 원한관계로 살았습니다. 아버지가 젊은 시절 방탕하여 딴 살림을 차린 것에 큰 상처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 일로 인해 어려서부터 어머니와 함께 숱한 고생을 겪었습니다. 몇 해 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시자 분노는 더욱 커졌습니다. 그는 도저히 아버지를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아버지를 향한 미움과 원망이 너무 깊은 나머지 그만 자신도 병이 들어 불행한 나날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가닥 희망이라고 찾고 싶어서 새벽기도를 나가게 되었습니다. 기도시간에 목사님의 권유에 못 이겨 “하나님, 아버지”를 부르고 또 불렀습니다. 아버지를 수십 번 외치던 중 그는 비로소 하나님아버지를 찾았습니다. 이제는 늙고 병들어 뼈만 앙상하게 남은 아버지를 껴안고 아들은 고백합니다. “아버지 .... 미안해요, 사랑합니다,” 아버지도 회한의 눈물을 흘리며 고백합니다. “어떻게 너와 네 엄마에게 용서를 구해야 할지 ....정말로 미안하구나 고맙다. 아버지와 아들은 그렇게 서로를 용서하며 하염없이 껴안고 흐느꼈습니다. 주일아침 그는 환한 미소로 이렇게 인사했습니다. 목사님, 이제 평안하고 제 모든 병이 다 나았습니다. 이렇듯 자기 존재를 부정하는 용기 있는 자만이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절망하는 자만이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절망으로 인해 하나님을 찾고 회개하는 자에게 희망이 밝아오는 것입니다. 누군가 이렇게 말합니다. ” 11시 까지 기다려 회개하겠다는 사람은 10시 55분에 죽더라. 회개는 하나님이 기회를 주셔야 할 수 있습니다. 미루다 보면, 회개의 기회를 놓치고 맙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기회에 바로 회개하고, 바로 살아야 합니다.

 

고후6:2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돕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구원의 날이로다.

 

오늘날 사람들은 하나님을 떠나 있습니다. 죄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리에 서 있습니다.

 

영화 '스타트렉: 더 비기닝'으로 유명한 할리우드 영화배우 재커리 퀸토가 지난 18일에 자신이 동성애자라고 선언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또 "동성애가 왜 하나의 문화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지 않고 세세한 설명을 필요로 하는지 의문이 든다."고 말함으로 자신의 부끄러움을 모르는 타락한 이 시대의 인간상을 보게 됩니다. 얼마 전 서울시 교육청의 인권조례안 초안에 동성애 차별을 금지하는 조항이 추가돼 논란이 일고 있습니다. “성적 지향을 이유로 차별받지 않을 권리 (7조 1항) 등을 포함한 학생 인권조례수정안을 시교육청에 제출되었다. 오늘이 이 시대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경은 이러한 행위에 대해서 로마서 1장 24-32에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를 깨뜨리는 죄악 된 행위로 순리를 역리로 바꾸는 행위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 상실한 대로 내 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시고 29절에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라고 말합니다.

 

40절에 베드로는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고 말함으로써 하나님을 떠난 세상의 패역함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도스트엡프스키“만약 사람들은 하나님이 없다고 하면 자기 멋대로 죄를 저지를 것이라고” 했습니다.

 

세계적인 과학자 뉴턴은 말년에 기억상실증에 걸려서 그 많은 지식을 망각해 버렸습니다. 답답해하던 제자들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이제 와서 선생님께 하고 계신 것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뉴턴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두 가지 이다. 하나는 내가 죄인이라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예수께서 내 구주시라는 것 뿐 입니다. 이것 외에 더 무슨 지식이 필요하냐?” 그렇습니다. 근본적으로 두 가지면 충분합니다. 이 두 가지만 붙들고 살면 세상이 어찌 하든지 승리 하며 살 수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것에 그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위하여 죽었고 부활한 하나님임을 믿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서 있는 곳은 어디입니까? 죄악의 땅, 타락하고 패역한 땅, 거짓과 위선으로 가득 차 있는 땅은 아닙니까? 만약 그렇다면 속히 돌아서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돌아서십시오. 진리의 말씀을 향해 돌아서십시오.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오기를 바랍니다.

 

예레미야 24장 5 그가 이르시기를 너희는 각자의 악한 길과 악행을 버리고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 여호와가 너희와 너희 조상들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준 그 땅에 살리라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성령을 선물로 받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죄의 습관을 끊어버리십시오. 그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서십시오. 예수님께로 나오십시오. 예수님 안에 참된 행복과 만족과 기쁨이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 진정한 평안과 안식이 있습니다. 이 주님을 믿고 영접함으로, 기쁘고 즐거운 인생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011년 10월23 청주 벧엘성결교회 정영진 목사 설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