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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5장 4절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gkffpffndi 2011. 2. 28. 21:17

마태복음 5장 4절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파우스트를 쓴 독일의 시인 괴테는 “눈물로 밤을 새워본 적이 없는 사람과는 인생을 논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유명한 설교가 토마스 왓슨은 “눈물의 골짜기를 지나지 않고는 낙원에 이를 수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스펄젼 목사님은 “천국은 메마른 눈으로 못 들어가며 젖은 눈을 가져야만 들어갈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오늘 우리들의 눈은 너무 메말라 있음이 문제입니다. 눈물을 회복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의 8복 가운데 2번 째 복인 애통하는 자의 복에 대하여 함께 생각하고자 합니다.

“애통” 이라는 뜻은 슬픔, 비탄이라는 뜻으로 사람이 죽었을 때의 심정을 가리킵니다.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생각하는 자는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뜻이 무엇인지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자신의 죄에 대하여 우는 자입니다.

 

세계적 권위 있는 의학 보고서에 의하면, 21c를 위협하는 가장 무서운 질병은 암도 아니고, 에이즈도 아니고, c형 감염일 가능성이 가장 크다는 보고입니다. 그 이유는 보균자가 10억 명 이상인데 환자들 스스로가 전혀 자각하지를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육체적으로 사람이 건강하면 병에 민감합니다. 마찬가지로 영적으로 ,신앙적으로 건강한 사람은 죄에 대하여 감수성이 예민합니다. 건강한 사회일수록 도덕적으로 깨끗하고 자정 능력이 있습니다. 하지만 도덕적으로 불감증에 걸린 사회는 무덤덤합니다. 여러분 ! 어린이들의 살결이 얼마나 깨끗하고 보드랍습니까? 그래서 상처에도 아이들이 고통을 호소합니다. 하지만 나이 들고 오랜 세월이 흐르면 굳은살이 올라 웬만한 통증이나 고통은 견딜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예수 믿고 처음 은혜 받고 구원받을 때는 조그만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고 죄에 대하여 민감합니다. 죄를 멀리 합니다.

앗 시시의 성 프랜시스가 예수님을 믿은 지 얼마 안 되어서 입니다. 길을 지나가는데 앞쪽에서 문둥이가 한 사람 걸어오는 것이 보였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불러세우고 복음도 전하면서 기도라도 해주고 싶은데, 왠지 역한 냄새가 나는 것 같고 더러운 생각에 그럴 용기가 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냥 지나칩니다. 그런데 계속 마음이 편치를 않습니다. 그래서 마음 속으로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저 문둥병자를 그냥 지나친 것이 잘못입니까?"

하나님이 그에게 물으셨습니다.

"왜 그냥 지나쳤는데?"

"예! 더럽게 느껴져서 그랬습니다."

"그래. 너는 그 문둥병자보다 나은 게 있었는 줄 아느냐? 너는 그 문둥병자보다 더 더럽고 추한 냄새나는 죄인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너를 그대로 받아주었고 사랑해 주었다."

그 순간 성 프랜시스는 즉시 그의 발걸음을 돌이켰습니다. 그 문둥병자에게로 뛰어갔습니다. 그리고는 그의 손을 꼭 붙들고서 예수님의 사랑을 그에게 전하면서 그를 위해 진정으로 기도해 주었습니다.

그로부터 얼마가 지났습니다. 성 프랜시스가 어느 동굴 속에서 하루 온종일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제자들이 스승의 기도를 통해서 좀 배우고 싶은 기대를 가지고, 동굴 밖에서 그가 무엇이라고 기도를 하는지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런데 성 프랜시스는 그날 온종일 단 한 가지 말만 되풀이를 했다고 합니다.

"하나님! 하나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깨닫기를 원합니다. 아울러 제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큰 죄인인가를 깨닫게 해주옵소서."

신앙은 자기가 지은 죄를 깨닫고 애통해하며 눈물을 쏟는 데서부터 시작합니다. 다윗은 성경에 80번이나 그 이름이 나오는 훌륭한 인물입니다. 그것은 그가 진정으로 회개한 사람, 애통의 눈물을 쏟은 사람입니다. 그는 시편6:6에 “내가 탄식하므로 피곤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초대 교부 어거스틴도 자신이 과거에 지은 죄와 잘못을 슬퍼하며 눈물로 회개하여 그 유명한 고백록을 남겼습니다. 사람이 진정으로 회개한다면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눈물이 소중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의 부패한 육신 때문에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받았습니다. 그리해서 그는 탄식했습니다. 사도행전 7장 15절 내가 행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21절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속에 거하는 죄니라. 24절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이 부패한 육신 덩어리에서, 이 썩어 냄새나는 시체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연약하여 죄를 범했을 때는 오호라 의 탄식이 반드시 터져 나와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했을 때, 갈등과 가책과 회개의 눈물이 있어야 합니다. 철저하게 자신의 연약함과 무능함 그리고 죄 성을 발견할 때 하나님의 은혜가 그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2. 이웃의 고통과 아픔에 대하여 우는 자입니다.

 

요즈음 지구촌 곳곳에서 재스민 혁명으로 불리는 민주화 운동의 불꽃이 타오르고 있습니다. 최근에 중동과 북아프리카를 중심으로 한 튀니지 이집트 리비아 사태 등이 중국과 북한에 까지 영향을 미칠지 초미의 경각심을 가지고 지켜보고 있습니다. 이러한 민주화 운동의 배경에는 장기집권과 독재로 국민들의 생활이 피페 해지고 도탄에 빠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지구촌 구석구석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가진 자와 못가진자 즉 빈부격차가 상상을 초월한다는 것입니다. 독재자들은 권좌에 오래 있으면서 자신의 부를 부정한 방법으로 축재하였다는 것입니다. 이집트의 무바라크와 리비아의 카다피, 북한의 김정일입니다. 이 중에서도 북한의 김정일 왕조는 국민을 노예로 삼으면서 자신들은 극도의 사치와 호화로운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최근 신문 보도에 의하면 극심한 식량난으로 인해 북한사람들의 평균 키는 153에 체중이 47키로 밖에 되지 않는 다는 것이다. 먹을 것이 없어서 자라나는 아이들이 쓰레기통에서 음식물을 찾는 모습이 보도 되었습니다.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난 2월 26일 가슴 아픈 기사가 나왔습니다. 쌍용차 복직을 기다리자 지친 임씨 (43세)가 자살했다는 기사였는데 그 부인은 지난 4월 남편의 복직을 기다리다 지쳐 생활고와 우울증으로 투신자살 한 이후 10개월 후에 남편이 죽은 것입니다. 슬하에 자녀 고등학생과 중학생이 있다 합니다. 죽기 전에 동료에게 자녀 등록금 때문에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간다고 했다 합니다. 그의 통장 잔고는 4만원이었고, 카드빚이 150만원이었다고 합니다. 저는 이 기사를 보면서 국민소득이 이만불이 넘는 이 나라에 이런 비극적인 일어났다고 생각하니 한편 슬픔생각이 들기도 하고 비통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두 부모를 먼저 보낸 그 자녀들은 앞으로 어떻게 하나 하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오늘 한국 사회와 교회가 과연 우리의 이웃의 고통과 아픔에 대하여 얼마만큼 관심과 사랑의 실천을 하고 있나 하는 생각입니다.

옛날 어느 마을에 한 지혜로운 현자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지혜로운 말을 듣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찾아왔습니다.

어느 날 그는 강가에서 사람들에게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었습니다. 일순간 그는 자신의 옷을 무릎까지 걷어 올렸습니다. 그리고는 첨벙첨벙 강물 속으로 걸어 들어갔습니다. 그는 허리를 숙이고 강바닥을 더듬었습니다.

잠시 뒤 강가로 다시 올라온 그의 손에는 제법 큼지막한 조약돌 하나가 쥐여져 있었습니다. 그는 그 조약돌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면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여러분! 이 돌을 깨뜨린다면 이 돌 속이 젖어있을 것 같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말라있을 것 같습니까?"

사람들 중 어떤 이는 말라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어떤 이는 방금 강에서 끄집어내었으니까, 또 강 속에 오랫동안 담겨져 있었으니까 그 속도 젖어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현자는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그 돌을 깨뜨렸습니다. 물론 그 속은 하얗게 말라 있었습니다. 현자는 그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면서 이러한 가르침을 베풀었습니다.

"여러분! 지금 이 세상에서 사랑이라는 말처럼 흔하게 쓰여 지는 말은 없을 것입니다. 세상에는 사랑이라는 말이 강물처럼 넘쳐흐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우리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이 돌처럼 겉만 젖어있고 속은 메말라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이 조약돌에서 물을 짜낼 수 없는 것처럼 우리에게서도 결코 사랑은 나올 수가 없을 것입니다. 사랑은 언제나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와야 하는 것입니다."그렇습니다. 사랑은 언제나 마음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웃에 대한 고통과 아픔에 대하여 울 수 있는 사랑이 내안에 있다면 그 사람은 복 받을 자입니다.

 

3. 하나님의 위로가 있습니다.

 

고린도후서13:11에 “형제들아 기뻐하라 온전하게 되며 위로를 받으며 마음을 같이하며 평안 할지어다.” 이사야61:3에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슬픔을 찬송으로 바꾸십니다. 우리의 애통을 기쁨으로 바꾸십니다. 우리의 고난을 축복으로 바꾸십니다.

중국에서 사역을 하시던 어떤 선교사님의 이야기입니다. 한번은 어떤 개울을 건너가게 되었습니다. 홍수로 인해서 갑자기 개울물이 많이 불어났습니다. 그는 자기의 옷을 걷어 올리고서 조심스럽게 한 걸음씩 한 걸음씩 개울물을 건너기 시작했습니다.

한 중간쯤 왔을 때 그는 갑자기 발을 헛디디는가 싶더니 넘어져 버렸습니다. 일어나려고 해도 흙탕물이 너무나도 급류라서 쉽게 일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흙탕물에 떠내려가고 있었습니다.

때마침 그 곁을 지나가던 어떤 사람이 그 선교사님이 흙탕물에 떠내려가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옷을 입은 채 급히 개울물에 뛰어들었습니다. 그리고는 그 선교사님을 다시금 일으켜 세워주었습니다. 그래서 간신히 그 선교사님은 자기의 목숨을 구하게 되었습니다.

선교사님은 너무나도 고마워서 자기의 목숨을 구해준 은인의 이름을 물어 보았습니다. 그러자 그 중국인은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성경에도 보니까 선한 사마리아사람의 이름이 기록이 되어 있지 않더군요."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조용히 자기의 갈 길을 갔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은 자신의 죄에 대하여 민감하고 회개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이웃의 고통과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느끼고 그들을 위해 울 수 있다면 복이 있는 자입니다. 이런 분들에게 하나님의 위로가 분명히 있다고 하십니다. 오늘 이 새벽에 나오신 여러분에게 이 큰 은혜와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2011년 3월 1일 특별새벽기도회